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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정권의 제2인자 이후락 그 숨은 이야기들 몇가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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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984회 작성일 2011-09-13 10:55

본문

 
 
 
 
 
 
@제목: 前 중앙정보부(안기부,국정원 前身) 부장을 역임한
 
박정희대통령 최측근
 
 
이후락 은둔 30년 재조명!
 

인물 정보

프로필 수정요청 내 참여내역
이후락 전 국회의원,전 정무직공무원
출생-사망
1924년 2월 23일 (울산광역시) - 2009년 10월 31일
가족
슬하 4남 1녀
학력
육군참모대학
경력
1979 제10대 국회의원
1976 불교 조계종 전국신도회 회장
1970.12~1973.12 제6대 중앙정보부 부장
1963.12~1969.10 제3대 대통령 비서실 실장
 
박정권 넘버2 도자기 굽는 촌로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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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3호] 2009년 11월 15일 
 
newsdaybox_dn.gif
   
  ▲ 7‧4남북공동성명 이듬해인 1973년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중정부장이 김일성 주석과 다시 만났다.  
 
 
박정희 정권 시절 “말 한마디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말할 정도로 최고 실세자리를 확고히 구축했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한국 현대사의 암흑기인 유신시대를 대표하는 권력자로 통했던 이 씨가 지난 2009년 10월 31일 85세의 일기로 병상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씨는 지난 5월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에 입원해 5개월 넘게 치료를 받았지만, 뇌종양 등 병세가 악화돼 이날 오전 11시 45분쯤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권력자였지만,
 
 그의 말년은 불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형욱 차지철 김재규 등에 이어
 
이 씨가 사망함으로써
 
 
박정희 정권 시절 ‘공작정치’의 대명사가 됐던
 
 
권력 실세들 대부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3공화국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 통했지만 5공화국 출범 후 몰락의 길을 걸으면서 30여 년 은둔생활을 해오다 사망한 이 씨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역정을 되짚어 봤다.
 
 
**************
 
@제목: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일대기!

1.육군 정보국 차장을 역임했던 이 씨가 권력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961년 5·16 쿠데타 직후(육군 소장)의 일이다.
 
 
2.1924년 울산에서 태어나 울산공립농고를 거쳐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육군에 임관한 이 씨는(박정희보다 7살 아래이나 한국군에서는 박정희 보다 군선배 였다)
 
3.쿠데타 이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공보실장
 
 
을 맡으면서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4.이후 대통령 비서실장 자리에 올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쥐었다.

5.이후락 씨는?
 
 
1969년 10월 ‘3선 개헌’ 후폭풍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김형욱 前 중정부장과 함께 해임돼
 
 
(이때 김형욱은 자기 나름대로는 큰 공로를 세우고도 해임당하여 그 이후 그는 엄청난 배신감에 온갖 反 박정희 활동을 미국에서 벌이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이후락은 비서실장에서 한때 잠시
 
 駐日 大使로 물러나기도 했다.
 
 
이 씨가 1970년 주일 대사 시절
 
 
도쿄 대사관 근처 일식집에서 생선 초밥을 비행기편으로
박 전 대통령에게 공수했던 일은 매우 유명한 일화로 꼽히고 있다.
(한때 그의 별명은 조조였다) 

6.이 씨의 지극정성이 박 전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일까?
 
 
1970년 12월 이후락은?
 
 
제6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면서
 
 
다시 권력 핵심으로 부활하게 된다.
 
 
 
7.이듬해-1971년-
 
"이번에는 2번 대중은 김대중"
 
金大中후보가 박정희 '총통제' 음모를 폭로하였던
 
바로 그 선거--제7대 대통령 선거를 총지휘하며
 
 
명실상부한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8.특히 이후락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면서
실세를 넘어 권력의 정점에 올라섰다.
 
 
(당시 부총리 장기영
 
-前 한국일보 社主-씨가 남북공동성명의 한국측 대표로 임명되었으나 이후락이 낌새를 알아차리고는 이 자리를 빼았았다는 後聞입니다-역시 조조!)
 
‘대한민국 대북 밀사 1호’로도 불리는 그는 1972년 5월 2일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자살용 청산가리 캡슐을 몸에 감추고 3명의 수행원과 함께 판문점을 넘었다.
 
 
9.3박 4일간의 방북기간 중 당시 김일성 북한 주석(주석제는 공동성명이후 박정희의 유신 체제에 결과적으로 이용당한 배반감을 느낀
김일성이 만들었다고 하며 당시에는 수상이 아닌가 합니다-옮긴이 주)
을 두 차례 만나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핵심 의제로
 
 
 
역사적인 ‘7·4 남북공동성명 기본 원칙’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10.그 뒤 72년 10월 유신 체제(김대중이 폭로한 총통제와 거의 흡사하고   온 국민의 순수한 열정의 관심사였던 72년7.4공동성명을 교묘히 유신체제 만들기에 惡用했다는 후문임)를 확립하는 데 앞장서면서
권력 2인자로 우뚝섰다.


 
11.하지만 이 씨는 1973년 10월 속칭 일명
 
 
‘윤필용 사건’으로
 
 
권력무상의 비애를 맛봐야 했다.
 
 
 
12.‘윤필용 사건’은?
 
이 씨의 심복(心腹)으로 알려진 윤필용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
1973년 4월 술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노쇠했으니(당시 56세의 박정희)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이후락 형님이 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드러나 촉발됐다.
 
 
당시 윤필용과 그를 따르던 하나회 후배들은 쿠데타를 모의한 죄로 같은해 10월 대거 구속됐다.
 
(나중에 민정당 대표를 역임한 권익현대령도 이 사건에 의해 구속된다  억울하게 줄 잘못 서서 당한 유능한 고급 장교들이 정치장교로 둔갑하여 모진 수모를 당한다)
 
수경사 참모장이었던 당시 육사 11기의 선두주자 손영길 준장도
억울한 옥살이와 불명예 예편으로 선두 자리를 결과적으로 예편직전
 
 
박종규 비서실장의 엄호로 기사회생한 전두환 및 노태우에게 그 선두자리를 내주고 이 사람들은 차례로 후일 대통령에 오르게 된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합수부 수사국장을 역임한 백동림
-육사15기-대령은 후일 말하길:
"이 윤필용 사건은 전두환이 꾸민 짓이다!"라고 자기 저서
책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결국 전두환이 이 일을 보고하여 자기도 죽을 뻔하다가 노태우와 함께 기사회생하여 후일 대통령이 됩니다.

13.이 사건 이후 이후락은?
 
당시 박 前 대통령의 최대 政敵으로 꼽혔던    김대중 납치 사건을 주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윤필용 사건’으로 위기감을 느낀 이 씨가 ‘김대중 납치 사건’을 주도해 박 전 대통령에게 충성심을 보이려 했을 것이란 분석에 힘이 실리기도 했다.
 
 
14.실제로 1998년 미국 국가안보기록보관소 ?
 
‘1973년 비밀 외교문서’라는 자료를 통해
이 씨가 ‘김대중 납치 사건’을 주도했다고 밝힌 바 있다.
 
 
###윤필용 사건은?
 
김대중 납치 사건을 결과적으로 불러오고 이 납치 사건은 문세광 박대통령 저격 사건
 
(육영수 여사 피격 사망-그 총알의 탄두 방향에는 의문점이 아직도 있음!)
 
을 불러오고 이 저격사건은
 
또 다시 박정희 대통령의 좌청룡 우백호 였던 최고의 장자방이던
이후락-박종규의 실각을 가져오고 
 
그 실각한 자리를 최측근의 그 다음 세력인 차지철(후임 경호실장),및 김재규(후임 정보부장)의 보임하게 되어 그들이 최측근이 된 이후 기존의 박종규-이후락 쌍두 마차 체제와는 달리 그들 차지철-김재규 체제는 불안 속에 출발하여
 
이 2명의 권력 투쟁및 갈등속에서
드디어는 5년뒤 79년10월26일 크게 폭발하게 되는 데
 
바로 박정희 시해 사건이다.
 
박정희는 결국 거슬러 올라가면
 
자기의 최측근인 이후락 및 그들 심복들의 제거 사건이 되었던
 
 
윤필용 사건을 박정희가 그것을 너무 심하게 건드려 결국
 
 
연이어 지는 사건의 단초가 되었고 결국 죽음의 길을 걷고 말았다
 
 
는 추론은 거의 확실하다고
 
저 한준구는 보고 있습니다.
 
 
 


15.이 씨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1973년 12월 중앙정보부장직에서 물러나
 
 
영국령 바하마에서 사실상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이 씨는 ‘오뚝이’란 별명답게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때 자신의 고향인 울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돼 재기를 노렸지만
과거의 영화를 되살리진 못했다.

16.이 씨의 말년 삶은?
불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7.1979년 10·26 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암살되고 신군부에 의한 제5공화국이 출범하자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몰리면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18.그는 당시 재산과 관련해
 
 
떡(정치자금)을 만지다보면 떡고물(부스러기 돈)
 
 
 
이  묻는 것 아니냐”는 발언으로
 
 
 
한때 ‘떡고물’ 유행어를 퍼트리기도 했다.
 
 
 
19.당시 전두환 신군부의 추정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194억 원에 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으로 치면 얼마나 될까요?)

20.이 씨는 1985년 정치활동 규제에서 풀려났지만 정계를 떠나
경기도 하남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최근 2009년 까지 은둔생활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21.이후 하남 자택과 땅은 보험사 대출금을 갚지 못해
99년 8월 경매 처분됐고,
경기도 광주에 있던 도자기 요장과 땅도 94년 매각됐다.

22.2004년 부인이 별세한 뒤에는 치매증상까지 보였다.
지난 2009년 5월 병원에 입원해 170여 일 동안 치료를 받던 이 씨는?
뇌종양과 노환 등으로 병세가 악화돼 10월 31일 결국 85세로 생을
마감했다.
 
23.그의 유골은?
11월 2일 대전 유성구 갑동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2묘역에 안장됐다.



끝내 묻힌 3공 비사 <일요신문>이 본 이후락
2003년 마실 가는 '백발 노인'

   
  ▲ 2003년 3월 26일 하남 자택을 나서는 이후락 전 중정부장의 모습이 일요신문 카메라에 포착됐다. 백발이 성성한 데다 얼굴에 검버섯까지 피어 몰라보게 노쇠한 모습이었다.  
 
<일요신문>은?
지난 1998년 2월, 제302호 보도에서
 ‘dj(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사건’과 관련해 이 씨의 배후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당시에는 ‘dj 납치’를 지시한 것은 ‘박정희 사전 지시설’이 일반화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요신문> 취재진은?
 dj 납치 사건 때 중정 6국장이었던 이용택 전 의원(11·12대 민정당)의 증언을 보도하면서
파장을 일으켰다.

<일요신문>은 또 지난 2003년 3월경에
이 씨의 노쇠한 모습을 담은 사진을 특종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이 씨가 단골 음식점인 ‘한우리’를 찾는 모습이었다. 당시 이 씨는 건강악화설이 돌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요신문>은 “치매 소문과는 달리 겉보기에 멀쩡해 보였다”며
94년 이후 처음으로 이 씨의 근황을 단독으로 공개해 큰 관심을 끌었다.

이외에도 <일요신문>은 3공 시절 숱한 비화의 ‘키맨’으로 지목받았던 이 씨의 입을 열기 위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정인숙 씨 사망사건’
‘김형욱 전 중정부장 실종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등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사건들의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이 씨와 여러 차례 접촉한 바 있다.
 

주간지 중에서 최고의 부수를 공개적으로 자랑하는
 
 
최고의 신문 일요신문!
 
저는 일요신문의 애독자 이지만
 
그 회사측하고는 일면식도 없습니다.
 
 
 
김장환 기자 감사합니다.
 
 hwany@ilyo.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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