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짜(?) 在野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상세 인터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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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780회 작성일 2011-08-30 00:06본문
@제목: 학위 없는 것보다 이념잣대로
배척당할때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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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8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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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이이화(75)씨가 지난 6월 펴낸 자서전의 제목은?
<역사를 쓰다>이다.
평생을 오로지 역사 연구에 매진했다는 자부심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의 남다른 이력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삶 자체가 어쩌면 ‘역사를 쓰는’ 것이기도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만큼 그는 한국 역사학계의 ‘별종’이다.
그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적이 없다. 그의 유일한 학교 졸업장은 광주고 졸업장이다.
그럼에도 그는 학벌과 학맥이 앞서는 폐쇄적인 풍토에서 역사학자로 살아남았다.
학계 일각에서 애써 그의 배경을 얕보고 그의 민중사관을 이단시했지만,
그는 자신의 힘으로 학문의 꽃을 피우고 향기를 뿜어냈다.
고답적인 엄숙주의에 갇혀 있던 1970~80년대
역사학계에서 처음으로 대중적인 글쓰기를 시도해 역사를
당대의 삶 속으로 끌고 들어간 첫 세대의 ‘주장’으로 인정받았다.
인터뷰를 위해 마주앉은 인간 李離和는?
또다른 면모도 보여주었다. 작은 체구에 눈빛이 뜨거웠고, 다변에 애주가였다. “술 인심이 후한 반면 술 취하면 혼자 떠드는 것이 내 단점”이라고 말했다.
고졸로 역사학 대중적 글쓰기 선구자역할 독학으로 1977년 41살때 학계 공식데뷔
-고졸 학력으로 역사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원래는 문학평론을 해보려고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갔는데, 생활형편이 어려워 그만두고 여러 일을 전전했다.
책 사 볼 돈이 없어서 그때 을지로에 있던 국립도서관에 자주 갔다. 어려서 한문을 익힌 탓인지 역사 분야의 책을 많이 읽게 되면서 한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964년 <불교시보>라는 신문사에 들어가 한 3년쯤 고승들을 만나고 역사 관련 기사를 썼는데, 그때 역사학을 하겠다는 뜻을 세웠다.” |
@학계에 이이화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것은?
“잡지에 한국사 관련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73년부터이지만,
공식적인 학계 데뷔라고 한다면?
41살 때인 1977년
순수 학술지 <한국사 연구>에
‘척사위정론의 비판적 검토’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다.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에서 일할 때인데,
당시 고려대 대학원생이던 조광 교수(고려대 정년퇴임)가
한문을 배우러 왔다가 나와 친해졌다.
나는 술 마시면 잘 떠들고 조광은 그런 내 얘기를 좋아했다.
어느 술자리에서 유신체제하에서 일부 학자들이 말하는
민족주체성이란?
넓게는 유교, 좁게는 송시열계의 노론 중심 주체성에 국한될 뿐이라고 비판을 해댔더니,
조 교수가 그 이야기를 한국사연구회에 가서 강만길 교수 등에게 했고,
그분들 추천으로 심포지엄에서 논문을 발표하게 됐다.
나중에 김용섭·정창렬 교수 등도 그 논문을 크게 칭찬해주었다.
박사는커녕 학사도 아닌 ‘무소속’으로서는 나름대로 화려한 데뷔였다.”
-공부는 어떻게 했는가?
“나야 뭐 처음부터 독학이었다. 바탕이 돼준 것은 한문 실력이었다.
나는 15살 때까지 학교 문턱도 가보지 못한 채 아버지에게 한문만 배웠다.
<사서>를 떼었지만 그 정도로는 한학을 제대로 했다고 할 수 없지만,
나름 神童 소리를 들었으니
기초는 다진 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친구 홍기삼(전 동국대 총장)의 도움으로
동아일보사 출판부에 촉탁(임시직)으로 들어가
<동아연감>, <한국고전 백선>과 같은 <신동아> 고전 별책 출판 작업을 하면서 유수한 학자들을 알게 되었고, 공부도 많이 했다.
68년에 들어가 74년 임시직들이 모두
해고될 때까지 6년이 내게는 대학의 ‘학사과정’이었다.”
-역사 저술가로서 이름이 났는데 학위를 해서 대학교수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은 없었나?
“왜 없었을까.
서른 몇살 무렵인가에는
야간대학이라도 마칠 생각을 하고 학교까지 찾아갔다가 그만뒀다.
왠지 구질구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굳이 그런 걸로 치장을 해야 할까 하는.
그 무렵 속된 말로 나는 잘나가고 있었다.
당시 역사학 분야에서 대중적 글쓰기가 가능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신문·잡지 등에서 알아주니까 학위 따위가 뭐 필요할까 싶었다.
설사 학교에 자리를 얻는다 해도 사람들이 내 약점을 가만둘까도 싶었다. 이후로는 교수 초빙 제안이 오기라도 하면 내가 먼저 딱 잘랐다.
나는 저술가다. 교수 따윈 관심 없다고.”
-학자로서 학위가 없으니 현실적으로 불편한 점도 많았겠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가장 싫었던 건 사람들이 나를 대우한다고 교수님, 심지어 박사님이라고 부르는데 딱 질색이었다.
박사학위도 없고 교수도 아닌 나로서는 엄연한 사칭이 아닌가?
어디 가서 마땅히 낄 자리가 없을 때도 불편했다.
학벌, 학맥은 해당 사항이 없고, 경상도 출신으로 광주고를 나왔으니 지역 배경도 아리송하고.
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외롭지는 않았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빨갱이니 뭐니 하며 내놓고 배척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휴머니스트다. 역사 속의 민중들과 핍박받는 하층민의 삶에 관심이 많았던
내 역사관을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 식의 이념 잣대로 재며 욕했다.
심지어 학위 논문에 내 글을 인용하는 것조차 못하게 한 사람들.”
-진보적인 역사연구단체인 역사문제연구소 창립에도 참여했지요?
“86년도엔가 김정기(전 서원대 총장) 등
서울대에서 공부한 후배들이 나한테 역사모임을 갖는다고 연락이 왔어.
임헌영(문학평론가)이하고
박원순 변호사,
원경스님 같은 분들이
역사문제연구소를 만든다고 했다.
서울대·연세대·고려대·성균관대 등에서 역사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박사학위 논문 쓸 무렵의 젊은 축들은 나한테 배울 게 조금은 있던 시절이라 나와 금세 친해졌다.
내가 古文에 주역도 좀 했잖아?
이것저것 주워들은 걸 뽀시락뽀시락 풀어놓으니 다들 좋아했지.
내가 그 친구들한테 술도 잘 샀어.
물론 큰 건은 박원순 같은 사람이 내고 나는 잔챙이 담당이지만.
그러니 날 잘 따랐지. 정식으로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면서 역사문제연구소 같은 데서 여러 훌륭한 선후배와 어울릴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80년대 초반 국책기관이던 정신문화연구원에도 있었는데?
“민추(민족문화추진회)에서 한문에 능한 세 사람이
민족문화백과사전 편찬사업에 스카우트되었어.
서기관급의 전문위원으로 대우가 아주 좋았는데,
1년 남짓 하고는 관뒀어.
민족문화사전에 자꾸 유신 항목을 챙기는 게 마음에 걸렸고,
전두환 정권이 매주 기업인이나 공무원들을 모아놓고 정신교육 같은 연찬회를 했는데, 정말 보기 싫었어.
거기서 祿 먹고 있다는 게 양심에 찔린 거지.
그래서 속으로 계산을 해봤더니 원고료만으로도 그럭저럭 먹고는 살겠더라구. 난 그 뒤부터 오로지 글값으로만 먹고살았어.”
-다작의 저술가로도 유명하다. 그렇게 많은 글을 쓸 수 있는 비결이라면?
“두가지다.
ㄱ.첫째:
고교 때부터 원고지 메우는 훈련이 되어 있어. 문학을 하려 해서인지 표현 능력도 어느 정도 있는 것 같고. 한문에 능해 다른 사람들보다 원전을 읽는 데 에너지를 덜 소모하는 것도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ㄴ.둘째는
젊을 때부터 교열이나 해제 작업을 하면서 각종 원전과 자료에 많이 접근해 본 것이 크게 도움이 됐다. 어디에 어떤 내용의 자료나 소재가 있다는 걸 감으로 알고 있어서 자료 찾는 일에 시간을 많이 아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전업 저술가로서 직업정신이 투철하다. 원고 마감이나 출판 약속은 정확히 지킨다. 글로 먹고사는 사람이 마감 약속 못 지키는 것은 월급쟁이가 무단 결근하는 것과 같다.”
-고학을 하며 겨우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경상도 출신으로 광주고 입학생은 내가 거의 유일할 거다.
부산을 거쳐 여수에서 광주로 가서 가짜 중학교 졸업장을 만들어 광주고 시험을 봤다.
학비가 없어 여관 보이 노릇 하느라 학교에 나가지 못하는 걸
장준한 교장선생님께서 혼자만 아시고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내가 돈이 없어 못 다니면 돈 많은 보결생으로 채우면 되는데 날 버리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해주었으니 내게 은인이시다.
그때만 해도 보결로 들어온 학생이 한 반 정도는 되었다.
광주고뿐 아니라 전국 대부분의 명문학교들이 다 그랬다.
전쟁 끝이라 교사 월급도 제대로 못 주던 시절이니,
위에서도 눈감아 줬지.
광주에서 처음으로 학교 도서관을 지은 게 광주고인데
그것도 보결생 받은 돈이라고
교장선생님이 공개적으로 그랬어.”
-수십가지 직업을 전전하고 전문 저술가로 성공했다. 나름대로 생활력이 강해 보인다.
“전혀. 나는 돈 생기면 술 마시고 술 사주고. 뭘 모을 줄 몰랐다.
내가 생활에 규모를 갖추게 된 건 국세청 공무원이었던
집사람(김영희) 덕분이다.
결혼할 때도 내 친구는 전부 (글)쟁이 아니면 (가난)뱅이라 별게 없었고, 아내가 모아놓은 전세보증금에 처가 부조금을 합쳐 신혼집을 얻었다.
6년 뒤 구리 아치울에 새집을 짓고 이사를 갔는데 집사람이 무척 좋아했다.
나중엔 그 돈 가지고 강남에 아파트를 샀으면 부자 됐을 거라고 후회하긴 했지만.
얼마 전엔 파주 헤이리 예술인 마을에 들어갔다.
난 지금도 利財엔 깜깜이다.
우리집에서 내 이름으로 된 건 딱 두가지,
손전화와 원고료 입금 통장뿐이다.
그래도 난 안 불편해. 이혼하면 반절은 줄 것이고, 안 하면 자식들 앞으로 갈 거니.”
-역사학자로서 많은 역사 속 인물들을 만나고, 현실에서도 많은 사람을 만나보았다. 인간에 대한 관점이랄까 그런 것이 있을 법한데.
“아내나 주변 사람들한테 귀가 얇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남 이야기를 너무 쉽게 믿는다는 뜻이지.
그만큼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려고 하는데,
딱 한가지 싫은 부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다.
ㄱ.저만 알고, 제 욕심만 차리는 놈들,
ㄴ.돈만 아는 놈들,
ㄷ.출세가 제일인 줄 아는 놈들.
그런 놈들하고는 안 맞아.
술자리에서도 그런 놈들에겐 대놓고 욕을 해버려.
가난하다고 해서,
학벌이 낮다고 해서,
출세 못했다고 해서 야박하게 굴면 안 되지.”
-일흔다섯이신데, 약주도 잘하시고 담배는 줄담배 수준이다.
건강은 어떠신가?
“6년 전에 위암 증상이 발견돼 수술을 했는데 지금은 아주 말짱하다.
그래서 술도 담배도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스트레스가 전혀 없대.
의사가 그래요,
나는 남 탓 안 하고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이라고.”
표현능력·한문실력·원전 정보가 다작 비결
“역사는 사람·세상과 소통하는 실천의 학문
현장을 누비고 머리 아닌 가슴으로 느껴야”
-글쓰는 일이 힘들 때도 되지 않았나?
“내가 좋아하는 게 술, 바둑, 글쓰기·읽기인데,
술이야 맨날 먹을 순 없고,
바둑도 여가이지 주업은 아니잖아.
결국 글쓰는 일로 돌아가.
타고난 천성인가봐.
그리고 나이 50에 본 막내딸이
올가을에 독일로 유학을 가요.
박사를 하려면 8년 정도 걸린다는데, 돈 벌어야지, 놀면 뭘 해.”
-앞으로 계획은?
“일단 두가지를 하려고 한다.
한가지는 한국 인권사를 쓰는 일이다.
고대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사람에 대한 생각, 사상 등을 정리해 책으로 남기고 싶다.
그 첫 시도로 전봉준 평전을 구상중이다. 거기서 방향을 잡아 본격적인 인권사를 쓰는 쪽으로 나아가려 한다.
또 한가지는?
외국 사람을 위한 우리 문화와 역사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두 권짜리인데 첫째 권은 다 써서 지금 영어 번역 중이다.
한류가 뜨긴 했는데 우리를 제대로 알리는 책이 너무 부실하다.
김영사와 계약했는데 그쪽에서는 시리즈를 생각하는 것 같다.”
-그 연세에도 저술 계약이 있다니 놀랍고 부럽다.
“내 주변에 은퇴한 교수들 많은데, 다들 억지로 조용하게 살아.
안 불러주니까.
어떤 이들은 원고를 들고 출판사나 잡지사를 찾아간다는데 별반 반기지도 않는대. 거기에 비하면 나는 좋은 편이지.”
-끝으로 후학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
“역사는 실천의 학문이다. 결코 고답적일 수도 없고, 고답적이어서도 안 되는. 현장을 발로 누비고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알게 되고 얻게 된 것은 글로 써서 대중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과, 세상과 소통하는 일이 곧 역사학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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