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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용모반사건-後폭풍-김대중-육영수-박정희-전두환의 정치적 관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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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1건 조회 1,483회 작성일 2010-07-27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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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윤필용장군 사건의 後폭풍은 무엇?

 

 

부제: 윤필용모반사건과 김대중 납치--육영수피격-박정희피살-전두환 득세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1.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은

 1972년 7월 4일 남북 공동 성명이후 일약 영웅으로 떠올랐고 박정희대통령은 오랜만의 화해 분위기의 남,북 관계를 악용하여 그해 10월 유신을 발표한다.

 

2.북한 首相 김일성은 남한측의 모략에 속았음을 알고 분개했다는 후문도 있었고 김일성도 미리 계획했었는 지 아니면 분개해서 작정했는 지는 몰라도

 

하여튼 김일성은 북한 체제를 새로운 주석제로 전환하기에 이르러 敵對敵 共生 관계를 이어간다.-필자주!

 

3.남한은 영구 통치의 박정희 유신체제로 치닫아

 

민주화 세력들에게 큰 저항으로 고난을 겪기 시작한 다음해인 1973년에는 위의 제목에서 알듯 한국 권력 최대의 권력 스캔들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소위 '윤필용 모반사건'이 일어난다.

 

 

4.이 '윤필용 모반사건'으로 인한 巨大한 後폭풍이

 

일어나게 되는 데

 

 김대중납치사건 및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피격사망사건과 그리고 5년뒤에 있게되는 박정희 피격 사망 사건이 어떻게 상호 연계성이 있는 지 살펴보기로 합니다.

 

 

5.우선 필용 將軍의 프로필은?

 

ㄱ.경북 청도 출신으로 1949년 육사8기로 졸업함

ㄴ.육사2기 출신의 박정희 사단장으로부터  총애를 받기

    시작함.(영관급 장교 시절부터)

ㄷ.5.16군사쿠데타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장 비서실장을

    할 정도로 지속적인 총애를 받았고 (61년)

    63년에는 육군본부 관리참모부 분석과장을 하였고

 

 

ㄹ.軍部內 권력 核心중의 하나인 육군 방첩대장(65-67년)

ㅁ.베트남 파병 맹호부대장(68년)

ㅂ.군부권력핵심인 수도경비사령관(70-73년)-軍경력 끝!

 

 

ㅅ.수도경비사령관 시절 수많은 일화(에피소드)가 있는

    데  그는 대구-경북 군부내 세력의 代父였고  육사후배

    전두환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하나회의 후원자였다.

ㅇ.수경사령관시절 많은 영관급 장교들이 명절에 3성장

     군이나 4성장군을 안찾고 2성장군에 불과한 그를 찾

     았다는 얘기도 있고  한때는 4성장군이 그에게 세배

     를 왔다는 첩보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위의 장교들은 '일부 영관급 정치장교'로 보면될듯!

 

 

ㅈ.그리고, 윤필용 장군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수도

     권에 배치된 중령급 주요 보직의 대대장, 대령급의 연

     대장들이 즐비하여 마음만 먹으면 박정희 정권을 무

     너뜨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라는 얘기도 나돌 정도

     로 그의 위세는 대단하였다.

 

ㅊ.그는 억울(?)하게도 -필자주-육군 보통군법회의에서

     8개 죄목을 뒤집어쓰고 징역15년형-벌금 2,000만원-

     추징금 590만원-당시 돈으로-선고 받게 됨!

 

 

ㅋ.약 2년뒤 쯤인 1975년 일단 석방된 윤필용은 낚시등

    으로 소일을 거듭하다가 그가 아끼던 육사 후배였던

    전두환이 79년 12.12쿠데타이후 軍權을 장악하고 대

    통령에 오르게 되자  전두환의 요청에 의해

ㅌ.윤필용은 자의반 타의반-필자주-으로 그 요청을 받아

     들여 1980년 이후에는 한국도로공사 사장--한국담배

     인삼공사 사장등을 지내며 말년을 조용히 보냈다.

ㅍ.그는 7년 전인 2003년 식도암 수술을 받은 적이 있고

     그것이 재발했는 지 아니면 다른 지병이 2달전 있어

     그 지병이 악화되어 83년의 파란만장한 生을 마감함!

      (2010년 7월24일 별세함)

 

6.윤필용 사건 이전의 권력 암투(?)과정은?

 

ㄱ.1970년 윤필용장군이 권력의 핵심인 수도경비사령관

     이 되자, 박정희 정권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라

     는 말이 나돌 정도로 그 위세는 대단하였다.

ㄴ.당시 육군 內 영관급 일부 정치 장교들은  참모총장이

     나 4성장군에게는 세배를 안가도 2성장군인 소장 윤

     필용 장군에게는 선물보따리를 싸들고 세배를 갈 정

     도 였다고 한다. 심지어는 4성장군이 2성장군 윤필용

      에게 새배했다는 뒷얘기도 나올 정도였다.

ㄷ.그리하여, '박정희 정권의 2인자는 이후락 정보부장도

     아니고, 김종필 국무총리도 아니고 군을 손아귀에 쥐

     고 있는 윤필용장군이다.' 라는 말이 나돌게되기도 함!

 

ㄹ.특히도 윤필용 수경사령관 4년차이던 1973년 初

 

     그가 아끼던 육사 후배들인 육사 11기중 전두환-노태

     우-최성택-손영길-김복동 대령들이 드디어 장군 진급

     을 하게 되자, 하나회를 후원하던 그는 더욱 그 세력이

     커지게 되었다.

 

ㅁ.하나회 후원세력은 누구?

 

    윤필용 수경사령관--차지철(육영수 저격사건후 경호실

    장으로 2인자역할함)--육사1기의 서종철 국방장관이

    대표적이었고 73년당시 경호실장 박종규도 심정적 후

    원 세력-전두환등에 대한 --이었다고 봅니다-필자주

 

ㅂ.하나회 반대 세력은 누구?

 

    육사 동기생인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역시 육사동기생

    인 강창성 보안사령관--육사 5기의 정승화 장군(육사

    교장 및 후일 12.12사건 당시 육참총장) 등이었다.

 

ㅅ. 어수선한 1970-73년 시기에 윤필용은 수경사령관으로

      다음을 모두 겪게 되는 데

 

      1970년대 초의 박정희의 불법(?)적인 대통령3선개헌

      이후락 정보부장의 북한 전격방문 및 12.7.4공동성명

 

      이에 대한 후폭풍으로 북한의 主席制 체제로 변경

 

      유신체제의 2년차이던

 

      1973년에 민주화 항거세력에 나라는 어수선하였고

      권력 핵심부 세력 사이에는 심리적 암투가 계속되는

 

      이 渦中에 73년 4월 드디어 대형 사건 하나가

 

       터지게 되는 데 이것이 윤필용 모반사건이었다.

 

 

7.윤필용 모반 사건의 사소(?)한 발단은?

 

ㄱ.1973년 4월 윤필용 수경사령관은  慶北 지역 선배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저녁 술을 하던 중--당시

     서울신문사 사장 신범식이 배석하였다고 함-필자주

     평소 고향선배인 이후락에게 '형님!'이라 잘 불렀음1

 

ㄴ." 박대통령이 노쇠했으니 이제는 후계자로 형님-이후

      락-이 해야 합니다."라고 발언한 것이 문제가 됐다.

 

ㄷ. 술자리에서의 이 발언이 누군가에 의해 밀고(密告)되

      어 박정희대통령의 귀에 들어가게 되자 박정희는 또

      다른 친위세력인 박종규 당시 경호실장 및 강창성

      안 사령관에게 지시하여 발본 색원할 것을 강력 지시

      하기에 이르렀다.

 

8.  육사 8기 同期生 끼리의 권력 암투(?)!

 

     ㄱ.순수 야전군 사령관을 원했던 강창성장군은 정치

         상황에 끼어 들지 않을 수 없던 보안사령관 자리도

         평소 탐탁하게 여기지 않던 차 -필자주!

 

     ㄴ. 육사 동기생이자 2인자로 위세가 등등하였던 윤필

          용 동기의 수사를 박대통령 강력 지시하에 수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당시 육사12기이던 정상문

          대령등과 함께 수사팀을 조직하고 본격적인 수사에

          전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ㄷ.후일 윤필용장군은 한참 세월이 흐른 뒤 말하길:

 

         " 나 때문에 불려간 후배 장군 및 영관급 장교들은

           모두 고문을 당했다."

 

        " 그러나, 나는 쿠데타 음모를 꾸민 적이 없다."고

         하였음.--필자가 보기에도 陰謨는 語不成說임!

 

 

9.강창성 보안사령관의 특별 수사팀은?

 

    ㄱ.강창성 보안사령관 휘하의 특별수사팀은 육사11기

        중  박정희 사단장 시절부터 총애를 역시 받았던

        당시 중위시절의 손영길--윤필용의 오른팔격-

 

        손영길 준장--이 윤필용 사건이 만일 없었더라

 

        면?

 

        육사 11기중에서는 전두환을 제치고 최초의 육참

        총장은 바로 이 손영길 차지였을 거라는 얘기도 있

        을 정도였음- 그리고 김성배 준장등의 장군급은 물

        론, 장성 3명과 장교 13명이 횡령과 수뢰, 군무이탈

        등의 죄목으로 징역형을 받았고 소위 '윤필용 계열'

         로 분류되던 31명의 장교들을 강제로 예편시켰다.

 

     ㄴ.  그리고, 이것에 그치지 않고 24명의 장교들이 인사

        조치를 받았고, 160여명이 감시대상으로 분류됨.

 

 

       당시 육사12기의 박준병대령은 예편 위기에 몰렸으

       나 수사팀에 육사 동기생인 정상문 대령이 박대령은

       아주 유능한 대령이고 정상참작次 빼야합니다 라

       고 강창성 사령관에게 진언하여 명단에서 빼게 되었

       는 데 후일 박준병은 6년뒤인 79년12.12쿠데타 당시

        20사단장이었고  쿠데타 성공후 육본 인사참모부장

       보안사령관의 요직을 거친후 4성장군으로 예편하였

       고 그 이후 옥천-영동 지역 4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바도 있다.--그가 만일 그당시 예편되었더라면 어떻

       게 인생 행로가 바뀌었을 까?

 

 

     ㄷ.민간인으로서는 김연준 당시 한양대 총장 겸 대한

        일보 사장이 구속되었고  나중에 6공 금융계의 황

        제가 되는 제일은행 차장급의 이원조가 해직되었음.

 

     ㄹ. 보안사령관 강창성장군은 에편 대상에 전두환

        노태우 준장을 명단에 넣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

        고 하였으나 --하나회의 핵심 세력이므로--

 

        최종 확인 과정에서 박정희대통령이 "경상도 출신

        유능한 고급 장교들의 싹을 말릴 수 있다."고 말한

         박종규 경호실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두환

        노태우 등 날 生 자로 명단에 표시함으로서 극적

        으로 예편되는 최대(?)의 위기를 넘기게 된다.

 

       73년 4월 최대의 위기를 넘기게 된 전두환-노태우

       하나회 그룹은 6년뒤 79년 10.26 박정희 사망을 계

       기로 권력 공백기를 잘 활용하여 드디어 12.12 쿠데

       타를 계기로 삼아 軍權을 손아귀에 넣게 되고

  

       走馬加鞭격으로 49세에 대통령에 오르게 되는 역사

        반전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전두환이 된다.

 

       훗날 전두환은 박종규를 잘 대접하였고 무기 사업

       에도 특사로 파견한 적이 5공 시절 있었다고 봅니다.

 

10.후일 강창성 보안사령관은 어떻게 보복당했나?

 

    ㄱ.윤필용 세력이 제거되자--하나회는 윤필용이 단지

        후원하였으나 윤필용은 하나회의 대부로 착각하였

        다는 전두환의 후일담이 있었음!

 

    ㄴ.강창성의 승승 장구에 우려를 느낀 윤필용 후원

       세력등은  그가 3성 장군으로 가는 길을 막았고

       덩달아 박정희 당시 대통령도 강창성에게 피를 묻히

       게 하는 역할을 하게 하고는 그를 토사구팽해 버렸다

       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다.

 

   ㄷ.역사 반전 드라마는?

 

       강창성은 윤필용 사건으로 수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일부 유능한 장군들에게 가막소에 가게하거나 강제

       로 군복을 벗게하는 악역을 맡은 것을 후일 무척 후

       회하기는 하였으나

 

      윤필용 사건에서 살아남은 전두환-노태우등의 하나

      회 핵심 세력들은 6년뒤 12.12쿠데타로 군권을 잡은

      뒤로는 해운항만청장을 역임한 강창성에 죄목을 뒤집

      어 씌어 가막소에 집어 넣고 그에게 가혹한 보복을

      했다고 후일 강창성은 그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한겨울에 차가운 감방에서 제대로 보온도 되지

     않은 아주 힘든 생활을 하여 몸의 이곳 저곳에 동상이

     걸리는 등 고통을 당하다

 

     후일 국회의원이 되기도 하여 의정활동도 활발히 하

      였다고 보며  과거의 보복 후유증으로 그는 조금 일찍

     생을 마감하였다.--필자주-- 그의 아들이 명지대학교

     강규형 교수이므로 그에게 궁금하면 물어보길 바람!

 

 

 

11.윤필용 사건 후의 

댓글목록

이계상님의 댓글

53 이계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더 먼 후일에 아마도 그 진실은 잘 밝혀질 것이다. 더욱 객관적인 판단과 자료로 그 과정을 알게 될 것이고 판단도 다양하게 나올 것 같은데.항상 긍정과 부정의 견해는 후세에 더욱 논란이 될 것 같기도 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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