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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용 사건 후폭풍 제2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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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007회 작성일 2010-07-27 15:01

본문

 
 

12.윤필용 사건과 육영수저격 사건과의 관계

 

는 과연 무엇인가?

 

ㄱ.윤필용 설화(舌禍)때문에 본의아니게 입장이 곤란해

     진 이후락 정보부장은 그 무엇을 해서라도 이것을

    보상하고 다시 박정희대통령의 총애를 받아야 할 딱

    한 형편이 되었다.

 

ㄴ.그리하여,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다시 신임을 얻기

    위해 그 사건이 난 4개월 후 쯤인 73년 8월 당시 일본

   의 동경(도쿄)에서 적극적인 反박정희 발언을 일삼고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가장 골치거리였던 김대중을

   엄청난 무리수-일본의 국권 침해포함!-를 두어 납치

   하여 현해탄 바닷속에 수장시키는 작전을 감행했다.

 

ㄷ.다행히 김대중은 헬기를 타고 납치 배를 따라 오던

    미국측에 의해 바닷속 물고기 밥은 면하였으나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강제 연금되어 오랜기간 영어(囹圄)

    생활을 하게 된다.--7년뒤 쯤에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이 전두환에 의해 꾸며져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ㄹ.이 김대중 납치 사건은 단지 이후락의 박정희 敎 信徒

    로서의 행위였으나-필자주-결과적으로 親北 재일동포

    사회를 크게 자극하게 되었고

 

ㅁ. 그 이듬해인 1974년 8월15일 광복절 국립극장 행사

     장에서 재일 동포 문세광에 의한 저격으로

 

     박정희대통령은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였으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피격되어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아직도 육영수 여사의 머리에 박힌 총탄의 발사 지

    점에 의문을 한동안 제기한 적이 있으나 집도의가 함구

    하고 고위 관계자들이 함구하는 바람에 영구 미제 사건

    이 되는 듯함!--우리는 문세광이 쏜 총탄으로 알고 있는

    데 이에 대한 이의를 제가하는 내용의 어느 주간 신문

   을 오래 前에 읽은 적이 있었음-필자주!

 

   *** 당시 육영수 여사가 쓰러진 방향을 보면 사격당시

   의 문세광 저격 위치와 비교하면 뭔가 이상하지 않나?

 

  *** 문세광이 한국에 들어오는 과정부터 국립극장 철통

  경호망을 뚫고 비표(秘票)구입 과정 등 일반인이 보기

  에도 너무 허술한 과정때문에 저도 지금까지 의문시하

  고는 있으나 국민적 파장을 고려하여 언론이 그냥 침묵

  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잘한 일이라고 저는 봅니다.

 

  **다만, 어느 대학교 실험실에서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문세광 저격 총탄의 소음과  연발 사격의 실패 및 반격

   사격등을 종합해 연구 발표한 내용을 어느 텔레비젼

   특집 프로그램에서 유심히 시청한 적이 있으나 결정적

   인 역사 오류를 잡아내지는 못한 듯한 인상을 받았음.

 

ㅂ. 이 사건 후유증으로 당연 당시 박정희 친위세력중의

     하나인 박종규 경호실장이 물러나게 됨!

 

 

13.윤필용-육영수저격- 박정희 피격과의

 

 관계는?

 

ㄱ.윤필용 사건 후유증으로 이후락 무리수로 인해 김대중

     사건이 벌어지고 이에 따른 여파로 문세광에 의한 육

     영수 여사 피격사건이 벌어지고

 

 ㄴ.이에 따른 문책 인사 이동으로

 

      당연 권력 핵심중의 핵심인 박종규 경호실장 대신

     차지철 경호실장이 들어오고  

 

     역시 핵심중의 핵심인  이후락정보부장이 물러나고

     김재규 정보부장이 권력 핵심부에 들어오게 된다.

 

ㄷ.이들에 대한 인사 발령에 우려를 표명하는 정치인

     들이나 측근 세력들이 많았다고 한다.

 

ㄹ. 강성 이미지의 차지철과 다소 무능한 김재규 와의

      갈등은 74년이후 무려 5년간 지속된다.

 

ㅁ. 그리하여, 1961년의 5.16군사쿠데타 당시 공수부대

     대위에 불과하였던 차지철과 당시 육군 준장이었던

     김재규와의 13년 뒤부터는 경호실장과 정보부장으로

     수많은 일에 상호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ㅂ.갈등과 반목의 5년이 흐른뒤 인 운명의 79.10.26일에

 

    김재규는 "버러지 같은 놈!"던 차지철을 궁정동의

    安家에서 박정희대통령과 함께한 자리에서 총으로

    욱하는 성미에 그동안 쌓인 불만을 폭발하듯 쏴버리고

 

    김재규 자신의 고향 선배이자 육사 동기이자 그의

    출세의 절대적 恩人이었던 박정희 대통령도 쏴버린다.

 

 

14.윤필용-김대중-육영수-박정희--전두환의 得勢와의

 

관계는?

 

ㄱ.윤필용 사건의 후폭풍으로 이후락의 과잉 충성이 빚

어지고 이로 인해 김대중 납치 사건을 일으키고 이로 인해 조총련계 재일동포인 문세광 저격사건으로 안타깝게

국모라 불리우던 육영수 여사가 피격 사망되고 

 

ㄴ.이로 因한 문책인사로 차지철-김재규 제2 친위세력이

등장하게 되고 이 친위세력의 갈등 폭풍으로 박정희대통령은 18년간의 장기 집권에 종지부를 찍고 김재규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된다.

 

ㄷ.1961년부터 무려 18년간 모든 권력을 한 손에 거머 쥐었던 박정희가 단 한순간의 총격으로 사망하게 되자

 

ㄹ.박정희 한 손에 누리던 권력이 이제 분산될 즈음

 

ㅁ.박정희대통령 시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취임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온갖 국내,외 정보를 독점하게 되고

 

그는 얼마안가서 전두환의 각종 월권에 뭔가 불안을 느낀

정승화 당시 계엄사령관에 의해 동해방위사령관으로 좌천될 위기에 몰리게 되자

 

ㅂ.전두환은 경복궁 30단(단장은 장세동대령) 회의실에서

황영시 선배 장군 및 동기생 장군 및 박준병등의 후배

장군들을 모아 소위 경복궁 회동을 한 후에  그 날인

 

ㅅ. 79년12월12일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無力化시키고  공수제1특전단장인 육사12기의 박희도준장을 시켜

 

용산의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강제 접수시키게 되고 전방의 9사단(사단장 노태우소장)연대를 끌어들여 경복궁 청와대 등 요지를 접수시킨다.

 

그리고, 허삼수,우경윤 대령등을 시켜 육참총장 한남동 공관을 쳐들어가 정승화 당시 계엄사령관을 납치하여

 

당시 최규하 대통령에게 체포동의를  뒤늦게 얻으려고

압박 분위기를 조성한다.

 

육참총장 공관 옆에 있던 국방장관 관저에 있던 육사3기

출신의 노재현 국방장관은  수십발의 총소리에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담을 넘어 국방부로 가게 되며 거기서 숨어있다가 하급 병사들에게 이끌려 대통령 재가에 전두환의 요청을 나중에는 받아들이라고 대통령에게 건의하기에 이른다.

 

###이글을 기고하는 시점인 2010년7월27일 오전 장 사령관의 부고에 접하게 됩니다-필자주- 장태완 수경사령관에 대한 몇가지 내용도 이참에 기고할 예정임!

 

ㅇ.밤사이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제거한 12.12쿠데타 세력은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ㅅ.얼마 안있어 전두환은 국보위를 설치하고 입법-사법-행정위에 군림하게 되고

 

1980년의 광주 민주화 항쟁--당시에는 광주사태 또는 광주 폭동을 진압하고  육군 대장에 승진한 후 

 

전두환은 제5공화국 대통령에 오르게 된다.

 

 

 

15.전두환 대통령은

 

   윤필용(尹必鏞)將軍이 恩人이 아닌가?

 

ㄱ.전두환은 대구공고 시절 경제적인 어려움을 많이 겪었고 정규 육사 1기이자 육사 11기 필기 시험에 1차로 떨어졌으나 30명인가 하는 추가 모집에 수학 과락을 간신히 면하고--피타고라스 정리 문제 맞춤-간신히 육사에 입학하게 되어 특유의 붙임성으로 육사 축구부의 주장과 골키퍼를 도맡게 되고 육사 럭비부의 스타 노태우와 같은 대구 고향으로 인해서 더욱 친해지게 된다.

 

ㄴ.전두환은 소위시절 업무상 이규동 장군의 집에 자주 들렀는 데 그 당시 경기여중학생이던 이순자학생을 우연히 보게되고 그가 몇년 지나 대학생이된 이순자에게 청혼한 끝에 장군의 사위가 되는 행운을 얻게 되어 아무래도 출세의 탄탄대로에 주마가편격이 되었다.

 

ㄷ.전두환은 대위시절 1961년의 5.16군사 쿠데타를 겪게 되는 데 당시 육사에는 동기생들중 머리가 우수한 장교들이 육사생도들을 가르치고 있었는 데다--순수 장교 들--

 

거기에다가 육사교장은 참군인 강영훈 중장이었는 데

 

하여튼 다른 영관급 장교들이 실패한 육사생도들의 군사혁명 지지 퍼레이드를 전두환이 다시 가서 설득 끝에

지지 행진을 이끌어냈다는 설이 유력함

 

ㄹ.이후부터 박정희 장군의 눈에 들은 전두환은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하는 데  훗날 그의 최고 라이벌이되는 손영길은

 

중위시절부터 즉, 박정희의 5사단장시절부터

중령이던 윤필용과 중위이던 손영길은 전두환 보다 몇년 일찍 박정희와 친분을 맺어왔는 데 반해

 

 전두환은 조금 늦게 박정희와 인연을 맺게 되는 바 이것이 윤필용 사건에 이르기 까지 전두환에게는 無言의 열등감과 압박으로 작용되기도 하였다.

 

ㅁ.전두환은 1973년 육사11기 동기생들의 1차 장군 진급시 손영길과 진급 경쟁을 하였고 장군 진급 후에도 윤필용의 가장 총애를 받았던 손영길에 비해 전두환은 조금 소외되 느낌을 받아 그가 회장으로 있는 하나회를 이끄는 데 윤필용장군을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었으며

 

초급 장교시절부터 붙임성이 좋아 윤필용같은 권력자에게는 형님! 하면서 잘 지냈던 것으로 증언되고 있다.

 

ㅂ.전두환은 후일담에서 윤필용장군이 하나회의 대부

였다고 보는 일부 의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바 있는 데

 

그냥 하나회 육사 후배들에 대한 든든한 후원자였다고 전두환은 말하고 있다.

 

ㅅ.전두환은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할 시 1차진급을 하게 되는 데 이때 동기생이자 육사 수석 입학 및 수석 졸업을 한 김성진 소령은 1차 진급 심사에서 미끄러지게 되자

 

이 소식을 들은 육사 생도들이 異口同聲을 말하길:

 

"육사에서 공부만 열심히 하면 뭣하냐?"

 

"전두환 선배처럼 인간 관리를 잘해야지!" 하는 후일담도 필자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ㅇ.전두환은 大領 1차 진급한 후 서종철 육참총장의 수석부관으로 승진하게 되고  곧이어 경력 관리次 베트남 파병되어 29연대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ㅈ.그는 이곳 베트남에서 작전참모인가 정보참모인가하는 장세동 소령과 함께 베트콩의 포위속에 죽음에 직면하게 되는 데 이 때 장세동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게 되고

 

장세동은 그 이후 평생 그를 임금모시듯 主君으로 모시게 되고 후일 경복궁 쿠데타 모의 당시의 경복궁 30단장으로 자리를 제공하게 되고 이후 쿠데타 성공후 3성장군 승진후 안기부장이 되어 5공의 황태자격으로 2인자로서 군림하게 된다.

 

ㅊ.베트남 파병당시 보안부대장이던 김복동대령이 전두환처럼 보병 연대장으로 보직 이동을 하려 하였으나 전두환의 방해공작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그때 부터 전두환과는 악연을 이어가게 되고

 

ㅋ.후일 12.12쿠데타 성공후  실병 지휘와는 관계없는 육사교장으로 김복동 장군으로 보임하였고 김복동의 여동생이자 노태우 장군의 부인인 김옥숙이 4성 장군으로 진급시켜줄 것을 여러 번 간청하였고 당시 절친한 친구이자 전두환의 보직을 8가지나 이어받았던 노태우도 힘을 쓰긴 하였으나 軍權을 거머쥔 전두환의 적극 반대로 김복동은 3성장군에 그치고 말았다는 후일담도  필자는 들은 바 있다.--김복동은 술을 너무 좋아해 현역 장교및 장군 시절에도 적지않은 실수도 한 바 있다는 後聞입니다. 그는 술로 인해 그리고 전두환 스트레스로 인해 다른 동기생들의 평균 수명보다는 조금 일찍 세상을 하직하였다고 필자는 보고 있습니다.  그가 죽은 지 10년이 지났지만 전두환은 아직 건재하고  노태우는 전립선암에 걸려 휘청거리지만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 않은 가?--2010.7.27현재임!

 

ㅌ.전두환은 베트남 29연대장시절 기습작전을 주로 감행하였다고 하며 노태우는 고참 대대장으로 월남에 파병되었는 데 그는 매복작전을 주로 감행하였다고 하는 데

 

ㅍ.이 작전 유형은 후일 대통령이 되는 이 2사람은

 

*5공시절 --각종 정책이 기습적으로(과외금지및 야간통행

                  금지 철폐등등)

                

 

*6공 시절--각종 정책이 한참 뜸을 들인 후의 매복 작전

                  식으로 이루어진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었다.

 

ㅎ.전두환은 아주 어린 시절 너무 가난하여

 

'움막집 아이'로 자라났고 너무 집안이 어려워

 

동생이 약  한 채도 못먹고 죽어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보았다고 하며  8살이나 9살 무렵에는 만주에서 생활하였고 그가 9살시절 만주 마적대의 습격으로 온 마을이 불에 휩쓸린 이후

 

'힘이 곧 正義다.'라는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ㅎ.전두환은 집권한 후 5공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레이건 대통령에의 국빈 방문과 김대중 풀어주기를 맞교환으로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하였으나

 

군인시절 박정희의 양아들이라 소문났던 전두환

박정희가 핵무기 개발과 관련하여 결국 죽음을 당한

것으로 보고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인력 1,000명 안팎을 해체및 해고하고 핵 개발 의지를 완전히 해체한 것을 미국 고위당국에 보여주어 레이건 국빈 방문 1호라는 개인적인 명예와 맞교환하였다는 후문도 있다고 저는 봅니다.

때마침 불어온 세계 경제의 3低 현상에 힘입어 경제 발전을 순조로이 이룰 수 있었는 데

 

1983년 10월의 버마 지금의 미얀마 국빈 방문時

북한 무장공비에 의한 아웅산 묘 방문시 이미 설치해 놓은 시한 폭탄에 의해 22명 안팎의 한국의 으뜸가는 장관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고

 

김재익등의 경제 관련 특급 참모들이 숨지는 바람에

 

그 이후 한국 경제는 조금씩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노태우 정권에 가서는 경제가 이상하게 비비꼬이기 시작하여

 

김영삼 정권에 이르러 그의 말기 정권시 i.m.f(국제통화 기금)의 지도를 받게되는 국가적 창피를 당하게 되는

 

단초가 바로 아웅산 폭파사건---북한의 지시에 의한 3명의 무장공비가 일으킨 사건으로--임을 우리 경제인들은 아직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듯하다-필자주!--

 

3명의 무장공비중 1명은 총격전 끝에 살해되고

감옥에 들어간  나머지 2명중 한명은 10여년 전 죽고

나머지 마지막 생존자는 아마도 4년전 쯤 열악한 감옥에서 病死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은 악명 높은 삼청교육대를 설치하여 사회악 일소에 회오리를 일으켰으나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도 부지기수라는 것이 텔레비젼 드라마에서도 가끔 본 적이 있다.

 

전두환은 집권 초기 경제 발전을 위해 일본으로 부터

약 40억 달러 안팎의 차관을 들어오려고

 

가수 정광태의 '독도는 우리땅'--정광태는 일본 여행 비자가 10여년 간 나오지 않았다고 하며  이제는 그 가수는 일본 여행이나 공연을 절대 안한다고 선언할 정도였음!

그는 독도 홍보 대사로 적극 활동하고 있는 양심있는 가수라고 저는 봅니다.

 

그런데, 이런 노래 조차 방송 금지를 시키면서 전두환은 일본으로 부터 40억달러의 차관 유치에 성공하였고

 

그의 퇴임후 정치활동의 무대가 되고 싶었던 일해 재단의 호 일해 즉 일본 바다도  전두환의 아호임을 알기 바란다.

 

 

에필로그:   

 

1.지금부터 40년 전의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윤필용 장군의 명복을 빕니다.

 

2. 이 글을 기고하는 시점에 접한 1979년12.12쿠데타당시

수경사령관이셨던 장태완 장군의 부음소식에 삼가 명복을 빕니다.

 

3.진정한 참군인의 표상이신 장태완 장군에게 다시금 경의와 명복을 빕니다.

 

4.몇년 전 박정희 대통령 집권당시 수많은 일화를 간직한 채 회고록 없이 세상을 하직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에게도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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