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비운에 간 야구 스타들과 구대성-한대화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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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3,107회 작성일 2010-03-16 15:47본문
1. 70년대 중,후반 당시 아마야구의 스타중의 하나였던 윤몽룡 선수는
대전 서대전초등학교 출신으로 고교는 서울 중앙고교를 다녔는 데 당시 투수로서 명성을 날렸고--특히 72년의 고교 메이저 대회인 청룡기 우승과 봉황대기 아쉬운 준우승을 차지한 에이스---당시 포수로는 과거의 대스타 포수였던 김영조님의 아들 김승수가 대형포수로서 둘이 중앙고교 배터리를 하고 있었다.--
이 윤몽룡 선수는 아마도 건국대 선수를 거쳐 대학시절부터 국가대표로 뛰었고 후일 광주상고 감독등을 역임하였는 데 그의 나이 32살에 정말 안타깝게도 백혈병으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2.그리고, 1982년 당시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리 한국이 한대화의 3점 홈런,김재박의 귀신 같은 개구리 점프 번트,등등으로 영예의 우승을 일본을 누르고 차지할 때의 주전 포수였던 심재원선수도 후일 프로팀 코치를 하다가 94년도 즈음에 폐암으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3.이길환선수: 선린상고 출신으로 프로야구 초창기 사이드 암 투수로 명성을 날렸던 이길환은 2007년 6월12일 지병인 췌장암으로 타계하였다. 1959년생으로 당시 48세의 나이여서 창창한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참 아쉽다.
특히, 1982년 3월27일 당시 서울 운동장 야구장였고 한동안 동대문야구장을 개명되었던 그 운동장에서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 투수로 나서 당시 삼성라이온스의 강타자이자 1번타자였던 천보성선수를 상대로 제1구를 던져 프로야구의 출범을 알리는 초구의 주인공이었다. 당시 주심-치프 엄파이어-
-chief umpire--는 김광철심판이었다.
4원년 mbc 청룡의 포수였던 김용운도 2005년에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김용운선수는 위의 이길환투수와 함께 배터리를 이루었던 명포수 출신이다. 3년동안 활약한 후 85년에 롯데자이언츠로 이적해 1990년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한 바 있다. 이후 마산에 살며 골프에 입문,레슨프로로서 변신해 새로운 생활을 모색하였는 데
김용운은 2005년 12월 대전에서 야구 명문 한밭중 동기들의 망년회에 참석했다가 집에 오던 길에 쿄통사고를 당해 숨졌다. 특히 아쉬운 것은 그날 저녁 모임 직후의 새벽에 골프레슨이 있다고 술을 입에도 대지 않고 있다가
밤 12시경 마산으로 향했는 데 새벽1시경 경부고속도로 구미 부근에서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당시 앞차와 가벼운 접촉 사고가 있어 도로에 자신이 승용차를 세우고 차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마침 뒤에서 오던 관광버스가 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들이받으면서 그 자리에서 숨진 케이스가 되고 말았다.
5.최초의 교통사고 사망 케이스는?
아쉽게도 mbc 청룡의 김정수였다. 프로 입단후 외야수로 나서며 일발 장타를 보여줬던 그는 가끔 투수로 마운드에 오를 정도로 어깨가 강했으며 그라운드의 개그맨 소릴 들을 정도로 입담도 좋았다고 한다.
1986년 11월 팀동료인 중앙고 출신의 안언학, 신일고교 출신의 김경표선수와 함께 병역 특례 보충역 훈련을 마치고 저 한준구의 기억으로는
헌,인능 근처의 큰 길로 나오는 샛길에서 차로 좌회전 신호을 완전히 받고
즉시 출발하기는 하였는 데 당시 서울 을지로 6가에서 성남가는 66번 버스인지 어떤지 고갯 마루에서 내려오던 탄력으로 아마도 1초나 2초 사이로 그대로 내리막길에서의 충돌로 김정수는 사망하고 나머지 선수들은 구사일생격으로 살아났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 생존한 2명의 선수들은 이 교통사고 후유증 이후 별다른 활약을 벌이지도 못하고 은퇴하게 된 것을 저 한준구는 알고 있습니다.
6. 위에서 언급한 김경표 선수---고교 시절 촉망받던 유격수였는 데 당시 김재박이 명유격수로서 있었기에 등용기회는 적었고 ---는 위의 김정수 교통사고 사망시 기적적으로 안언학선수와 함께 생존하였는 데 약 3년뒤 김경표는 또 다른 교통사고로 타계하고 말았다.
7.김대현선수--1986년에 해태타이거스에 입단한 유망 투수였는 데
1988년 8월 승용차편으로 광주에서 서울로 이동하던 중 천안휴게소에 들어서면서 운전 미숙으로 인해 화물트럭을 들이받고 현장에서 사망하였는 데
조수석에 동석했던 호타준족의 명타자 이순철은 다행히 의자를 뒤로 젖히고 안전벨트를 매고 있어서 목숨을 건졌고 이후 스타선수로 맹활약하여 해태의 코리언시리즈 여러 차례 우승의 최고 전성기의 핵심멤버가 된 바 있고 지금 해설위원등으로 맹활약하는 중이다.
8.큰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뻔했던 야구 스타중에는 그 유명한 김봉연이
있었다 그는 군산상고 역전의 명수 당시 핵심 투수겸 4번타자로 김준환,
김일권등과 함께 1972년 황금사자기 부산고교와의 결승전에서 9회초까지
4대1로 패전 직전에 있다가 기적같은 5대4 역전승을 일구어 내 그후로도 군산상고는 역전승을 유독 많이 만들어내 소위 '역전의 명수'라는 아름다운 별칭을 갖게되었고 당시 전 국가대표 출신의 명감독 최관수 감독이었다.
그리고 최고의 특급 후원자는 경성고무의 이용일 사장이었다고 기억됩니다.
김봉연은 연세대학에서도 4번타자로 맹활약하였고 아마도 프로 원년인가 두번째 해인가 홈런황을 차지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그는 선수생활 몇년하던중 큰 교통사고를 당해 다행이 목숨을 건졌는 데 그 사고 후유증으로 오랜동안 상처를 가리려고 콧수염을 기르고 다닌 것이 기억되고 그 이후 한참 지나 지방 극동대학교 교수로 맹활약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9.휘문고교 시절 3연타석 홈런의 주인공--그것도 공주고교의 에이스 박찬호 선수를 상대로---즉, 1989년 휘문고 시절 봉황대기에서----저 한준구는 그당시를 기억하고 있고--- 4연타수 홈런도 기록한 바 있어 장래가 촉망되던
제2의 장훈 선수라고 기대했었는 데
박정혁선수는 엘지 2군에서 있다가 은퇴한 후 개인사업을 하다가 1999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당시 휘문고에는 제2의 선동열로 손꼽히던 임선동 투수가 밤하늘 아래에서 강속구를 뽑내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소위 92학번 중에는 조성민-임선동-손경수-박찬호-정민철 등 좋은 투수들이 유독 많이 있었는 데
신일고교의 강타자겸 에이스인 조성민선수는 고려대-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잠시 활약한 바 있고 5년연상의 그 유명한 봅탈렌트 최진실과의 결혼으로 세상을 떠들석 하게 한 바도 있었는 데 조성민은 재활공장 공장장이란 닉네임을 가진 바 있던 한화이글스의 김인식감독휘하에서 재활하다가 실패하여 지금은 서울 강남의 선릉 근처의 오피스텔에서 새로운 사업을 하고 있다는 데 일단 잘 되었으면 좋겠다.
임선동선수는 고교 당시에는 정말 불같은 강속구로 제2의 선동열로 칭송이 자자하였으나 연세대 졸업후 프로가는 상황에서 매끄럽지 못한 여러 추문으로 한동안 이름이 잊혀지다가 현대 유니콘스에서 당시 김시진 투수 코치의 지도로 한 시즌 17승을 거둔 적이 있어 부활의 청신호라고 저 한준구도 여겼으나 세월의 흐름을 막지 못해 그 이후 그냥 사라지고 말았다.
임선동의 대학 졸업 당시 연고지 구단 엘지에서 한 2년 활약하다 인정을 받고 일본 프로에 진출하였더라도 아마도 10승 정도는 무난하였을 터인 데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않으려 했던 부모와 본인의 선택은 다소 위험한 투기였다고 보며 결국 국내 팬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주지 못한 것은 축구의 김종부와 농구의 이민현에 비견되는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경기고 출신의 손경수는 홍익대로 둘어갔는 데 대학시절의 간염증세등을 잘 관리하지를 못해 고교랭킹 2위나 3위였던 선수였는 데 가장 불운했던 케이스이지 않았나 합니다.
정민철은 대전고교 시절 어깨를 아낀 덕에 대전 한화이글스의 에이스로서 최연소 100승을 달성한 바도 있는 데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트에 갔다온 이후 성적이 나빠져
각종 기록을 갱신할 찬스를 잃고 2009년 자의반 타의반 은퇴를 하게 되어
같은 대전고교 출신의 일본전의 영웅 구대성이 최고참선수로 이제 불혹의 나이를 바라보면서 같은 대전고교 선배인 -아마도 약 10년 선배인 국가대표 출신 한대화 신임감독의 무거운 어깨를 가볍게 해줄 책무를 2010년 해야할 중책-아마도 마무리 전문으로서 -을 갖고 있다.
10.광속구 투수로 이름을 고교 시절 부터 날렸던 부산고-고려대 출신의 국가대표를 역임한 박동희선수는 2007년3월 부산에서 사업을 하다 이른 새벽 귀가하던중
밤길에 갑자기 지나가는 사람을 피하려다 전봇대를 들이받고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11.심재원포수: 역대 최고의 수비형 포수로 인정받는 심재원선수는 위에서 언급한 82년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의 주역이자 국가대표 명포수 춣신으로 83년 롯데에 입단해 85년에서 91년 엠비시 청룡과 엘지에서 뛰다 은퇴한 바 있는 데 엘지에서 코치생활을 하다 94년 5월 폐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12.해태의 주전 투수였던 김상진은 99년 6월10일 위암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97년 코리언시리즈의 우승 주역이었던 김상진은 22세의 한창 꽃 피울 나이에 세상을 떠나 팬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13.프로야구 2년째 되던 1983년 혜성같이 나타나 아마도 100% 전무후무할
시즌 30승의 위업을 달성한 재일동포 투수 너구리 장명부선수는
은퇴후 자기가 경영하던 일본의 마작하우스에서 2005년 4월 숨진 채 발견돼 국내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당시 나이 55세 였음!--83년과 84년에 받았던 고액 연봉을 부동산에 투자하고 건실하게 생활하였더라면 지금은 100억대 재산가가 되었을 터인 데 일설에 의하면 마작하우스에서 나중에는 꽁찌를 하다 소파에서 자다가 횡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필자주!
14.한화의 진정필 선수는 은퇴 후 아마추어 지도자 생활을 하다 백혈병으로 투병하다가 2003년 7월 운명하였다.
15.깅영신 포수; 84년 로스엔젤스 올림픽 국가대표 포수출신으로 85년 당시 오비베어스에 입단했던 김영신은 김경문 및 조범현등 당대 최고급 포수들에 가려 빛을 잃다가 그만 1986년 봄 일산 앞 한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는 데 당시 소속팀에서는 잠수부를 동원하여 그의 시체를 건져 올린 후 그의 등번호 54번을 한국최초로 영구 결번하기도 하였다.
16.1995년 한화의 권근한선수는 음독자살하였다고 하며
17.현대유니콘스에 입단 예정이었던 서울고 투수 임효상은 2군에서 훈련하던 중 2004년 12월 한강에 투신 자살하였다고 한다.
18.프로야구 지도자들의 사망 모음!
ㄱ.과거 60년대및 70년대 경북고 야구 신화의 감독 서영무 감독이 삼성라이온스 초대 사령탑으로 있었으나 84년 오비베어스 관리이사로 자리를 옮긴 뒤 85년 대구 수성관광호텔에서 뇌졸중으로 5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ㄴ경북고 전성기의 임신근-남우식-황규봉-이선희 투수의 계보의 임신근투수는 경북고와 한일은행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한 바 있었는 데 쌍방울 수석코치로 부임하였을 때 91년 9월 오비베어스 전을 앞두고 구단 버스에서 호흡 곤란 증세를 보이다가 심장마비로 아쉽게도 유명을 달리하였다.
ㄷ.한양대 감독시절의 빨간 장갑의 마술사였고 해태 타이거스 시절의 초대 감독을 역임하였던 김동엽은 방송인으로서도 유명하였는 데 프로 이전 방송인 시절 잘나가던 프로 야구선수들의 월급이 40만원안팎이던 시절 일본 프로 야구 처럼 연봉 1억원 선수가 나와야 한다고 하여 깜짝 놀랐던 기억이 아마도 77년이나 78년 경이 아니었나 사료됩니다.
그 연부역강하던 김동엽도 이혼후 혼자 살다가 술먹고 귀가한 후 한강로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바 있다.
ㄹ.현직감독이 세상을 떠난 경우는 부산 롯데의 김명성 감독이 아직 유일한 케이스인데 그는 2001년 7월 호흡곤란 증세를 호소하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ㅁ.삼미 슈퍼스타스의 초대 감독을 역임하였던 60년대의 강타자 박현식감독은 2005년 8월 76세를 일기로 숙환으로 인해 별세하셨다.
@@@위의 내용은 007년 6월12일 췌장암으로 사망한 이길환 투수의 죽음을 계기로 6월14일 기고한 스포츠서울 신문의 이재국기자가 올린 글을 중심으로 저 한준구의
떠오르는 여러 프로야구 단상들을 함께 모아 올린 글임을 참고로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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