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덤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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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41 진만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201회 작성일 2010-03-30 06:44본문
무덤덤한 삶
來年이면 내 나이 古稀가 된다. 지금은 흔한 일이지만 옛날에는 그 나이까지 살기가 쉽지 않아 그런 詩를 읊었으리라.
나에겐 70 平生의 삶이 그저 무덤덤했다?
富裕한 家庭에서 태어나 호강하며 산 것도 아니다. 都市 변두리의 貧民家에서 태어나 늘 不足하게 살았을 뿐이다.
훌륭한 家門의 後裔도 아니다. 흔치 않은 驪陽 陳氏 後孫으로 내세울 것도 없었다.
先天的으로 튼튼하게 태어나지도 못했다. 키도 크지 않아, 學校 때는 늘 앞番號였다. 軍에 가서는 맨 꼴찌에서 뛰기 바빴다.
나보다 세 살 위의 兄은 잘 생기고 몸집도 좋았다는데, 紅疫을 같이하다가 그 형은 죽고 어찌 어찌하여 나만 살아남아 내 어머니가 하늘을 怨望했었단다. 陰曆 유월 한 더위에 태어났으니 살아남은 게 내 意志만은 아니었을 게다.
그저 그렇고 그런 아이였을 것이다. 特別히 工夫를 잘 하지도 못했다. 누구는 1等도 하고 班長도 했다지만, 大田 中. 高等學校에 進學한 게 잘한 일이었다.
成功한 人生은 어떤 것일까?
내가 아는 사람은 慶尙道 시골에서 태어나 初等學校만 卒業하고, 外場을 뛰다 可也谷學校 앞에 배나무를 키우면서, 萬年橋 건너 넓은 花園자리를 비롯해 많은 땅을 가지는 등 돈 버는 재주가 남달랐다. 그는 내가 退職한 후 어느 해, 儒城 龍鷄洞이 앞으로 展望이 좋으니 投資하라고 했지만 나는 나서지 못했다. 돈 버는 것으로 치면 나는 成功한 축에 낄 수가 없다.
우리 同窓 중에 누구는 會社의 高位 任員이 되어 新聞紙上에 이름이 오르내린 이도 있고, 仲介業을 하여 그 이름을 떨친 親舊도 있다. 누구는 國會議員을 거쳐 大田市長을 꿈꾸기도 하며, 敎授, 檢事, 辯護士로 學界나 法曹界에서 頭角을 나타낸 이도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는 足脫不及이다.
家庭形便 上 1年이라도 먼저 돈벌이에 나서고자 敎大에 進學해 平生 先生으로 살았다.
그 길로 나섰으면 不斷한 努力으로 先輩 先生들의 認定을 받았어야 했는데, 4年 制 大學을 가지 못한 것을 푸념만 하며 虛送歲月하였다. 심지어 學校의 優等生이 社會에서는 꼴찌라는 말도 들었으니..........
지금 돌아보면 挑戰精神과 勇氣가 부족했다. 大田을 떠나면 죽는 줄 알았으니, 사내가 그 무엇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敎大 卒業 後 서울로 갈 機會도 있었으나 大田에 安住했고, 長期勤續으로 大田을 떠나야 했을 때도 僻地 가기가 싫었다. 靑陽으로 發令이 났을 때 죽으러 가는 것 같았었다고, 退職한 후에 마누라가 놀렸으니 말이다. 어떤 사람은 인도네시아 密林에서 數 十 年間 勤務한다는데, 大韓民國은 고사하고 忠淸道를 가지고 그렇게 겁을 냈으니.........
그래도 先生 한 게 제일 나은 것 같다. 내가 萬若 企業體에 있었다면 그렇게 懦弱해서야 어찌 하루라도 버텨낼 수 있었겠나? 熾烈한 生存競爭에서 初期에 淘汰되었을 게다.
昨今 서울시 敎育廳의 非理가 連日 報道되고 있다. 물 좋은 江南의 校長을 하기 위해, 아니면 昇進하려고 獎學士, 獎學官에게 賂物을 주었단다. 그런 일들이 서울뿐이었고, 옛날에도 그런 일이 왜 없었겠나?
술자리에서 동료 장학사끼리 다투다 하이힐로 폭행한 일이 빌미가 되어 비리가 폭로되는 웃지 못 할 일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
내가 在職 時에는 남을 구렁텅이에 빠뜨리려는 그런 惡漢은 없었다.
나 또한 一身의 榮達을 위해 남을 헐뜯지 않았다. 昇進을 위해, 좀 더 좋은 자리를 위해 요리저리 눈치 보며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욕하고 배 아파 하기는 했다.
다만 外地에 나가 있을 때, 大田으로 들어오기 위해 윗분에게 事情을 呼訴한 적은 있었다.
아무튼 70 平生이 무덤덤했지만, 큰 죄를 짓지 않았고 남에게 몹쓸 짓은 하지 않았으니 그것으로 滿足한다.
다만 在職 時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피지 못하고, 어려운 이웃에 奉仕하며, 지금까지도 이 社會를 위해 獻身하지 못한 점을 부끄럽게 여긴다.
2010. 3. 23.
儒廣 陳 萬 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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