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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박정희-만주경험-현대사 비화!-54회이후는 필독요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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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672회 작성일 2010-01-08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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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사실과 다른 것이 있거나 이견이 있으시면 댓글 요망합니다.
특히 무단전재와 폄글을 금지합니다.양해 요망합니다.
 
 
 
@@@ 남과 북의 지도자: 金日成과 朴正熙!

 

새삼스럽게 위의 두사람에 대해 언급할 것이 뭐 새로운 것이 있겠느냐고 반문할 동기생들이 물론 없지는 않겠으나 우리 동기생들은 대체적으로 대충 알기는 하나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박정희의 일화를 보더라도 그가 저격당한 지 이미 30년3개월이 지나가고 있지만 새로운 일화들이 우리에게 박정희 평가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 아닙니까?

 

유명한 어느 서양 역사학자가 말하길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하였다는 데 과거를 잘알아야 현재와 미래에 대한 대비책과 예측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과거 청산이 제대로 안된 우리 대한민국의 현대정치사는 정말 누더기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만, 운좋게도 1960년대의 개발도상국인 한국에 박정희를 만난것은 대한민국에게는 행운이었다고 저는 평가하고 있답니다..나중에 더 자세히기술하겠지만,

 

박정희가 2회 연임한 후 한번 양보하고 다시 대통령을 하였더라면 어땠을 까하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 --만일 집권에 실패하면 그만이라는 마음을 비워야 진정한 민족 지도자이지 않은가?--

 

 중앙정보부 동원등의 편법--휘하 부하들이 작당하여 하였을 지라도 박정희의 책임이 모면되는 것은 아니다-과 불법에 가까운 3선 개헌이라든지 김일성과의 남북회담-즉 1972년의 7.4공동성명의 사기성-이 공동성명 직후 남한에서는 10월유신 공포-김대중의 대중연설에서의 연설대로 총통제와 비슷한 유신하의 대통령제-북한에서는 주석제로 남과 북은 더욱 각기 대중탄압의 길로 나아가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그리하여,박정희가 경제 개발 및 소위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영웅이 되었지만, 지금도 대학생 중에서 복제하고 싶은 인물 1위나 2위권이 항상 들어있는 것도 모두 경제 개발과 성장의 영웅이라는 것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민주화의 첫 시금석이었던 3선 불법 개헌과 이것이 그당시  비록 국민들이 설령 마음속으로 과반수로 찬성을 하였더라도

 

이것은 긴 안목으로 볼 때에는 한국민주화의 장애 요소였다고 합니다. 학자들의 견해가 워낙 분분하기에 찬찬히 후술할 예정이오며 우선 위의 2사람에 대한 핵심 비교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1912년생인 김일성과 1917년생인 박정희는

 

해방전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의 땅이라던 만주지역에서 각기 항일운동(1937년의 보천보 전투등)과 친일행위(만주군관학교 및 일본 육사졸업후 만주에서 일군 장교로서 독립운동가 잡던 행위등등)로서 나름대로 만주 경험을 쌓았다는 공통된 경험을 안고 있었고

 

 이 '만주경험'은 김일성에게는 해방직후 집권에 큰 도움을  그리고 및 박정희에게는 1961년의 5.16군사혁명(요즘에는 군사정변으로 정해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됨을 잠시뒤에 기술하게 됩니다. 

 

2.김일성은 1919년 3.1운동당시 7살때 처음 만주로 이주하게되고 다시 4년뒤인 1923년에 돌아오고 1925년에는

재차 이주와 진학(화성의숙,육문중학,길림중학) 그리고,

공산주의 공부및 조직 참여,1929년-30년에는 반일 혐의 체포와 퇴학에서 보듯

 

김일성은 이 만주 공간을 생활과 성장의 공간으로 지내게 됩니다.  이후 김일성은 20살때인 1932년 4월부터 중국과

소련의 여러 군사조직에 참여하게 되고 일본 패전직전까지 맹렬하게 항일운동에 나서게 됩니다

 

많은 군사조직에서 김일성은 중간급 지도자로 생사를 건 무장투쟁을 주도한 바도 있고,  나중에 밝혀진 전투상황을 보면 죽을 고비를 몇번 가까스로 넘긴 적이 있다고 하며 그런 전투참가 등으로 부하들,주민들,중국 및 소련군

지휘관들 과의 친밀한 관계로 리더십 함양및 후일 결정적으로 북한 괴뢰 수반으로 스탈린의 최종 재가를 받는 데 큰 내신 성적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김일성은 종전 시점에 만33세에 불과한 애송이 청년이었을 지 몰라도 무려 20년가까이 만주라는 당시 국제공간에서 목숨 건 투쟁을 하며 천운으로 살아남았고 그 와중에 그는 정치,군사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3.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교련점수 최우수 성적을 제외한 나머지 성적은 거의 관심없는 꼴찌 수준으로 다른 친구들은 도시등의 비교적 좋은 데로 발령나게 되는 데 박정희는 그 좋은 머리를 적성에 맞지 않는 사범학교에 다니면서 초등교사를 보장받고 갑자기 징병으로 끌려가는 경우의 수를 당하지 않는 안전장치를 해놓고

 

졸업후 성적순에 따라 문경 새재의 아주 시골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3년간 하다가 사범학교 당시 박정희를 아주 우수한 조교로 기용한 바 있던 교련담당 장교를 찾아가 추천서를 받고 만주군관학교에 손가락을 깨문 피로

 

 '진충보국(盡忠保國)멸사봉공(滅私奉公)'

 

 이라는 혈서를 동봉한 편지를 보내는 한편 후일 큰 칼 옆에 차고 금의환향하겠다는 각오로 교사생활을 그만두고 만주로 가

 

그당시 아주 늦은 나이이고 입학이 사실상 허락이 안되는 23세임에도 그 편지와 혈서가 효험을 보아 그는 적성에 맞는 일본이 초급장교 양성을 위해 창설한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 발군의 실력으로 만주5족중에서 영예의 1등을 차지하여 당시 만주괴뢰국 황제 부의가 선사하는 금시계도 선물받았고

 

 졸업당시 1등상도 받는 장면이 만주및 한반도 식민조선의 영화관 뉴우스 시간에 방영되어 그당시 그 장면을 보았던 10대 후반의 청년들에게 큰 자극을 주어

 

그당시 군관학교에 지망하던지 아니면  후일 해방후 남한 의 군사영어학교 또는 국방경비사관학교에 들어가는 청년들이 다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중에는 강문봉(후일 중장이 됨)등이 그당시 어린 청년으로 영화를 보았으며 그 일로 그는 군인의 길을 걷게되었다고 하는 데 그런 사람들에게 박정희는 큰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백선엽-후일 한국최초의 육군대장이 33세에 됨-교사도 필시 영향을 받았으리라 보며 -예를 들면

 

백선엽은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갔는 지 잘 기억은 안나는 데 독립운동가나 중국측 독립운동가를 잡는 간도특설대 장교가 되었던 점이 백선엽에게는 후일 최고의 약점이 되기도 하였으나--작년 6.25전쟁 6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육군 원수에 추대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위의 간도특설대 친일행위가 결정적으로 악영향을 주어 아직까지는 유보된 상태임-

 

 다행히  해방이후 백선엽은 월남하여 빨리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군에서 출세를 무척 빨리 하였으며 장군시절 남한 군에 늦게 들어온 박정희의 군선배로서

 

박정희의 빨갱이 행위로 인한 사형선고 및 무기징역 감형및 후일 육군본부 문관 취업 및 전쟁통에 소령 복직 및 몇년뒤대령에서 장군 진급시 또한 준장에서 소장진급시 절대적으로 백선엽 대장은 박정희 편이 되어 그를 위기에 처할 때마다 생명의 은인이 되어준 백선엽이었던 것이다.

 

4.박정희는 만22세 1939년9월 일본 황군 장교가 되기 위해 만주로 가서 1940년4월  23세때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하여 뒤늦게 만주생활을 하게되고 졸업후 1등의 영예로 일본 본토의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하고 거기서 일본인외의 타종족중의 엘리트중에서 3위를 하고 다시 만주로 가서 초급장교생활을 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잡는 친일행위를 하였다.--백선엽대장과 청년시절 같은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하게되었으나 박정희가 집권후 온갖 자료를 없애버렸다고 합니다.

 

5.다른점: 

 

 김일성의 만주행은 부모의 이주에 의한 자연스런 동행이었음에 비해

 

박정희는 안정적이고 징병도 피할 수 있는 교사직을 버리고 위에서 언급한 바  사범학교 시절 교련담당 일본장교를 찾아가고-그의 추천서가 결정적으로 군관학교 입학이 허락됨-혈서를 쓰고 또 군관학교에  일본제국을 위한 황군이 되겠다고 강한 맹세문도 쓰고 하여 군관학교 입학하게 되는 '의지적 결단'이었다는 점에서 체험의 밀도와 강도는 상대적으로 긴 기간의 김일성에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6.박정희는 이후 1942년 3월 신경군관학교 1등 졸업과 함께 성적우수자에게 주는 특전인 일본 육군사관학교 편입의 기회가 주어지고 44년4월 일본 육사 비일본인 중에서 3등을 하는 우수 장교가 되어 다시 만주로 돌아와 일본 패전시 까지 장교로 근무하였는 데 일부 증언에 의하면

 

장교 근무중 늘 과묵하다가 독립운동가를 잡으러 가자는 명령이 떨어지면 갑자기 야호! 하면서 뛰어나갔다는 증언도 있다!

 

그는 종전후 9개월이나 지난 46년 5월 귀국하게 되는 데 아마도 일본 황군으로서의 패전장교로서 여러모로 귀국이 망설여 졌을 것이고 하여 남한 분위기를 나름대로 파악하면서 귀국 시점을 선택하는 데 신중을 기하였으리라 봅니다.--일부 증언에 의하면 귀국 희망의 우리 조선인들을 규합하고 타국인들로 부터의 테러등에도 대비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하였다고 합니다.

 

7.박정희는 만주에서 총4년여 그리고 일본에서 2년간의 생활을 하는 데 만일 그의 만주행이 없었다면 일본패전후

16년뒤에 오는 그리고 한국전쟁 종전후 8년뒤에 오는 그의 결단 5.16군사혁명은 실패하였으리 라는 전문가들의 견해이며 저 한준구도 전적으로 이에 동조합니다.

 

즉, 만주 군맥이 없었다면 그의 군사혁명은 사전에 발각되어 사형처분을 받거나 아예 시도하기가 어려웠을 거라는 분석이다.

 

그리고,김일성도 만주에서의 목숨을 건 항일투쟁이 없었다면 소련군 북한 점령 정보 고급장교들의 보고에 의한 스탈린의 결정이 없었다면 애송이 33세의 청년 김일성에 대한 북한괴뢰수반에 대한 낙점은 어려웠으리라는 분석이다.

 

8.만주(滿州)는 이 2명의 남북 지도자에게 어떠한 곳이었나?

 

첫째:만주는 훗날 남한과 북한의 각각 나름대로의 근대화를 결정짓는 '박정희 방식'과 '박정희문제'  또 '김일성방식'과 '김일성문제'가 길러진 배양처였다.

 

 즉, 이들의 만주체험은 김일성에게는 빨치산파 라는 이름으로 박정희에게는 소위 만주인맥 이라는 이름으로  해방이후 16년간격으로 집권과 권력의 중추를 형성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의 배양처가 된 滿州였다.

 

둘째: 두사람에게 만주는 국제적 감각과 경험을 익힌 공간이었다.   김일성은 중국공산당 당원이자 장교였으며 해방전 소련군 장교까지 경험하였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및 일본 정규 육군사관학교 경험과 만주 주둔 황군 초급 장교로서 둘다 미국이 동아시아국가에 채 눈을 돌리지 못한 상황에서 이들 두명은 국제관계의 구도와 논리를 체득하는 좋은 채널이었다.

 

셋째: 두명은 모두 군인의 길을 갔다. 이 군인이었다는 사실은 다음 지적에서 적지않은 영향을 각각의 국민들에게 끼쳤다.

 

즉,  이 2명의 지도자가 각각 집권한 이후 공히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는 反정치적이며 관료적이며 지시적 성향을 가지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를 원인으로는 바로 이 군인출신이었다는 데 있다. 이들은 둘다 청년 시절 하급장교 시절 명령과 복종을 생명으로 하는 군대조직의 원리를 자신들의 국가경영에 도입하게 했던 것이다.

 

9.태평양전쟁과 만주시대 및 식민 조선이 종식되어 이들이 귀국했을 때 각각의 위치는 어떠하였는 가?

 

ㄱ.김일성은 해방후 원산앞바다를 통해 9월에 의기양양하게 소련 고급장교들의 비호하에 귀국하였고

 

ㄴ.박정희는 해방후  중국에서 이런저런 눈치를 보다가

무려 9개월 뒤에나 귀국선에 오른다. 박정희에게 종전은

조선국민으로서는 당연한 승리였겠지만 일본군 장교로서는 패전인 2중적 상황이어서 패잔병과 귀국 조선인의 양면성을 가지고 초라하게 귀국하였다.

 

10.상반된 입장에서 공통의 만주 경험은

 

 이들에게 어떤  삶의 로드맵을 그려주었는가?

 

ㄱ.김일성의 경우:

 

귀국이후 김일성은 소련 고급장교들의 전폭적인 지원덕에 재빠르게 권력장악에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위에서 잠시 언급한 바 있던 만주 항일투쟁의 빨치산 동지들의 도움은 결정적이었다.

 

김일성은 소련 스탈린의 '일지역 사회주의론'을 번안한

'민주기지론'을 통해 애초부터 통일국가수립에는 염두에 두지 않고 독자권력 구축 전략을 추구하여 38선 이북의 분단상황을 우선 고착화하였다

 

김일성의 민주기지노선은 이승만의 단정론(전라도 정읍에서의 발언)에 앞선 단독국가건설노선 이었다는 점에서 분단국가 수립에 있어서의 선수를 친 셈이었다.

 

민주기지론을 통해 거의 완벽하게 정권을 장악하게 된 이후 김일성은 정부수립 직후인 1949년 초 '국토완정론'

(國土完整論)을 통해 비로소 통일 즉 적화통일에의 의지와 열정을 전면화하였다.

 

위의 민주기지론에서 국토완정론에의 전환은 국가수립에서 통일로의 국가의제 轉移(전이)이었다.

 

***역사의 아이로니:

 

국토완정론  에로의 전이가 바로 한국전쟁을 일으켰고- 일설에 의하면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48번이나 전쟁 구걸을 하였다고 함- 이 전이의 산물인 6.25전쟁이 개인적인 박정희의 삶에 어떠한 변이(變移)를 가져왔으며 나아가 대한민국 및 남,북 관계에 결정적 변동을 초래할 줄은 당시에는 당연히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11.한국전쟁 당시 박정희는 이미 군부에서 예편된 상태였고 백선엽장군의 배려로 육군본부에서 문관 신분으로 군 선후배들이 모아주는 생활비로 호구지책을 하는 아주 비루한 형편이었다. 아마도 6.25전쟁이 5년만 늦게 일어났더라면 박정희는 술로 지새우는 등 아마 폐인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다른 얘기지만 일본도 5년만 더 늦게 6.25전쟁이 일어났더라면  다수의 군수공장들은 문을 닫고 수많은 실업자들이 길거리를 우글거렸을 것이다.

 

12.해방이후 6.25사변 직전 까지의 박정희는?

 

8.15광복후 무려 9개월만에 중국에서 귀국선을 탄 박정희는 7월에는 공산조직에 참여하였다고 하며 9월에는 구미 집에서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친형

박상희--왜정시대에 구미 동아일보 지국장을 하는 등 시골 지식인이었으며 동네 사람들이 박정희네 집안에서 뛰어난 인물이 나온 다면 바로 박상희일 거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지식과 인덕과 출중한 외모를 지니고 있던 인물이었으나 아깝게 대구 10.1폭동 사건에 휘말려 인심을 잃지는 않았지만 우익인지 좌익인지의 폭동 와중에 목숨을 잃게 된다.

 

구미에서 무위도식하던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을 뽑는 다는 광고를 접하고는 형 박상희 집에서 카메라를 가지고 나와 그걸로 노잣돈을 만들어 상경하여 위의 사관학교에 들어가 다시 군경력을 쌓게 된다.

 

  이때 서로 미리 상의하여 들어간 것은 아니었겠지만 구미 집에서 멀지않은 곳에 살던 김재규도 육사2기생 동기로 군문에 입문하게 된다.---당시 김재규는 빈농이었던 박정희가문과는 달리 중농 집안으로 그럴듯한 기와집에서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하였다고 전하는 데 재미있는 것은 박정희가 수재가 들어가는 대구사범학교에 들어간 후 김재규 부친이 자주 김재규한테 "재규야! 너도 건너마을  동네 박정희 처럼 공부를 열심히 해야하지 않겠니?"라는 잔소리를 자주 들었다고 하는 데 이것도 박정희 저격에 평소 욱하는 성질의 김재규에게도 어릴 적부터의 박정희에 대한 열등감의 표출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파격적인 배려로 군단장도 하였는 데 이당시에도 김재규는 그 은공도 모르고 배은망덕하게도 군단장 집무실에 찾아올 박정희 대통령을 포박하고 어떻게 할 요량이었다니 참?  그것이 불발되고 약10년이 지나 드디어는 궁정동에서 패륜을 저지르고 만다.

 

육사2기로 들어간 박정희는 무척 과묵한 편이었다고 한다. 특히 육사2기생들은 육사 개교이래 최초로 일부 2기생들이 구대장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2기의 박정희가 이 폭력에 비록 가담한 것은 아니었으나 후일 육사2기의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거사를 성사시키는 것도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한다.

 

 그가 1917년생이어서 육사 입교시 동기생들은 대개 5년에서 8년까지 한참 어린 후배들이어서 동기생들은 형님대접을 해주었다고 하며 이미 육사 전신인 군사영어학교에 빨리 들어간 일본군 시절의 후배나 동기생들은

 

 박정희가 다시 소위계급장을 달았을 때 그들은 이미 대위나 소령또는 중령 계급장을 달고 있어 이 또한 박정희에게는 또 다른 스트레스가 아니었나 합니다.

 

육군 중위시절 그는 원용덕 소령--나중에 헌병사령관이 디는 정치 장교-이나 다른 군선배들로 부터 어찌 너 같이 빈한한 놈이 군장교를 하느냐?고 면박을 많이 주었다고 하며 이때 육사1기 출신의

 

 김점곤대위(나중에 육군 소장예편을 함--5.16 군사혁명이후 군인사 적체가 심함을 알고는 과감히 군인사제도를 혁신하고는 본인은 소장에서 자청하여 예편신청한 강직한 장군이었고 그는 후일 경희대 평화대학원 교수및 대학원장을 역임하였음-아직 생존하고 계신 듯한데 아마 거의 90세쯤 되었을 듯함)는 박정희를 잘 보살펴 주었다고 합니다.

 

박정희는 초급 장교시절 존경하는 친형 박상희의 친구인 이재복이 찾아온 적이 있는 데 그는 남한내 군부를 관할하는 주요 직책을 가진 지식있는 빨갱이였으며 초급장교로서 불우한 생활을 하던 박정희는 이내 그에게 포섭이 되어 한국 군부내의 빨갱이 중간책이 되었다.

 

박정희는 1948년의 여순반란사건(또는 14연대반란사건)을 전후하여 군부내 빨갱이 소탕작전에 연루되어  사형 총살가능성 직전에 백선엽의 배려와 비호 그리고 빨갱이 사냥꾼 김창룡도 고문을 가하지 않았으며 수사팀장 김안일 소령(훗날 김안일은 장교당시 피를 너무 많이 묻혀 그는 속죄하는 의미에서 나중에 목사가 되어 목회활동을 하다 10여년전 세상을 떠남)도 박정희를 배려해 주었고

 

소설가 이병주님 및 다른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는 군부내 빨갱이 인맥 300명 안팎을  불어대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그리하여 다른 군장교 같으면 사형총살 가능성이 농후하였지만 언도 직전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 이후 풀려났으며

 

이때 군 특무부대에 심문을 받는 사이 본인 박정희와 동거하던 사실상의

두번째 부인이던 이현란이 이웃 사람들로 부터 빨갱이라고 하여 그녀는 가출하였고 군에서 풀려나온 박정희는 사방에 수소문하며 그녀을 찾아다니는 등 참 옆에서 보기에도 불우하고 비루한 생활에 다들 측은지심이 생길 정도였다.   이게 바로 6.25직전의 박정희의 구차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박정희는 빨갱이 색출 수사에 연루되어 목숨을 겨우 부지하게 되었고 이 와중에 동거하던 사실상의 부인도 도망가고 직장도 잃고 군 선후배를 찾아다니며 혹시 도망간 부인의 소재 파악을 묻기도 하고 친한 군 동료들과 술을 마시며 신세 한탄과 아울러 울부짖던 모습을 기억하는 증언도 있을 정도로 참 비루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토록 희망이 없던 좌절의 최악의 인생기를 보내던 박정희에게

정말 의외의 인물과 사건이 길을 열어주게 된다.

 

이것이 바로 건곤일척의 6.25전쟁과 이것을 일으킨 김일성이야 말로 박정희에게는 정말 후일을 도모하게 되는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6,25전쟁 직전 마침 집안에 애사가 있어 구미에 내려가 있었을 무렵 전쟁이 터졌다. 그는 이 전쟁소식을 들은 후 바로 문관으로 있던 육군본부로 돌아왔으며 서울이 함락되기 시작하자 그는 천호대교 인근의 한강을 헤엄쳐 건너
한강이남에서 진을 치고 있던 우리 국군을 조우하게 된다.

 

이것은 박정희를 잘아는 군부 장교들에게는 의아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아마도 박정희는 이 전쟁통에 북괴측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는 데

 

그는 한강을 도강하면서 빨갛게 물들었던 한때의 잘못을 깨끗이 한강물에 씻어내고  한강 건너 우리측 군부대와 조우하면서 그는 이제 빨갱이의 오명을 완전히 씻게 되었고  군부에서는 전쟁통에 군장교의 부족을 들어 이내 소령으로 복직시키게 된다.

 

**조금다른 얘기지만, 백범 김구선생을 저격까지 하였던 안두희 소위도 징역살다 전쟁통에 풀려서 소위인가 중위로 복직하고 나중에 중령까지 진급을 계속하였고

 

 종전후 강원도 군납하여 돈을 버는 등 한때 군납 납세 랭킹 2위까지 올랐다니 민족지도자 살인범이 사형은 커녕 이렇게 진급을 거듭하고 한때 부자까지 된 것도 이모두다 전쟁통에 벌어진 있어서는 안될 수많은 일들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박정희는 중령과 대령으로 진급을 거듭하는 과정에 군부 수뇌부의 우려 즉,

전쟁의 최일선으로 대대장등의 실병 지휘관으로 보내면 6.25전쟁 전의 표무원,강태무 대대장 처럼 대거 진두지휘로 북괴측으로 부하들 모두와 함께 넘어가는 중대사가 될 까 걱정과 우려가 있어 최전방의 지휘관은 되질 못하였다.

 

우선 기억나는 것은:  박정희가 대령으로 최전방의 9사단 참모장을 할때

즉.중공군의 대공세 직전 박정희는 몸이 너무 아파 2주일의 병가를 내고 후방으로 잠시 나가있었는 데 바로 이때 중공군의 대거 공격으로 9사단은 협곡과 계곡과 고봉준령을 넘어 작전상(?) 후퇴를 거듭하였는 데 이 당시 9사단 참모들의 증언에 의하면

 

만일 박정희가 이 당시 그대로 9사단참모장으로 계속 전투에 임하였다면 아마도 십중팔구는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을 것이고 아마도 북괴군에 이첩되어 총살형을 당했을 거라는 증언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어머니의 임신 초기부터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되지만 그때마다 천우신조로 목숨을 부지하게 되는 경우도 수도없이 많이 벌어지게 되는 데 그의 스토리를 읽게 되면 정말 그는

 

천지신명의 비호와 배려로 인한  대통령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이후 대령예편의 위기에서 백선엽장군의 포병사령관제 도입으로 준장진급의 숨통이 트여 가까스로 준장에 진급하여 5사단장- 이 무렵 육사 8기 출신의 윤필용 중위가 휘하에 들어가고 이후 평생의 아끼는 군후배가 되어 나중에는 막강한 수도경비사령관을 하고 그 위세을 드날리다 소위 박정희 이후 대통령은 금기사항임에도 불구하고 차기는 이후락이라는 등 몇몇 고위 지도층과 언론인이 합석한 자리에서 발설하는 바람에 윤필용은 동기생 8기출신의 강창성소장에게 치도곤을 당하고-특히 윤장군의 부하들이--이 당시 박정희 휘하의 사조직인 하나회도 된서리를 당하여 윤장군 사건시 대령이었던 전두환-노태우등도 예편 99%의 위기에서 당시 경호실장이었던 박종규의 박대통령에 진언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예편위기를 넘기는 데 이당시 육사 12기의 박준병대령도 함께 위기를 겪기도 하였는 데 이들이 수년뒤 육군 소장으로 12.12쿠데타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되고

 

신군부의 최고 실력자가 된 전두환은 대령당시 하나회를 무척 괴롭혔던 책임자 육사선배 강창성을 옭아매어 삼청교육대로 보내 동상걸리게 하고 죽음의 위기까지 몰아부치게 되는 인생유전과 무상을 겪게 시키는 데 그 8년뒤쯤인가 9년뒤쯤 전두환은 엄동설한에 그 유명한 백담사에 유배당하고 노태우와 함께 수천억 비자금사건으로 후일 또 수의를 입고 재판을 통해 국가적 수모와 더불어 징역을 함께 사는 인생유전을 또 되풀이 됩니다.

 

전두환은 과거 보안사령관및 중정부장서리의 막강위세는 저리로 하고 가막소 잡혀가기전 골목설명을 하고 합천으로 피신하는 추태를 벌이기도 하였고  나중에 가막소에서 나올때에는 전두환이 말하길: 즉석 인터뷰에서

"여러분! 죄짓지 마십시오! 가막소는 있을 만한 곳이아닙니다!'라고한 말이 저 한준구의 귓전을 때립니다. 

 

노태우는 자기가 먹은 정치자금 수천억원 안팎의 돈을 거의 물어냈다는 데 -숨기는 수완이 부족하여--그러나 전두환은 아마도 노태우보다 2배는 많았을 터인 데 아직도 물어내지 않은 돈이 엄청

있을 터인 데 수사기관이 태만한 것인지 정말 모르는 것이지 정말 알수가 없고 전두환은 한술 더 떠 지갑속에 29만1천원밖에 없다고 하여 한때 유명세를 타기도하는 아주 불쾌한 해프닝은 온 국민이 다아는 우리 전직 대통령의 화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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