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테크에 무능한 내가 잘 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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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41 진만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1건 조회 1,488회 작성일 2010-01-10 06:03본문
財테크에 無能한 내가 잘 한 일
“당신 말대로 했더라면 아마 지금까지도 G洞에 살고 있을 거야. 그렇게 D區를 못 떠난다고 하더니.........”
요즘 아내가 하는 말이다.
우리는 D區의 單獨住宅에 20年 넘게 살다가, 9年 前 S區의 아파트로 移徙를 왔다.
아내는 空軍 飛行場과 다른 陸軍部隊가 있었던 곳에 새롭게 造成되고 있는 그곳 新市街地로 移徙하기를 원했다. 市廳을 비롯한 公共機關 大部分이 그곳으로 移轉할 計劃이며, 周圍의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던 때였다. 나는 그곳으로 가면 <등산 할 곳이 마땅치 않다>느니 <관리비가 비싸 우리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라는 핑계로 떠날 생각을 안했다.
그곳은 몇 년 동안의 開發로 新道心이 되었다.
來年이면 直轄市가 된다는 所聞으로 憂鬱하던 그 해 3月, 長期勤續으로 어쩔 수 없이 外地인 C郡으로 내가 通勤하던 때였다. 그곳으로 通勤하려면 S네거리를 지나, 溫泉街道를 거쳐야만 C郡으로 갈 수 있었다.
開發이 始作되면서 S네거리로 迂廻하지 않아도 溫泉이 있는 곳으로 빠질 수 있게 되었다. 산을 뭉개고 다리를 다시 놓는 허허벌판으로 버스 路線은 조금씩 바뀌면서도 溫泉 쪽으로 잘도 통했다. G市로 轉勤되어 乘用車를 利用할 때도 새롭게 들어서는 아파트 숲을 지나가기만 하였다.
그러다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교차로>에 나온 電話番號로 通話를 한 후, 찾아간 곳이 그가 가르쳐 준 아파트가 아니라 엉뚱한 이곳 H아파트였다. 室長이라 불리는 젊은 여자가 案內하는 집을 보고, 한 시간 남짓 만에 契約을 했다. 겨울에 하루 종일 햇빛이 들 거라며 아내는 좋아했다. 百貨店도 가깝고, 멀지 않아 e-마트가 近處에 들어선다고 했다.
G洞 집이 팔려야 했으므로 殘金 날짜를 넉넉하게 잡았다. 집에 돌아와 아이들에게 말했더니, 옷 한 벌 사듯이 너무 쉽게 決定한 게 아닌가 하며 마뜩찮게 생각했다.
두 달 넘게 契約期間을 정했음에도 G洞 집이 팔리지 않아 애를 태웠다. 집은 팔리지 않고 期間이 다가 와 모자라는 돈을 어렵게 變通하여 그 집을 남에게 傳貰로 놓았다. 좀 싸다 싶게 G洞 집을 팔고 우리는 또 다른 아파트에서 傳貰를 얻어 살 수밖에 없었다. 그 두 달 사이 마음苦生이 심해, 모든 것이 여편네 때문이라고 怨望을 했었다.
지금도 아내는 新聞에 코 박고 살면서 經濟에 대해 아는 게 뭐 있냐고 핀잔한다. 新都市 開發 初期 G洞 집을 팔고 이쪽으로 왔으면, 집이 두 채는 됐을 것이라고.......... 契約書上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의 分讓價는, 당시 G洞 집값의 折半 정도였다. 그 때는 아직 이곳에 아파트 붐이 일기 전이었다. 우리는 IMF로 아파트 값이 뛰던 그 때 집을 산 것이다.
G洞으로 移徙 오기 전에 우리는 D洞에 살았었다. H女中 附近 높은 地帶로 수돗물이 잘 나오지 않아 어머니는 한 밤중에 물을 받아야 하는 그런 곳이었다. 그 집도 첫 애가 태어나 남의 눈치보고 사느니 헌 집이라도 내 집을 마련하는 게 좋겠다고 아내가 우겨 어렵게 산 곳이었다. 하여간 집을 사고팔고 옮긴 것은 모두 아내가 저지른 일? 이었다.
元來 나는 S洞에 살았다. 내가 除隊할 무렵, 日帝 때부터 計劃되었다는 그 길의 工事가 D洞에서부터 우리 집이 있는 곳을 거쳐 火葬場이 있는 Y洞을 지나 市 外廓으로까지 뻗게 斷行되어 떠날 수밖에 없었다. 新婚집을 그 D洞에 구해 살다 헌집도 D洞에서 마련했다. 6.25 直後 避難民들이 산비탈에 板子村을 이루면서 지금까지도 D洞이 못 사는 동네로 알려져 있지만, 事實 이 都市에서는 唯一한 D高女가 있었다.
政權이 萬年 與黨에서 野黨으로 바뀌고, 그 똑똑한 敎育部 長官이 나이 든 선생 한 명 그만두면 젊은 선생 둘을 쓸 수 있다며 몰아칠 때, 나는 敎職에서 물러났다. 1949년에 初等學校에 入學한 후 줄곧 50년 동안 學校에서만 있었으니 이제 지겹기도 했으며, 더구나 昇進도 못한 늙은 平敎師였으니까...........
年金 申請을 어떻게 할 까 여러 窮理를 하다 一部만 終身 年金으로 申請했다. 그 때 아내는 一時金을 원했다. 當時 IMF로 金利가 25% 가까이 되어 그대로 간다면 利子 收入도 만만치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는 年金을 一時金으로 받았다가 子息들 事業資金으로 다 빼앗기고 月賦 책장사로 轉落했다는 所聞을 들은 것도 있어 나는 우겨서 一部 終身 年金을 選擇했었다.
그 終身 年金選擇이 材테크에 無能한 내가 唯一하게 잘 한 일이다.
萬若 一時金을 받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BOX를 주우러 다녀야 할 것이다. 金利가 곤두박질 쳐 物價 오름세에 비하면 0%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當初 公務員 俸給 引上率을 反影하던 制度가 都賣物價를 勘案하여 조금씩 오르는 것으로 바뀌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다만 몇 푼씩 더 오르고 있다.
G百貨店 옆에 살면서도 名品 購入을 못하는 處地이지만, 우리 둘이 먹고 싶은 것 먹고 살면 그것으로 족한 게 아니겠는가? 年金이 있어 感之德之다.
2010. 1. 10.
陳 萬 錫
댓글목록
손정기님의 댓글
41 손정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건강하시지요.
영문이니셜이 많아 읽어 내리는데 시간이 솔찮게 걸렸습니다.
선배님. 재테크 잘하셨습니다.
그러나 글속에는 사모님 재테크를 더 추겨주시는 모습입니다.
건강하시길 바라면서 줄입니다.
마뜩찮다 란 단어 처음 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