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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환-옥희-이주일-하춘화-김추자-이금희-한명숙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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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361회 작성일 2009-12-01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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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 복싱 전 세계챔피언 홍수환선수는 우리 국민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주어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는 수퍼스타임에 틀림없습니다.

 

***저는 3년여전 우연히 강남의 도곡동 홍수환 복싱클리닉 지하 도장에서 대학친구들과 2차로 노래방가다 조우한 적이 있고 몇가지 질문도 던진 행운을 간직하고는 있습니다만.......

 

***홍수환은 1972년 12월인가 1973년 1월인가 텔레비젼 특별 프로그램에 수도경비사령부 군인 복장으로 스포츠 머리로  아주 밝은 미소로 동양 타이틀 보유자로서 저는 본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때의 홍수환선수의 잘생긴 미소가 뭇 여성들의 추파를 어떻게 견뎌낼 까하는 생각도 마침 그 한달전인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하와이 공연에서의 폭발적인 인기 방영 장면과 오버랩 되었던 장면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 그 이후 홍수환선수는 1년여 뒤인 1974년 7월4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더어반에서 라디오 생중계-당시 mbc-이철원 아나운서인지 다른 방송의 박병학 캐스터인지 잘 기억은 안나는 데-- 상황하에서

 

 소위 남아공의 홈디시젼의 일방적 판정을 딛고 3차례 상대 선수인 아놀드 테일러 선수를 다운시킨 끝에 판정승을 거둔 바 있는 데

 

당시 저의 생생한 기억으로는 이철원 아나운서가 3번이나 다운시켰으면서도 혹시나 불합리한 판정이 나올까 노심초사하는 목소리가 귓전을 지금도 맴돌고 있는 듯합니다.

 

@@@당시 홍수환은 이 밴텀급 체급에서 승리를 쟁취한 직후 가진 라디오 생방송 인터뷰에서 예정된 멘트인 박정희 대통령각하를 비롯한 온 국민의 성원으로 저는 챔피언을 땄습니다.......등등과 특히

 

모친과의 대화중 그  유명한 말 즉,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 라고 어머니가 외쳐 당시 유행어가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 그 세계챔피언은 1966년 6월25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있었던 한국 역사상 최초의 세계 타이틀 매치인 '세계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 매치'에서 한국의 희망 김기수 선수가 이탈리아의 미남 복서 니노 벤베누티를 히트앤드 런 작전끝에 2대1의 근소한 심판 판정으로 타이틀을 따 낸지 무려 8년만의 경사가 바로 홍수환선수의 첫 세계타이틀 쟁취였던 것입니다.

 

김기수 선수는 이탈리아의 미남 복서 벤베누티 측에서

원정 개런티 5만5천달러--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액수임-를 요구하여 할수 없이 청와대에 보고가 들어가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소득 400달러가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전 국민에게 큰 희망을 안겨줄 수도 있을 김기수 선수를

 

 적극 지원하고자  지급 보장을 하고 시합을 하도록 결재하였다고 합니다.

 

&&& 아마도 홍수환선수는 74년 세계 챔피언이 된 후

그 당시 최고의 가수대열에 섰던 율동 가수 옥희와 섬씽 스페셜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1974년 과 1975년의 옥희는 나는 몰라요! 등으로 인기 절절의 준 댄스 가수였는 데  저의 기억으로는

1960년대 중반의 댄스 가수 이금희-율동 가수가 맞겠지만-2년전 지병과 생활고로 작고하였음-아마도 62세안팎-

"키다리 미스터 김"등으로 유명한 듯함-

생각난 김에 노란샤스 입은 사나이로 유명한 한명숙은 1960년대 중반 공전의 대히트를 치면서 스타덤에 올랐는 데 40년이 자나 어느 스포츠 신문에 한명숙이 여러차례의 사업실패와 아들의 지병등에 의한 데미지로 수원의 어느 달동네에서 월세 20만원짜리에 살며 생활고에 허덕인 다는 소식에 참 마음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지금은 어떻게 사시는 지? 가수협회장 송대관이 찾아가 보았는 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등으로 유명한 김추자!

댄스가수의 맥을 이금희 보다 약간 늦었지만 거의 동시대의 가수인듯 하고 그다음에는 바로 옥희가 댄스 가수의 -율동 가수의 맥을 이어가게 됩니다--적어도 눈 까뒤집힌듯한 눈매의 김완선이 등장할 때 까지는 --김완선은 1980년대 중반에서 후반및 90년대 초반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 당시 군대에서는 김완선 프로가 나오는 텔레비젼 방영 시에 가장 보초 서기가 싫었다는 후문입니다.

그리고 90년대 초반 룰라 그룹의 엉덩이 치기 춤등

많은 가수 그룹이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박남정이 고개를 돌리고 몸을 돌리는 댄스로 한시대를 풍미하였다고 봅니다.

 

옥희는 나중에---------

 

 

@@@ 그리고 그 다음에 세계적인 강타자가 둘 있었는 데

알폰소 자모라(멕시코 말로는 사모라 가 맞음) 와 카를로스 사라테 였는 데 홍수환은 특히 알폰소 사모라와의 두번의 경기에서 모두 완패하고  조금 쉬다가

다시금 재기하게 되는 데    당시 wba측에서는

 

주니어 페더급을 신설하고 초대 세계챔피언을 뽑기로 하였는 데 한국에서는 당시 홍수환에 필적하는 대전 보문고교 출신의 염동균하고 세계타이틀 도전 국내 전초전을 벌여 홍수환이 승리를 거두면서 도전자로 나서게 됩니다.

 

@@@ 드디어 운명의 날 1977년 11월27일이 왔습니다.

 

그 운명의 날 직전에 미팅에서 양측은 한라운드 3회 자동

ko패 로 정하는 지 아니면 프리 녹다운제 인지 였는 데

홍수환측은 전자를 카라스키야측은 후자를 강력 주장하였는 데 홍수환측이 양보하여 후자를 택하였는 데 만일

전자였더라면 홍수환은 4전5기의 신화는 커녕 3회 자동

넉다운으로 ko패 당할 개연성도 다분히 있었다고 저는 보는 데 하여튼 홍수환은 기적적인 드라마같은 4전 5기 신화를 창조하게 되는 수퍼스타가 됩니다.

 

@@@신화창조의 수퍼스타 홍수환선수!

1.1977년 11월27일

2.장소는 남미가 아니고 중미의 파나마

3.상대방은 11전 11ko승의 가공할 카라스키야 선수

4.1974년 챔피언이후 3년만의 한국 최초의 2체급 석권

   즉,밴텀급 이후 주니어 페더급 석권함!

5.특히 2회에 4번 다운당한후 3회 역전 ko승 하게됨!

6.홍수환의 마지막 레프트 휘니쉬블로는 사실 너무했음

왜냐하면 링 줄에 큰 대자로 누었는 데 그대로 갈겨서!

-심판의 1초 늦장실수였고 카라스키야 본인도 그냥 초반에 다운당하며 홍수환처럼 숨고르기를 하였더라면 달라졌을 수도!

 

지금부터는 한국 현대사 전공자인 박태균박사-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임-의 기고문입니다.

 

@@@한국 현대 스포츠 역사에서 홍수환의 쾌거가 30년이상 흘렀지만 아직도 기억되는 이유는?

 

ㄱ.아마도 역전또는 역전승이라는 매력때문이기 때문!

ㄴ.20세기 들어서 우리는 나라를 빼앗겼고 식민지에서 해방되자마자 분단과 전쟁을 겪었기에 우리 민족에게 역전

보다도 더 뚜렷한 목표는 없었다고 봅니다.

 

ㄷ.한준구의 의견--이 홍수환의 쾌거이전 1972년은 한국

야구 역사에서 특히 고교 야구에서 군산상고의 부산고교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1대4로 지다 9회말 마지막 공격에서 5대4의 역전승이 길이길이 인구에 회자되는 역전의 묘미중의 묘미였다고 봅니다. --당시 지금도 한국프로야구사의 한획을 긋는 선수들인 김봉연,김준환,김일권등이 활약했던 바로 그 시기였습니다.

 

그 이후 군산상고는 유독 역전을 많이 하였던 팀이 되었고 프로야구가 시작되는 1982년 이후 군산상고는 큰 후원자를 잃고 1급 팀에서 후발 신일고교나 덕수상고등에게 명성을 점점 빼앗기기는 하였습니다.

 

1972년의 전국 고교 야구는 경북고교가 가장 명성이 자자하였고-임신근-남우식-황규봉-이선희등 초고교급 투수를 독차지하여 경북고교 10년 이상의 아성을 지키다 광주일고및 광주상고의 등장등으로 야구 불모지 호남야구는

 

1970년대 후반부터 꽃피기 시작하여 80년대를 거쳐 90년

대에도  광주일고등은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도 전국대회를 많이 석권하고 국가대표 선수들을 많이 키워냈습니다.

 

ㄹ.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에서의 손기정 마라톤 우승

1976년 레슬링 올림픽 우승의 양정모선수도 우리 국민에게 각인되었지만   뭐니뭐니해도

 

1970년대의 프로레슬링의 김일, 권투의 홍수환,야구의 군산상고에 환호했던 것은 바로 역전 드라마였기 때문임!

 

ㅁ.홍수환의 소위 4전5기의 드라마는 당시 1977년의

수출 100억불, 1인당 국민소득 1,000불,그리고 쌀 자급을

통한 쌀막걸리의 재등장과 점철되었다고 봅니다.

 

ㅂ.정신적으로 특히 더 중요한 것은 1972년의 유신헌법

이후 5년이 지나가고 있는 시기라 수많은 사람들은 소위

막걸리 보안법등으로 민주화 인사들은 반체제 라는 미명하에 쥐도새도 모르게 실종되거나 고문살인되는 시기와

맞물려 정말 사회를 짓누르는 암울한 시기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한준구

 

ㅅ.그 5년사이에 1974년의 전세계의 오일쇼크,그리고

30만명이상 파병한 바 있던 베트남전의 종결 즉 베트남의 멸망-1975년4월30일-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홍수환의 4전5기 직전에는 본격화된 대학생 시위로 인해

긴급조치 9호이후 처음으로 20여일간 대학 휴교가 있었고 언제 민주화의 봄이 오려나? 하는 암울한 시기였음!

 

 

ㅇ.설상가상으로 홍수환 쾌거 딱 2주일전인 77년11월11일에는 한국화약측의 이리역 화물차 다이나마이트 화약폭발 사고-당시 그 폭발이 원폭에 버금갈 정도로 위력적이어서 -화물차 2량이 모두 다이나마이트 였으니 오죽하였겠는 가? -인근 수많은 가옥이 파괴되고 마침 이리역앞의 극장에서 지방공연 쇼를 하던 명가수 하춘화는 극장 천장이 무너지는 바람에 어깨를 다쳤고 이를 옆에서 보던 이주일-코메디언-못생겨서 죄송합니다-이 자신의 부상을

무릎쓰고 들쳐 업고 나가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하는 해프닝이 벌어졌고-한준구 기고문

 

-이후 이주일은 무명에서 일약 한단계 도약하게 되고-몇년뒤에 벌어지는 12.12사건이후 전두환정권하에서 텔런트 박용식은 전두환 닮아서 쌍코피 터지고 이주일은 다행히 못생겨서 출세 가도를 달리며 -이후 이주일은 자기 표현을 빌면 전성기 시절에는 돈을 가마니로 벌었다고 합니다-무명시절에는 부모에게 명절에 쇠고기 한근 사드릴 여유가 없이 찢어지게 가난하였다는 데 인생역전이 홍수환 말고도 벌어집니다.-한준구 기고문

 

ㅈ. 그런 판국에 홍수환의 쾌거는 우리 국민에게 그 와중의 암울한 현실에  희망을 가져다 주었으며 박정희 말기 유신정권의  힘겨운 민주화 억압 통치 상황에도 다소 유리하게 작용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일듯 합니다. 그리하여, 몇년뒤 행운의 집권을 하게되는 전두환은 소위 쓰리s-즉 스포츠,스크린,섹스등의 작전을 주효하게 사용하게 됩니다.-한준구 기고문

 

ㅊ.스포츠는 이렇게 사회적으로 다양한 효과를 만들어 내며 특히 국가대항전을 통해 국민을 통합하는 수단으로 작동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독재자가 스포츠 육성을 강조하였던  것도 모두 이 때문이었다고 봅니다.-박정희의 박스컵 국제 축구대회 등도! 전두환의 프로야구,프로축구,프로씨름의 탄생 실제 배경은 바로 쓰리 에스 작전임!-

 

여기에더하여 스포츠는 갈수록 순수성과 다양성을 잃고 상업화되고 있으며 이제는 잔인함까지 더해가고 았습니다

비록 그것이 국가를 위해 이용됐다고 하더라도

 

그때 지금 의 아름다운 스포츠정신이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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