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이승만 전 초대 대통령의 30세 당시 대미 외교의 초라한 모습과 당시 일본 외교특사였던 가네코와의 비교 칼럼인데---2008년8월4일자 중앙일보 예영준
정치부 차장의 좋은 글이어서 폄글로 가져왔으며
말미에 저의 강한 의견을 기고하였사오니 바쁘신 분은 후반부를 먼저 읽어 주셔도 무방합니다.
1.1904년 고종임금 및 그 측근-민영환등의 중신들 -들이 젊은 이승만-당시 30세-을 밀사로 미국에 파견한 이유는?
정답: 미국 조야에 일제의 한반도 침략 의도를 설명하고 지원을 호소하려 하였는 데 무려 5년 반 동안이나 가막소에서 -당시 반체제 인사로 한성감옥에 수감했던 적이 있음-갈고 닦은 영어 실력때문이었음!
2.30세의 이승만은 배로 태평양을 건너 다시 열차로 미 대륙을 질러 워싱턴에 도착한 것은 1904년의 세밑이었다.
3.애숭이 청년 이승만은 1905년 8월 미국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를 만나는 데 일단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대통령은 이 애숭이 청년의 하소연을 들어줄리 만무했다. 왜?
4 왜냐하면, 그도 그럴 것이 이승만을 만나 주기 5일전에 그 유명한 미국과 일본간의 소위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체결하였기 때문이었다.
@@ 한준구 의견:
이 조약은 일본 총리인 가쓰라 와 당시 미국 육군장관--대통령이 아님-나중에 이사람은 대통령이 됨-과의 밀약으로 그 내용의 핵심은 뭐냐하면
'일본 너희들이 한국을 먹는 데 우리 미국이 못본 척 할터이니 우리 미국이 필리핀을 먹는 것을 못본 체 서로 합시다.'
였다고 저는 봅니다. 즉, 미국측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밀약으로 인정한 셈이 된 꼴입니다.
이들이 그 밀약 체결 36년뒤 일본의 선전포고없이 하와이 진주만 기습-1941년12월7일-으로 엄청난 희생을 가져오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외교에는 영원한 적도 그리고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명언이 역시 실감됩니다.
--억울한 한국인 징병과 징용과 다수의 종군 위안부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미어 옵니다.
5.이당시 일본의 대미 외교는 주도 면밀하였다. 청년 이승만보다 먼저 워싱턴에 와있던 일본 특사 가네코겐타로는 위의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하버드 대학 입학동기였다. 나아가 크리스마스 카드와 편지등으로 서로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6.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가네코특사가 선물한 책인 '무사도' 영문판을 읽고난 후 일본에 푹 빠졌고 일본의 고단자로 부터 매주 3차례씩 유도를 배웠다. 그 덕분에 가네코 특사는 수시로 백악관을 드나들 수 있었다.
@@한준구 의견: 한국은 위의 일본의 유도 가르침이후 무려 60년 이상이 지나 태권도 9단이며 미국 태권도의 대부격인 이준구 님이 미국 상하 양원 국회의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게 됩니다.
7.21세기에 각광받는 소위 '소프트 파워'외교를 일본측은 이미 100년전에 구사한 셈이다.
8.그 결과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한국인을 위해 일본에 간섭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자신을 위해 주먹 한 번 휘둘러 보지 못했다."
@@한준구 의견: 이 미국 대통령은 그 당시의 우리 조선의 의병 봉기를 알지도 못했고 이 작자는 노벨평화상을 탔다고 합니다.-확인 요망!
9.루스벨트의 중재로 러시아와 일본간에 1905년 8월 소위 '포츠머스 조약'-즉 러일 강화조약의 제1조에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군사,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지도,감독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라고 되어있다.
10.위의 조약으로 러시아를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낸 일본의 위의 포츠머스 조약 체결 3개월뒤인 1905년11월17일 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체결
하기에 이른다.
11.20세기초 한국과 일본의 미국에서 펼친 외교 전쟁은 이미 시작 전 부터 승패가 정해져 있었다.
12.한국에 온 선교사가 써준 몇 통의 소개장에 의지한 30세 이승만의 밀사로서의 초행 미국행은 일본 특사 가네코에게는 소위 '조족지혈' '족탈불급' 이었다.
13.2008년 8월 당시 미국은 땅과 관련한 미국 지명위원회 즉 bgn측의 독도 영유권 표기를 '주권 미지정'으로 바꿨다가 일주일만에 철회한 바 있다. 말 그대로 원상복귀일 뿐 그 이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중립을 지키겠다는 미국의 공식 입장도 그대로다.
14.한준구의 견해: 일본의 치밀한 외교는 얼마전 미국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가 일본 방문시- 신문에서도 크게 보도되었고 미국에서도 말이 엄청 많았는 데-
즉. 태평양 전쟁이후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 뒷짐진 거만한 자세 옆에 살아있는 신-즉 현신이라는 히로히토 일본 국왕이 -이 놈들은 꼭 천황이라 불러달라고 한국 외교부를 수십년간 괴롭혀 왔고 지금도 그렇다!- 왜소한 모습으로 초최하게 서있는 모습의 사진과 즉, 맥아더 총사령관과 히로히토 국왕이 함께 찍은 사진! 그리고 문제의 사진은 최근에 나온
오바마가 90도 각도로 그 농구선수 출신의 큰 키를 굽혀 일본 국왕 아끼히토에게 악수 인사드리는 모습이었다.
일본 국민들은 열광하였고 오바마는 모든 외교 문제를 아주 수월하게 처리하였다는 후문입니다.
이 사진은 나를 포함한 전 한국인들에게 적지않은 충격을 주었는 데 이것 또한 위에 장황히 언급한 바 있는 일본 외교의 물밑 외교의 승리가 아닌가?
그런 일본놈들은 한국을 35년이상 강점하고 유린한 한국 국민들에게 통절한 사죄는 커녕 말장난만 하고 있고
일본 국왕의 사죄 방한은 광복이후 단 한번도 이루어 지지않고 있다.
저 한준구는 5년전 여름 한국 명동의 은행회관에서 열렸던 한,중,일 근현대사 학자들의 세미나 말미에 발언권을 얻어
당시 일본의 학자들에게 그리고 일본인 방청객들에게 부디 당시 실세였던 일본 관방부장관이던 아베 신조는 나중에 총리가 될 것이니 만큼 아베신조 관방 부장관은
일본 국왕과 함께 총리가 되면 한국및 남경 30만 대학살의 중국 그리고 싱가포르등지를 사죄 방문하라고 역설하였다.
아울러 1970년 12월7일 서독의 당시 총리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의 유태인 학살 장소인 게토지역에 가서 그 묘소에 헌화하고 무릎 꿇고 깊이 사죄하였는 데 당신네 들도 그렇게 하길 바란다 라고 대갈일성하였는 데
그 회의가 끝난 직후 한신대학교의 중견학자 안병우 교수가 저에게 악수를 청하며 "한선생님! 덕분에 속이 후련하였습니다."라고 한 기억이 5년여가 흘렀지만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리고 저 한준구가 나중에 생각해보니 한국의 근현대사 전공 학자들은 이들 일본측 및 중국측 학자들을 매년 아니면 적어도 2년이나 3년에 한번 씩 어떤 때에는 일년에 수차례씩도 학회나 세미나에서 자주 만나기 때문에
저 한준구 처럼 아주 직설적인 표현을 못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던 적이 있으며 그날 일본 방청객들은 얼굴이 아주 찌그러진 모습과 얼굴을 붉히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일본놈들에 대한 공개적 대갈일성이후 1년이 지난 어느 여름
서울대학교 한일관계 토론회에서
발언권을 얻어 저 한준구가 김영삼 대통령이 말한 바 있던
'저 일본 놈들 버르장머리를 고쳐야지!'
라는 말을 즉, 비외교적인 언사를 다시 저 한준구가 인용하면서 한국측 학자들의 얼굴을 잠시 살펴보니 몇몇 학자들이 안절부절하는 모습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한준구 의견:
최근 외교부 개혁에 대한 여러 탁견들이 비등한 데 소위 현상유지의 폭군들 때문에 지지부진한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위의 30세 이승만과 일본특사 가네코의 엄청난 차이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외교 100년 대계를 위해 외교부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추신: 20년전 주 아르헨티나 대사를 역임한 윤태현대사의 공금 횡령 비리가 늘 외교부만 생각하면 첫번째로 떠오른 데 최근 재외 공관 영사등이 공금횡령의 비리가 또 신문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2009년12월2일현재로--
부디 참신한 이미지의 외교관과 외교부가 되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