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말자-114주기-일본의 국가적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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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340회 작성일 2009-10-11 21:27본문
오늘은 마침 1895년 10월 8일 일본에 의해 국가적 범죄를 저지른 명성황후 민비시해 사건이 일어난 지 딱 114주기가 되는 의미 심장한 날입니다. 그리고 내일 일본 신임 하토야먀 총리도 방한한다고 하니 신문 다수의 관련 기고중 가장 잘 된 내용을 저의 의견과 함께 올리오니 일독을 권해 봅니다-관심있는 제위께!
우선 명성황후 민비 하면 떠오르는 것이 흥선대원군의 부인에 의해 조실 부모하여 외척의 발호를(소위 민씨척족) 방지할 참으로 정치적인 학습 효과로 간택되어진 어린 민비가 시간이 흘러
흥선대원군의 섭정 10년후인 1873년부터 고종을 등에 업고 대원군과 22년간에 걸친 치열한 권력투쟁을 하는 왕비로 또는 황후로 알려진 바 있지요! 일부 근대사 전공 교수들은 민비를 나라를 망친 것을 맹비난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대원군도 잘못한 것도 적지않습니다만....
그리고,지난 40년이상 동안 궁녀 사진을 갖고 민비 사진이라고 결과적으로 국민을 속인 교과서에 분통이 터집니다.--민비는 외국 사절들및 부인들의 종용을 뿌리치고 혼을 앗아가는 사진 찍기를 극구사절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의 사진도 늙었을 때의 인자한 사진만 교과서에 게재하여 저 마저도 저렇게 인자해 보이는 사람이 그렇게 악독하게 하였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갖은 적이 있을 정도이었는 데
아예 게재를 하질 말던지 아니면 최근의 이등박문 청년 시절의 악독한 사무라이 사진을 동시에 게재하던 지 했어야 했다.
***일본이 진정으로 반성을 하는 증표가 앞으로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그중의 하나는 당연 1895년 10월8일에 자행된 명성황후 민비 시해 사건에 대하여 우리 민족에게 일본 국왕이 엎드려 진정으로 사죄하는 것이다.
***아래글은 90%는 폄글입니다***
1.경복궁의 북쪽 끝에 위치한 건청궁(乾淸宮)은 고종과 민비가 살던 곳이다. 1895년 10월8일 새벽 민비는 옥호루에서 극악무도-패륜무도(悖-어그러질 패 倫無道)한 일본놈들에 의해 난자당하고 녹산 언덕에서 불에 태워졌다고 합니다.그녀의 나이는 당시 44세였다.
민비의 친아들이자 마지막 황제가 되는 순종은 당시 20세 초반이었지만 이 시해사건으로 인한 엄청난 정신적 충격으로 한동안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합니다.이미 신체적으로도 결함을 가지고 있던 순종에게 이런 정신적 충격까지 가해져 후일 짧은 생애를 마감하게 되는 원인(遠-멀 원 因)이 되지 않았나 한다.물론 이 시해사건 이후 엄청난 일본의 각종 압박이 단명의 가장 큰 이유였으리라 본다.
2.114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녀의 한맻힌 영혼은 어디에 머물러 있을까? 어쩌면 주한일본 대사관위 아니면 현해탄너머 일본 국왕 궁전위를 맴돌고 있지는 않을까?
3.일본의 군대,경찰,외교관,낭인
(浪人-과거에는 우리 국사시간에 일본 깡패들로 인식되었으나 최근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하버드대학 유학생 출신등 소위 최고 엘리트도 다수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수백명이 작당하여 주권국의 왕궁에 난입하여 왕비를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4.이런 비유도 가능하지 않을지요?
ㄱ.유럽 어느 국가의 병사,낭인 합동 부대가 영국이나 프랑스의 왕궁에 침입해 왕비를 척살한 것과 비슷!
ㄴ.조금 무리해서 비교를 또 해보면
중동의 어느 국가가 테러리스트 무리를 백악관에 침투시켜 미국의 퍼스트 레이디를 암살하고 그 시체를 로즈 가든에서 불사른 것과도 비교해 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면,위의 두가지 비교에서 가해국 책임자들이 사죄 한마디 없이 무려 114년을 버틸수가 있을까?
5.민비 살해(시해)는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 주한 일본공사가 기획-지휘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이전의 일본 내무대신 출신임에도 주한 일본 공사를 자청한 바 있던
이노우에 전임공사와
후일 안중근 의사에게 격살당하는 이등박문의 합작품이라는 일부 학자들의 견해가 더 설득력있다고 본다-필자주
6.그리고,과거 중,고교 시절 일본 낭인은 하급 사무라이 출신 깡패 집단으로 배운 바도 있었으나 사실 그중에는 위에서 언급했지만 미국 하버드대학 출신등의 엘리트 낭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일본의 군인및 경찰이 궁궐을 돌파한 것으로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흥선대원군과 일부 조선군 훈련대가 이 난입에 가세는 하였으나 이는 일본이 민비 암살을 쿠데타로 위장하려 기획한 것이다.
전권대사였던 일본 공사가 그 중심이었고 일본 군대와 경찰이 가담하였으니 이는 분명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병탄을 위한 국가 범죄가 아닐 수 없다.
7.일본의 명치(메이지) 천황이나 이토 히로부미 총리대신이 진짜로 문책할 것이라면 미우라 공사가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다음은 미우라 공사가 총리대신 이토에게 보낸 사건 보고서의 원문중 일부이다.
"우리 세력을 유지하고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부득불 이렇게 하게 된 바 그 전후 사정을 잘 알아 주시길 바랍니다."
8.미우라공사 및 가담자 48명은 히로시마 감옥에 투옥되고 재판을 받기는 받았다-국제적 국가범죄는 아님을 입증하려는 꼼수!-그러나 모두 증거불충분이라는 명목으로 석방되었고 이중 다수가 출세가도를 달렸다. 대표적으로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는 14선 국회의원에다 내무대신을 지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9.민비시해 110년이 지난 2005년 5월 직접 칼을 휘두른 자객들의 후손-증손자-2명이 한국을 찾았다.그들은 명성황후의 무덤-생가와 건청궁을 찾아 사죄의 절을 올리고 참회의 눈물을 대신 흘렸다.
10.일본 낭인중 20여명은 일본 구마모토 출신이다.
다행히도 그 곳에서는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을 만들어 주민들에게 민비 살해는 역사적 과오였음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용기있는(?) 일본인들을 보면서 일본의 왕이나 총리나 대신 정치인들중 그 누가 일본의 책임과 사죄를 인정하라고 외친 적이 있는가?--경제 대국이지만 도덕적으로는 소국임을 전세계 사람들이 점점 알고 있는 과정이지만 정말 무심하고 한심한 일본이다
.--나중에 언젠가 기술하겠지만 이는 해방후 5년6개월여 기간동안 일본 주둔군 최고 사령관을 역임한 더글라스 맥아더의 일본 버릇을 못 고친 죄는 적지 않다고 확신한다-필자주
11.한술 더떠 일본의 대다수의 교과서에서는 민비살해 사건을 기술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해방이후 6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의 어느 지도자가 솔선하여 단 한명이라도 '' 이웃나라의 왕비를 난자한 천인공노할 죄를 다음 세대를 이끌 일본 청소년,청년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라고 한 지도자가 있는가?
12.1895년 10월8일의 왕비 시해 사건은 세계 어느 문명국가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세계사의 만행이다.
일본 새로운 총리 하토야마가 지한파 부인을 대동하고 우리나라를 10월9일 방문한다. 일본의 최고의 지성적인 총리의 그 유명한 무라야마 담화-동아시아 침탈에 대한 진정한 최고 수준급 사죄!-그당시에도 민비시해는 언급 하지 않았음!-를 넘어서는 최고의 진정한 사죄는 무엇일까
하는 고민을 하면서 현해탄을 넘어오길 바라면서 이만 제1부를 마칩니다-위의 내용의 90%는 중앙일보 대기자인 김진기자의 기고문임을 참고로 알려드립니다.
시간이 허락되면 제2부를 기고할 예정임
끝까지 읽어주신분 제위께 감사를 드립니다
한준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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