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주점 ‘청자’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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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2 유하용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074회 작성일 2009-07-08 14:28본문
학사주점 ‘청자’를 아시나요
현란한 사이키조명, 30여 평의 좁은 공간, 자연미를 살린 원목탁자, 투박한 뚝배기와 막걸리, 매달린 조롱박, 그리고 꽉 들어찬 젊은이들과 담배연기.
숨 막히는 공간 사이로 송창식의 ‘고래사냥’이 흘러나온다. 그들은 머리 위에 술 쟁반을 얹고 앉은 채로 온몸을 흔들어 댄다. 그러면서 ‘자~ 떠나자! 고래잡으러~’라는 클라이맥스에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곡은 다시 팝송으로 바뀐다. ‘뎀체인지’다. 이번에는 가사를 아예 바꿔서 부른다. ‘디리 소주나 먹고 디리 고고나 추자’ 좁은 공간은 젊은이들의 합창으로 채워진다. 개중에 공명심이 있는 친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려고 한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주먹이 제일 센 성학(전 권투연맹부회장)이가 길다란 장대로 위협(?)하면서 주저앉힌다. 성학이는 그 집 기도다. 술값을 내지 않거나 싸움질하는 친구, 그리고 오늘처럼 질서를 깨뜨리며 ‘고고’ 판을 벌이려는 취객을 다스린다.
홀 분위기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잔잔해진다. 윤시내의 ‘별들의 고향’ 주제곡이 센치하게 흐르기 때문이다. 당시 많지 않았던 대전시내 여대생 중에 다분히 끼가 있는 몇몇은 이곳이 단골집이다. 거친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눈을 지긋이 감고 그 무엇인가에 도취한 듯 긴 침묵 속에 빠져든다.
70년대 초반 대전 은행동 학사주점 ‘청자’의 풍경이다. 지금 대우당 약국 뒤편에 있었던 ‘청자’는 대전 최초 학사주점이었다. 그 곳에 얽힌 사연들은 이제 50대 중반의 추억이 되었다. 어쩌면 아내를 만났던 장소이기도 했고 첫사랑과 이별의 아픔을 털어내기 위한 공간으로 기억될 수 도 있을 것이다. 지나간 추억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그래서 잠시 먼 과거로 잠시 여행을 해보았다.
필자는 드라마 ‘파랑새는 있다’에서 나오는 샹그리아 나이트 클럽 사회자(한진희 분)의 실제 모델이다. 말하자면 서울 천호동 000 나이트에서 사회를 보았고 거기에 자주 놀러왔던 모PD가 이 클럽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든 것이다. 이 얘기는 시쳇말로 ‘딴따라’ 출신이라는 뜻이다. ‘아~ 이 친구가 그래서 거기를 잘 아는구나’하고 수긍을 하리라고 본다.
필자는 대전 최초로 태극당건물옥탑방에서 문을 열었던 돌체 음악학원 1기생이다. 당시 대전고 은사이신 임만기 선생님이 원장을 맡았고 거기에서 ‘상하이트위스트’, ‘울리불리’를 마스터하고 그 유명한 ‘청자’에 입성했다. 청자 최초의 통기타가수이자 디스크 쟈키였던 셈이다.
나는 군에 입대하기 전 마냥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 양 으스대고 살았다. 그 후 맞은편에 ‘건넛마을’, 신도극장 옆에 ‘아엠유’가 등장하면서 학사주점은 호황기를 맞았다. 유신시대의 서슬 속에서 무언가 돌파구를 찾으려는 젊은이들에게 고래잡이를 떠나게 하고 별들의 고향을 찾게 하며 생성된 문화가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로 대변되는 ‘청년문화’가 아니였던가.
멀게만 느껴졌던 서울, 부산, 대구 등의 마지막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는 대전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다음날 새벽에 출발한다.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 속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마냥 신기하고 호기심도 생겼던 기억이 난다. 신기한 건 화장실이었고 호기심은 당시 최고 직업이었던 아름다운 안내양이었다. 하루를 묵는 동안 그녀들은 무엇을 하며 대전의 밤을 지낼까.
그들 역시 젊음의 분출구로 ‘청자’를 찾고 내일의 일상을 현란한 음악과 막걸리한잔에 고뇌하며, 즐기며 준비를 하였다. 몇 권 안 되는 책을 가슴에 끼고 학사주점에 들어오는 여인은 도무지 구별이 안됐다. 안내양인지 여대생인지, 아니면 산업역군인지 식별하기는 어려웠지만 모두들 즐기면서 젊음을 발산하고 내일을 기약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국가의 부름이 왔다. 바로 군 입대 영장이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그야말로 극과극의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든 즐거움과 이상을 뒤로 한 채 ‘무찌르자 공산당! 쳐부수자 북괴군! 이룩하자 남북통일!’ 을 부르짖으며 3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길게만 느껴졌던 군복무를 마치고 나니 ‘청자’도 예전 청자가 아니었다. 그게 나에게는 생각과 행동에 변화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장래를 걱정하고 현실을 직시해야만했다. 그래도 내가 잠시 군가로 대체했던 ‘고래사냥’과 ‘별들의 고향’만은 버릴 수가 없었다. 단지 시간의 차이일뿐, 그것이 3년이냐 30년이냐의 차이일 뿐.
내 가슴에는 중년인 오늘날에도 그 때 생각만 하면 가슴이 벅찬다. 눈에 보이던 '청자'는 사라졌지만 그때의 친구 '성학'이는 바로 어제도 나와 함께 소주한잔을 걸치며 중년의 고래사냥을 외쳤다. 30년 전 젊은이들의 문화가 오늘날 우리들의 중년문화이며 아버지세대의 30년 전 문화가 오늘날 우리세대가 아닌가. 대중문화는 어제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새로운 추억을 만들면서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다.
대전예총기관지 7월호 기고내용 中 2009.07.08
52기 유 하 용 (파랑새기획대표.혜천대학이벤트연출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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