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박사 파동-安규리 교수-그女의 그 이후 행적은?](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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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136회 작성일 2016-02-29 00:16본문
1주일에 하루… 인생 7분의 1을 진료봉사에 바치다
입력 : 2016.02.28 05:15
['포스코청암상' 수상… 이주 노동자 무료 진료 '라파엘클리닉' 대표 안규리 교수(上)]
1996년 이른 봄, 서울대병원 내과 첫 여성교수로 임용된 지 4년째였던 안규리 교수는 천주교 고찬근 신부와 함께 광주교도소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의 손에는 따끈따끈한 카레가 들려있었다. 두 사람은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파키스탄 사형수 두 명을 면회가는 길이었다. 사형수들은 1992년 경기 성남의 한 살인 사건 범인으로 지목돼 4년째 갇힌 신세였다. 이들은 그러나 "우리는 결백하다"며 온갖 기관에 탄원서를 보냈고 이 사연을 알게 된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재수사를 요청하는 등 관심이 높아진 상태였다.
'파키스탄 사람들이니까 카레를 먹겠지' 하는 생각으로 갔던 안 교수는 그러나 "음식을 줄 수 없다"는 교도소 측 제지에 영치금만 맡기고 카레는 도로 가져와야 했다. 이후 동료들로부터 "잘 만들 줄도 모르는 카레는 왜 들고 갔느냐"는 농담을 들은 안 교수는 '저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의료봉사를 떠올렸다. 이주노동자를 위한 무료진료소 '라파엘클리닉'은 그렇게 식어버린 카레에 대한 명상에서 비롯되었다.
포스코청암상 수상자는 안규리 교수가 아니라 라파엘클리닉이다. 안 교수는 라파엘클리닉을 19년 전 만든 사람이다. 그는 "나를 포함해 여기서 봉사하는 모든 사람은 자기 직장과 가정에서 열심히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이고 일주일에 하루 이곳에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라며 "나는 그저 그들의 대표일 뿐"이라고 말했다. /김지호 기자
年 52일 진료에
1만 6000명 찾아
천주교의 도움으로
복도진료환경에서
새로운 건물로 이사
그 이듬해인 1997년 4월 13일 천주교 혜화동성당에서 시작된 라파엘클리닉은 25일 '2016년 포스코청암상' 봉사상 수상자로 선정돼 3월 30일 상금 2억원을 받게 됐다. 안규리(61) 교수와 서울대 의대 가톨릭학생회 지도교수였던 김전 교수(현 라파엘인터내셔널 상임이사), 그리고 서울대 의대생 4명이 시작한 라파엘클리닉은 첫날 30명 남짓한 환자를 진료했으나 19년이 지난 지금 연간 1만6000명을 진료하는 대형 병원으로 성장했다. 매주 일요일, 즉 연 52일밖에 문을 열지 않는 병원으로서는 엄청난 숫자다.
김수환 추기경의 끈질긴 탄원 끝에 두 파키스탄 사형수는 1999년 삼일절 특사로 석방됐다. 그들은 끝내 안 교수의 카레 맛을 보지 못하고 석방 당일 강제 추방됐으나 그들의 형제 파키스탄인 노동자들은 97년부터 지금까지 안 교수에게서 무료 진료를 받고 있다. 지난 17일 서울 성북동1가 라파엘센터 4층의 작은 회의실에서 만난 그는 "청암상은 라파엘클리닉이 받는 것이어서 내가 조명받는 것은 정말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병원 건물이 번듯하네요.
"2014년 4월 천주교에서 이 건물을 무상임대해 주시고 후원금으로 리모델링해서 멋지게 이사할 수 있었어요. 그전까지는 동성고 강당 복도에서 오랫동안 진료를 했죠. 겨울엔 난로를 켜고 여름엔 부채질을 하면서 일을 했어요."
천주교 서울대교구 유지재단이 무상임대해 준 라파엘센터는 지하 1층 지상 5층 연면적 1177㎡(약 356평) 규모다. 1층은 접수와 투약, 5층은 성당이며 나머지는 지하 1층 내과를 비롯해 19개 진료 과목을 갖춘 병원이다. 각 층은 정중앙에 접수대가 있고 병상 하나와 책상 하나를 둔 미니 진료실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2014년 서울시 건축상을 받을 만큼 아름답게 디자인된 건물로, 특히 5층 성당 공간에는 무슬림들이 라마단 때 동쪽을 보며 기도할 수 있도록 동창(東窓)을 내기도 했다.
1908년대에 쓰던 궤짝 두 개에 처방전과 사무용품을 넣고 혜화동 성당 구내에서 시작한 라파엘클리닉은 외국인 환자가 밀려들자 불과 두 달 뒤인 1997년 6월 가톨릭대 성신교정 내 빈 건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이주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에 관심이 많았던 기수환 추기경은 라파엘 클리닉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는 선종(善終)하면서 통장 잔액 340만원 전액을 라파엘클리닉에 송금하기도 했다. 생전 라파엘클리닉을 찾은 이주 노동자들과 김 추기경이 만나는 모습. /라파엘클리닉 제공
궤짝 두 개였던 짐이
지금은 트럭 3대로 불어나
하루 진료 70~80명에 달해
파키스탄 사형수와의 운명적 만남
―얼마나 환자가 많았기에 두 달 만에 이사했습니까.
"그때 제가 서울대병원에서 외래환자를 30명까지 봤거든요. 그런데 하루에 70~ 80명씩 오는 거예요. 일요일 오후 2시에 시작해서 4시쯤 끝내면 집안일을 하겠지, 했는데 밤 8시까지 진료를 해야 했어요." 라파엘클리닉을 함께 시작한 김전 교수는 진료를 하지 않는 생리학자였고, 의대생들에게 진료를 맡길 수 없어 모든 진료 행위는 안 교수가 도맡았다.
―가톨릭대로 옮기고는 좀 나아졌나요.
"궤짝 두 개로 시작한 건데, 두 달 만에 짐이 리어카 세 대로 늘어났어요. 그만큼 물품을 도와주신 분이 많았어요. 책상도 주시고 의자도 주시고, 낡은 진료 기기도 주시고…. 그래도 열악하기 짝이 없었지요. 서울대 치대 김중수 교수님은 미장원 의자를 구해 오셔서 치과 진료를 했어요. 그분이 키가 커서 허리가 무척 아프셨을 거예요."
'치유의 대천사' 라파엘의 이름을 딴 라파엘클리닉은 그로부터 1년 뒤인 1998년 6월 다시 이사를 했다. 이번엔 동성고 강당 4층 'ㄷ'자 복도 전체를 병원으로 쓰기로 했다. 안 교수는 "그때는 짐이 리어카 세 대에서 트럭 세 대로 또 불어났었다"고 말했다.
―어떤 분들이 이곳에서 진료받을 수 있습니까.
"관광객들은 진료받으실 수 없어요. 처음 등록할 때 취업비자가 있는 여권을 제출하고 어디서 일하는지 밝혀야 해요. 워낙 언어 문제로 고생하는 분들이 많아서 중국인 가운데 우리말이 자유로운 조선족 분들은 다른 병원으로 안내해 드리고 있어요."
이주노동자 중 가장 많은 국적은 필리핀인이다. 그다음이 중국·몽골·나이지리아·방글라데시·네팔·파키스탄 등의 순이다. 이들은 경기 전역과 충청 일부에서 찾아온다. 대개 가구공장이나 축산농가·철공소·비닐하우스 같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상당수가 영어를 쓰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한국외대나 전화통역 서비스 같은 곳에서도 통역 봉사를 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라파엘클리닉을 찾는 이유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저녁 8시에 퇴근하는 일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요일에 여는 병원인 데다가 무료이고 언어도 통하니 이들에겐 최적의 진료소이다. <下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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