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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最高의 **碩學-**이어령 博士-상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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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760회 작성일 2016-03-02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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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인터뷰 게재 일자 : 2016년 02월 05일(金)
이어령
 
한국 정치,
 
 
右클릭하고 左회전하니 곳곳서 접촉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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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해방 이후 지속돼 온 한국 문화권의 체제-반체제 갈등 속에서 비(非)체제를 선언하고 새로운 길을 열어왔다. 그가 쏟아낸 수많은 창의와 저술은 그런 ‘체제에 질문하는 삶’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이 전 장관이 지난 1월 22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이어령 前 문화부 장관

이어령,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문학평론가, 에세이스트, 소설가, 시인, 전 논설위원, 명예교수, 전 문화부 장관, 전 문학잡지 주간, 문명비평가, 문화기획자….

그가 이제껏 가졌던 직함들을 나열하자면 훨씬 길어진다. 어느 하나도 그의 정체성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타이틀로는 모자란다. 각각의 것 앞에 ‘당대 최고’를 붙인다면 또 어느 하나 어울리지 않을 것도 없다.

한 가지로 명료하게 묶어낼 수 없다는 그 지점에 그의 정체성이 있는 건 아닐까. 끝없는 창의성과 ‘워커홀릭’의 열정은 거기서 나온다.

스스로 말하듯, 아웃사이더로 인사이더의 삶을 살아온 사람 이어령. 그가 아스팔트만 달려왔다고 본다면 뭘 모르는 것이다. 그가 문화 권력을 비판하고 스스로 권력이 됐다고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친체제와 반체제로 문단이 갈릴 때 그는 비체제를 선언했다. 문학은 어떤 체제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기질상 자기 패거리를 만들지 못하며, 펜을 잡은 ‘두 손가락’의 힘으로 고독과 싸우며 새 길을 열어 온 사람이다.

존재적 외로움이야말로 그를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했으며, 한국인이면 첫손가락에 꼽는 ‘거대 지식인’으로 끌고 온 동력이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일본의 재무장을 우려할 때마다 항상 이어령의 저서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 제시한 시각을 인용한다. 밖에서도 이어령을 한국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보고 있다.


연령대를 넘어 가장 폭넓은 세대의 멘토인 이어령을 지난 1월 22일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서울 종로구 평창동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만났다. 연구소 이름과 관련해서 먼저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현안부터 물었다.



―얼마 전 북한이 수소폭탄이라 주장하는 핵실험을 했고, 우리 정부는 중국과 두텁게 관계를 쌓았다고 해왔는데, 실제 중국의 행보는 기대에 한참 어긋납니다. 일본과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으로 여전히 껄끄럽고요. 한·중·일 관계가 우리의 미래와 관련해 여러모로 어렵게 합니다.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은 내가 지금 여기 있는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라는 이름에 있어요. 아시아시대를 예견하고 2008년에 발족했지요. 중국을 비롯한 브릭스(BRICS)의 대륙세력이 커지면 불가불 해양세력과 충돌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대륙의 중국과 해양의 일본이 아시아의 패권 경쟁을 벌이게 될 것입니다. 그 사이에 낀 한국이 가장 큰 피해를 받습니다.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살리지 않으면 그 존재감도 소멸됩니다. 여기에서 지정학(지오폴리틱스·Geo Politics)을 지문화(지오 컬처·Geo Culture)로 대전환하는 전략이 요구됩니다. 중국과 일본의 대립과 충돌로 향하는 패권 경쟁을 가위, 바위, 보의 게임처럼 대륙과 해양 사이 반도의 존재를 회복하고 강화시켜 삼항순환의 상생 패러다임으로 이끌어가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제 생각만이 아니라 자크 아탈리(프랑스 미래학자·전 유럽부흥개발은행 총재)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유럽연합(EU)처럼 아시아공동체가 생기게 되면 베이징(北京)이나 도쿄(東京)가 아니라 서울에 그 본부가 설치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름은 사고(思考)의 집이죠. 그래서 저는 동아시아란 말 대신 한중일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한국인의 역할이 충돌을 상생으로 향하는 비전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불선 삼교 일체와 융합을 이야기한 고운 최치원 선생의 접화군생(接化群生)의 비전이지요.”

―정부나 정치권이 우리의 생존이 걸린 한·중·일 문제에 예측과 대비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구심도 듭니다.

“중국이 우크라이나에서 폐선을 사들였을 때 정치계는 물론이고 언론도, 학계도 주목한 사람이 없었지요. 그러나 그것이 초음속기가 발진할 수 있는 항모로 구축돼 남중국해의 분쟁해역에 출현했을 때, 그제야 우리는 자다가 깬 사람처럼 야단들을 합니다. 나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가 나기 8개월 전 아프리카에서 에볼라가 발생했을 때 이머징 바이러스(emerging virus)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글을 신문지상에 발표했지만 그러나 누구도 주목하는 사람이 없었지요. 메르스 사태가 일어나자 그제야 온 나라가 패닉 상태에 빠졌지요. 북핵도 예외는 아닙니다. 중국과 북한의 관계에 대해서도 우리는 미리 그런 사태가 올 것을 알았어야 해요.”

―한·중·일의 비교문화 연구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중국 사람이 좋아하는 꽃은 모란, 일본은 벚꽃, 한국은 무궁화지요. 다 다르지만 3국을 이어주는 꽃이 하나 있어요. 매화예요. 아무런 통일성이 없는데 매화는 통하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세 나라를 비교해, 의자가 세 다리를 가져야 안전하듯이 문화적으로 공통의 것을 찾는 게 시작이에요. 값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게 많아요. 그게 지식인의 역할이죠. 공통의 문화기반을 가짐으로써 패권 없는 아시아를 만들고 중국, 한국, 일본이 상생할 수 있는 것이에요. 최근에 ‘한중일 공통 808자’를 선정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자화자찬 같지만 중요한 일을 한 것이지요. EU가 왜 EU가 됐어요? 정치, 경제가 만든 게 아니고 문화였어요. 한·중·일 공통의 기반을 만드는 저수지를 만들어야지. 물을 끌어다가 논에 주느냐, 밭에 주느냐는 정치, 경제가가 할 일이고.”

―말씀하신 김에, 현실 정치에 대해선 거의 언급을 안 했지만, 4월 총선을 앞두고 선량(選良)들이 화급한 국제 정세나 민생보다는 여전히 진보·보수 타령에다가 자리 보존에 급급해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는데, 한 말씀해 주시지요.

“한국 정치는 후미등만 켜고 질주하는 자동차와도 같습니다. 정치인이나 정당의 이슈가 항상 좌클릭이냐 우클릭이냐가 쟁점이 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색깔 논쟁을 하던 때에는 그래도 단순하지만 분명한 선택이 있고, 소박하지만 정치적 정체성이라는 것을 지니고 있었지요. 그런데 요즘은 우클릭하고 좌회전하고, 좌클릭하고 우회전하는 정치인이나 정당이 많아 도처에서 접촉사고나 충돌이 발생합니다. 표를 찍는 유권자들도 헷갈려 ‘멘붕’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큰 선거를 치를 때 당명을 바꾸거나 분당하는 일이 잦은 것도 모두가 후미등의 깜빡이를 잘못 켰거나 위장한 데서 비롯되는 일도 많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길을 가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미래의 비전을 보여주고 밝혀주는 전조등인데 결국 한국의 정치차(車)에는 후미등의 후향성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소돔의 성이 불타고 있을 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위기의 시대에는 미래의 입법자라는 시인이나 예술가처럼 미래를 투시하는 상상력과 창조력을 발휘하는 전조등의 정치가 필요할 것입니다.”

―선생님은 미래를 예측해온 상상과 창조의 아이콘인데요. ‘창조학교’도 만들었고요. 창조성에 대해 말씀하신다면요.

“누구나 창조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창조인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과 안목을 교육하고 육성하는 쪽이 유효할 것입니다. 한국의 비극은 천리마는 있는데 그 천리마를 알아보는 백락(伯樂)이 없다는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잡스를 알아보고 그가 학생 시절부터 도와준 명사들이 있었다는 것을 부러워해야 합니다. 왜 맨토링시스템의 창조학교를 만들었겠어요? 정치가들의 이슈가 김구,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DJ), 노무현 묘에 가느냐, 마느냐예요. 왜 정치가 과거에만 목을 맵니까. TV를 틀어봐도 ‘응답하라’야. 전부 과거 얘기야. ‘응답하라’는 책임을 묻는 거잖아요. 국회 청문회도 ‘응답하라’예요. 응답하라 스트레스에 걸려 있어요. 응답하다라는 것이 영어로 리스폰드(respond)이고, 리스폰서빌리티(responsibility)가 책임이죠. 미래라는 것은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고 질문을 하는 거예요. 질문은 누구도 모르기 때문에 응답할 자가 없어. 그럼 뭐야, 만들어야 해요. 심판의 반대가 창조야.”

―‘창조경제’니 해서 정부와 기업도 창조를 여러모로 고민하는데요.

“미래를 좌우하는 첨단산업은 대개가 다 무지와 규제 때문에 기지개를 켜지 못합니다. 드론과 3D 프린터 그리고 전기자동차의 경우 한국은 중국, 대만보다도 뒤지고 있습니다. 일본만 해도 드론을 날릴 수 있는 특별구를 만들어 요코하마(橫濱)시에서는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도록 숨통을 열어주고 있지요. 만약 우리가 농촌 지역만이라도 규제를 풀어 드론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 논이나 과수원의 병충해 발생지를 정확히 촬영해 그곳에만 농약을 뿌려 비용과 환경오염을 막을 수 있고 청년 일자리도 생깁니다. 농업과 공업이 공생하고 오락산업까지 영향을 주는 일석삼조, 사조의 성과를 낼 수 있지요. 세계 드론 대회를 열면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에 활용해 드론의 예술 문화를 창조하는 중심국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센서가 달린 스마트 젓가락을 휴대전화와 연계하면 매일 먹는 식품의 중금속 오염, 염분과 당분 측정 등 빅데이터를 만들어 운영할 수 있습니다. 당뇨병, 암 등 온갖 식품공해로 인한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이 세계의 의료시스템을 창출할 수 있게 됩니다. 젓가락질을 모르는 구글과 애플을 이길 수 있는 비즈니스 분야가 열리는 겁니다.”

―현재 신자유주의가 빈부격차를 극단으로 몰며 세계를 옥죄고 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도 ‘금수저, 흙수저’에 ‘헬조선’을 말하는 지경입니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금융쇼크 이후 금융 자본주의가 벽에 부딪혔을 때 저는 ‘생명이 자본이다’라는 책으로 ‘산업=금융’의 물질자본주의에서 생명 공감을 밑천으로 삼는 자본주의 문명론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인적자본에서 사회자본 그리고 문화자본과 자연자본으로 확산시키고 통합하는 생명자본 개념을 제창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요즘 폐해가 있다고만 생각하지, 그보다 자본주의의 폐해가 있다고 생각해서 만들어진 환상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잊고 있어요. 사회주의도 있었고, 히틀러, 일본 제국주의도 있었단 말이죠. 그것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그래도 마지막 살아남은 게 자본주의예요. 리먼 쇼크 이후에 삼척동자가 봐도 금융, 돈 먹고 돈 먹는 카지노 자본주의예요. 이걸, 물질자본주의를 생명자본주의로 돌리는 얼터너티비티(alternativity)밖에 없어요. 사람이 살려 하는 것을 살림살이라고 하는데, 나는 살림살이라는 말을 참 좋아해요. 한국 사람은 뭐가 밑천이야? 자식이, 인간이 밑천, 그게 생명사상이에요. 젊은이들이 ‘헬조선’을 말하는데, 해방되고 선진국 대열 10위권 내에 그래도 턱걸이한 나라가 있나요? 상대적으로 평가해야죠. 젊은이들이,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고. 진짜 지옥이 뭔지 가르쳐 줄까요? 포기하는 게 지옥이야. 진짜 지옥은 아무것도 안 하고 죽는 거예요.”

―책에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생각하라)를 말씀하시고 했는데, 죽음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정리하고 계신지요.

“그래서 내가 문학을 하게 된 거예요. 나는 6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돌아가시기 전에도 어머니 코에다 손을 대서 숨 쉬는 거 확인하고 잠들곤 했어요. 6세 때부터 끝없이 죽음의 문제를 생각한 거죠. 죽음 앞에서 권력이 어디 있고, 돈이 무슨 소용인가, 누구나 공평해요. 그러니까 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 안 죽을 순 없지만 죽음 이상의 가치를 만들지 않는 한 사형선고 받은 채로 사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소위 메멘토 모리, 이런 것들이 계속 문학에서 머무르게 한 것이고, 세속적 가치관보다 존재론적 사유를 하게 한 거예요. 마지막에는 종교문제로 들어간 것이죠. 그런데 딸(이민아 목사·2012년 작고)이 죽고, 외손자가 죽고, 나도 몇 번씩 수술을 하고 보니까, 이제는 모색하는 단계는 지났고 나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이제야말로 세속적 언어라도 남겨야겠다고 ‘한국인 이야기’ 10권 저술에 착수한 거예요. 유언을 쓰듯. 난 자서전은 절대 안 써요. 왜 남들이 내 변명 들어주고, 나 잘난 얘기를 해요. 내가 만난 이웃들, 내가 기억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 세상을 열심히 살아왔는지, 그 의미가 뭐였는지에 대해 남기고 싶어요. 내가 일제강점기, 6·25전쟁, 독재시대 등 가혹한 시대를 살았는데, 이제는 감사하고 있어요. 내가 그 시절에 안 살았다면 제국주의가, 전쟁이, 독재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겠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버림받은 세대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하나님이 선택을 하셨구나. 문학 하는 사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삶이었다는 거예요.”

―2007년으로 기억합니다만, 병고를 겪으면서도 밝게 살아가는 따님 이민아 목사를 기쁘게 해주겠다는 마음으로 처음 기독교 신자가 됐지요. 당시 언론들이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제목으로 1면 머리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따님이 세상을 떴는데, 신앙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건 없는지요.

“딸애는 죽을 때도 참 의연했어요. 죽음아, 너 오너라, 한 번 해보자, 웃어가면서. 의사가 3개월 남았다고 하니 씩 웃었어요. 그러고서 책 세 권을 썼잖아요. 나는 인간이 안 죽을 순 없지만 죽음보다 강할 수 있다는 걸 우리 딸에게서 봤어요. 죽기 직전까지도 세계를 긍정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나는 밤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거든. 나는 절대로 지성에서 못 벗어나요. 욥처럼. 처음에는 욥처럼 나도 하늘을 원망했습니다. 세례를 받은 후 외손자가 그리고 내 딸이 내 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세 번이나 큰 수술을 받는 재앙의 연속이었어요.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누구 하나 순탄한 길을 걸었는지. 다 순교했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그런 불행들이 기독교를 천 년의 반석 위에 올려놓았지요. 예수님처럼 아무 죄도 없는 분이 죄인으로 형틀에서 돌아가셨는데 하물며 죄 많은 사람이 겪는 고통은 당연한 것이지요. 그런데도 밤중에도 열 번 속으로 외칩니다. ‘주여 날 버리시나이까.’”

―선생님은 20대부터 글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고, 60년 동안 ‘베스트셀러’를 수없이 냈습니다. 선생님을 만든 것은 무엇일까요?

“어릴 적 서울에서 학교 다니는 형님들이 방학 동안에 가져온 책들을 초등학교 2, 3학년 때 다 볼 수가 있었어요. 남들이 동화 읽을 때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니 뇌세포가 활성화될 수밖에 없어요. 어머니는 밤낮 책을 읽어주셨고, 형들은 방학 때 오면 서울에서 본 영화 얘기를 해줬는데, 호기심에 가득 찬 초등학생이 대학생들과 어울려서 대화를 나눈 거예요. 단순한 독서가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과 창조력을 키우는 기회였어요. 내가 세계 규모의 행사에서 기조연설을 여러 번 했잖아요. 내가 독서만으로 배운 거라면 그 사람들 앞에서 말 못해요. 그때의 상상력으로 하니까 상대가 아무리 노벨상을 탄 사람 앞이라도 가능한 거죠. 아버지는 지적 호기심이 많으신 분이었어요. 당시로선 첨단산업, 벤처인 비닐하우스를 하시고 했거든요. 아버지의 지적 호기심에 어머니의 문학적 상상력, 형님들과의 대화가 나를 만들었죠.”

―‘이어령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평생을 산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맞는 말이에요. 내가 하나밖에 없는 삶인데 왜 남을 되풀이해서 살아요. 강박관념이지, 트라우마. 나는 항상 새것을 하지 않으면 못 움직여요. 가령 참치는 헤엄을 쳐야 물을 빨아들여 호흡합니다. 그래서 잠을 잘 때도 헤엄을 쳐요. 나한테 있어서 산소라고 하는 것은 창조, 그게 멈추면 죽어. 나는 내 지문이 남들과 다르듯, ‘온리 원(only one)’을 추구했어요. 모방하거나 되풀이하면 나는 존재하지 않죠. 나를 아주 잘 표현했는데. 그게 없었으면 나는 쓰러졌을 것이야. 이걸 나만의 강박관념이 아니라 온 국민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에요.”

―끝으로, 독자들은 선생님이 탄탄대로를 달려온 것으로 보는데, 선생님 자신은 ‘아웃사이더이면서 인사이더로 살아왔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무슨 의미입니까.

“평생 대학교수로, 언론사 논설위원으로, 수많은 위원장, 고문, 장관까지 지냈으니, 사람들은 내가 레드카펫 위를 지난 줄 알아요. 앞서도 얘기했지만, 내가 살아온 시대는 가혹한 시절이었습니다. 대학 등록금을 벌려고 문경에서 영어교사 생활한 건 모르죠. 또 내가 30대에 승용차를 사서 다녔는데, 남들은 내가 과시하는 것으로 봐요. 당시 대학과 언론사를 같이 하며 마감에 맞추려 어쩔 수 없어 차를 산 거예요. 나는 평생을 오해와 편견 속에서 살았어요. 평탄치 않은 길을 걸어왔죠. 더군다나 한국처럼 모든 것이 정치화되고 분파된 데서 외톨이로, 모든 적에게 둘러싸인 곳에서 내 편 없이 살았어요. 이아무개 편이 누구인가 물어봐요. 한 사람도 없어. 그 안에서 손가락 두 개 가지고 팔십까지 살아온 것이 그게 파란만장의 삶이 아니고 무엇인가요. 문단 정치 밖에 있었고, 언론계도 오래 있었지만 나를 언론인이라고 하는 사람 있어요? 대학에서도 학과장도 해본 적이 없어요. 평생 나는 인볼브(involve)된 적이 없어요. 항상 손님처럼 살았어요. 나는 내가 한국인인가 할 정도로 한국을 비판하고 한국 바깥에서 살아오고 그랬어요. 5∼6년 주기로 프랑스, 미국, 일본 등 바깥에 가서 살지 않으면 못 견뎠단 말이지.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거야, 고독한 아웃사이더. 만약 내가 인사이더로 매몰됐으면 지금 평범한 늙은이, 글 써서 돈 몇 푼 벌어 집 한 채 자식들한테 물려주는 많은 사람 중 하나였을 거예요. 남들은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고 하지만 나는 반대예요. 우물을 파다가 물이 나오면 다른 우물을 팝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우물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생에 대한 갈증 그 자체인 것입니다. 지적 호기심, 충족은 오히려 죽음이지요. 목마르지도 않은 사람에게 물을 퍼마시게 하면 그게 바로 ‘물고문’이에요. 그래서 80세 먹은 피터 팬처럼 살지요.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아이로 살아요.”

인터뷰 = 엄주엽 문화부장 ejyeob@munhwa.com
e-mail 엄주엽 기자 / 문화부 / 부장 엄주엽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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