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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 파산 /
NHK 스페셜 제작팀 지음,
김정환 옮김 /
다산북스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젊을 때는 노후 같은 건 생각 안 하지 않습니까?
매일 바쁘고 매일 즐거웠지요. 그래도 열심히 일해왔는데 설마 이런 신세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지요.”
일본 도쿄(東京) 미나토(港)구에 사는 83세 독거노인 다시로 다카시(田代孝)가 말하는 이런 신세는 ‘노후 파산’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12년간 맥주 회사에 다니다 40대에 독립해 작은 술집을 운영했던 그는 지금 국민연금 최고액인 65만 원과 맥주 회사 후생연금을 합한 월 100만 원으로 생활하고 있다.
일본 독거 고령자 절반의 연금 수입이 100만 원에 못 미치기에 그의 연금 수입이 적은 편은 아니지만 집세, 공공요금, 보험료 등을 내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은 20만 원뿐이다. 차라도 한잔 마실 여유도 없으니 친구나 지인과 관계가 끊긴 지 오래됐고 돈을 아끼기 위해 전기는 켜지 못하고, 밥은 하루 한 끼, 아파도 병원에 갈 엄두를 못 낸다.
다시로는 2014년 9월 일본에서 방영돼 큰 반향을 일으킨 NHK 스페셜 ‘노인 표류 사회- 노후 파산의 현실’에 나오는 노후파산자 중 한 사람이다. 취재팀이 시간상 소개하지 못한 사례와 문제점 분석 등을 더해 새로 쓴 르포르타주인 책에는 비참함이 가득하다. 하지만 보고 싶지 않다고 덮어버릴 수 없다. 노인 빈곤율이 49.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인 우리 현실 때문이다. 우리보다 노인 정책이 앞서 있고 노인 빈곤율이 19%인 일본 상황이 이러니 우리는 어떠하겠는가. 게다가 우리 사회의 고령화는 빠르게 진행돼 내년에는 노인 인구 비율이 14%를 넘고, 2026년이면 20.8%에 달해 초고령 사회에 들어선다. 우리에 앞서 초고령사회의 악몽인 노후 파산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일본 사회를 제대로 봐야 하는 이유다.
노후파산 피해자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최선을 다해 살아온,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이들이다. 이들이 노후파산에 이르는 전형적인 과정은 이렇다. 노령이 돼 은퇴한다. 일을 그만두면서 수입원은 연금으로 한정된다. 처음엔 부부의 연금을 합해서든 저금을 헐어서든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부부 중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 연금 수입이 줄어들고, 병이 생겨 의료비 등이 발생하면서 결국 수입으로만 생활해나갈 수 없는 파산에 이르게 된다. 설령 저금이 있다 해도 큰 액수가 아닌 이상 시기를 어느 정도 늦출 뿐 노후 파산을 막을 수 없다. 자녀가 없고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없는 독거노인은 더 어렵다. 일본에서 홀로 사는 고령자가 600만 명을 넘을 기세로 급증하고 있다.
노후 파산은 경제 상황, 고령화, 가족 붕괴, 1인 가구증가, 청년 실업, 사회보장제도의 구멍 등 사회·경제 현상들이 맞물려 벌어지기에 확산에 가속도가 붙는다. 먼저 일본도 우리도 더 이상 고도성장 사회가 아니다. 성장기엔 젊어서 성실하게 일하면 안정된 노후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지난 20년간 일하는 세대의 평균 수입이 꾸준히 감소했다. 세대 수입과 함께 1인당 연금도 감소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초고령 사회가 도래하고 핵가족화와 1인 가구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가족이 노인을 돌보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사회 보장제도가 제 기능을 못 하게 됐다.
더욱 심각한 것은 노후 파산의 사회적 도미노다. 청년 실업과 고용의 질이 나빠지면서 부부가 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집안의 자녀가 직장을 구하지 못하거나 실직해 부모에게 의지하게 되면서 가족 전체가 파탄에 빠지는 경우이다. 부모에 의지해 사는 청년·중년 자녀들은 그나마 부모가 살아 있는 땐 겨우 생활해나갈 수 있지만,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곧바로 파산의 운명이다. 치매 등을 앓는 부모를 돌보기 위해 자녀가 일을 그만두면서 부모와 함께 공멸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일본에선 부모를 간병하기 위해 일을 그만두는 사람이 매년 10만 명 가까이 된다. 이들은 부모가 쾌유하거나 혹은 세상을 떠난 뒤 다시 일을 하려 하지만 재취업이 쉽지 않다.
이 같은 노후 파산 도미노의 악몽 때문에 2014년 스페셜 프로그램이 방영됐을 때 제일 뜨겁게 반응한 세대는 당사자인 고령자가 아니라 그 아랫세대인 40·50대였다. “비정규직인 저는 연금 미납자입니다. 결혼도 못 한 제게 찾아올 미래는 노후 파산뿐입니다.”(40대 남성) “전업주부로 시부모님을 돌보고 있어요. 제겐 늙은 저를 돌봐줄 아이가 없답니다. 노인 복지 시설에 들어갈 돈도 모아놓지 못했는데, 결국 집에서 외롭게 죽는 수밖에 없나요?” (50대 여성) 이런 목소리들이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특히 한국 부모들은 자식의 결혼 비용이나 교육비 때문에 노후 자금을 써버리기에 상황은 더 어렵다. 책은 ‘장수의 악몽’이라고 이름 붙인 현실을 똑바로 보라고 한다. 노후 파산으로 인해 지불해야 할 사회적 비용이 어마어마하기에 개인들에게는 노후 대비를 빨리 시작하라고, 사회적으로는 급변하는 환경에 맞게 사회보장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우리에게도 똑같이 필요한 조언이다. 그런 점에서 책은 우리에게 유의미한 논의와 시급한 대응의 출발점이다.
최현미기자 chm@munhwa.co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