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슈=신종철 기자] 내가 법조인인데 “좋은 변호사를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기분이 어떨까? 물론 난감할 것이다. 법조인의 양심을 걸고 당당하게 소개시켜 줄 수 있는 ‘좋은 변호사’, ‘최고의 변호사’는 있는 것일까?
‘소년등과’라 할 수 있는 스물두 살에 제26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 20년과 교수 10년 등
법조인생 30년째인 박찬운(52)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최고의 변호사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쓴 글이
일반인들은 물론 법조인들에게도 호평을 받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인권변호사로 활동해온 박찬운 교수는
▲공감능력이 뛰어난 변호사
▲출중한 실력 있는 변호사
▲용기 있는 변호사
▲사건에 집중하는 변호사
▲발 넓은 변호사 등
5가지로 ‘좋은 변호사의 장점’을 분류하면서,
각 분야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출중한 변호사들을 소개하며
비화까지 담았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이 모든 장점을 갖춘 변호사가 ‘최고의 변호사’이겠지만, 그 전부를 가진 변호사는 없다고 한다. 어디에서도 접해 볼 수 없었던, 실전비화가 담긴 그가 말하는 변호사들의 세계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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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변호사로 활동해온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사진=페이스북) |
◆ <최고의 변호사, 그는 누구인가>
박찬운 교수는 10일 페이스북에 <최고의 변호사, 그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글을 올렸다. 그는 추석을 맞아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보내는 ‘선물’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먼저 “법조계 들어온 지 30년이다. 그렇다 보니 지금 변호사 일을 안 해도 지인들로부터 종종 좋은 변호사를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난감하다. 좋은 변호사라? 그게 어떤 변호사인가?”라며 말문을 열었다.
박 교수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 양심을 걸고 이런 변호사야말로 제대로 된 변호사니 당당히 추천할 수 있는 변호사, 그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생각해 보니 몇 부류의 좋은 변호사가 떠오른다. 그 기준은 변호사가 가져야 할 품성 혹은 덕성이었다”고 자신만의 기준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몇몇 변호사 중에는 아래 기준에서 제시하는 여러 품성을 동시에 갖기도 했지만, 어떤 변호사도 그 전부를 갖진 못했다. 만일 그 전부를 가졌다면 당사자(의뢰인)로서는 생애 최고의 변호사를 만나는 것이겠지만, 그 변호사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멋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며 “세상사에서 완벽함은 없다. 완벽함은 그 자체로 허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찬운 교수는 ‘좋은 변호사’를 다섯 가지 부류로 장점을 나눴다.
첫째는 ‘공감능력이 뛰어난 변호사’다. 박찬운 교수는 “변호사 중에는 유난히 당사자의 아픔을 함께 하는 이가 있다. 당사자의 아픔을 타인의 그것으로 보지 않고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동분서주하는 변호사”라면서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 팽목항에 내려가 유가족과 슬픔을 같이 하는 몇몇 변호사들이 대체로 이 그룹에 속하는 변호사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변호사들이 맡는 사건은 돈이 되는 사건이 아니다. 반드시 법정에 가서 승소한다는 보장도 없다. 솔직히 말하면 돈도 되지 않고, 법정에 가도 성공하긴 쉽지 않은 사건들이 이들 변호사들에게 온다”며 “사실 이런 변호사들이 만나는 당사자도 사정을 잘 알기에 사건을 맡은 변호사들에게 승소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저 나의 아픔에 동참하면서 나의 이야기를 대신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강하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그러니 이들 변호사들은 어쩜 다른 변호사들 보다 마음은 편할지도 모른다”며 “돈을 많이 받고 사건을 처리하는 변호사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른다. 그것은 사건처리에서 당사자의 뜻대로 사건이 끝나야 한다는 부담감이다. 이 부담감은 일반인이 모르는 변호사들만의 고민이자 스트레스다”라면서 “그런데 이들 변호사들은 최소한 이런 부담감에서 해방되기에, 그 어떤 변호사보다 당사자와의 관계가 떳떳하다”고 비교했다.
박 교수는 “이런 변호사들은 사회적 소수자 약자의 친구들이다. 이런 변호사들이 있기에 세상은 살맛이 난다”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들이 현재 세월호 법률지원단 등 이런 일을 맡고 있다.
인권변호사로 활동해온 박찬운 교수는 “내가 보기엔 이들은 비록 돈을 많이 벌진 못해도 굶지는 않는다. 적은 돈을 가져오지만 이들을 찾는 이들이 꾸준히 있기 때문”이라며 “욕심을 비우면 이런 변호사도 해 볼 만하지 않겠는가?”라고 후배들에게 권유했다.
◆ “출중한 실력 있는 변호사”
두 번째는 ‘출중한 실력 있는 변호사’다. 박찬운 교수는 “변호사 중에는 법리에 밝은 변호사가 있다. 걸어 다니는 판례라고 불리는 변호사다. 요즘은 그런 변호사 이름을 듣기 어려운 데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분들이 몇 분 계셨다”면서 한 예로 고인이 된 유현석 변호사를 거명했다.
박 교수는 “돌아가신 유현석 변호사님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 때 노 대통령 변호인단의 좌장을 한 분이었는데, 법조계에서는 법리에 밝은 분으로서 전설적인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이 분은 어찌나 기억력이 좋은지 50년대 초 판례와 법령에 이르기까지 무불통지(모르는 것이 없음)였다”며 “특정 판례를 이야기할 때는 그 판결을 선고한 판사를 거명하면서까지 판사의 무능함을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기억했다.
박 교수는 “후배 변호사들은 이분과 이야기할 때면 그저 입을 열고 찬사를 연발하거나,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면서 “아니 저 연세에 저런 것을 어떻게 아실까? 아니 저게 몇 년 전 일이야, 내가 태어나기도 전 일인데, 저분은 그것을 어제 일어난 것처럼 말씀을 하니... 도대체 나는 뭐야, 이래 가지고 변호사 생활할 수 있겠나...”라고 자성할 정도였다고 극찬했다.
박 교수는 “사건 중에는 법원에 가도 법리논쟁이 예상되는 사건이 있다. 이런 사건은 바로 이런 출중한, 실력 있는 변호사가 제격”이라며 “법조계는 의외로 좁아 이런 분들이 사건을 맡으면 법원에서도 긴장을 한다. 자칫 판사들이 법리판단을 잘못하면 그 사건은 여지없이 대법원으로 갈 것이고 거기에서 판사의 법리판단이 심판될 테니 긴장을 안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 유현석 변호사는 누구길래?
여기서 잠깐. 유현석 변호사는 법조계뿐만 아니라 천주교에서도 높이 평가받기에 잠시 소개했다.
유현석 변호사는 1927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1945년 경성대학 법학과에 들어갔으나 이듬해 하향했다. 이후 서산법원 서기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1952년 제1회 판사 및 검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했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관해 법무장교, 육군고등군법회의 검찰관, 서울고등법원 판사,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등을 지낸 후 1966년 한국 최초의 로펌인 ‘제일합동법률사무소’를 열고 변호사의 길에 들어섰다.
1970년대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80년대 광주민주화항쟁, 90년대 강기훈 유서 대필사건 등 굵직굵직한 변론으로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천에 분투했다.
1987년부터 1991년 2월까지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이사를 역임했으며, 1991년 서울지방변호사회 법률실무연구회 운영위원장에 선임됐다. 1999년 대한변호사협회 총회의장으로 취임했고, 민변 원로회원으로, 언제나 후배 변호사들에게 든든한 배경으로 큰 힘을 실어줬다.
또한 1950년 서산성당에서 유봉운 신부님에게 세례(사도요한)를 받은 이후, 1982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회장, 1988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를 맡아 활동했다. 그리고 천주교인권위원회를 창립한 선각자였다.
뿐만 아니라 1992년 한겨레신문 자문위원장을 비롯해, 1997년 경제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1999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고문, 2002년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이사장 등 여러 사회단체의 좌장으로 활동했다.
19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으며,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사건의 대통령 법률 대리인단 대표로 헌법재판소 법정에 선 것이 마지막 재판이 됐다. 유현석 변호사는 탄핵 기각 소식을 듣지 못하고 2004년 5월 별세했다.
천주교인권위원회는 유현석 변호사가 돌아가신 것을 ‘선종’이라고 표현한다. 유 변호사가 평생을 실천하는 신앙으로서, 의로운 인권변호사로서, 약자들의 벗으로서의 한결같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족이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출연한 기부금으로 2009년 5월 천주교인권위원회 유현석 공익소송기금이 출범했다. 천주교인권위원회는 이 기금으로 공익소송사건을 선정해 소속 변호사들이 소송을 수행하고 있다.
유현석 변호사의 유족으로는 법원도서관장, 서울서부지방법원장, 서울가정법원장 등을 역임한 유원규 법무법인 광장 대표변호사가 있다. 유원규 변호사는 현재 대한공증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유현석 변호사에 대한 자료는 천주교인권위원회의 도움을 받았다.
◆ “용기 있는 변호사”
세 번째로 ‘용기 있는 변호사’다. 박찬운 교수는 “변호사가 다 용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며 “대부분의 변호사들은 티가 안 나게 행동한다. 조용히 사건을 수임해서 조용히 법정에 나가 변론하고 결과를 기다린다”고 말했다.
그는 “사건을 성공리에 끝내고서도 성공보수를 못 받는 변호사도 있다. (성공보수를 주지 않는) 당사자와 다툼을 벌이면 결국 피해자는 변호사라는 생각에 울며 겨자 먹기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변호사가 의외로 많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사건 중에는 때때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사건이 있는데, 과거에는 세무사건도 그 중에 하나였다”며 “세무서 눈치를 보는 것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으니 자칫 내가 맡은 사건이 세무당국의 심기를 건드리면 내 사무실 세무조사 받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을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찬운 교수는 “시국 공안사건은 과거는 물론 현재도 대표적으로 용기가 필요한 사건”이라며 “레드 콤플렉스(극단적 반공주의)가 유난히 강한 사회에서 살다보니 그런 사건을 변호하는 변호사들마저 좌파로 몰려 곤욕을 치르곤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70년대는 변호사가 법정에서 변호하다가 바로 감옥에 간일도 있다”며 “민청학련 사건을 변호한 강신옥 변호사가 대표적 인물”이라고 밝혔다.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은 1974년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에 의해 학생운동을 하던 180명이 구속 기소된 사건이다. 학생들은 법정에서 “순수한 학생운동”이라고 주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들은 비상군법회의에서 사형, 무기징역, 징역 20년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민청학련 사건 변호를 맡은 강신옥 변호사는 변론 중에 “피고인석에서 그들과 같이 재판을 받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차리라 피고인석에 서겠다”라고 무죄를 항변했다가 세계 사법사상 최초로 법정에서 변호인이 구속되기도 했다. 이에 강신옥 변호사를 변호하기 위해 무려 93명의 변호인단이 조직되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인 2005년 ‘국정원과거사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민청학련은 대한민국 최대의 학생운동 탄압사건”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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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훈 전 대법원장 | 2008년 9월 26일 이용훈 대법원장은 ‘대한민국 사법 60주년’ 기념식에서 민청학련 등의 사건을 거론하면서 “권위주의 체제가 장기화되면서 법관이 올곧은 자세를 온전히 지키지 못해 국민의 기본권과 법치질서의 수호라는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고, 그 결과 헌법의 기본적 가치나 절차적 정의에 맞지 않는 판결이 선고되기도 했다”며 “사법부 구성원들은 이런 불행한 과거가 사법부의 권위와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에 적지 않은 손상을 줬음을 잘 알고 있다”고 과거사를 고백했다.
이 대법원장은 그러면서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되찾고 미래를 향해 새로 출발하려면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도덕적 용기와 자기쇄신의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대법원장으로서 과거 우리 사법부가 헌법상 책무를 충실히 완수하지 못함으로써 국민에게 실망과 고통을 드린 데 대해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물론 당시 사법부의 과거사 반성은 높이 평가 받았다. 이에 검찰에게도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지만, 검찰은 과거사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시 돌아와, 박찬운 교수는 “정권과 관련된 사건은 말할 것도 없다. 대통령을 상대로 하는 사건이나 정치권의 실세를 상대로 소송을 벌일 때는 사건 수임과 처리과정에서 더욱 신경이 쓰인다”며 “혹시나 괘씸죄에 걸려 이 정권 내내 고생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사건은 통상 민변 변호사들이 잘한다. 이들이 이런 사건을 잘 맡는 것은 그들의 생각이 진보적인 것도 있지만 역시 조직력이 한 몫 한다”며 “민변의 수백 명 변호사들은 암묵적으로 그들의 잠재적 지원군이다. 따라서 이들 동료가 자신을 지켜보고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이들을 용기 있는 변호사로 만든다”고 평가했다.
박 교수는 “최근 국정원의 간첩조작사건을 담당한 민변 변호사 J, K 변호사를 개인적으로 만나 보라. 한 성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매우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그런 분들이 국정원과 한판 승부를 벌렸다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라고 극찬했다.
그렇다면 J, K변호사는 누구일까.
이 글을 본 서울지방변호사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김한규 변호사는 댓글로 K변호사에 대해 ‘김용민 변호사’라고 추측하며 “훌륭한 변호사”라고 말했다.
박찬운 교수가 언급한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사건 민변 변호인단은 6명의 변호사로 구성됐다. 장경욱 변호사, 천낙붕 변호사, 양승봉 변호사, 김용민 변호사, 김진형 변호사, 김유정 변호사다. J변호사는 이니셜로 볼 때 장경욱 변호사가 특정된다. K변호사는 3명인데, 아무래도 언론 인터뷰에 많이 비춰져 잘 알려진 김용민 변호사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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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부터 양승봉 변호사, 김용민 변호사, 유우성씨, 천낙붕 변호사, 장경욱 변호사 |
◆ 용태영 변호사는 왜?
박찬운 교수는 “민변 변호사만이 용기 있는 변호사는 아니다”며 “그런 조직이 없이 홀로 사무실을 운영하면서도 타고난 반골기질과 재야정신으로 똘똘 뭉쳐진 변호사도 있다”면서 “돌아가신 용태영 변호사가 대표적인 분”이라고 소개했다.
박 교수는 “이 분도 대한민국 법조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분인데, 그 기개가 대단했다”며 “법조 선후배들은 이 분을 ‘천하의 용 변호사’라 불렀다”고 전했다.
박 교수는 “이 분이 활동할 때가 박정희, 전두환 두 독재자가 기승을 부릴 때인데, 곧잘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는 기발한 소송을 많이 했다. 이 분이 청와대 근처에서 사셨는데, 당시 경호실에서 이 일대에 사는 주민들을 대통령 경호한답시고 많이 괴롭혔다고 한다”며 “그런데 이 분만은 건드리지 못했다. 워낙 세게 나오시는 분이라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도 피해 갔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용태영 변호사에 관한 일화도 소개했다. 박찬운 교수는 “불교계는 이 분에게 감사해야 한다. 불탄일(석가탄신일, 음력 4월8일)이 공휴일이 된 데에는 이 분의 역할이 컸다”며 “이 분이 불자였는데, 성탄절은 공휴일임에도 불탄일이 공휴일이 아니었다. 이분은 여기에 분연히 이의를 제기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그것도 기발한 착상을 통해서다. 성탄절을 공휴일을 지정한 것이 평등권을 침해한 위헌, 위법이라 주장했던 것이다. 소송결과로 불탄일이 공휴일로 지정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소송이 위력을 발휘한 것은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또한 “이런 일도 있었다. 지금 서초동 서울법원종합청사는 권위주의 시대의 전형적 건축이다. 판사 위주로 만들어져 변호사나 민원인들에게는 대단히 불편하다. 내부구조가 마치 미로와 같아 법정을 찾아다니기가 불편하고, 89년 개청 이래 십 수 년 동안은 법정을 올라가는 민원용 승강기마저 없었다”며 “이 분은 이것을 소송으로 가져갔고, 급기야는 이 공사에 책임 있는 법관들이 변호사로 개업하는 것을 막는 변호사회의 특별결의를 주도하기도 했다”고 용태영 변호사를 소개했다.
◆ “사건에 집중하는 변호사”
네 번째로 ‘사건에 집중하는 변호사’다. 박찬운 교수는 “변호사의 당사자에 대한 일차적인 의무는 성실의무다. 사건을 수임하면 당사자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며 “그러나 실제상황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많은 변호사들이 당사자들로부터 성실성에서 의심을 받는다. 재판기일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불출석을 하기도 하고, 기한을 놓쳐 소장이나 상소장을 제출하지 못해 당사자들에게 치명적 피해를 입히는 일도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당사자들은 자신의 사건에 최선을 다하는 변호사를 만나길 원한다. 내가 아는 L 변호사, 이 분은 그리 알려진 유명 변호사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지난 30년 동안 만난 변호사 중, 적어도 사건의 집중도에 있어서만큼은, 이분을 능가하는 이를 만나지 못했다”며 L변호사를 소개했다.
그는 “L변호사는 사건을 맡으면 자나 깨나 그 사건 생각만 한다. 심지어는 밤에 자다가도 그 사건 관련 꿈을 꾼다고 한다. 그러면 바로 깨서 서재로 달려가 꿈결에 생각한 아이디어를 글로 옮겨 놓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제 밤 꿈은 통상 잊기 때문에 그런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참 범접하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어 “L변호사는 사건 성공률에 있어 동료 변호사 들 중에서도 소문이 날 정도로 높다. 그는 동료 변호사를 만날 때마다 사건에 대해 자문을 구한다”며 “허물없이 지내는 판사 동기는 그의 법률자문역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그 분야 최고의 현직 판사도 사석에서 만나면 그의 사건 자문을 해주어야 할 정도니 사건을 수임하면 성공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L변호사의 열정을 인정했다.
박 교수는 “내가 십여 년 전에 (교수로 가며) 변호사를 그만 두면서 담당했던 몇 건의 사건도 모두 그에게로 갔다. 당사자들에게 욕 안 먹고 사건에서 손을 떼기 위해서는 확실한 변호사를 소개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 때 머릿속을 스친 이가 바로 L변호사였다”고 말했다.
◆ “발 넓은 변호사”
다섯 번째는 ‘발 넓은 변호사’다. 박찬운 교수는 “우리나라 법조계의 고질적인 폐습이 전관예우다. 이것을 근절하기 위해 여러 제도를 두고 있지만 아직도 국민 대다수는 이 문제를 법조계의 최대의 부조리로 인식한다”며 “전관예우가 판을 치는 이유는 사건처리가 변호사에 따라 (검찰과 법원에서) 달리 취급된다는 불신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그런데 전관예우는 없어져야 할 관행이지만 어느 변호사가 인맥을 잘 관리해 동료 법조인들 사이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것까지 막을 방법은 없다”며 “아마 당사자들이 사건을 맡긴다면 이런 변호사가 선호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아는 M이라는 변호사. 그는 아주 사람 좋고, 예의 바르기로 소문난 분이다. 이 분은 주변 법조인들에게 특별히 인기가 있는데, 연수원 동기생 300명 대부분에게 생일 때면 꼭 메일 한 통을 보내는 사람”이라며 “평소에는 특별히 교유가 없더라도 생일 날 메일 박스를 열면 한 통의 편지가 와 있다. 그동안 격조했음을 사과하면서 오늘 특별한 날,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를 해 온다. 누가 이런 사람을 싫어하겠는가”라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이렇게 주변 지인을 챙기는 것은 인간관계에 대한 그의 치열한 자세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며 “M변호사는 정치인이 되어도 잘 할지 모른다. 사람과의 관계망을 잘 만드는 사람들이 정치는 하는 법이니 M변호사야말로 제격이 아닌가”라며 그의 열정적인 자세를 인정했다.
그러면서 “여하튼 M변호사는 이런 방식으로 동기생, 선후배를 대한다. 그러니 그에게 사건이 많은 것은 당연지사!”라면서 “나도 가끔 강의실에서 예비 법조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서 주변사람을 성심으로 대하라고 조언한다”고 덧붙였다.
박찬운 교수는 “로스쿨 학생들, 그들은 앞으로 험난한 법조현실에서 살아가야 한다. 얼마나 어렵겠나! 하지만 이런 인간관계에서의 성실성만 제대로 터득한다면 법률가로 사는데 밥은 굶지 않으리라 확신한다”며 “이것은 선배가 후배에게 주는 간곡한 조언이다”라고 마무리했다.
◆ 대한변협 총회의장 소순무 변호사,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공감 표시
박찬운 교수의 장문의 글에 일반인들은 물론 법조인들도 “좋은 글, 멋진 글, 잘 읽었다”는 등의 수많은 댓글이 달리며 공유가 이어지고 있다.
대한변협 총회의장으로 최근 대한변호사협회의 ‘법의 지배를 위한 변호사대회’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소순무 변호사도 “좋은 글”이라며 “법조인에 대한 신뢰가 바닥이지만 훌륭한 선배, 동료도 많습니다. 사표가 될 분들의 행적을 잘 정리해 공유하는 것도 우리의 책무라고 생각한다”는 의견을 달았다.
소순문 변호사는 부장판사 출신으로 대한변협 부협회장, 총회의장 등을 지냈고, 현재 법무법인 율촌 대표변호사를 맡고 있다. 변협 총회의장은 변협회장과 다른 직책이다. 변협회장은 대한변호사협회의 대표성을 갖는다. 총회는 변협 대의원으로 구성되고, 총회의장은 대한변협의 최고의사결정기관인 총회의 수장으로 국회로 말하자면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자리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아주 생생한 내용과 교훈으로 꽉 차 있다”며 “학생들에게 보라고 하겠다”며 큰 공감을 표시했다.
◆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누구?
박찬운(52) 교수는 스물두 살 때인 1984년 제26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률가가 됐다.
20대 후반과 30대의 대부분을 변호사로서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 부위원장,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사무차장과 난민법률지원위원장, 서울지방변호사회 섭외이사 등을 맡았다.
박 교수는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시국사건 연루 양심범, 수용자 그리고 사형수의 인권을 위해 변호하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40대 중반에는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정책국장으로서 사형제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 인정 등 국가인권위의 대표적 인권정책 권고에서 실무책임을 맡았다.
현재는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