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스포츠-북한 축구-등에 대해!
페이지 정보
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838회 작성일 2009-05-04 16:58본문
4월1일 남,북한 축구 대결을 앞두고 다음 한국과 북한의 숙명의 44년을 기고하오니 일독을 권유해 봅니다. 2009년 4월1일은 전세계적으로 국제축구연맹 피파가 공인한 국가대항전 즉 a매치 day입니다. ㄱ.북한은 1966년 영국 런던 월드컵-축구 종주국인 영국은 이 당시 월드컵 80년 에서 단 한번 우승 그것도 자기 홈그라운드에서 심판의 도움도 약간 받으면서 우승한 대회임-대회에서 이탈리아를 16강 결정전에서 예나 지금이나 세계 3대 강팀중의 하나인 빗장수비의 대명사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북한 축구 영웅 박두익의 상대 오른쪽 에서 반대편 골포스트안으로 들어가는 그라운드 강슈팅으로 행운의 1득점을 끝까지 지켜 8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고 이어 8강전 유세비오-에우제비오의 포루투갈팀을 맞아 전반 한때 3대0의 압도적 리드를 지켜 당시 북한으로서는 영원히 깨지지 않을 4강 진입을 목전에 두고 위의 수퍼스타 에우제비오의 강슛을 견디지 못하고-4골 기록함-3대5로 대역전패를 당하는 너무 큰 아쉬움을 북한측은 남긴 대회였음! ㄴ.우리 남한 대한민국은 그 1년전인 1965년 북한에 질 것이 확실시 되어 아예 예선전 출전도 포기할 정도였음! ㄷ.이는 질것을 두려워한 -당시 남북 이데올로기 대결은 매우 심각한 상황-대한축구협회가 정부측과 상의하여 아예 불참하였고 이는 북한에 지면 그 후폭풍이 겁났던 시절의 얘기였으며 한국 축구사에 씻을 수 없는 불명예로 기록되고 있음! ㄹ.위의 치욕보다 10여년전 1956년및 1960년 최고 권위의 아시아 축구 선수권대회-4년마다 열리는 대회로 지금도 아시아내 최고 권위의 대회로 명성이 있음-에서 연속우승하는 등 그 무렵에는 잘나가는 한국 남한 축구 였는 데 1960년 우승이후 선수들의 자만심과 축구협회등의 부패등으로 급격히 쇠락의 길을 한동안 걸었고 국제대회 참패를 거듭한 적도 있었음! ㅁ.북한이 1963년-런던 월드컵 북한 8강 3년전-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1회-제3세계 신생국가 대회인 =소위 가네포 대회(첫글자 약자의 명칭)에서 북한이 당시 강팀 이집트(당시에는 아랍공화국)와 공동 우승을 북한이 차지하였으나 ㅂ.남한측에서는 이를 크게 취급하지 않고 그냥 얕보기 까지함! ㅅ.그러나 그 1년뒤인 1964년 일본 동경올림픽에서 한국이 무려 10대 1로 아랍공에 대패해 버리면서 남,북한의 축구 실력차이는 명백해졌다 ㅇ.도쿄 올림픽 축구 대패이후에 위에 언급한 1966년 런던 월드컵 예선 불참도 -북한이 두려워-이 대패이후 결정되었고 그 때부터 북한이 나오는 대회는 한동안 모두 불참이나 회피하였다. ㅈ.1974년 이란 테헤란 아시안 게임에서는 북한과의 토너멘트에서 만나지 않으려고 예선전에서 일부러 다른 나라에 져주는 추태도 불사하였음!----그리하여, 1970년대 초반까지 십년이상 북한 공포증은 계속되었고 남북대결이 한동안 없게된 이유가 되었음! ㅊ.최초의 남북 공식 국가대항전격인 a매치---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이뤄짐--남북은 서로 사력을 다했으나 0대0 무승부를 이룬 바 있음! ㅋ.그 무승부이후 지금까지 31년동안 13번 대결에서 5승7무1패를 기록하고 있으며 남한측의 유일한 패배(1대2패배)는 1990년 10월11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통일 축구대회 -홈에서는 나중에 1대0으로 이기게 됨--어웨이 경기라서 일부러 친선경기이므로 느슨하게 져주었다고 봄이 정확함! ㅌ.오늘의 남,북한 축구 대결은 201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개최의 -일부는 개최가 불투명하다는 견해도 다소 있음!- 최종 예선 b조 1위및 2위를 다투는 중요한 일전이며 무승부하면 둘다 동반 진출도 고려해 볼 수 있으나 재수없으면 둘 중 하나 사우디에게 덜미를 잡힐 개연성 다소 있으므로 사력을 다해 서로 승리를 노릴듯합니다. ㅍ. 남한은 7연속 월드컵 진출의 금자탐을 이룰 절호의 찬스이며-사실 7연속 월드컵 진출을 이룬 나라는 지금까지 7개국 안팎으로 전세계 축구하는 200여개 나라중 극소수 나라임을 알면 우리나라도 참 저력있는 나라라고 자부해도 무방합니다. ㅎ.최근 북한은 미국등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인공위성이 아니 미사일 발사 실험-대륙간 탄도탄-icbm-엄청나게 고난도의 실험임-을 목전에 두고 내부 단속을 하고있는 와중이며 아마도 며칠뒤에는 유엔안보리및 혈맹 중공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발사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문가들-아마도 60%이상일 듯-의 예상입니다 이 실험은 적어도 3천만 달러가 드는 고비용인 실험인데 최근 보도에 의하면 북한은 연간 15억달러-북한으로서는 어마어마한 액수임-의 무기 수출로 지배층을 연명시키고 있다고 합니다-하부층은 자구책으로 텃밭갈이등 호구지책은 겨우 가능은 하다고 하여서 유엔등에서 식량 원조를 안하면 지배층이 굶어 죽는 다고 하는 데-공산당원 포함 약 440만명 추정- 2200만명의 인구중 약 상위 20% 추정됨-필자주- ***최선을 다하는 페어플레이와 남북 동반-북한은 44년만의 경사가 됨-의 구도를 연출하여 남,북관계에 숨통을 틔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이 자리를 빌어 한국일보 논설위원 이계성님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4월1일자 기고문임 저 한준구의 기고는 맨끝 부분에 주로 있고 중간중간에 조금씩 삽입한 것도 있음을 참고로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다음은 저의 순수 30여년 축구 관전 내공에서 나온 창작 글입니다 축구팬들에게는 강추 합니다. 기실, 북한 남자 축구는 이미 1966년 영국 런던 월드컵에서 16강전에서 이탈리아를 박두익의 결승골로 1대0으로 신승하고 8강전에서 유럽 최고의 수퍼스타인 에우제비오의 포르투갈팀을 전반 한때 3대0 의 압도적 리드를 하다 전반 27분이후 에우제비오에게 4골을 먹고 5대3으로 분패한 적이 있었다. 1966년 당시 이탈리아 국민들은 몰래 새벽 1시에 귀국하는 축구팀을 기다려 썩은 계란 세례를 준 적도 있다고 하며 특히도 그해에는 남한에서는 66년 6월25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한국의 프로 복싱 첫 영웅 김기수선수가 이탈리아의 미남 복서 니노 벤베누티를 불러들여 홈에서 히트 앤드 클린치 작전으로 힘겨운 승리를 거둬 한국 최초의 세계챔피언에 등극하여 당시 이탈리아 국민들은 그해 이탈리아는 남한에게 엊어 터지고 북한에게 발로 채였다 라는 자조섞인 유머가 한때 유행하였다고 하며 10년전 홍콩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이탈리아인도 그것을 확실히 기억한 바있어 다소 이채로웠던 기억이 납니다. 프로복싱은 챔피언 김기수-아시아에선 적수가 없었음- 이후 8년뒤인 1974년 7월4일 남아공의 더어반에서 풍운아 홍수환선수가 홈링의 아놀드 테일러를 3번 다운시킨 끝에 판정승을 거두고 한국 두번째의 세계 챔피언에 오르게 되고 축구의 경우 1966년이후 무려 36년이 지나 이번에는 한국(남한)에서 안정환의 결승골로 월드컵 16강전에서 또다시 이탈리아를 꺾는 이변을 연출하여 전세계의 관심을 끈 바도 바로 엊그제 갖습니다.-안정환은 이 승리로 속좁은 이탈리아 프로 구단주로 부터 방출 통보를 받는 개인적 아픔을 겪기도 하였지요.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축구...축구의 국가대항전은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제의 북한과 우리나라...의 축구선수의 기량의 차이는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직까지 고정화된 축구의 전술로 북한팀은 일변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피파랭킹이나 해외파 선수가 많은 우리나라가 객관적으로는 유리하지만..우리의 고정화된 축구전술로는 북한을 이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상대에 따른 전술분석과 그에 따른 전술을 택해, 선수을 운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은 수비형태의 전술로 나오다가 한번에 역습의 찬스를 놀리는 전형적인 수비형태의 방법을 구사하는 팀입니다.. 그 사실은 아마 축구를 보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나라도 그에 따라 선수운용을 해야 했어지만..그렇지 않았습니다. 북한에 홍영조, 정대세처럼 빠른 공격수가 역습을 노리게에 우리나라는 발 빠르고 몸싸움이 강한 수비를 운용해야 했으며, 수비형태의 북한에 중거리 슛을 잘하는 공격수 투입과 헤딩 능력이나 세트 풀레이가 가능한 선수를 선발했어야 합니다. 물론 감독의 입장에서 그동안 손을 맞추어온 선수를 기용해서 효과의 극대화를 노렸겠지만 그게 않될시 빠른 교체로 전술의 변화가 필요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축구의 원로들이나 프로감독축구감독들은 하나 같이 요즘축구선수는 더노력을 해야하는데..너무 빨리 텔레비전이나 메스컴등에 접근하고 여자를 너무 빨리 만나는등...아쉬운 일들이 많습니다.. 진정한 프로 선수는 항상 준비하고,, 오래 롱런을 해야지 진짜 프로 선수가 아닐까 합니다 진정 프로 선수들이 되기위해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정신력으로 단련해 진정한 선수가 되서 우리나라 축구의 한획이 되길 기원합니다. 다시 축구로 돌아가 보면 1966년 월드컵 8강의 신화를 이룩한 북한 축구는 남한에게는 한동안 공포의 대상이 되어 그 이후 한국은 국제 대회에서 북한과 맞닥칠 경우가 생기면 일부러 시합에 출전을 기피하는 때도 있었지요. 이를 보다 못한 당시 권력의 핵심인 중앙정보부의 김형욱부장은 당시 실업팀이나 대학에서 볼을 잘차는 선수들을 강제로 끌어 모아 양지팀-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정보부의 슬로건에 의거하여-을 급조하여 월급을 두둑히 주고 -당시 아시아의 스타 이회택선수는 당시를 회상하며 대우가 매우 좋았다고 함-해외 전지 훈련을 시키는 등 강팀을 만들어 북한에 대비한 실력 재건에 박차를 가하는 해프닝도 있었지요! 이후 한국축구는 북한 경제수준을 서서히 넘어가기 직전의 1971년경부터 박정희 대통령배 국제 축구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하였고 이때에는 강팀이 버어마(지금의 미얀마)국가대표팀으로 -한국에서는 김호 김정남 수비가 돋보임-이 버마팀은 한국과 대등한 경기로 공동 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고 -독재의 경제 불황으로 버마는 10년뒤에는 완전히 아시아 강자에서 사라짐-1972년부터 아시아의 대스타 차범근이 국가대표 막내로 출전한 이후 이차만,고재욱,황재만,박이천,박수덕 등과 함께 일본은 한국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고 이후 우리 청룡 국가대표팀은 북한과의 국가대항경기가 없다가 1978년 12월20일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축구 첫대결에서 북한과 거의 대등한 경기로 의미있는 공동우승을 함께 차지하였고 드디어 1980년 9월28일 아시안컵 준결승에서 스타 정해원의 2골에 힘입어 2대1로 신승한 바 있는 데 당시 익일 일간스포츠 신문이 모두 매진되고 또 발행하여 당시 판매부수 신기록 경신을 하기도 하였답니다. 이후 한국은 경제 발전과 더불어 20여년간 북한 국가대표팀을 압도하게 되었지요.-역대 북한전 5승5무1패로 그 1패도 평양방문 친선 경기에서 져준 게임이나 다름없음!-고정운이 활약하던 1993년경에는 남북한 축구가 거의 3골 차이가 나다가 최근에는 다시 비슷해진 느낌을 받음!- 그러나 한국 축구에 1968년 이후-일본은 멕시코 올림픽에서 3등을 차지함-이때 일본 축구의 차범근격인 -나이로는 김호와 비슷-가마모도와 스기야마등이 맹활약- 줄곧 한국의 밥이되는 신세로 전락하다 일본 축구 재건을 내세운 축구인들의 단합으로 1990년대 중반부터는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격상되었고 지금도 원정경기에서는 그 누구도 승리를 장담 못하는 한-일 축구수준이 되었고 일본은 최근 7년간 대학 축구에 열성을 기울여- 놀랍게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축구 3연속 우승이란 기록을 작성중임을 모르는 한국 축구인들이 대다수일 듯하며 이는 앞으로 아시아 최강을 자랑하는 한국축구에 큰 경종을 울리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한국대학 축구팀은 1991년 영국 세필드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한번 우승한 적은 있음. 다음은 북한 여자 축구에 대해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여자 축구는 미국,독일,노르웨이,프랑스등이 구미 강국이며 아시아에서는 한때 중국여자팀이 최강자로 군림한 적도 있고 -중국 자 축구는 한국에 20여년간 한번도 이긴적이 없는 공한증,염한증 상태임에 반해-북한 여자 성인축구팀도 세계 4강권임을 자랑하고 있고 이에 버금가는 일본 여자 축구도 있습니다. 한국 여자 국가대표팀은 10년전에는 중국여자 대표팀이 마음만 먹으면 5골이상도 더 이긴다고 주장선수가 호언할 정도로 아시아의 밥이었던 적이 있는 데 -18년전 한국 축구의 영웅 박종환 감독은 여자 축구 중흥을 크게 주장하였으나 당시에는 반향이 거의 없어서 중흥의 호기를 당시에는 놓쳤으나 지금은 아시아 3강과 많이 그 격차가 좁혀진 상태이며 최근 잘만하면 세계 여자 축구계의 펠레 격으로 잠재력있는 박은선 이란 예비 국가 보배는 고교 졸업시 스카웃 파동과 본인의 불성실 수시 이탈과 정신적 방황과 부상으로 전세계에 내놓을 만한 수퍼스타 반열-미국의 수퍼스타 미아 햄 선수처럼-에 올릴 기회와 한국 여자 축구의 급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할 이 박은선의 침체는 정말 아쉬울 따름이며 아직 23세이므로 잘 재활에 성공하면 중국이나 북한 축구및 일본 축구와 대등한 실력을 발휘할 가능성도 다소 있습니다. -수퍼스타 한명은 존재감은 전성기의 마라도나 처럼 늘 우승을 몰고 다니는 경우도 있고 나머지 10명의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불러 일으키는 시너지 효과도 대단합니다. 그리고 북한 20세 이하 여자 축구팀은 2년전 세계가 인정하는 u-20(20세이하) 여자 월드컵대회에서 위에 언급한 세계 강자들을 모조리 누이고 fifa가 주최하는 아시아 최초의 우승을 북한 청소년 대표팀이 차지한 적이 있으며-2년전 당시 북한 여자 청소년 20세 이하팀은 세계적인 강호 프랑스,독일,중국등을 모두 완파하고 우승한 바 있는 데 특히 세계축구 연맹이 정식 개최한 전세계 축구대회의 결승전에서 아님-또는 몀불허전임을- 내용에 열거해 봅니다. ***북한 남,녀 스포츠 스타*** 1.신금단(여): 60년대 초,중반 제3세계및 공산권 국제 육상대회-예를 들면 가네포 대회등등- 에서 800미터및 1500미처의 중거리에서 도합 8회의 세계 신기록을 세운 바 있는 철녀로서 당시에도 남자가 아니면 저런 스피드가 어떻게 나오는 가 하는 반신반의한 스포츠 전문가들이 많았다고 함.-신금단선수는 이산가족으로 64년 동경 올림픽 당시 남한의 친아버지인 신문준씨와 우여 곡절끝에 5분만 면담하고 영원히 헤어지는 슬픔을 우리 남한 이산 가족에게 슬픔을 안겨줌. 2. 한필화 - 아시아 톱클래스의 빙상스타-아마도 60년대 말및 70년대 초 무렵인 듯-언니라고 자처하는 한계화씨와 오빠를 자처하는 한필성씨가 상봉하러 나섰으나 한필성씨만이 친오빠로 확인된 바 있고 역시 이산가족의 아픔을 전국민에게 각인시켜 줌 3.사격선수 이호준- 1972년의 뮌헨 올림픽 사격 금메달리스트로서 수상후 인터뷰에서 남한의 심장 즉 박정희의 심장을 겨눈다는 마음으로 집중 훈련을 하였다 라고 하여 한때 남한에서 큰 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음. 시간이 허락하면 다음에 계속됨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