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민주주의여! 3.8의거를 회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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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41 진만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1건 조회 1,315회 작성일 2009-03-03 02:43본문
아! 민주주의여! 3.8의거를 회상하며......
1960년 그 해 우리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당시 자유당정권의 독재는 극에 달해 있었다. 그달 15일에는 대통령의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독재정권은 갖가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정 선거를 획책하고 있었다.
3월8일! 그날은 야당 후보인 장면 박사 유세가 공설운동장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일반 시민은 물론 학생들인 우리들까지도 그곳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통제된 상태였다. 학교 주변에는 경찰들이 학교울타리 주변에 배치될 정도였다. 일부 학생들은 당시 신축 중인 교사에 올라가 공설운동장 쪽을 바라보기도 하였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어수선한 가운데에서도 수업 중에, 교실 밖이 소란스럽더니 2학년 선배 서 너 명이 교실에 들어와 농구장에 집합하라고 하였다. 우리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농구장으로 뛰어나갔다. 그 때 수업하던 선생님은 말도 못하고 우리들의 행동을 쳐다보고 있었다.
농구장으로 가니 이미 수백 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고, 단상에는 2학년 학도호국 간부가 <독재 타도>와 민주주의에 관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옳소. 옳소>하며 열렬히 박수를 쳤다. 조금 후에 또 다른 2학년 선배가 단상에 올라가 힘차게
“공설 운동장에 가자! 우리 모두 공설 운동장으로 가자!”
고 했다. 우리는 서슴없이 교문을 나서 시위를 시작 하였다. 그 때 교문에는 몇 몇 선생과 직원이 있었으나 우리들의 위세에 제지를 하지 못했다.
우리들은 대흥동 로타리 쪽으로 구보로 행진 하였고, 간간히 선배들의 <독재 타도! 독재 타도!>구호에 따라 외쳤다. 대흥동 로타리에서 공설 운동장 쪽으로 방향을 바꿀 때, 누군가 내 옆구리를 툭툭 쳐서 바라보니 같은 반 강희용(41회 서울 녹십자 의원원장)이었다. 그는 씩 웃으면서 더욱 힘차게 <영차! 영차!>를 외쳤다.
공설 운동장 앞의 큰 길을 지나 운동장 입구로 다가갈 때, 선두 그룹에 있던 우리 쪽으로, 트럭에서 내린 20여명의 경찰들이 달려들었다. 경찰들은 칼빈 총의 개머리판으로 우리들을 사정없이 치기 시작하였다. 여러 곳에서 학생의 비명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것이 보였고, 바로 나의 앞에 있던 학생이 큰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순간 나는 경찰을 피해 도망갔다. 경찰 모자를 거꾸로 쓰고 모자 테를 목에 걸고 큰 눈에 입을 악물고 개머리판으로 학생을 치는 40대의 경찰관 얼굴이 지금도 뚜렷이 생각난다. 개머리판이 완전히 쪼개져서 총의 멜빵끈에 매달려 덜렁거리던 것을 잊을 수 없다. 그 후 오랫동안 ‘똥00 새끼’라고 속으로 욕을 했다. 동작이 느린 내가 어떻게 그리 빠르게 도망을 쳤는지 지금도 의아스럽다. 당시에는 칼빈 총의 개머리판이 그렇게 무서웠으나, 군대 가서 보니 별로 무서운 총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는 쓴 웃음을 지은 적이 있다. 쓰러진 학생이 사망 했거나 중상을 입었다고 걱정했으나, 그 후 이런 말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경찰을 피해 공설운동장 건너편 대전천으로 흐르는 작은 개울의 옆길로 달아났다. 그 때 앞서 가던 학생들 중에는 운동장 부근 논밭에 있었던 분뇨구덩이에 빠지기도 하였다. 분뇨 구덩이를 피해 가다가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리기에 뒤돌아서 보니 구덩이에 빠졌던 학생이 내 곁을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허리띠 아래는 전부 분뇨 투성이였지만, 침착하면서 당당한 얼굴을 보고 왠지 모르는 감동을 받았다. 지금도 개머리판에 맞은 학생과 분뇨 구덩이에 빠진 학생이 누군지, 근황이 어떠한지 궁금하다.
한 참을 뛰어, 시위 학생들이 기마경찰에 쫓겨 원동국민학교(현, 동구청) 교문 앞 길 건너 다음길인 시장 통 길로 들어섰다. 5,60여명 학생과 같이 빠르게 대전역을 향해 걸었다. 두려운 마음에 시위를 계속할까, 학교로 돌아갈까, 망설이니 걸음 속도가 느려졌다. 그때 갑자기 대전 중학교 동창이기도 한 김원웅(41회 전, 국회의원)을 만나 무척 반가워서
“야, 원웅아! 시위 그만하고 학교에 가자, 이제 할 만큼 했 잖아”
하고 말하니, 원웅이는
“뭐 어째, 그만 가자고?”
오른팔을 불끈 쥐면서, 민주화와 경찰들에 대한 분노 등을 짧은 시간에 말하며
“끝까지 하자!”
는 말을 남기고 쏜살같이 대전역 쪽으로 달려갔다. 순간 나는 머리에 둔기를 맞은 듯 멍해졌다. 수치심과 자존심이 상하여
“원웅아 같이 가자.”
하면서 달려가니 이미 김원웅은 보이지 않았다.
대전역과 목척교가 보이는 큰 도로로 나오니 학생들이 경찰에 쫓기고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심으로 대고 쪽으로 도망치는데, 어디선가
“대고학생 이리 와서 숨어”
소리가 들렸지만 사력을 다해 뛰었다. 그때 좀 더 침착하고 용기가 있었다면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지 않았을까?........당시 모든 시민들은 우리 학생들을 응원했다.
원동 도립병원 근처에서 학교로 가는 학생들이 늘기 시작하여 대흥동 로타리 근처에 오니 50여명이 되었다. 모두 지치고 피곤한 모습으로 패잔병 같이 말없이 천천히 걸었다. 대흥동 로타리를 지날 쯤 해서 사복경찰이나 신문 기자로 추축되는 남자가 우리 대열에 들어오더니 시위에 대해 말을 걸었다. 아무도 대답하는 학생이 없었는데, 내 집과 가까이 살던 2학년 이수종(40회 이수종 치과원장)선배는 당당하게 시위의 필요성과 경찰의 횡포에 대해 능숙하게 답변했다. 그가
“그러면 네가 바로 시위 주동자냐”
하니 이수종은
“주동자가 어디 있습니까?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은 모두 자발적 으로 참가했으니 우리 대고 모든 학생들이 주동자입니다.”
라는 말이 지금도 생생하게 귓가를 때린다. 나는 이런 명답이 어디 있는가 하면서 박수를 치고 싶었으나 두려움에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박수를 칠 용기도 없었던 나는 지금도 부끄럽게 생각한다. 이수종 선배는 또
“우리 대전고등학교는 일류학교인데 경북고등학교한테 첫 시위를 뺏긴 것이 아쉽다”
라고 여러 학생들한테 말하였다. 조금 후 선생 한분이 대열에 합류하여 같이 걸으면서
“너희들 일을 이렇게 크게 저질렀으니 지금부터 너희들은 큰일 났다. 너희들 중 아버지가 공무원이면 아버지도 불이익을 당하고 영향을 미칠 것이다”
등 많은 말을 하던 것이 어제 들은 듯 생생하다. 그 당시 철도 공무원이었던 나의 부친도 좋지 않은 일이 생길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 당시는 왜 그리 순진했는지........... 그 선생님의 말이 교육적인 차원인지, 겁을 주는 건지, 국가에 충성하는 건지에 대한 결론을 아직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선생의 말씀은 37 여 년간 교직 생활을 하고 있는 나에게 어떤 교육 자료가 된 것만은 틀림이 없다.
학교에 오니 이상하게 조용하였다. 여러 선생님들이 책가방을 갖고 오라 하여 어떤 교실에 들어가니 30여명의 학생이 모여 있었다. 그사이에 꽤 많은 학생이 집으로 돌아갔다.
“너희들 지금 나가면 경찰에 붙잡히니 안전할 때 까지 여 기에 있다가 집에 가라. 경찰서에 연행된 학생이 많다”
등의 말을 여러 번 들었고 화장실 갈 때만 교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화장실 갈 때는 선생님 한분이 동행하여 감금상태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완전히 어두워져서 귀가할 수 있었다. 이때는 시장 끼가 너무 심해 저녁을 빨리 먹고 싶을 뿐 이였다.
내성적이고 수동적인 내가 평생의 삶과 37 여 년간 교직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준 그 일은 영원히 잊을 수 없으며, 4.19혁명 후에도 민주주의를 가로 막은 많은 험로가 있었지만, 50여 년 전 우리들의 3.8의거가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민주발전에 힘을 보탰다는 자부심에는 변함이 없다.
2009. 3. 2.
41회 오이식(吳伊植)
(부경대학교 공과대학 신소재 공학부 교수)
댓글목록
이계상님의 댓글
41 이계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장한 일이었다
대고의 남팔남아의 정신이었다 대고는 이런 학교란 것이다.
시대적 의미가 있다.대고역사의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민족의 역사에 빛이 나리라
대고는 지금 이런 정신을 이어 가고 있다. 어제런듯 세월은 흘렀다. 많이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