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주년 윤봉길의거 및 친일파 척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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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338회 작성일 2009-05-04 16:51본문
다음은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기념 77주년을 맞이하여 숙명여대 명예교수 이만열 교수의 기고문 및 저 한준구의 친일파 척결에 대한 단상을 기고하오니 비록 공사 다망하시더라도 일독을 권해 봅니다.
***윤봉길 의사 의거 77주년 및 친일파에 대해!
1.정부의 문화재청은 올해 백범 서거 60주기를 맞이하여 그의 유품 19점을 근대문화재로 등록 예고한 바 있다.
2.그 중에서 윤봉길 의사의 회중시계가 시선을 끌었다. 77년전 바로 오늘 즉 1932년 4월29일 상해 의거 거사 전에 백범 선생께서 보관하였던 바로 그 윤의사의 시계였다.
3.즉,오늘 4월29일은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 77주년이 되는 날이다.
4. 윤봉길의거 약 7개월여 전인 1931년 9월18일 일제는 만보산 사건을 기화로
만주 침략을 감행,소위 만주사변을 일으킴.
5.이를 보다 못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무회의에서 특무공작대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그 모든 활동을 백범 김구선생에게 일임하였다.
6.백범선생은 만주사변 일으킨 약 2달뒤인 31년 11월 특무대를 조직하고 이 조직을
'한인 애국단' 이라 칭하였다
7.한인애국단의 첫 특무 공작은 조직 2달뒤쯤인 32년 1월8일 일본 한복판인 도쿄에 파견된 이봉창의사가 사코라다몬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으로 던졌으나 아쉽게
실패하였다.
8.한인 애국단의 또하나의 공작으로 32년 3월이나 4월쯤인가 이덕주 및 유진식이 국내로 들어가 일본의 우가키 총독을 제거하려 계획은 세웠으나 실패하였음
9.32년 5월하순경에는 유상근 및 최흥식이 만주에 들어가 관동군 사령관을 폭살하려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음.
10.일제는 만주침략 4개월뒤인 32년 1월28일 상해사변을 일으켜 상하이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점령 3개월뒤인 4월29일 일왕의 생일경축일인 천장절에 상해 점령 경축식을 겸하여 관병식을 거행하기로 함.
11.이 기회를 포착한 백범은 한인애국단원인 윤봉길에게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중국을 침략하는 적을 도륙한다는 선서를 받고 거사를 결행토록 함.
12.거사 전날---윤봉길은 경축식에 참가하는 일본 요인들의 사진을 입수해 얼굴을 익히고 공원도 사전 답사를 함.
13.거사 당일 윤봉길은 폭탄 2개를 가져가 그중 수통형 폭탄을 단상에 던져
상해 파견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비롯한 요인들에게 중상을 입혔고
그 중 몇몇은 곧 사망하였다.
14.윤봉길의사의 의거의 파장은?
ㄱ.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상이 높아지고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이 강화됨.
ㄴ.만보산 사건이후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에게 악화된 감정을 일시 가졌으나 그 감정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됨.
ㄷ.중국 안에서의 한국의 독립 운동의 여건이 훨씬 나아짐
ㄹ.장개석은 중국군 30만명이 해내지 못한 일을 윤의사가 해냈다고 극찬함
ㅁ.이어 장개석은 중국군 사관학교 안에 한인 장교 훈련반을 별도로 설치토록 배려
하여 한국의 독립 운동을 오랜동안 적극 지원하게 됨
ㅂ.이 의거로 인해 일본제국은 중국 침략의 확전을 단념토록 하는 데 일조하였고 이어 중국측과 일본은 정전협정을 맺게하는 단초를 제공함.
******* 오늘 77주년을 맞이하여 이글을 쓰는 이유는 단지 윤봉길의사의 의거일이어서 뿐만 아니라 이런 의미깊은 날을 맞이하여 역사의식을 환기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임!
a.일본 정부는 올해에도 중학교 교과서 검정에서 한국의 역사를 왜곡한 극우파의 후소샤 판과 자유샤 판을 승인하였다.--일본의 대다수의 역사 교사들은 수십년전부터 왜곡된 역사 사실을 배워 후학들을 가르쳐 왔으며 이를 그대로 수용한 일본의 젊은이들은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 침략을 진출로 혹은 침략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b.이보다 더 한심한 것은 국내 사정으로 특히 식민지 근대화론이 활개를 치고 설쳐대고있는 판국이다.
c. 설상가상격으로 소위 건국 60주년이란 명목으로 우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폄하하는 일을 일삼고 있다.
d. 이들 국내 왜곡 인사들에 의해 독립 운동을 위해 헌신한 백범선생과 윤봉길의사는 공공연히 테러리스트로 폄훼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다.
e. 위의 한심한 작태를 보면서 윤봉길의사가 거사 직전 조국의 청년들에게 지속된 독립운동을 당부하면서 썼다는 "피끓는 청년 제군들은 잠자는 가!" 라는 유서가 귀에 쟁쟁히 울리는 듯하다.
f.백범선생께서는 광복후에 이봉창,윤봉길 의거일과 안중근의사의 서거일(3월26일)에는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자 자주 붓글씨를 썼다고 함.
g.그런날에는-----"영예와 치욕에 놀라지 아니하고 한가로이 뜰앞에 피고지는 꽃을 본다.......나방이는 오로지 밤 촛불에 뛰어드는구나!........올빼미는 오직 썩은 쥐를 즐겨 먹는구나! 세상에 나방이와 올빼미와 같지 않는 자 몇이나 되겠는가?" 라는 글을 남김
h. 백범선생이 위의 글을 통해 말하려는 것이 분명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는 "의사들의 죽음은 분단된 조국에서 역사의식없는 나방이와 올빼미 같은 자들을 위해 희생된 것이 아니다."라는 강한 메시지였을 것이다. 끝
***위의 내용은 저 한준가 존경하는 양심적인 역사학자이며 숙명 여대 명예교수이신 이만열교수님의 경향신문 2009년 4월29일자 기고내용이며 이자리를 빌어
독립을 위해 돌아가신 순국선열 제위께 고개숙여 감사를 드리며 애국적인 양심있는 역사학자이신 이만열 교수님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저 한준구가 기억나는 단상들!
ㄱ.해방전 풍찬노숙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던 독립운동가의 가족및 후손들은
가장 중요한 기간인 해방후 20년간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2대나 3대에 걸쳐 대대로 가난을 지고 살았으며 대학을 제대로 졸업한 후손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ㄴ.친일 세력들은 해방후 이승만 정권에 빌붙어서 온갖 부와 명예를 3대에 걸쳐 누리는 가 하면
ㄷ.최근 까지도 을사오적 이완용의 증손자가 법정 소송을 걸어 일본이 하사한 엄청난 땅을 도로 찾아 현금화 하고 일본등으로 도피해 살거나
ㄹ. 과거 중추원등에서 친일세력으로 커온 사람들의 후손들이 아마도 증손자들이
다시 세를 결집하고 심지어는 계모임등을 하는 등 정말 후안무치의 일들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고 함
ㅂ.지금도 다수가 고래등같은 집에서 살거나 엄청난 부를 이용하여 친일의 흔적을 수십년간 세탁을 하고 살고 있으며 최근 반민족 행위자들에 대한 사전 편찬을 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의 활동을 알게 모르게 방해하고 있다고 합니다.
ㅅ.이승만 정권의 반민특위 해체 시도및 와해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 확립에 결정적 반민족 행위였으며 이 하나만으로라도 이승만은 역사적으로 처벌받아야 합니다.
ㅇ.6.25전쟁 약 1년전 백범선생이 경교장에서 안두희 소위의 총탄에 저격당하고 서거하셨는 데 이는 친일 브로커 출신의 연루와 이승만 정권에 빌붙었던 친일세력들의 천인공노할 합작이었다고 봅니다-필자주
ㅈ.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전 국회의원 김원웅 의원은 어릴적에 독립운동가 어른 들로 부터 "이렇게 가족이 풍비박산난 마당에 그리고 반면에 친일세력은 떵떵거리고 사는 마당에 다음에 다시 이런 독립운동의 기회가 오면 너는 절대 독립운동하지 말아라 ."
라는 슬픈 얘기를 접했던 김원웅의원의 심정은 지금 와서 어떨지 무척 궁금합니다.
ㅊ. 백범선생에게 총을 겨누고 저격하였던 안두희 소위는 감옥속에서도 호의 호식하였다고 하며 6.25전쟁통에 국군에 복직하기도 하였고 아마도 소령인가 중령까지 승진하였다고 하며 --이 암살범이 어찌하여?--
ㅋ. 이 암살범 안두희는 나중에 군제대후 강원도 지역 군납을 많이하여 한때는 세금 납부 강원도 2위 안팎을 차지할 정도로 부를 누리기도 함
ㅌ.이렇게 잘나가던 안두희에게도 인과응보로 어느날 의협심강한 곽태영이 이 놈을 찾아내어 나무막대기로 사정없이 내려쳐 --이 의혈남은 그 이후에도 여러차례 수십년간
안두희를 찾아내어 암살 배경을 누차 물었으나 거짓과 변명과 침묵으로 일관한 바 있음--곽선생께서는 저 한준구도 몇번 먼발치에서 뵈온 적이 있었는 데 얼마전 정말 슬프게도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ㅍ. 의혈남 곽태영님에게 분노의 민족 차원의 일격을 당한 안두희는 머리를 다쳐 그 이후 측근들이 사업을 말아먹고 이후 안두희는 60대이후에는 비루한 생활을 오래 한 듯함
ㅎ.의혈남 곽태영님 말고도 권중희님 그리고 결정적으로 각목으로 민족이름으로 그 더러운 인생을 비루하게 이어가던 안두희를 70여세의 노인이었지만 처단한 젊은 의혈남도 있었는 데 그 이름은 박기혁님으로 그는 이사건으로 인해 옥고를 치르고 나옴
***반민특위의 해체로 인해 우리 한국사회는 권력에 아부하고 더러운 부와 명예의 휘하에 들어가는 등 황금 만능주의에 휩쓸려 이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 인명사전 편찬사업을 -지금 계속중--친구들에게 이 민족문제 연구소 한달에 1만원을 내라고 해도 한놈도 반응이 없는 작금의 상황을 개탄스럽게 생각하며 주변 친구 친지나 이글을 읽는 선후배 제위및 한국인들에게 이 민족문제 연구소 회원 가입을 다시금 권유해 봅니다
----www.minjok.or.kr--일단 검색해 보고 가입을 하길 권유합니다.
***위의 내용이 사실과 다른 것을 알려주시면 반드시 후사합니다.
그리고 일부 내용은 정보수준이 아니라 첩보 수준에 해당되는 것도 있을 수 있음을 참고로 알려드립니다.
한준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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