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당일 서울 풍경!-강준만 칼럼 -98주년-다시보기-매국노와 애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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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281회 작성일 2008-08-29 15:34본문
1.국치일 일주일전---1910년 8월22일 대한제국 순종황제가 형식적으로 참석한 어전회의에서 총리대신 이완용이 조선과 일본의 강제병합안을 가결시킴
2.일제는 이 사실을 1주일 동안이나 극비에 부침.---8월29일에야 순종황제의 옥새를 날인케하고 병합조약을 포고함
3.1910년은 경술년이어서 위의 수치를 '경술 국치'라 일컬음.
역사가들은 한일합방은 잘못된 표현이고 '조선합병' '한국합병'조선병탄'
조약 또는 늑약이라고 함 (강제할 늑)---97년전의 국치일.
4. 금산군수 홍범식--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 순국함
5.매천야록으로 유명한 황현은 절명시를 남기고 순국함
6.그리고, 그뒤로도 수많은 우국지사가 자결 순국의 길을 택함.
7.해방이후 역사를 배운 세대는 당연 그날 합병이후 모든 조선인들은 비통해 하며 괴로워했을 것이라 생각해 왔음.-그런데,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8.그 유명한 최린---삼일만세의거 당시 민족대표 33인중 한사람으로 활동했다가 나중에 변절한 최린에 의하면--- 한일합방이 공포된 그날 종로거리의 조선인들은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흥청거리며 장사를 하고 먹고 마시는 일상'을 잃지 않았다고 함.
9.다수의 역사학자들은 --- "설마 그럴리가 없지?" 하며 "어쩌면 최린이 말한 그날은 아마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비밀리에 조약을 체결한 8월22일의 풍경일 지도 모른다."라고 반신반의함.
10.그러나, 최린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주장이 자꾸 나온다.
11.중국인 학자 양계초---1910년 다음달인 9월에 쓴글에서---
'합병조약 발표를 둘러싸고 주변국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눈물을 참지 못하는 데 ,조선인들은 흥겨워하며 고위관리들은 날마다 새로운 시대의 영광스러운 지위를 얻고자 분주하고 기뻐하기만 하였다.'주장함.
12.위의 양계초의 주장은 다소 믿기 어려우나 다만 당시에 조선인들은 적어도 소위 '일상'을 잃지는 않았다는 건 수긍해야 할 것 같다.
13.실제로 그날 8월29일은 의외로 조용하였으며 반대 시위도 전혀 없었다고 함---강준만은 당시 한국 민중이 이미 체념의 지혜를 가졌는 지 모른다고 봄.---또한 지금 우리는 '애국심'담론이 욕먹는 세상이 살고 있는 듯하여 새삼 해본 얘기라고 강준만은 계속 언급함
14.새뮤얼 존슨에 의하면---"애국심은 악당들이 쏟아내는 최후의 배설물이다."라고 하였으나 그 취지는 공감하지만 반쪽만 공감.
15.한국은 애국심을 외치는 목소리는 높지만 애국심은 매우 약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16.애국심이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목소리가 자꾸 커지는 건 아닌지 모름
17.서울대 교수를 역임한 고영복 교수에 의하면---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각종 교육은 많이 받았지만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가족에 대한 애착심을 비교해 보면 놀라울 정도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약한 것을 볼 수 있다."
"공무원의 마음속에는 가족을 초월하는 큰 사회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나와 나의 가족만이 보일 뿐이다."라고 주장함.
"사회 전반적으로 애국심이 없어 큰일" 이라고 개탄함.
18.일부 앞서가는 지식인들이 국가주의 배격 차원에서 '애국심'담론을 공격하는 선의--공감한다. 그러나,반쪽만 공감하는 이유도 위와 연관되어 있다.
19.이런 '애국심 담론'이란?
한국의 엘리트 계급이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사화와 국가의 이익보다 앞세우는 게 만연되어 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다.
20.즉, 공존공영의 원리조차 실현되고 있지 않다는 뜻임
21.그래서, 이름없는 보통 사람들은 곧잘 애국심 담론에 푹 빠져들어 비분강개하곤 한다.
22.지식인에 대한 비판은 보통 사람들의 비분강개하는 애국심 담론보다는 엘리트 계급의 탐욕을 향해야 한다. 지금의 애국심 담론은 그런 탐욕을 향한 분노의 목소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23.엘리트 계급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목숨걸고 고수하면서 개인및 가족차원의 탐욕에만 눈이 멀 때 어떤일이 또 벌어질 까?
24.혹시 97년전 8월29일 당시 조선 민중이 보였던 차분함-위의 글 8번,11번,13번 내용 참조-은 바로 그런 냉소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 한준구의 단상***
1. 조선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국적회복이 광복 62년이 지난 지금도 안되고 있어 이분은 무국적자로 되어 있어 얼마전 국회의원 유기홍,심상정 의원에게도 면박을 준 적이 있고 3주전 독립기념관 김삼웅 관장에게도 면전에서 그럴 수가 있느냐고 따졌으나 국회에서 관련 법을 통과안시키는 데 어떻게 할 수가 없이 시간만 또 흘렀다고 위의 세분이 대답한 적이 있으며 이를 어찌할 것인가?
2. 20년전 한국인으로서 미국 시민권자를 동시에 가진 20만명이 있는 데 그들이 만일 전쟁이 나면 돌아올 것인가? 그리고, 한국에 거주하는 일부 그들은 전쟁에 참전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3. 몇년전, 우리 선배이자독립운동가의 후손이자 국회의원인 김원웅의원에 의하면--- 해방후 독립운동가 어느 가정에 상을 당했는 데 조문객을 대접할 쌀 한톨이 없어 빈궁한 처지를 빗대 다수의 사람들이 앞으로 이런 독립운동의 상황이 오면 우리 자손들은 집안 망가지고 후일에도 또 고생하는 그런 일을 절대 하지말라고 당부한 슬픈 얘기를 몇번 들었다는 김원웅의원의 가슴을 치는 이런 얘기를 접하는 우리 대고 동문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실 까?
4.지난 수십년 동안 친일파의 후손들은 법정 대결 끝에 그 엄청난 토지를 되찾고 이를 현금화하여 일본등지로 도망가던 작태를 어떻게 보아야 하며-법조계의 친일 잔존 세력의 후손 잔존-법리 적용상의 어려운 점-소급 입법 필요-지금도 엄청난 대토지 소유로 3대가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고 독립운동가들은 해방후 좌,우익갈등 와중에 일부는 빨갱이로 몰려 왜정때 고문하던 악덕 친일 경찰들에게 해방후 다시 고문당하는 상황을 어찌 역사의 아이로니라고 치부할 것인가?
5.과거 친일파의 온상인 중추원의 친일세력들은 그 증손자들이 모여 계모임을 한다는 첩보를 접했을 때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에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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