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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도 좁은 세상의 인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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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41 진만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457회 작성일 2007-10-15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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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넓고도 좁은 世上의 因緣(2)

 내 어머니는 25年 前 1982年 7월에 世上을 뜨셨다.

 

 1976年 長期勤續이라는 理由로 大田을 떠나 論山郡 可也谷面의 可也谷學校로 發令 돼 食率을 이끌고 그곳 다 쓰러져 가는 館舍? 에서 寄居해야 했기 때문에 동생을 집에 불러들여 어머니를 맡겨 놓았었다. 그곳에서 4년을 勤務하다 1980年 다시 大田으로 轉入하여 대전 大洞學校에서 勤務하고 있었던 時期였다. 客地에 나가 있는 동안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지 않을까 걱정하던 시기를 벗어나 있었다.

 

 그 時期 죽은 金正石의 딸들이 그 學校에 다녔으며, 安善浩의 아들 안진혁 君을 擔任하기도 했으며, 초라한 내 處地 때문에 同窓會에 발을 끊고 지냈었으나, 위의 安善浩와 金正石, 또 朴鎭泰 등의 說得으로 同窓會에 나가기도 했던 時期였다.

 

 어머니 喪을 당했기에 돌아가신 丈人어른도 오셨고, 初等學校(옛 弘道國民學校)同窓 모임을 함께 하고 있는 李春根도 問喪을 왔었다.

 

 그런데 내 丈人과 李春根 春府丈과는 그 전부터 因緣을 맺고 있었다는 事實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丈人어른이 李春根과의 關係를 물어 오시기에 初等學校 同窓임을 말씀 드렸다. 葬禮를 치른 후 丈人이 들려 준 李春根과의 因緣은 다음과 같았다.


 내 妻家는 元來 平北 선천이 故鄕이었단다. 내 丈人은 日帝 治下 時 滿洲 봉천에서 택시를 하는 등 新 文物에 물들어 있었기에 共産黨이 판치는 것이 싫어, 6.25 前에 南下하여 서울 龍山 등 거쳐 大田에서 豆菜 工場을 하고 있었단다.

 

 終戰이 얼마 남지 않은 時期에 큰 妻男이 軍 服務를 하다 負傷을 당했었는데, 그 때 李春根의 아버지가 大邱의 後方 軍 病院에 後送시켜 주었으며, 그를 빌미로 除隊까지 시켜 주었었단다. 그러므로 내 丈人은 李春根 아버지의 도움으로 당신의 큰 자식을 다시 얻은 셈이었다. 春根이의 말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基督敎 長老 系統의 元老였으며, 五山 學校에도 깊숙이 關係가 있었던 知識人이었단다.

 

 그 큰 처남이 엊그제 79세의 나이로 別世하여 大田 國立 顯忠院에 묻혔다.

 

 내 妻男들 중에는 大高를 다닌 사람이 없었다. 내 丈人은 이웃에 살며, 아들 자랑이 대단한 全關哲의 아버지를 ‘전 홀아비’ 라며 貶下하여 부르면서도  그것을 무척 부러워했던 것 같다.

 그러다 李春根의 兄과 내 妻兄을 어떻게 엮어 보려다가 일이 잘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李春根의 兄은 내 妻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일이 있은 後로는 學校 오고 가다 내 妻家에 잘 들렀던 李春根 마저 발길을 끊었었다고 當時 어렸던 집사람이 記憶하고 있었다.

 

 지난 10월 13일 만났던 春根이는 내 妻兄을 호수돈 學校에 다녔던 누나라고 알고 있었으나, 내 妻兄은 우리보다 나이가 적은 43年生이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李春根의 兄이 아니라 春根하고 내 妻兄을 엮으려 했던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으나, 春根이와 집사람에게 確認 한 結果 그 對象이 春根이 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事實 나는 6.25 前 49年에 大田 三省學校에 入學하여 6.25 當時는 2學年이었다. 戰爭의 混亂期에 月謝金 督促에 시달리다 興亞 織布 工場을 전전하며 공부했던 5學年 때 學校를 그만 두었으며, 그 後 다시 5學年에 다시 들어 가 41回가 되었다.

 

 李春根 朴鎭泰 등도 避難民 初等學校에 다니다 朴鎭泰는 宣化學校로, 李春根은 弘道 學校로 와 그들과 緣을 맺게 된 것이다.

 

 6學年 때 春根이는 우리 6學年 1班 班長이었다. 當時 우리 班에는 徐弘圭, 權益重, 42回로 卒業한 박찬일 등이 있었다. 죽은 高在哲은 6學年 2班 班長이었으며, 嚴長吉도 2班이었다.

 

 지난 10月 13日은 初等學校 同窓의 子婚이 있었다. 禮式이 끝난 後 모처럼 徐弘圭, 李春根과 어울렸다. 春根이가 하는 撞球場으로 가 撞球도 한 게임 쳤으며, 저녁도 먹고 노래방에 가 10時가 넘도록 興에 겨워 노래를 불렀다. 弘圭는 11시가 넘어 大田驛으로 가 서울로 갔으며, 버스가 끊겨 새벽 3시 반이 넘어서야 집에 갔었다고 들었다. 셋이서 아주 盛大한 班窓會를 한 셈이었다.

 

 그들과의 因緣은 우리 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으로, 이미 어떤 끈으로 엮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한편 우리 집은 6. 25 때 내 큰 姑母가 살고 있었던 大德郡 杞城面 牛鳴里(現在 大田市 西區 牛鳴洞)로 避難을 갔었다. 姑母네 집에는 나보다 한 살 위인 朴魯吉이 있는데, 朴魯吉은 姜京錫과 初等學校 同窓이며, 그 이웃 元亭里에 살았던 宋翼淳도 내 姑從 四寸인 朴魯吉을 잘 알고 있었다.


 지난 9月에는 姜京錫 宋翼淳 等과 朴魯吉을 한 번 만나보러 가자고 約束을 했었는데, 내가 時間을 내지 못해 不發되었으며, 姜京錫이 中國에 자주 가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나, 그 언제인가는 이루어 질수 있도록 機會를 엿보고 있다.


 世上의 因緣은 참으로 넓고도 좁은 것이다.

                                            2007.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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