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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41 진만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379회 작성일 2007-07-2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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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 關東別曲


 나는 江原道 楊口에서 軍隊 生活을 했다. 當時에는 멀고도 징그러운 곳이었지만, 40余年이 지난 이 時點에 와서는 젊은 時節을 3 年 余 보낸 아련한 追憶의 땅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昨年 8월에는 車도 없이 집사람을 데리고 楊口를 다녀왔었다.


 昨年 末부터 허리 痛症 때문에 近 6個月余의 苦生 끝에 시멘트 施術로 겨우 그 痛症에서 조금 벗어난 집사람이 車를 가지고 다시 한 번 가고 싶다는 意思를 隱然 中 비쳤다.

 그래서 지난 7월 8일부터 서울에 머물던 참에 7월11일 嶺東高速道路를 利用하여 楊口로 향했다.


 문막 休憩所에서 楊口로 가는 法을 물었다.

 만종分岐點에서 55번 高速國道로 갈아타고 가다 洪川 IC에서 빠져 나와 44번 國道를 탔다. 이번에는 신남에서 46번 國道로 갈아타고 北으로 달렸다.

 昨年에 대 여섯 時間 동안 발 담그고 있던 楊口郡 東面 팔랑 2리 溪谷을 찾아 다녔으나, 그 길이 그길 같아서 찾지 못해 내일 다시 찾기로 하고 邑內로 向했다.

 邑內에 到着하니 벌써 저녁 6時가 넘어 있었다. 郡廳에서 세운 觀光 弘報物에 楊口가 우리 國土의 中心이라는 文句가 새삼스러웠다. 그 사이 장맛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먼저 宿所를 정해야 했다. 昨年에 묵었던 집은 가기 싫었다. 飮食店과 모텔을 같이 하는 主人 여편네가 싹수없이 忽待했기 때문이다. 집사람이 저녁 생각이 없다고 해서 1人 分만 시켰었는데, 究竟하던 집사람이 飯饌을 먹어보고 맛깔스럽다고 밥을 한 공기 더 시켰었다. 그랬더니 앞으로 그렇게 살지 말라나? 안 받는다는 것을 우겨서 2人 分 飮食 값을 카운터에 던져주고 나왔었다.


 아들이 軍 生活을 楊口에서 해서 面會를 자주 왔다가 장사가 될 듯싶어 아예 楊口로 와 旅館業을 한다는 慶尙道 사람이 하는 ‘서울장’ 을 宿所로 정했다. 오르내리기 편하게 1層이면서 寢臺 없는 온돌방으로 정했다. 主人은 날씨가 서늘하다며 煖房도 넣어 주었다.

 主人은 50대 後半으로 나와 산 經驗이 비슷하여 말이 通했다. 軍隊 이야기, 政治 이야기, 對北 問題 등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 사람 紹介로 忠淸道 抒川이 故鄕이라는 사람이 하는 飮食店에서 삼겹살로 저녁을 먹었다. 飮食 맛이 있어 아침까지도 먹고 싶었지만 週中에는 손님이 없어 週末以外에는 아침營業을 하지 않는단다.


 每日 그렇지만 7월 12일 새벽 2時에 잠이 깼다. 旅館房에 인터넷 連結 施設이 없어 PC 房에 갔다. 홈피에 올라온 글에 대한 댓글을 달고, 인터넷으로 新聞을 읽었다.

 6時 頃에 楊口 郡廳으로 가 觀光 案內圖를 얻으려 했지만 當直室에는 準備된 것이 없어 公務員 勤務 始作 時間에 맞추어 오기로 했다.


 아침을 어제 休憩所에서 산 호도 菓子로 代身하겠다는 집사람을 두고, 軍人 相對로 일찍 문을 연 김밥 집에서 돌솥 밥을 먹었다. 젊은 사람 상대로 하는 집이라 그런지 飮食이 너무 달았다. 豫備軍 마크를 붙인 除隊 將兵들이 많았다. 그들은 기분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9시 조금 넘어 郡廳에서 案內圖를 얻고, 楊口 附近의 名所를 紹介 받았다.

 먼저 平和의 댐을 보기로 하였다. 全 國民의 誠金으로 만들어졌으며, 말도 많았던 댐이다. 460번 地方道를 따라 방산면을 거쳐 갔다.

 방산면은 舊石器時代 遺物이 出土된 地域이면서, 21師團 65聯隊 駐屯地이다.

 나는 春川 제 2 補充隊에서 홍천면에 있는 首都 師團 機甲聯隊로 配置되었었다. 그 聯隊 人事課에 있었는데, 그 聯隊가 美 國防部의 指命?으로 越南으로 派兵되게 되었다. 派兵을 願하지 않아 다시 제 2 補充隊를 다시 거쳐 楊口군에 駐屯하는 21師 66聯隊 人事課로 옮기게 되었다. 部隊를 바꾸는 통에 休暇를 가지 못했다.

 日曜日 部隊 밖 논에서 훔쳐 온 볏짚으로 이엉을 엮고 있는데 人事將校 양준호가 불러 事務室로 가보니 特別休暇證을 주었다. 뛸 듯이 기뻤다. 같은 處地인 安城사람 강병규 上兵이 자기 休暇를 付託하면서 나도 같이 갈 수 있도록 빽을 쓴 모양이었다.

 休暇費는 PX에 있는 大中 先輩에게 500원을 빌렸다. 自請해서 不寢番을 서며 몸과 옷을 丹粧했다.

 새벽 4시에 部隊에 非常이 걸렸다. 방산 65聯隊 副聯隊長이 武裝 共匪들에게 被殺되었다는 것이었다. 내 課 古參 박수용 上兵과 鄭 兵長이 休暇費를 쥐어주며 將校들이 出勤하기 전에 튀라는 것이었다.

 밥이고 자시고 할 것 없었다. 7시에 버스를 탔지만 곳곳의 檢問所에서 檢問이 三嚴했다. 休暇證을 빼앗길 것 같았다. 春川까지 나오니 安心이 되었다. 龍山에서 軍用 列車를 기다리는데 뉴스에 그 事實이 보도 되고 있었다.

 방산면을 지나며 옛날 그 일이 回想되었다.


 平和의 댐은 楊口郡과 화천군 사이에 있다. 北側 임남 댐(俗稱 金剛山 댐)에 問題가 생겼을 때를 對備하여 댐은 텅 비어 있었다. 水資源 公社 事務室로 갔다. 親切하게도 우리 둘만을 위한 說明과 함께 映像物도 보여 주었다. 미리 準備된 댐 周邊의 風景을 背景으로 寫眞도 찍었다. E mail로 보내 준단다. 


 다음은 제 4 땅굴과 乙支 展望臺를 볼 次例다.

 되짚어 楊口 쪽으로 나와 31번 國道를 타고 66聯隊 駐屯地였던 곳으로 갔다. 지금은 63聯隊가 駐屯하고 있지만 醫務中隊가 正門 哨所 쪽으로 나온 것만 빼고는 옛날 그대로의 部隊配置였다.

 部隊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節次를 밟으려면 時間이 많이 걸릴 것 같아 팔랑 2리로 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찾지 못하여 郵遞局에서 물어 찾아 갔다. 장마철이라 물이 흐렸다. 記念으로 돌 하나를 실었다. 


 金剛山으로 向하는 31번 國道를 버리고 453번 地方道로 해안면으로 향했다. 1147m의 돌산령을 넘었다. 고개 위에 오르니 너른 盆地가 펼쳐졌다.

 戰爭 當時 美軍들은 이곳을 PUNCH BOWL이라 불렀다. 盆地 모양이 마치펀치로 한 방 먹인 술잔 모양이라서 그리 불렀다는 말도 있고, 戰爭 때 彼我가 實彈이 떨어져 肉薄戰을 치렀대서 그리 불린다는 말도 있다.

 이곳 盆地는 옛날 뱀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단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는데 한 노인이 돼지를 풀어 먹여서 뱀을 退治했단다. 그래서 돼지 亥에 편안 安, 亥安面이 되었단다.

 事實 내가 軍 生活을 할 때는 이곳은 民統線 以北이라 出入이 自由롭지 못했다. 京畿道 板門店 附近의 대성마을과 같이 許可 받은 사람만이 居住할 수 있는 곳이었다.

 軍人들도 허가 받고 가야 했다. 가끔 옥수수로 만든 노란 동동주를 즐기던 곳이었다.

 우리보다 先輩 世代들이 軍 生活을 할 때는 間諜들이 내려와 목을 잘라 가곤 했던 곳이었단다. 

 當時에도 그곳에는 諜者들이 많이 있었다. 63聯隊와 任務 交代로 우리 聯隊 搜索 中隊 하대덕 中尉가 兵士들을 이끌고 310 GP에 到着하니 對南 放送으로 구슬픈 音樂과 함께

 ‘하대덕 중위를 비롯한 장병 여러분! 임무 교대로 그 얼마나 고생이 많습   네까? 남의 괴뢰정군은.......................’

하더란다. 

 反共意識이 지금처럼 稀薄해 져도 되는 것인지 헷갈렸으며, 아무튼 너무 달라진 世態가 隔世之感이었다.

 

 楊口 統一館에서 제 4 땅굴과 乙支 展望臺 觀覽을 申請했다. 나는 觀覽料가 免除 되어서 집사람 것과 駐車費를 물었다.

 擔當者 말이 지금은 구름이 깔려 있으니 點心을 먹은 후 午後 1시 以後에 오르라는 것이었다.

 그 사이 막국수 집에서 點心을 먹었다. 집사람은 現地의 막국수가 처음이다. 먹을 만 했다.

 點心을 먹은 후 戰爭記念館과 統一館을 구경했다.

 戰爭記念館은 도솔산 戰鬪, 펀치볼 戰鬪, 피의 稜線 戰鬪 等 楊口의 9개 地域 戰鬪史를 再 照明하고 있다. 楊口 地域 戰鬪에서 3,800余名의 我軍이 戰死하였으며, 이 中 確認된 戰死者 名單 1,100名이 內部에 揭載되어 있다. 이 지역에서는 전사한 국군의 유해를 발굴하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聯隊單位 戰鬪訓練인 RCT 야영지에서 주인 잃은 군번, 화이바 등을 보고  애달픈 삶을 살고 간 先輩들을 생각했었다. 

 統一館 廣場에는 1997년 警察廳 主管 第 1 回 全國學生 백일장에서 <휴전선 아래 우리 마을>이라는 題目으로 詩 部門 最優秀 受賞을 한 亥安初等學校 學生의 詩碑가 있다. 또 戰爭 當時 使用하던 指揮用 裝甲車, 155mm 평사포, 戰車 등이 展示되어 있다.

 

 自動車 기름을 補充했다.


 제 4 땅굴은 1990년 3月 3日 楊口 東北方 26km 地點 非武裝地帶 안에서 發見되었단다.

 統一館에서 發給 받은 出入證을 哨兵에게 주고 들어갔다.

 21師 66聯隊 3大隊 9中隊에서 管理하고 있었다. 3大隊는 그 옛날 우리 同窓 玄光緖가 軍 服務를 했던 곳이다.

 楊口郡에서 派遣되어 勤務하는 女職員도 있었다. 17人昇 電動車를 타고 땅굴 內部를 보며 兵士의 說明을 들었다. 地下의 巖盤水도 마셔 보았다. 安保館에서는 發掘 및 掘鑿 場面과 發見 當時 搜索 狀況을 映像으로 보여 주었다.

 땅굴 入口에는 發見 當時 內部 搜索 中 800m 地點에서 北韓軍이 設置한 地雷를 밟고 散華한 軍犬을 기리는 忠犬碑가 있다.

 光緖와 함께한 軍 時節, 3大隊가 <對 間諜作戰 障碍物 工事> 途中 浸透한 武裝 共匪에게 12名의 兵士와 함께 殉職한 軍犬이 생각났다. 當時 이런 內容은 一般에 公開되지 않았었다.

 열 名 未滿의 觀覽客 中에는 平和의 댐에서부터 본 夫婦가 있었다. 慶北 봉화 사람인데 자기도 옛 軍 時節을 생각하여 찾아 온 것이란다.


 乙支 展望臺로 올라갔다. 구불구불 험한 길을 한참이나 걸려 올랐다. 南方 限界線의 鐵條網이 산허리를 감돌고 있었다.

 그곳은 12師團에서 管理하고 있었다. 展望臺에 設置된 望遠鏡에 500원을 넣고 북쪽을 보았지만 雲霧에 싸여 잘 볼 수 없었다.

 自給自足하는 北의 兵士들이 이 雲霧를 利用하여 몰래 播種하고 몰래 收穫해 갔던 옛일과 함께, 國防部 長官 指揮覺書를 310 GP에 傳達하기 위해 人事將校가 先任 搭乘한 3/4 닷지 車 積載函에서 무서움과 好奇心으로 四周 警戒하며 24RG를 가던 어느 해 10月 1日 國軍의 날 생각이 났다.

 가파른 고갯길을 클러치와 브레이크를 함께 밟고 내려오는 바람에 自動車에서 煙氣가 났다. 書類를 哨所에 返納하고 自動車를 식혔다.


 453번 地方道 끝 원통에서 46번 國道를 따라 東海岸 속초로 향했다. 가는 도중 백담사 가는 길로 들어섰다. 卍海 한용운 선생의 體臭가 남은 곳이어서 들르고 싶었다. 또 통장에 29만원 밖에 없다고 해 人口에 膾炙된 厚顔無恥의 極致 전두환이 있었다는 곳이어서 이기도 하다.

 백담사 入口 마을 용대리에 駐車시키고 올라 갈 作定이었다. 그러나 徒步로는 장장 두서너 時間이 걸린다고 하여, 용대리-백담사 버스를 타기로 하였다. 버스 기사는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좁은 산길을 갈지자를 그리며 용케도 잘 올라간다. 

 백담사 앞에는 넓은 溪谷물이 시원하게 흐르고 있었다. 卍海는 參禪하기 좋은 곳이었고, 전두환은 놀기 좋은 곳이었다. 전두환이 마치 귀양이라도 가는 것처럼 하였는데 이곳은 그에게 過分한 곳이었다.

 앞 溪谷?(계곡 치고는 너무 넓음)물에 들어가 보기 좋은 자그마한 돌을 몇 개 주웠다. 나갈 버스 시간이 되어 아쉽지만 백담사를 나왔다. 용대리 마을길 양 옆의 자두나무를 흔들어 몇 개 주워 먹었다.


 46번 國道에서 다시 56번 地方道를 따라 속초로 간다. 有料인 미시령 터널을 거쳐 속초에 到着했다. 雪嶽山 國立公園에서 자기로 하고 들어갔다.

 몇 군데 방을 보다가 ‘코리아 모텔’에 旅裝을 풀었다. 이번에도 모텔 主人이 紹介한 <산정 식당>에서 山菜 정식을 시켰다. 1인당 1만 3천원, 조금 비쌌지만 만 원짜리 더덕주와 함께 注文했다. 特異한 것은 더덕 구이였다.


 7월 13일에도 새벽에 깼다. 집사람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모텔 隣近에는 PC 방이 없어 속초 市廳 쪽으로 나갔다. 조이 너 댓 시간 머물다 國立公園 地區로 돌아와 어제 저녁 먹었던 <산정 식당>에 가서 아침을 먹었다.


 7번 國道 海岸을 따라 내려와 江陵으로 가기로 했다. 하조대 海水浴場에 들어가 보았으나 비가 부슬부슬 내렸고, 너무 이른 시간이라 海水浴客은 없고 警察들만 安全 裝備들을 챙기느라 바쁘다. 東海岸은 潮水 干滿의 差가 적어 밀물인지 썰물 時間代인지 알지 못하겠다.

 아예 江陵으로 곧바로 가기로 했다. 道路 案內 標識 보고 烏竹軒 駐車場에 차를 댔다. 昨年에 왔을 때는 移動에 制限이 많아 자세히 보지 못했으나, 이번에는 넉넉하게 시간을 잡아 구경하기로 했다.

 漢文 實力이 딸려 훌륭하게 써 놓은 글들은 그저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라고 읽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대로는 집사람에게 열심히 說明했다.

 

 申師任堂이 栗谷을 낳았다는 방은 너무 狹小했다.

 요즘은 넓은 집만 찾는 추세다. 그래서 夫婦가 使用하는 空間은 넓다. 夫婦싸움을 한 후 같은 房을 使用해도, 房이 넓기 때문에 身體接觸 없이 멀찍이 떨어져 和解의 機會를 못 가져 冷戰을 오래 한단다. 내 나이 먹은 사람들은 夫婦가 各房 쓰는 것이 普通이지만 요즘은 젊은 夫婦까지도 各房 쓰는 것이 茶飯事가 되었단다.

 옛 사람들은 庭園 같은 곳은 넓게 造成했지만, 정작 夫婦가 寄居하는 곳은 작게 만든 理由가 있단다. 夫婦간 다툼을 했지만 좁은 空間에서 자다보니 자연히 身體接觸이 되고, 和解의 機會가 생겨 夫婦간 琴瑟이 좋아지게 된단다.   옛 선비들은 夫婦間 人間關係까지도 그런 깊은 生活의 智慧 속에서 살았다는 論理를 편 博識한 宋翼淳의 말이 一理가 있었다.


 경포대 海水浴場도 썰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사람은 車에서 나와 보지도 않는다. 農協 引出機에서 現金을 찾았다.

 許均, 허 난설헌의 옛집 草堂을 둘러보았다. 文學的 情趣가 흠뻑 하였다. 周邊에 핀 여러 색깔의 水菊이 탐이 난다.


 변두리의 깨끗한 咸興式 冷麪 집에서 막국수와 饅頭를 시켜 배부르게 먹었다. 집사람은 饅頭 맛이 좋다며 막내 놈 준다고 만두 일인분을 包裝시킨다. 자기만 자식 생각하는 模樣이 늘 그렇다.


 歸京길이다. 蒼岩 先生 春府丈께서 내 號를 지었고, 그걸 받기 위해 14일 陽谷 徐弘圭와 함께 鐘路에서 만나기로 約束을 했다.

 평창 休憩所에 들렀다. 2014년 冬季 올림픽 誘致가 霧散된 아쉬움이 새삼스럽다. 高速道路 여러 休憩所를 보았지만 평창 休憩所 뒤쪽의 呱呱한 소나무 背景이 아름다웠다.


 신갈 分岐點에서 京釜高速道路로 빠져야 하는데, 그만 호법 分岐點에서 빠지는 바람에 東서울을 향하여 中部 高速道路로 北進하고 있었다.

 아들 녀석이 전곡에서 軍 生活을 했었다. 그 때 面會 갔다 大田으로 올 때 中部 高速道路로 南下 하다, 호법 分岐點에서 빠져 나갔던 일만 생각했나 보다.

 하는 수 없이 경안 料金所에서 빠져 나왔다.

 附近의 自動車 整備所에서 서울 찾아 가는 方法을 물었더니, 다시 경안으로 들어 가 東서울 料金所를 거쳐 판교 일산 方面으로 가다 城南 요금

소에서 料金 치르고, 판교 IC에서 京釜線을 타라는 것이었다. 너무 複雜했다.

 답답해서 陽谷에게 電話 했다. 陽谷 말로는 경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城南 方向으로 繼續 오다 보면 올 수 있다고 겁먹지 말라고 했다. 陽谷 말을 듣기로 하고 城南을 향해 차를 몰았다.

 信號에 걸렸을 때 옆 車에게 開浦洞 가야 한다고 했더니, 자기를 따라 오라고 했다. 그 사람은 차를 천천히 몰며 나를 誘導 했다. 한참의 실갱이 끝에 양재 大路에 들어섰다. 이제 알만 했다. 그 젊은이 아니었으면 헤맬 뻔 했다.


 2泊 3日間의 江原道 나들이를 無事히 마친 것에 感謝한다. 주제넘게 題目을 鄭澈 先生 흉내 내어 <新 關東別曲>으로 지었다.  

                                          2007.  7.  21

                                         儒廣  陳  萬  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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