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현지시각)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 산세바스티안의 공항에 안현민 셰프가 발을 디뎠다. 그는 쌀쌀한 바람에도 옅은 온기를 느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레스토랑과 다름없는 미식의 도시 산세바스티안이기 때문이다. 이 도시의 바람에는 주방의 열기가 숨어 있다. 중국 베이징에서 한식당 ‘원 포트 바이 쌈’을 운영하는 그는 한식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 목표다. “산세바스티안을 포함한 바스크 지방은 전세계 맛의 중심지이자 식도락 여행객들이 가장 주목하는 곳”이라며 “한식을 제대로 알릴 수 있는 방법을 이곳에서 찾고 싶다”고 했다. 그를 따라나선 사흘간의 산세바스티안을 포함한 바스크 지방 미식여행은 경이로운 맛의 향연이었다.
아르사크의 식탁은 예술품 같다. ‘깃털 모양의 포테이토를 곁들인 오리구이’. 사진 박미향 기자
세계 맛의 중심지 산세바스티안
유럽인들의 휴양도시로 유명한 산세바스티안은 인구가 20만도 안 되는 작은 도시다. ‘은둔’이 첫인상일 정도로 태양 아래 산세바스티안은 매우 적막하다. 친구의 아내와 사랑에 빠져 모래알 같은 생을 사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문>의 주인공이 숨기에 안성맞춤일 정도로 대단히 조용하다. 이토록 고요한 도시, 산세바스티안을 세상에 끄집어낸 것은 반짝거리는 ‘별’이다. 세계에서 단위면적당 <미슐랭 가이드>의 별이 가장 많다. 별 3개에 빛나는 ‘아르사크’, ‘아켈라레’, ‘무가리츠’, ‘마르틴 베라사테기’부터 별 1개인 ‘엘카노’, ‘알라메다’까지 총 17개다. 버스로 1~2시간 거리에 있는 레스토랑까지 합치면 개수는 더 늘어난다. 정부가 나
서서 홍보하지 않았는데도 수많은 별이 깃든 것은 현대 식문화를 주도한 스페인 요리사들의 영향이 진하게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레스토랑 ‘엘 불리’를 운영한 페란 아드리아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액화질소 등을 활용해 식재료 본연의 형태를 해체하고 다른 맛과 질감을 탄생시키는 등 그의 ‘분자요리’는 가히 혁명적으로 전세계 레스토랑에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는 ‘슈밍화미코’의 신동민 셰프, ‘엘본더테이블’의 최현석 셰프가 유명하다. 건축가 가우디의 부재에 빗댈 정도로 페란의 2011년 현역 은퇴는 당시 충격을 줬다. 미식여행으로 인한 수익이 줄 것으로 본 스페인 셰프들마저 있었다. 하지만 이후 로카 삼형제, 키케 다코스타 등 페란의 후예들이 등장하면서 기우에 그쳤다. 산세바스티안에서 레스토랑 아르사크를 운영하는 엘레나 아르사크도 대표적인 ‘페란 키드’다.
하지만 현란한 기술이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맛은 때로 현기증을 부른다. 스페인의 매력은 페란의 조리법을 반대하는, 스페인 전통식에 뿌리를 두고 조리 기술을 최소화한 채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자는 자연주의 맛도 공존한다는 데 있다. 스페인 자연주의 요리사 산티 산타마리아는 2008년 공개적으로 페란 아드리아의 조리법을 비판했다. 그가 2011년 53살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전까지 걸출한 이 두 셰프의 논쟁은 이어졌다. 조리의 시작과 끝, 철학이 완전히 다른 두 세계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는 곳이 산세바스티안을 포함한 바스크 지방이다. 산세바스티안에서 차로 1시간 거리(75.5㎞)에 있는 레스토랑 아사도르 에체바리의 셰프 빅토르 아르긴소니스는 산타마리아의 철학을 잇는 이다.
산세바스티안의 삼인삼색 레스토랑
지난달 28일(현지시각), 아사도르 에체바리(Asador Etxebarri). “나는 프랑스에서, 이 친구는 독일에서 왔어!” 흔들거리는 미식여행객들의 입에서 상큼한 샴페인 향이 난다. 다른 식탁에는 40대 중반의 일본인 남성 둘이 앉아 있다. 아사도르 에체바리는 만국박람회다. ‘시식 메뉴’는 총 15가지(135유로). 염소젖으로 만든 버터에서 미세한 불향이 난다. 빵에 올라간 안초비(멸치절임)는 넉넉하다. 해삼, 가리비, 새우 등 식재료들은 태초에 가졌던 그 맛과 향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순박하게 접시에 올라가 있다.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같은 화려한 접시 예술은 없지만 맛은 최고다. 식탁마다 감탄사가 터진다.
아사도르 에체바리의 새우구이. 사진 박미향 기자
바스크 지방의 자연주의 퀴진(요리법)은 지역의 재료를 100% 사용하는 것. 산과 바다가 공존하는 바스크는 싱싱한 해산물로 유명하다. 맛의 비밀은 주방에 있다. 주방 문을 열자 빅토르 아르긴소니스 셰프가 밝은 미소로 맞는다. 섬세한 맛 때문에 세련된 풍모를 연상했으나 그는 옆집 아저씨처럼 푸근한 인상이다. 바스크 지방을 떠난 적이 없다는 그는 “어머니는 이 지역의 나무로만 조리했다”며 “그 전통을 이어왔고 앞으로도 혁신적인 맛을 추구할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주방 왼쪽에는 숯을 만드는 화로가 있다. 오른쪽에는 쇠창살 형태의 조리 선반이 있는데 그 아래에 숯이 깔려 있다. 이 선반들은 벽에 달린 커다란 버튼을 통해 식재료에 따라 위아래로 움직인다. 이 기구는 셰프가 직접 고안했다. “한달에 4톤의 나무를 쓴다”는 그는 “재료마다 익히는 불의 강도와 시간이 다르다”고 한다. 1990년 문을 연 이 레스토랑은 2009년 <미슐랭 가이드> 별 한개를 받았다.
아르사크의 3가지 굴 요리. 사진 박미향 기자
바스크 지방에서 아사도르 에체바리와 정반대의 맛을 추구하는 레스토랑은 산세바스티안의 아르사크(Arzak)다. 1897년 문을 열어 4대째 이어가는 유서 깊은 아르사크의 오너 셰프는 엘레나 아르사크다. 2014년 기준 세계에서 <미슐랭 가이드> 별 3개를 획득한 여성 셰프는 고작 6명이다. 그중 한명인 그는 스페인 식문화를 한 단계 올렸다는 평을 듣는 부친 후안 마리 아르사크를 잇는다. 엘레나의 요리는 바스크 지방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는 있으나 ‘엘 불리’를 비롯해 알랭 뒤카스, 피에르 가녜르 등 세계 유명 셰프들의 레스토랑에서 수학한 실력을 살려 매우 창의적인 맛을 연출한다. <미슐랭 가이드> 별점을 받은 레스토랑을 방문할 때는 정장을 갖춰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최소한 아르사크에서는 아니다. 가벼운 여행객 옷차림으로 맛을 즐기는 이들이 많다. 리크(부추와 비슷한 채소), 노란 호박, 블루베리 등 3가지 색다른 맛으로 구성한 굴, ‘꿀을 섞은 꽃가루를 곁들인 랍스터’, ‘백합을 곁들인 아귀구이’ 등 아뮈즈부슈(입맛을 돋우는 주전부리) 5가지를 포함해 13가지 ‘시식 메뉴’(199유로)는 화려한 기교를 뽐낸다.
눈이 한창 호강할 무렵 73살인 후안 마리 아르사크가 노구를 이끌고 나온다. 손님들이 경의를 표한다. 그를 부축한 종업원은 몇주 전 한국의 한 방송사에서 촬영해 갔다는 사실을 전한다.
<에스비에스 플러스>의 프로그램 ‘셰프끼리’ 시즌2 제작진이 방문한 것이다. 웨이터는 “최근 몇달 새 한국인 손님이 많아졌다”며 주방으로 안내한다. 25~30여명의 요리사들이 일하는 현장은 열기가 가득하다. 위층은 와인창고로 어두컴컴한 미로 같다. 60%는 스페인 와인이고 30%는 프랑스 와인, 나머지 10%는 칠레,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이라고 한다. 그가 안내한 연구소는 비밀병기고다. “지난 6월에 낡은 연구소를, 수백개에 이르는 허브와 씨앗 종자를 상자에 담아 보관하는 새로운 연구소로 만들었다”고 한다. 두 아이의 엄마인 엘레나는 삼성전자 냉장고의 광고모델이기도 하다.
핀초를 먹고 있는 안현민 셰프. 사진 박미향 기자
물과 기름처럼 보이는 이 두 레스토랑의 특징을 잘 섞은 아수르멘디(Azurmendi)는 안현민 셰프가 세번째로 고른 레스토랑이다. 산세바스티안에서 차로 약 1시간 20분 거리(88.4㎞)의 농장지대에 덩그러니 있는 아수르멘디는 빛나는 맛의 보물창고다. 커다란 홀과 똑같은 규모의 넓은 주방, 주방 안의 기상천외한 분자요리 도구들, 레스토랑 뒤 언덕에 있는 씨앗 보관소와 제철 식재료 농장 등은 맛을 보기도 전에 감동을 준다. 아사도르 에체바리 등 스페인 레스토랑에서 실력을 닦은 에네코 아차 셰프는 “맛을 만드는 이들이 여유롭고 편안해야 손님들도 만족한다”고 주방을 유난히 크게 만든 이유를 설명한다. 노동의 중요성을 그는 안다.
그는 “내가 추구하는 바는 뉴 바스크 퀴진”이라며 “바스크 지방에서 생산되는 재료와 이 지방 특유의 조리법이 잘 조합된 맛”이라고 말한다. “전통적인 조리법은 현대적인 맛을 창조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둘은 함께 어울려야 한다.” 2008년 <미슐랭 가이드> 별 1개를 처음 딴 이후 현재 별 3개를 자랑하는 그는 “앞으로도 아수르멘디를 ‘특별하고 다채로운 프로젝트’로 이해해주길 바란다”며 “곧 영국 런던에 분점을 낼 예정”이라고 말한다.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 셰프 이동혁씨는 “레스토랑이 식사만 하는 곳이 아니라 나갈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주는 곳이어야 한다는 에네코 셰프의 철학이 잘 녹아 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11가지(145유로), 14가지(175유로) 두 가지 ‘시식 메뉴’가 있다.
밤이 깊어지자 안현민 셰프가 산세바스티안 구시가지에 빼곡하게 자리잡은 ‘핀초’바로 나선다. 핀초는 한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의 빵 조각, 각종 해산물, 구이류 등을 꼬챙이에 꽂아 먹는 타파스의 일종이다. 구시가지에는 약 15개의 핀초바가 있다. 개당 3~7유로다.
산세바스티안/박미향 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