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백범 김구 앙살및 박정희 꼼수및 김일성 사망등등!
페이지 정보
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521회 작성일 2007-07-20 09:58본문
1. 6.25전쟁 정확히 1년전 백범 김구 선생께서는 하루전
아들 김신 공군 장교가 군무지를 이탈하며서 까지 경교
장에 와서 피신하실 것을 종용하였지만 남북 평화통일의
하나의 밀알이 되겠다하시며 의연한 모습을 보이시다 다
음날 친일 경찰 세력및 반공 세력을 등에 업은 막 20세를
갓 넘겼을 안두희 소위가 -10명의 행동대원은 수유리에서
사격 연습을 하고 저들로 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고 있었
고 그중 한명인 안두희가 -49년 6월26일 오전 12시 경 즉
정오 무렵에 저격하였고 백범의 숨이 채 넘어가기도 전에
군 헌병대가 와서 12시 34분께 안두희를 데려감
안두희는 채병덕 총참모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전봉덕
헌병사령관등에 의해 감옥에서 호의호식하다 6.25와중에
복직한 바 있고 전후 강원도 군납 납세 랭킹 2위에 오를
정도로 군 비호세력하에 부를 축적하다 의혈남 곽태영님
의 몽둥이질로 뇌를 다쳐 사업체 핵심세력이 챙길것 다
챙겨 도망가고 비루하게 수십년을 이럭저럭 살다 권중희
님의 몽둥이질을 수차례 받았고-배후 세력 실토하라는-
수십년 흘러 아주 초라한 70대의 노인이 되어 살던 중
역시 의혈남 박기혁님에 의해 급기야는 정말 악인의 말
로의 길의 최후로 배후 실토도 거의 하지 않은 채 그 몽
둥이 세례로 그 비루한 인생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음.
이승만 측근의 호가호위 세력-친일브로커, 장관, 군장성
및 극우 반공 세력등이 사사건건 이승만 정책에 반대하는
민족 지도자 백범을 그여코 암살한 정말 불우한 사건이었
으며 지난 6월26일 58주기가 됨을 도하 각 신문에서도 거
의 다루지 않는 상황을 슬퍼하며 간략히 줄이며 2학기때
기회만 주어진 다면 우리 후배 교사들이 교육의 백년 대
계를 위해 늘 상기했으면 하는 여러 해방후 사건들을 모
아 상세히 특강을 했으면 하는 생각은 늘 갖고 있음을 참
고로 알려 드립니다.(상세한 배경은 후일 도모 예정임
*** 72년 남,북간 7.4 공동 성명
김일성보다 5살 아래였던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국민 소
득이나 기타 상황에서 -특히 베트남 전을 통해- 71년경
부터는 우세를 점하고 있다고 판단한 박 대통령-자신감
을 어느 정도 가지고 북한에 밀사를 파견하였고 -원래
당시 경제 부총리였던 장기영 씨가 가기로 했으나 사전
에 정보를 접수한 이후락이 그 밀사역을 가로챘고-김형
욱 회고록에 의하면- 당시 고교 2학년이었던 저는 교련
선생님,영어 선생님등이 매우 흥분하시며 수업시간에 매
우 들떠 있던 기억이 생생하고 - 온 국민이 당시에는 쌍
수를 들어 환영했던 기억이 나나 이후 밝혀진 내용에 의
하며 당시 3선 개헌등으로 다소 정치적 위기에 '빠진 박
대통령이 7.4 공동 성명 얼마후 10월 17일 유신체제를
선포한 바 있고 -국민을 우롱한 처사임- 북한의 김일성
도 이 유신체제에 속은 분한 김에 주석제로 남북이 오히
려 더욱 곤고해진 소위 '적대적 공생 관계'로 나아가게
되었다고 많은 북한 전문가들에 의해 지금도 인구에 회
자 되고 있습니다.
**** 김일성 사망
지금부터 13년전인 1994년 7월 8일 아마 심근경색으
로 82년의 삶을 마감하였고 특히 6.25 사변 원흉의 민족
반역자인 김일성은 스탈린,히틀러 와 더불어 세계 3대
악인중의 하나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세계 유명 전쟁에서 가장 민간인 학살이나 사망이 많았
던 전쟁-군인 사망과 비교하여- 은 베트남 전쟁도 2차
대전도 아니고 바로 6.25 전쟁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
입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극비 문서 해제된 것만 30년
이상 공부해온 어느 박사님은 맥아더가 공산화된 중공을
한반도에 유인하여 일거에 북한은 물론 중공까지 다시
모택동을 축출하려는 계획-물론 여차하면 만주에 당시
24개의 원폭중 일부 사용 강행 예정-을 가졌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미국 정보부에 근무하던 한국인 정보
요원 박하리마오 씨도 최근 인터뷰에서 이미 4개월전에
6.25전쟁의 d-day 및 h-hour도 거의 정확히 알고 있었
다고 회고한 바 있었지요. 당시 미국 가족들은 단 한명
도 다치지 않고- 인천 배 도선중 4명의 가벼운 부상만-
미국으로 돌아간 기록도 있지요.
아뭏든 동족 상잔의 이 비극은 지금도 당시 부상자가
현재 보훈 병원에 누워 치료받고 계신다고 얘기 들었
으며 그 전쟁 후유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며
지금도 1000만 이산가족의 아픔을 김정일은 외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음에는 이준 이상설등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 100주년 -고종이 일본놈 칼 앞에서 농락당하던 이야기
등 - 과거의역사를 반추하여 성찰하지 않으면 그 슬픈
역사를 되풀이 할 수 있다는 독일의 전 대통령이었던
헤르베르트 폰 바이츠제커 의 금언을 상기하면서 이만
다소 아쉽게 줄이며 많은 사건 얘기는후일을 도모하겠
습니다. 대승적 견지에서 혜량과 양찰이 있으시길 빌며
이만 간략히 줄입니다. 한준구 올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