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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되돌아 보게되는 1970년대 박정희의핵개발과 1990년대의 김일성 그리고 카터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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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41 노재성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 댓글 0건 조회 2,039회 작성일 2006-10-27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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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cago 교외(Skokie)에 살고있는 41회 노재성(Ro,Jae-S)입니다.
한준구 53회 후배의 "길다란 글"을 끝까지 읽고,때마침 한국일보 Chicago판에 북한 핵실험 후에 실린 "고착화된 의존성"칼럼(10월26일자 미국판 Written by Ro,Jae-S)을 "Attached Files"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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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되돌아 보게되는 1970년대 박정희의핵개발과 1990년대의 김일성 그리고 카터대통령! - 한준구 ┼
│ 작 성 자 : 한준구 [alfonsohan@yahoo.co.kr] 2006.10.15


│ 글 제 목 : 되돌아 보게되는 1970년대 박정희의핵개발과 1990년대의 김일성 그리고 카터대통령!



│ 내용이 다소 많으나 필히 끝까지 읽어 주시옵고 동기생 댓글이나 동기생의 가까운 친구나
│ 친지,지인등 국방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fact 에 어긋나거나 보완할점,지적할 점등을 알려
│ 주시길 바라오며 국방과학연구소 동기생들도 댓글 요망합니다


│ . 소직이 지난 10년 동안 북한 전문가들의 특강을 부지런히 들으려고 부단히 노력을 하고
│ 있는 중입니다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사오나 가급적 다수의 미래지향적 댓글을 부탁드리
│ 며 제가 읽은 신문 칼럼중 가장 흥미로왔던 신문 내용을 저의 주석과 함께 소개하오니 남
│ 북한 항구적 평화 통일 기반 조성에 다소나마 참조하셨으면 합니다.

│ 다음글은 문화일보 정치부장의 칼럼입니다.

│ *** 1970년대에 박정희 정권은 자주국방과 고슴도치론을 내세우며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 에 나선 바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박정권이 미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극비리에 추진한
│ 데다 유신 독재 정권의 폐쇄성,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에 이르는 전두환,노태우 정권
│ 의 비핵화 추진 과정에서의 완벽한 단절등으로 인해 그 내막의 전모는 한국 현대사의 블
│ 랙홀 중의 하나로 아직 남아 있습니다.

│ *** 최근 공개된 1972년의 외교문서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비록 일부분이지만 당시
│ 상황을 설명해 주는 정부 공식자료이기 때문입니다.소직이 고교 3학년 시절인 1972년은
│ 한반도 현대사에서 또하나의 turning point였습니다. 역사적인 7.4 공동성명으로 - 남북 관
│ 계가 분단이후 처음으로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게 됐으며 국내적으로는 10월 유신
│ 으로 불리는 10.17 특별성명으로 박정희 독재체재가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햇습니다.

│ *** 1970년대 들어 미국의 역할 감소를 의미하는 닉슨 독트린으로 인해 북한은 매우 고무
│ 되어 가고 있었고, 남한은 점점 불안에 휩싸이는 한반도의 상황으로 변하는 시기였습니
│ 다. 1970년 7월 당시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주한 미군 2만명 철수 계획을 밝혔으며 실제
│ 로 미국 보수층의 우려및 한국 정부의 의사를 완전히 무시한 채 1971년 3월 2만명 안팎의
│ 미7사단 병력을 철수 해 버렸습니다.

│ *** 미 7사단 철수 약4개월 전인 1970년 (박대통령 53세때) 11월 한국 언론인 2명과의 비
│ 공식 저녁 술자리에서 핵 개발계획의 의중을 내보인 바 있었습니다. 박정희가 말하길 " 우
│ 리의 살길은 온 국민이 힘을 뭉쳐 고슴도치가 되는 길 뿐이오. 코끼리나 사자도 전신에 가
│ 시를 곧추세운 고슴도치를 함부로 못하지요. 사생결단의 자주 국방 의지를 이번 기회에
│ 다져야 합니다. 우리는 미사일도 만들고 원자탄도 만들어야 합니다. 임자들에게 처음으
│ 로 하는 얘기이니까 절대 입 밖에 내지 마시길 바라오."

│ ***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전쟁이 공산회로 끝나자 박정희는 "번개 사업"으로 명명된
│ 핵 및 마시일 개발을 본격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최형섭 과기처장관-박대통령의 절대
│ 적 신임을 받고 있었고 최장수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한 바 잇으며 얼마전 천수를 누리
│ 시다
│ 돌아가심- 의 총지휘하에 대전 기계창에서 부품을 만들고, 기상 측후소로 위장된 곳에서
│ 성능시험을 했습니다.

│ *** 1976년 5월 당시-- 8.18 도끼 만행 사건 약3개월전임--- 제럴드 포드 행정부의 도널
│ 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말하길 "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고집하면 미국은 안보및 경제 문
│ 제를 포함해 한국과의 모든 관계를 재검토할 것" 이라고 정면 경고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 바로 그 럼즈펠드가 이번에도 부시의 국방장관이 되어-약 30년만에 또 국방장관이 됨- 북
│ 한에 대해 핵개발 포기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
│ 다.

│ *** 미국방장관인 도널드 럼즈펠드의 경고장을 무시한 지 2년 4개월이 지난 1978년 -박정
│ 희 피살 1년 1개월전 - 9월26일 서해안 바닷가에서 "백곰" 으로 명명된 첫 국산 미사일이
│ 발사됐고 한국은 이제 세계에서 자랑스런 7번째의 미사일 보유국가가 돼었습니다.

│ *** 그후 한국은 프랑스와 비밀리에 핵 재처리 시설및 기술 공급 계약을 체결하였고 드디
│ 어 박정희 대통령이 학수고대하고 국내,외적으로 강하게 표명했던 자주 국방의 가장 큰
│ 힘인 핵개발이 초읽기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미국과의 긴장관계는 계속되고 지미
│ 카터 대통령의 한국 방문시 인권문제등을 포함하여 둘 사이는 가시돋힌 설전이 오가기 까
│ 지 하였습니다.방한 당시 카터는 박정희를 바로 방문하지 않고 바로 전방 미군 부대로 들
│ 어가 그의 취미였던 조깅을 자국 군인들과 함께 즐기며 박정희의 심기를 심하게 긁은 바
│ 있었고-대통령 재직시에는 가장 무능한 대통령으로 그리고 임기후에는 가장 유능한 전직
│ 대통령으로 전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친 바 있는 카터 대통령- 그리고 얼마 안있어 "나의
│ 뒤에는 미국이 있다" 라고 말했다는 중앙정보부의 김재규가-김재규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
│ 세히 기술할 예정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를 죽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 정보부 한
│ 국 책임자였던 도널드 그레이그-나중에 주한 미국 대사 역임-는 박정희 피살 약 2달전 미
│ 국의 한 강연회에서 아마 한국에 뭔가의 변고가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음을 넌지
│ 시 암시한 바도 있었습니다.그리고,김재규는 박정희와 동향이고 육사동기이고 그동안 박
│ 정희로 부터 수많은 은혜를 입어오곤 하였으나 -김재규는 육군 중장시절 군단장 집무실
│ 을 방문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체포할 마음도 갖고 있었으나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하
│ 였고-약 10년 뒤에는 그 수많은 은혜를 총알로 갚는 배은망덕의 패륜행위를 저질렀다고
│ 도 볼 수 있으며 아마 가만히 김재규가 그냥 조용히 정보부장 사직후 기다렸어도 부마 사
│ 태이후 차지철은 "여차하면 탱크로 200만명도 죽일 수 있다." 고 그의 속내를 드러낸 바도
│ 있는 상황이라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민주화의 역량이 조금만 더 쌓인 후 총체적으로
│ 시의 적절하게 반독재 국민 시위에 나섰다면 김재규 사건으로 어부지리의 덕을 본 전두환
│ 이나 그의 졸개 노태우의 등장은 사실상 어려웠으리라는 일부 전문가들의 시각도 아직 유
│ 효합니다.-역사에 가정은 다소 무모하지만-

│ *** 박정희 피살 직전 차지철의 전횡을 우려한 육군 수뇌진은 그래도 다소나마 차지철을
│ 견제할 수 있는 전두환을 파격적으로 국군 보안사령관으로 천거하였고-그를 천거한 육군
│ 선배는 지금도 후회하고 있음- 박정희 피격후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이 되어 경찰,검찰,
│ 정보 기관의 거의 모든 고급 정보를 일차적으로 독점하는 횡재와 아울러 당시 육참총장이
│ 던 육사 5기 출신의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육사 3기 출신의 노재현 국방장관을
│ 무력화시키고 나아가 최규하 대통령을 협박하여 1979년 12.12 쿠데타를 성공시키며 일약
│ 신군부의 리더로 차기 대통령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12.12 사태로 군부를 완전히 장악한
│ 전두환 신군부는 즉각 핵개발 중지를 천명하여 미국의 절대적인 환심-박정희가 5.16 군사
│ 정변 성공후 반공을 제일의 국시로 내세웠듯이-을 사게되고 해당 핵관련 연구자 1000명
│ 을 해고하여 완전히 핵과는 손을 씻게 되었으며 광주 사태의 주모자로 옭아매어 사형선고
│ 까지 내린 김대중에서 사면을 베푸는 바터제로 미국 국빈 방문을 성사시켰고-이때 막후에
│ 서 활동한 군인은 영어에 능통한 김윤호 장군으로 알려짐- 나아가 미육군 대장으로 주한
│ 미군 사령관이었던 위컴대장은 소장에 불과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을 안하무인격으
│ 로 막 대한 바도 있는 데 전두환은 결정적인 체포작전을 벌이지 않은 - 12.12 사태이후 다
│ 수의 군인들이 미군이 조금만 도와주면 전두환 소장 체포는 어렵지 않다고 건의하고 실
│ 제 도움 요청을 한 한국 고급장교들이 다수 있었지만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눈에 보이
│ 지 않는 위컴의 공로를 높이사 미국 방문시 한국 핵개발의 씨를 완전히 없애버린 내신 성
│ 적도 참고할 사 전두환은 위컴을 레이건에게 미육군 참모총장으로 적극 천거하였고 실제
│ 레이건은 능력도 있는 그를 미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하는 묘한 인생의 수레바퀴를 보는
│ 것 같았습니다.

│ *** 그리고, 전두환의 졸개 노태우는 1991년 한국의 핵전문가들의 조언을 듣지도 않고 -
│ 일본의 경우처럼 핵은 일단 포기하지만 핵재처리와 관련한 평화적 이용은 극대화 시키는
│ 전략도 고려하지 않고-일방적으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하여 미국의 환심을 또 사면서
│ 경제및 안보 협력을 강화하는 외교로 치닫게됨.
│ 그런데, 남한측은 비핵화선언을 전세계에 천명하면서 곧이어 북한측은 핵개발에 더욱 박
│ 차를 가하게 되며 1989년 소련 붕괴, 독일 통일, 연이어 터지는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 몰
│ 락과 붕괴 속에서 김일성은 무척 당황하게 되고 중국도 1978년 등소평 집권이후 흑묘백묘
│ 론을 앞세우며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더욱 박차를 가하여 경제 발전에 일로매진하는
│ 상황하에서- 즉, 믿을 놈 하나 없는 상황하에서 드디어 김일성은 박정희 사망후 박살난 자
│ 주 국방의 기치를 드높이며 핵무장을 통한 체제수호의 방향으로 완전히 굳히게 되며 몇년
│ 뒤인 1994년 북한 핵위기가 극도로 고조되고 1976년 8.18 도끼 만행사건 이후 두번째로 전
│ 쟁 위기로 치닫게 됨( 도끼 사건은 김정일 지시 때문에 ,이번에는 김일성의 핵무장 계획
│ 지시 때문에 전쟁의 일촉즉발의 위기를 자초함)

│ *** 1979년 박정희는 자주국방의 핵개발 고집으로 피살되었고 1994년 김일성도 자주국방
│ 의 핵개발로 결과적으로 둘다 핵 때문에 박정희는 한창 잘나갈 62세에 죽었고 김일성은
│ 조상 묘 덕에 82살 까지 비교적
│ 긴 삶을 살았으며 둘다 공교롭게도 남한은 카터가 현역 대통령으로 방한이후,그리고 북한
│ 은 카터가 특사로 방북이후 둘다 죽었는 데 일부 호사가들에 의하면 - 독수리 관상의 카터
│ 가 호랑이 관상의 김일성을 위압하였고 이에 기가 질린 김일성은 심장에 기가 안통해 심
│ 근경색으로 죽었음이 거의 확실함.

│ *** 럼즈펠드 특집- 다음 내용은 아주 재미있게 읽은 중앙일보 "분수대" 칼럼-정치부 차
│ 장 오영환의 06년8월 31일자 기고문임- 으로 저의 주석을 달아 글을 올립니다.
│ 1.미국 닉슨 대통령- 1971년- 우리 대한민국은 주한 미7사단 철수문제로 한반도가 매우
│ 불안할 때임-
│ 당시 39세인 닉슨의 참모 럼즈펠드(직책은 대통령 고문) 때문에 골치가 아팠음.럼즈펠드
│ 는 4선의 하원의원의 관록을 접고 닉슨 행정부에 입성한 지 2년이 지나는 시기. 1968년에
│ 서 1972년 사이는 미군의 월남전 사상자가 엄청 늘고있던 상황이었고 이 전쟁에 질질 끌
│ 려 다니던 닉슨대통령에게 39세의 혈기 방장한 럼즈펠드는 딴죽걸기가 일쑤였다.나중에
│ 밝혀진 닉슨의 비밀 녹음 테이프에 의하면"러미(럼즈펠드)는 너무 거칠어! 무례한 놈이
│ 야!"- 닉슨은 럼즈펠드를 35년전에 이렇게 평가했다.
│ 2.미국 포드 대통령- 1974년 - 72년의 남북 7.4공동 성명 선언 2년뒤 한국은 문세광 육영
│ 수 여사 저격사건(8월15일 광복절 행사시)으로 남북이 매우 경색되어 가게되는 상황- 42
│ 세가 된 럼즈펠드는 제럴드 포드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됨.- 그는 기세등등하던 국무장관
│ 겸 국가안보 특별보좌관이던 헨리 키신저의 역할 축소에 발벗고 나서 드디어 키신저는 국
│ 무장관 직책만 맡도록 하게 한다. 그리고, 럼즈펠드는 지금부터 31년전인 1975년 국방장
│ 관에 드디어 오른다.- 이당시의 일로 인해 3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있는 헨리 키신저
│ 와는 사이가 안좋다고 함.
│ 3.럼즈펠드의 관료 생활- 늘 저돌적이고 늘 잡음이 뒤따랐고 다수를 적으로 만들었으나
│ 거의 지는 법은 없었다. 실제 그는 고교,대학,해군에서 레슬링으로 우승한 적이 많았다.
│ 그의 dna는 원래 저돌적 정면 돌파 그자체였다.
│ 4.돌아온 마카로니 웨스턴 결정판 장고 럼즈펠드- 1975년 첫 국방장관에 오른지 26년만
│ 에 다시 국방장관으로 돌아온 장고 럼즈펠드는 미군의 최대 목표를 "military
│ transformation"-즉 군사 변환이었다.이른바 중후하고 장대한 미군을 우리 휴대폰처럼 경
│ 박단소(가볍고 얇으며 짧고 작은)한 미군으로의 대변환을 시키는 대작업이었다.즉, gpr,
│ 미군 재편성으로 인한 신속 기동군화가 그 핵심이었다.이 계획중에는 최근에 밝혀진 바대
│ 로 3만7천명 안팎의 주한 미군중 평택 이전 과정에서 약1만 2천명 정도를 감축하여 그 병
│ 력을 다른대로 재배치할 것으로 보인다. 위의 럼즈펠드 독트린에 미국내 군부와 의회가
│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럼즈펠드는 이를 깔아 뭉갠다. 위에 언급한 그의 dna 가 바뀔 턱
│ 이 없었다. 이후의 아프카니스탄및 이라크 전은 "럼즈펠드 개박살 독트린"의 실험 무대였
│ 다고 본다. 첨단 무기 타격 중심의 이 럼즈독트린은 속전속결 작전이었지만 전후 처리에
│ 는 큰 허점을 남겼다. 특히 미군은 이라크전에서 자국군 2천명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였
│ 고 부상자및 이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트라우마-는 걸프전 참전 미군에게서 보았듯 굉장
│ 히 심각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야기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미 80년대 베트남전을 리얼하게
│ 다룬 플레툰-미군 패배를 최초로 인정한 영화-올리버 스톤 감독의 3대 명작중의 하나- 에
│ 서 자국군끼리 서슴없이 총을 겨누는 장면과 베트남 양민 학살 장면과 문제작 "디어 헌
│ 터" -로버트 드니로와 메릴 스트립주연으로 유명하며-에서 참전 군인의 전쟁 후유증과 러
│ 시안 룰렛게임으로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 바 있는 데 이번 이라크전은 제2의 베트남전이
│ 될 가능성이 큰 바 럼즈펠드가 제2의 맥나라마 전 국방장관이 될 것 같아 두고두고 이라크
│ 내 대량 살상 무기도 거의 없었는 데 기독 근본주의자 부시-딕 체니-럼즈- 라이스-월 포
│ 이츠 등의 실세 강경파 그룹 그리고, 멍청한 미국 c.i.a 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허위 보고
│ 등은 역사의 죄인이 될 것 같습니다.
│ 5.이라크 점령 지역내 이라크 포로 학대 고문 사건 - 미국내 언론의 적지않은 비판과 예비
│ 역 장성들의 양심 선언과 럼즈에 대한 엄중한 반란성 비판 등에도 럼즈는 오뚝이처럼 넘
│ 어지지 않았다.
│ 6.후세인및 호메이니 와의 관계- 럼즈는 국익 앞에서는 냉혈한이었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 는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파이프라인이었다. 1983년 레이건 중동 특사로 지금의 후세
│ 인 대통령을 만나 이란 견제책에 대한 조언-호메이니 혁명이후의 견제와 균형 정책 조언-
│ 을 하였으나 15년 뒤인 1998년 럼즈는 후세인 전복을 주장했고 결국 그의 뜻대로 이라크
│ 전 막바지 변방 허름한 집 지하 동굴에서 미국 초콜렛으로 연명하던 후세인은 자결하지
│ 않고 아주 치사하게 지금까지 가막소에서 큰소리치며 최후의 날만 기다리는 초라한 신세
│ 로 전락해 있다.- d-day 최후 통첩 48시간전에 망명 신청하여 수많은 자국 국민과 문화재
│ 를 살리는 방향으로 갔거나 아예 대량 살상 무기가 없음을 천명하고 사찰을 받았으면 하
│ 는 아쉬움이 크고 이후 이라크 점령후 스페인 청년 장교 -대위,소령급 7명이 헬기 이동중
│ 로켓포를 맞아 폭사하거나,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출근 통근 열차 폭발 테러로 1800 여명
│ 의 부상자와 180 여명의 아까운 사망자가 나왔으며 영국 런던 폭탄 연쇄 테러가 이어졌고
│ 올해도 어느 유럽 비행기가 비행중 폭탄 테러등으로 그어느 누가
│ 죽음을 당할 지 아무도 장담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으며 이번 레바논에 대한 이
│ 스라엘 침공은 전세계 불특정 다수가 희생자가 될 수 있는 지구 전체의 비극이 아닐 수 없
│ 다.
│ 7.한미 연합사 창설의 주역 럼즈펠드- 만 28년전 한미 연합사 창설을 주도하였던 럼즈는
│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2009년에 우리측에 넘기겠다고 최근 서한을 보내왔으며 또한 한국
│ 군은 이제 북한의 공격은 막아낼 수 있을거라며 다시 언론에 그 양도 의사를 분명히 하였
│ 다. 만일 한국측이 그 이양 시기를 늦추자고 하면 럼즈는 어떻게 나올 것인가? - 5년전에
│ 그가 언론에 기고했다는 "럼즈펠드 룰 154개 항목"에서 굳이 그 해답을 찾아 본다면?- "의
│ 심스러우면 하지마라!" 아니면 "그래도 의심스러우면 옳은 일을 하라" 아마 둘중의 하나
│ 가 될 것이다.

│ * 김일성 사후 지금까지 김정일은 "강성대국" "선군정치" 를 아직도 고집하고 있는 바 이
│ 는 그 동기의 측면에서 70년대 박정희의 자주국방과 고슴도치론과 공통된 측면이 있습니
│ 다.남한은 ,특히 보수파들은 30년전 핵개발에 나섰던 기억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체제위
│ 기에 몰린 집권자는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핵개발에 나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또 한.미 안
│ 보동맹이 중요하지만 이해관계가 충돌할 경우 미국은 언제든 한반도에서의 역할을 변화
│ 시킬 수 -지금은 전략적 유연성및 전세계 미군 재편성 계획(g.p.r)-있습니다. 북한 역시
│ 최고 권력자의 피살 이후 영구 동결된 남핵사태를 기억해야 합니다.
│ *** 다행히도 북핵 문제은 남핵 문제에 비해 훨씬 복잡한 측면을 가지고 있고 또 다양한
│ 평화적 해법이 논의되고 있습니다.그렇지만 당사국들이 상대방을 최대한 이해하면서 냉
│ 철히 움직일 때에만 공동번영의 방향으로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 *** 그리고,현재의 북한핵 문제에 대해서도 저도 기고할 예정이오니 함께 우선 사이버상
│ 에서 대화를 나누기를 기대해 보면서 우선 마무리 인사에 갈음합니다.

│ 2006.10.15 한준구 올림

│ ** 53회 홈피에 올라오는 한준구 동기에 글이 너무 유익하기에
│ 우리모두 함께 하고자 총동창회 게시판에 퍼 올립니다 - 옮긴이 - 53회 류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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