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 보게되는 1970년대 박정희의핵개발과 1990년대의 김일성 그리고 카터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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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이름으로 검색 댓글 0건 조회 2,127회 작성일 2006-10-19 20:01본문
작 성 자 : 한준구 [alfonsohan@yahoo.co.kr] 2006.10.15
글 제 목 : 되돌아 보게되는 1970년대 박정희의핵개발과 1990년대의 김일성 그리고 카터대통령!
내용이 다소 많으나 필히 끝까지 읽어 주시옵고 동기생 댓글이나 동기생의 가까운 친구나
친지,지인등 국방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fact 에 어긋나거나 보완할점,지적할 점등을 알려
주시길 바라오며 국방과학연구소 동기생들도 댓글 요망합니다
. 소직이 지난 10년 동안 북한 전문가들의 특강을 부지런히 들으려고 부단히 노력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사오나 가급적 다수의 미래지향적 댓글을 부탁드리
며 제가 읽은 신문 칼럼중 가장 흥미로왔던 신문 내용을 저의 주석과 함께 소개하오니 남
북한 항구적 평화 통일 기반 조성에 다소나마 참조하셨으면 합니다.
다음글은 문화일보 정치부장의 칼럼입니다.
*** 1970년대에 박정희 정권은 자주국방과 고슴도치론을 내세우며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에 나선 바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박정권이 미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극비리에 추진한
데다 유신 독재 정권의 폐쇄성,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에 이르는 전두환,노태우 정권
의 비핵화 추진 과정에서의 완벽한 단절등으로 인해 그 내막의 전모는 한국 현대사의 블
랙홀 중의 하나로 아직 남아 있습니다.
*** 최근 공개된 1972년의 외교문서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비록 일부분이지만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는 정부 공식자료이기 때문입니다.소직이 고교 3학년 시절인 1972년은
한반도 현대사에서 또하나의 turning point였습니다. 역사적인 7.4 공동성명으로 - 남북 관
계가 분단이후 처음으로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게 됐으며 국내적으로는 10월 유신
으로 불리는 10.17 특별성명으로 박정희 독재체재가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햇습니다.
*** 1970년대 들어 미국의 역할 감소를 의미하는 닉슨 독트린으로 인해 북한은 매우 고무
되어 가고 있었고, 남한은 점점 불안에 휩싸이는 한반도의 상황으로 변하는 시기였습니
다. 1970년 7월 당시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주한 미군 2만명 철수 계획을 밝혔으며 실제
로 미국 보수층의 우려및 한국 정부의 의사를 완전히 무시한 채 1971년 3월 2만명 안팎의
미7사단 병력을 철수 해 버렸습니다.
*** 미 7사단 철수 약4개월 전인 1970년 (박대통령 53세때) 11월 한국 언론인 2명과의 비
공식 저녁 술자리에서 핵 개발계획의 의중을 내보인 바 있었습니다. 박정희가 말하길 " 우
리의 살길은 온 국민이 힘을 뭉쳐 고슴도치가 되는 길 뿐이오. 코끼리나 사자도 전신에 가
시를 곧추세운 고슴도치를 함부로 못하지요. 사생결단의 자주 국방 의지를 이번 기회에
다져야 합니다. 우리는 미사일도 만들고 원자탄도 만들어야 합니다. 임자들에게 처음으
로 하는 얘기이니까 절대 입 밖에 내지 마시길 바라오."
***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전쟁이 공산회로 끝나자 박정희는 "번개 사업"으로 명명된
핵 및 마시일 개발을 본격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최형섭 과기처장관-박대통령의 절대
적 신임을 받고 있었고 최장수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한 바 잇으며 얼마전 천수를 누리
시다
돌아가심- 의 총지휘하에 대전 기계창에서 부품을 만들고, 기상 측후소로 위장된 곳에서
성능시험을 했습니다.
*** 1976년 5월 당시-- 8.18 도끼 만행 사건 약3개월전임--- 제럴드 포드 행정부의 도널
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말하길 "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고집하면 미국은 안보및 경제 문
제를 포함해 한국과의 모든 관계를 재검토할 것" 이라고 정면 경고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바로 그 럼즈펠드가 이번에도 부시의 국방장관이 되어-약 30년만에 또 국방장관이 됨- 북
한에 대해 핵개발 포기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
다.
*** 미국방장관인 도널드 럼즈펠드의 경고장을 무시한 지 2년 4개월이 지난 1978년 -박정
희 피살 1년 1개월전 - 9월26일 서해안 바닷가에서 "백곰" 으로 명명된 첫 국산 미사일이
발사됐고 한국은 이제 세계에서 자랑스런 7번째의 미사일 보유국가가 돼었습니다.
*** 그후 한국은 프랑스와 비밀리에 핵 재처리 시설및 기술 공급 계약을 체결하였고 드디
어 박정희 대통령이 학수고대하고 국내,외적으로 강하게 표명했던 자주 국방의 가장 큰
힘인 핵개발이 초읽기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미국과의 긴장관계는 계속되고 지미
카터 대통령의 한국 방문시 인권문제등을 포함하여 둘 사이는 가시돋힌 설전이 오가기 까
지 하였습니다.방한 당시 카터는 박정희를 바로 방문하지 않고 바로 전방 미군 부대로 들
어가 그의 취미였던 조깅을 자국 군인들과 함께 즐기며 박정희의 심기를 심하게 긁은 바
있었고-대통령 재직시에는 가장 무능한 대통령으로 그리고 임기후에는 가장 유능한 전직
대통령으로 전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친 바 있는 카터 대통령- 그리고 얼마 안있어 "나의
뒤에는 미국이 있다" 라고 말했다는 중앙정보부의 김재규가-김재규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
세히 기술할 예정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를 죽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 정보부 한
국 책임자였던 도널드 그레이그-나중에 주한 미국 대사 역임-는 박정희 피살 약 2달전 미
국의 한 강연회에서 아마 한국에 뭔가의 변고가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음을 넌지
시 암시한 바도 있었습니다.그리고,김재규는 박정희와 동향이고 육사동기이고 그동안 박
정희로 부터 수많은 은혜를 입어오곤 하였으나 -김재규는 육군 중장시절 군단장 집무실
을 방문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체포할 마음도 갖고 있었으나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하
였고-약 10년 뒤에는 그 수많은 은혜를 총알로 갚는 배은망덕의 패륜행위를 저질렀다고
도 볼 수 있으며 아마 가만히 김재규가 그냥 조용히 정보부장 사직후 기다렸어도 부마 사
태이후 차지철은 "여차하면 탱크로 200만명도 죽일 수 있다." 고 그의 속내를 드러낸 바도
있는 상황이라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민주화의 역량이 조금만 더 쌓인 후 총체적으로
시의 적절하게 반독재 국민 시위에 나섰다면 김재규 사건으로 어부지리의 덕을 본 전두환
이나 그의 졸개 노태우의 등장은 사실상 어려웠으리라는 일부 전문가들의 시각도 아직 유
효합니다.-역사에 가정은 다소 무모하지만-
*** 박정희 피살 직전 차지철의 전횡을 우려한 육군 수뇌진은 그래도 다소나마 차지철을
견제할 수 있는 전두환을 파격적으로 국군 보안사령관으로 천거하였고-그를 천거한 육군
선배는 지금도 후회하고 있음- 박정희 피격후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이 되어 경찰,검찰,
정보 기관의 거의 모든 고급 정보를 일차적으로 독점하는 횡재와 아울러 당시 육참총장이
던 육사 5기 출신의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육사 3기 출신의 노재현 국방장관을
무력화시키고 나아가 최규하 대통령을 협박하여 1979년 12.12 쿠데타를 성공시키며 일약
신군부의 리더로 차기 대통령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12.12 사태로 군부를 완전히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는 즉각 핵개발 중지를 천명하여 미국의 절대적인 환심-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 성공후 반공을 제일의 국시로 내세웠듯이-을 사게되고 해당 핵관련 연구자 1000명
을 해고하여 완전히 핵과는 손을 씻게 되었으며 광주 사태의 주모자로 옭아매어 사형선고
까지 내린 김대중에서 사면을 베푸는 바터제로 미국 국빈 방문을 성사시켰고-이때 막후에
서 활동한 군인은 영어에 능통한 김윤호 장군으로 알려짐- 나아가 미육군 대장으로 주한
미군 사령관이었던 위컴대장은 소장에 불과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을 안하무인격으
로 막 대한 바도 있는 데 전두환은 결정적인 체포작전을 벌이지 않은 - 12.12 사태이후 다
수의 군인들이 미군이 조금만 도와주면 전두환 소장 체포는 어렵지 않다고 건의하고 실
제 도움 요청을 한 한국 고급장교들이 다수 있었지만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눈에 보이
지 않는 위컴의 공로를 높이사 미국 방문시 한국 핵개발의 씨를 완전히 없애버린 내신 성
적도 참고할 사 전두환은 위컴을 레이건에게 미육군 참모총장으로 적극 천거하였고 실제
레이건은 능력도 있는 그를 미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하는 묘한 인생의 수레바퀴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 그리고, 전두환의 졸개 노태우는 1991년 한국의 핵전문가들의 조언을 듣지도 않고 -
일본의 경우처럼 핵은 일단 포기하지만 핵재처리와 관련한 평화적 이용은 극대화 시키는
전략도 고려하지 않고-일방적으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하여 미국의 환심을 또 사면서
경제및 안보 협력을 강화하는 외교로 치닫게됨.
그런데, 남한측은 비핵화선언을 전세계에 천명하면서 곧이어 북한측은 핵개발에 더욱 박
차를 가하게 되며 1989년 소련 붕괴, 독일 통일, 연이어 터지는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 몰
락과 붕괴 속에서 김일성은 무척 당황하게 되고 중국도 1978년 등소평 집권이후 흑묘백묘
론을 앞세우며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더욱 박차를 가하여 경제 발전에 일로매진하는
상황하에서- 즉, 믿을 놈 하나 없는 상황하에서 드디어 김일성은 박정희 사망후 박살난 자
주 국방의 기치를 드높이며 핵무장을 통한 체제수호의 방향으로 완전히 굳히게 되며 몇년
뒤인 1994년 북한 핵위기가 극도로 고조되고 1976년 8.18 도끼 만행사건 이후 두번째로 전
쟁 위기로 치닫게 됨( 도끼 사건은 김정일 지시 때문에 ,이번에는 김일성의 핵무장 계획
지시 때문에 전쟁의 일촉즉발의 위기를 자초함)
*** 1979년 박정희는 자주국방의 핵개발 고집으로 피살되었고 1994년 김일성도 자주국방
의 핵개발로 결과적으로 둘다 핵 때문에 박정희는 한창 잘나갈 62세에 죽었고 김일성은
조상 묘 덕에 82살 까지 비교적
긴 삶을 살았으며 둘다 공교롭게도 남한은 카터가 현역 대통령으로 방한이후,그리고 북한
은 카터가 특사로 방북이후 둘다 죽었는 데 일부 호사가들에 의하면 - 독수리 관상의 카터
가 호랑이 관상의 김일성을 위압하였고 이에 기가 질린 김일성은 심장에 기가 안통해 심
근경색으로 죽었음이 거의 확실함.
*** 럼즈펠드 특집- 다음 내용은 아주 재미있게 읽은 중앙일보 "분수대" 칼럼-정치부 차
장 오영환의 06년8월 31일자 기고문임- 으로 저의 주석을 달아 글을 올립니다.
1.미국 닉슨 대통령- 1971년- 우리 대한민국은 주한 미7사단 철수문제로 한반도가 매우
불안할 때임-
당시 39세인 닉슨의 참모 럼즈펠드(직책은 대통령 고문) 때문에 골치가 아팠음.럼즈펠드
는 4선의 하원의원의 관록을 접고 닉슨 행정부에 입성한 지 2년이 지나는 시기. 1968년에
서 1972년 사이는 미군의 월남전 사상자가 엄청 늘고있던 상황이었고 이 전쟁에 질질 끌
려 다니던 닉슨대통령에게 39세의 혈기 방장한 럼즈펠드는 딴죽걸기가 일쑤였다.나중에
밝혀진 닉슨의 비밀 녹음 테이프에 의하면"러미(럼즈펠드)는 너무 거칠어! 무례한 놈이
야!"- 닉슨은 럼즈펠드를 35년전에 이렇게 평가했다.
2.미국 포드 대통령- 1974년 - 72년의 남북 7.4공동 성명 선언 2년뒤 한국은 문세광 육영
수 여사 저격사건(8월15일 광복절 행사시)으로 남북이 매우 경색되어 가게되는 상황- 42
세가 된 럼즈펠드는 제럴드 포드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됨.- 그는 기세등등하던 국무장관
겸 국가안보 특별보좌관이던 헨리 키신저의 역할 축소에 발벗고 나서 드디어 키신저는 국
무장관 직책만 맡도록 하게 한다. 그리고, 럼즈펠드는 지금부터 31년전인 1975년 국방장
관에 드디어 오른다.- 이당시의 일로 인해 3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있는 헨리 키신저
와는 사이가 안좋다고 함.
3.럼즈펠드의 관료 생활- 늘 저돌적이고 늘 잡음이 뒤따랐고 다수를 적으로 만들었으나
거의 지는 법은 없었다. 실제 그는 고교,대학,해군에서 레슬링으로 우승한 적이 많았다.
그의 dna는 원래 저돌적 정면 돌파 그자체였다.
4.돌아온 마카로니 웨스턴 결정판 장고 럼즈펠드- 1975년 첫 국방장관에 오른지 26년만
에 다시 국방장관으로 돌아온 장고 럼즈펠드는 미군의 최대 목표를 "military
transformation"-즉 군사 변환이었다.이른바 중후하고 장대한 미군을 우리 휴대폰처럼 경
박단소(가볍고 얇으며 짧고 작은)한 미군으로의 대변환을 시키는 대작업이었다.즉, gpr,
미군 재편성으로 인한 신속 기동군화가 그 핵심이었다.이 계획중에는 최근에 밝혀진 바대
로 3만7천명 안팎의 주한 미군중 평택 이전 과정에서 약1만 2천명 정도를 감축하여 그 병
력을 다른대로 재배치할 것으로 보인다. 위의 럼즈펠드 독트린에 미국내 군부와 의회가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럼즈펠드는 이를 깔아 뭉갠다. 위에 언급한 그의 dna 가 바뀔 턱
이 없었다. 이후의 아프카니스탄및 이라크 전은 "럼즈펠드 개박살 독트린"의 실험 무대였
다고 본다. 첨단 무기 타격 중심의 이 럼즈독트린은 속전속결 작전이었지만 전후 처리에
는 큰 허점을 남겼다. 특히 미군은 이라크전에서 자국군 2천명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였
고 부상자및 이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트라우마-는 걸프전 참전 미군에게서 보았듯 굉장
히 심각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야기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미 80년대 베트남전을 리얼하게
다룬 플레툰-미군 패배를 최초로 인정한 영화-올리버 스톤 감독의 3대 명작중의 하나- 에
서 자국군끼리 서슴없이 총을 겨누는 장면과 베트남 양민 학살 장면과 문제작 "디어 헌
터" -로버트 드니로와 메릴 스트립주연으로 유명하며-에서 참전 군인의 전쟁 후유증과 러
시안 룰렛게임으로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 바 있는 데 이번 이라크전은 제2의 베트남전이
될 가능성이 큰 바 럼즈펠드가 제2의 맥나라마 전 국방장관이 될 것 같아 두고두고 이라크
내 대량 살상 무기도 거의 없었는 데 기독 근본주의자 부시-딕 체니-럼즈- 라이스-월 포
이츠 등의 실세 강경파 그룹 그리고, 멍청한 미국 c.i.a 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허위 보고
등은 역사의 죄인이 될 것 같습니다.
5.이라크 점령 지역내 이라크 포로 학대 고문 사건 - 미국내 언론의 적지않은 비판과 예비
역 장성들의 양심 선언과 럼즈에 대한 엄중한 반란성 비판 등에도 럼즈는 오뚝이처럼 넘
어지지 않았다.
6.후세인및 호메이니 와의 관계- 럼즈는 국익 앞에서는 냉혈한이었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는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파이프라인이었다. 1983년 레이건 중동 특사로 지금의 후세
인 대통령을 만나 이란 견제책에 대한 조언-호메이니 혁명이후의 견제와 균형 정책 조언-
을 하였으나 15년 뒤인 1998년 럼즈는 후세인 전복을 주장했고 결국 그의 뜻대로 이라크
전 막바지 변방 허름한 집 지하 동굴에서 미국 초콜렛으로 연명하던 후세인은 자결하지
않고 아주 치사하게 지금까지 가막소에서 큰소리치며 최후의 날만 기다리는 초라한 신세
로 전락해 있다.- d-day 최후 통첩 48시간전에 망명 신청하여 수많은 자국 국민과 문화재
를 살리는 방향으로 갔거나 아예 대량 살상 무기가 없음을 천명하고 사찰을 받았으면 하
는 아쉬움이 크고 이후 이라크 점령후 스페인 청년 장교 -대위,소령급 7명이 헬기 이동중
로켓포를 맞아 폭사하거나,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출근 통근 열차 폭발 테러로 1800 여명
의 부상자와 180 여명의 아까운 사망자가 나왔으며 영국 런던 폭탄 연쇄 테러가 이어졌고
올해도 어느 유럽 비행기가 비행중 폭탄 테러등으로 그어느 누가
죽음을 당할 지 아무도 장담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으며 이번 레바논에 대한 이
스라엘 침공은 전세계 불특정 다수가 희생자가 될 수 있는 지구 전체의 비극이 아닐 수 없
다.
7.한미 연합사 창설의 주역 럼즈펠드- 만 28년전 한미 연합사 창설을 주도하였던 럼즈는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2009년에 우리측에 넘기겠다고 최근 서한을 보내왔으며 또한 한국
군은 이제 북한의 공격은 막아낼 수 있을거라며 다시 언론에 그 양도 의사를 분명히 하였
다. 만일 한국측이 그 이양 시기를 늦추자고 하면 럼즈는 어떻게 나올 것인가? - 5년전에
그가 언론에 기고했다는 "럼즈펠드 룰 154개 항목"에서 굳이 그 해답을 찾아 본다면?- "의
심스러우면 하지마라!" 아니면 "그래도 의심스러우면 옳은 일을 하라" 아마 둘중의 하나
가 될 것이다.
* 김일성 사후 지금까지 김정일은 "강성대국" "선군정치" 를 아직도 고집하고 있는 바 이
는 그 동기의 측면에서 70년대 박정희의 자주국방과 고슴도치론과 공통된 측면이 있습니
다.남한은 ,특히 보수파들은 30년전 핵개발에 나섰던 기억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체제위
기에 몰린 집권자는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핵개발에 나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또 한.미 안
보동맹이 중요하지만 이해관계가 충돌할 경우 미국은 언제든 한반도에서의 역할을 변화
시킬 수 -지금은 전략적 유연성및 전세계 미군 재편성 계획(g.p.r)-있습니다. 북한 역시
최고 권력자의 피살 이후 영구 동결된 남핵사태를 기억해야 합니다.
*** 다행히도 북핵 문제은 남핵 문제에 비해 훨씬 복잡한 측면을 가지고 있고 또 다양한
평화적 해법이 논의되고 있습니다.그렇지만 당사국들이 상대방을 최대한 이해하면서 냉
철히 움직일 때에만 공동번영의 방향으로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리고,현재의 북한핵 문제에 대해서도 저도 기고할 예정이오니 함께 우선 사이버상
에서 대화를 나누기를 기대해 보면서 우선 마무리 인사에 갈음합니다.
2006.10.15 한준구 올림
** 53회 홈피에 올라오는 한준구 동기에 글이 너무 유익하기에
우리모두 함께 하고자 총동창회 게시판에 퍼 올립니다 - 옮긴이 - 53회 류동열
글 제 목 : 되돌아 보게되는 1970년대 박정희의핵개발과 1990년대의 김일성 그리고 카터대통령!
내용이 다소 많으나 필히 끝까지 읽어 주시옵고 동기생 댓글이나 동기생의 가까운 친구나
친지,지인등 국방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fact 에 어긋나거나 보완할점,지적할 점등을 알려
주시길 바라오며 국방과학연구소 동기생들도 댓글 요망합니다
. 소직이 지난 10년 동안 북한 전문가들의 특강을 부지런히 들으려고 부단히 노력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사오나 가급적 다수의 미래지향적 댓글을 부탁드리
며 제가 읽은 신문 칼럼중 가장 흥미로왔던 신문 내용을 저의 주석과 함께 소개하오니 남
북한 항구적 평화 통일 기반 조성에 다소나마 참조하셨으면 합니다.
다음글은 문화일보 정치부장의 칼럼입니다.
*** 1970년대에 박정희 정권은 자주국방과 고슴도치론을 내세우며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에 나선 바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박정권이 미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극비리에 추진한
데다 유신 독재 정권의 폐쇄성,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에 이르는 전두환,노태우 정권
의 비핵화 추진 과정에서의 완벽한 단절등으로 인해 그 내막의 전모는 한국 현대사의 블
랙홀 중의 하나로 아직 남아 있습니다.
*** 최근 공개된 1972년의 외교문서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비록 일부분이지만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는 정부 공식자료이기 때문입니다.소직이 고교 3학년 시절인 1972년은
한반도 현대사에서 또하나의 turning point였습니다. 역사적인 7.4 공동성명으로 - 남북 관
계가 분단이후 처음으로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게 됐으며 국내적으로는 10월 유신
으로 불리는 10.17 특별성명으로 박정희 독재체재가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햇습니다.
*** 1970년대 들어 미국의 역할 감소를 의미하는 닉슨 독트린으로 인해 북한은 매우 고무
되어 가고 있었고, 남한은 점점 불안에 휩싸이는 한반도의 상황으로 변하는 시기였습니
다. 1970년 7월 당시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주한 미군 2만명 철수 계획을 밝혔으며 실제
로 미국 보수층의 우려및 한국 정부의 의사를 완전히 무시한 채 1971년 3월 2만명 안팎의
미7사단 병력을 철수 해 버렸습니다.
*** 미 7사단 철수 약4개월 전인 1970년 (박대통령 53세때) 11월 한국 언론인 2명과의 비
공식 저녁 술자리에서 핵 개발계획의 의중을 내보인 바 있었습니다. 박정희가 말하길 " 우
리의 살길은 온 국민이 힘을 뭉쳐 고슴도치가 되는 길 뿐이오. 코끼리나 사자도 전신에 가
시를 곧추세운 고슴도치를 함부로 못하지요. 사생결단의 자주 국방 의지를 이번 기회에
다져야 합니다. 우리는 미사일도 만들고 원자탄도 만들어야 합니다. 임자들에게 처음으
로 하는 얘기이니까 절대 입 밖에 내지 마시길 바라오."
***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전쟁이 공산회로 끝나자 박정희는 "번개 사업"으로 명명된
핵 및 마시일 개발을 본격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최형섭 과기처장관-박대통령의 절대
적 신임을 받고 있었고 최장수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한 바 잇으며 얼마전 천수를 누리
시다
돌아가심- 의 총지휘하에 대전 기계창에서 부품을 만들고, 기상 측후소로 위장된 곳에서
성능시험을 했습니다.
*** 1976년 5월 당시-- 8.18 도끼 만행 사건 약3개월전임--- 제럴드 포드 행정부의 도널
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말하길 "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고집하면 미국은 안보및 경제 문
제를 포함해 한국과의 모든 관계를 재검토할 것" 이라고 정면 경고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바로 그 럼즈펠드가 이번에도 부시의 국방장관이 되어-약 30년만에 또 국방장관이 됨- 북
한에 대해 핵개발 포기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
다.
*** 미국방장관인 도널드 럼즈펠드의 경고장을 무시한 지 2년 4개월이 지난 1978년 -박정
희 피살 1년 1개월전 - 9월26일 서해안 바닷가에서 "백곰" 으로 명명된 첫 국산 미사일이
발사됐고 한국은 이제 세계에서 자랑스런 7번째의 미사일 보유국가가 돼었습니다.
*** 그후 한국은 프랑스와 비밀리에 핵 재처리 시설및 기술 공급 계약을 체결하였고 드디
어 박정희 대통령이 학수고대하고 국내,외적으로 강하게 표명했던 자주 국방의 가장 큰
힘인 핵개발이 초읽기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미국과의 긴장관계는 계속되고 지미
카터 대통령의 한국 방문시 인권문제등을 포함하여 둘 사이는 가시돋힌 설전이 오가기 까
지 하였습니다.방한 당시 카터는 박정희를 바로 방문하지 않고 바로 전방 미군 부대로 들
어가 그의 취미였던 조깅을 자국 군인들과 함께 즐기며 박정희의 심기를 심하게 긁은 바
있었고-대통령 재직시에는 가장 무능한 대통령으로 그리고 임기후에는 가장 유능한 전직
대통령으로 전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친 바 있는 카터 대통령- 그리고 얼마 안있어 "나의
뒤에는 미국이 있다" 라고 말했다는 중앙정보부의 김재규가-김재규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
세히 기술할 예정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를 죽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 정보부 한
국 책임자였던 도널드 그레이그-나중에 주한 미국 대사 역임-는 박정희 피살 약 2달전 미
국의 한 강연회에서 아마 한국에 뭔가의 변고가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음을 넌지
시 암시한 바도 있었습니다.그리고,김재규는 박정희와 동향이고 육사동기이고 그동안 박
정희로 부터 수많은 은혜를 입어오곤 하였으나 -김재규는 육군 중장시절 군단장 집무실
을 방문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체포할 마음도 갖고 있었으나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하
였고-약 10년 뒤에는 그 수많은 은혜를 총알로 갚는 배은망덕의 패륜행위를 저질렀다고
도 볼 수 있으며 아마 가만히 김재규가 그냥 조용히 정보부장 사직후 기다렸어도 부마 사
태이후 차지철은 "여차하면 탱크로 200만명도 죽일 수 있다." 고 그의 속내를 드러낸 바도
있는 상황이라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민주화의 역량이 조금만 더 쌓인 후 총체적으로
시의 적절하게 반독재 국민 시위에 나섰다면 김재규 사건으로 어부지리의 덕을 본 전두환
이나 그의 졸개 노태우의 등장은 사실상 어려웠으리라는 일부 전문가들의 시각도 아직 유
효합니다.-역사에 가정은 다소 무모하지만-
*** 박정희 피살 직전 차지철의 전횡을 우려한 육군 수뇌진은 그래도 다소나마 차지철을
견제할 수 있는 전두환을 파격적으로 국군 보안사령관으로 천거하였고-그를 천거한 육군
선배는 지금도 후회하고 있음- 박정희 피격후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이 되어 경찰,검찰,
정보 기관의 거의 모든 고급 정보를 일차적으로 독점하는 횡재와 아울러 당시 육참총장이
던 육사 5기 출신의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육사 3기 출신의 노재현 국방장관을
무력화시키고 나아가 최규하 대통령을 협박하여 1979년 12.12 쿠데타를 성공시키며 일약
신군부의 리더로 차기 대통령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12.12 사태로 군부를 완전히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는 즉각 핵개발 중지를 천명하여 미국의 절대적인 환심-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 성공후 반공을 제일의 국시로 내세웠듯이-을 사게되고 해당 핵관련 연구자 1000명
을 해고하여 완전히 핵과는 손을 씻게 되었으며 광주 사태의 주모자로 옭아매어 사형선고
까지 내린 김대중에서 사면을 베푸는 바터제로 미국 국빈 방문을 성사시켰고-이때 막후에
서 활동한 군인은 영어에 능통한 김윤호 장군으로 알려짐- 나아가 미육군 대장으로 주한
미군 사령관이었던 위컴대장은 소장에 불과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을 안하무인격으
로 막 대한 바도 있는 데 전두환은 결정적인 체포작전을 벌이지 않은 - 12.12 사태이후 다
수의 군인들이 미군이 조금만 도와주면 전두환 소장 체포는 어렵지 않다고 건의하고 실
제 도움 요청을 한 한국 고급장교들이 다수 있었지만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눈에 보이
지 않는 위컴의 공로를 높이사 미국 방문시 한국 핵개발의 씨를 완전히 없애버린 내신 성
적도 참고할 사 전두환은 위컴을 레이건에게 미육군 참모총장으로 적극 천거하였고 실제
레이건은 능력도 있는 그를 미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하는 묘한 인생의 수레바퀴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 그리고, 전두환의 졸개 노태우는 1991년 한국의 핵전문가들의 조언을 듣지도 않고 -
일본의 경우처럼 핵은 일단 포기하지만 핵재처리와 관련한 평화적 이용은 극대화 시키는
전략도 고려하지 않고-일방적으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하여 미국의 환심을 또 사면서
경제및 안보 협력을 강화하는 외교로 치닫게됨.
그런데, 남한측은 비핵화선언을 전세계에 천명하면서 곧이어 북한측은 핵개발에 더욱 박
차를 가하게 되며 1989년 소련 붕괴, 독일 통일, 연이어 터지는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 몰
락과 붕괴 속에서 김일성은 무척 당황하게 되고 중국도 1978년 등소평 집권이후 흑묘백묘
론을 앞세우며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더욱 박차를 가하여 경제 발전에 일로매진하는
상황하에서- 즉, 믿을 놈 하나 없는 상황하에서 드디어 김일성은 박정희 사망후 박살난 자
주 국방의 기치를 드높이며 핵무장을 통한 체제수호의 방향으로 완전히 굳히게 되며 몇년
뒤인 1994년 북한 핵위기가 극도로 고조되고 1976년 8.18 도끼 만행사건 이후 두번째로 전
쟁 위기로 치닫게 됨( 도끼 사건은 김정일 지시 때문에 ,이번에는 김일성의 핵무장 계획
지시 때문에 전쟁의 일촉즉발의 위기를 자초함)
*** 1979년 박정희는 자주국방의 핵개발 고집으로 피살되었고 1994년 김일성도 자주국방
의 핵개발로 결과적으로 둘다 핵 때문에 박정희는 한창 잘나갈 62세에 죽었고 김일성은
조상 묘 덕에 82살 까지 비교적
긴 삶을 살았으며 둘다 공교롭게도 남한은 카터가 현역 대통령으로 방한이후,그리고 북한
은 카터가 특사로 방북이후 둘다 죽었는 데 일부 호사가들에 의하면 - 독수리 관상의 카터
가 호랑이 관상의 김일성을 위압하였고 이에 기가 질린 김일성은 심장에 기가 안통해 심
근경색으로 죽었음이 거의 확실함.
*** 럼즈펠드 특집- 다음 내용은 아주 재미있게 읽은 중앙일보 "분수대" 칼럼-정치부 차
장 오영환의 06년8월 31일자 기고문임- 으로 저의 주석을 달아 글을 올립니다.
1.미국 닉슨 대통령- 1971년- 우리 대한민국은 주한 미7사단 철수문제로 한반도가 매우
불안할 때임-
당시 39세인 닉슨의 참모 럼즈펠드(직책은 대통령 고문) 때문에 골치가 아팠음.럼즈펠드
는 4선의 하원의원의 관록을 접고 닉슨 행정부에 입성한 지 2년이 지나는 시기. 1968년에
서 1972년 사이는 미군의 월남전 사상자가 엄청 늘고있던 상황이었고 이 전쟁에 질질 끌
려 다니던 닉슨대통령에게 39세의 혈기 방장한 럼즈펠드는 딴죽걸기가 일쑤였다.나중에
밝혀진 닉슨의 비밀 녹음 테이프에 의하면"러미(럼즈펠드)는 너무 거칠어! 무례한 놈이
야!"- 닉슨은 럼즈펠드를 35년전에 이렇게 평가했다.
2.미국 포드 대통령- 1974년 - 72년의 남북 7.4공동 성명 선언 2년뒤 한국은 문세광 육영
수 여사 저격사건(8월15일 광복절 행사시)으로 남북이 매우 경색되어 가게되는 상황- 42
세가 된 럼즈펠드는 제럴드 포드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됨.- 그는 기세등등하던 국무장관
겸 국가안보 특별보좌관이던 헨리 키신저의 역할 축소에 발벗고 나서 드디어 키신저는 국
무장관 직책만 맡도록 하게 한다. 그리고, 럼즈펠드는 지금부터 31년전인 1975년 국방장
관에 드디어 오른다.- 이당시의 일로 인해 3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있는 헨리 키신저
와는 사이가 안좋다고 함.
3.럼즈펠드의 관료 생활- 늘 저돌적이고 늘 잡음이 뒤따랐고 다수를 적으로 만들었으나
거의 지는 법은 없었다. 실제 그는 고교,대학,해군에서 레슬링으로 우승한 적이 많았다.
그의 dna는 원래 저돌적 정면 돌파 그자체였다.
4.돌아온 마카로니 웨스턴 결정판 장고 럼즈펠드- 1975년 첫 국방장관에 오른지 26년만
에 다시 국방장관으로 돌아온 장고 럼즈펠드는 미군의 최대 목표를 "military
transformation"-즉 군사 변환이었다.이른바 중후하고 장대한 미군을 우리 휴대폰처럼 경
박단소(가볍고 얇으며 짧고 작은)한 미군으로의 대변환을 시키는 대작업이었다.즉, gpr,
미군 재편성으로 인한 신속 기동군화가 그 핵심이었다.이 계획중에는 최근에 밝혀진 바대
로 3만7천명 안팎의 주한 미군중 평택 이전 과정에서 약1만 2천명 정도를 감축하여 그 병
력을 다른대로 재배치할 것으로 보인다. 위의 럼즈펠드 독트린에 미국내 군부와 의회가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럼즈펠드는 이를 깔아 뭉갠다. 위에 언급한 그의 dna 가 바뀔 턱
이 없었다. 이후의 아프카니스탄및 이라크 전은 "럼즈펠드 개박살 독트린"의 실험 무대였
다고 본다. 첨단 무기 타격 중심의 이 럼즈독트린은 속전속결 작전이었지만 전후 처리에
는 큰 허점을 남겼다. 특히 미군은 이라크전에서 자국군 2천명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였
고 부상자및 이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트라우마-는 걸프전 참전 미군에게서 보았듯 굉장
히 심각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야기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미 80년대 베트남전을 리얼하게
다룬 플레툰-미군 패배를 최초로 인정한 영화-올리버 스톤 감독의 3대 명작중의 하나- 에
서 자국군끼리 서슴없이 총을 겨누는 장면과 베트남 양민 학살 장면과 문제작 "디어 헌
터" -로버트 드니로와 메릴 스트립주연으로 유명하며-에서 참전 군인의 전쟁 후유증과 러
시안 룰렛게임으로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 바 있는 데 이번 이라크전은 제2의 베트남전이
될 가능성이 큰 바 럼즈펠드가 제2의 맥나라마 전 국방장관이 될 것 같아 두고두고 이라크
내 대량 살상 무기도 거의 없었는 데 기독 근본주의자 부시-딕 체니-럼즈- 라이스-월 포
이츠 등의 실세 강경파 그룹 그리고, 멍청한 미국 c.i.a 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허위 보고
등은 역사의 죄인이 될 것 같습니다.
5.이라크 점령 지역내 이라크 포로 학대 고문 사건 - 미국내 언론의 적지않은 비판과 예비
역 장성들의 양심 선언과 럼즈에 대한 엄중한 반란성 비판 등에도 럼즈는 오뚝이처럼 넘
어지지 않았다.
6.후세인및 호메이니 와의 관계- 럼즈는 국익 앞에서는 냉혈한이었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는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파이프라인이었다. 1983년 레이건 중동 특사로 지금의 후세
인 대통령을 만나 이란 견제책에 대한 조언-호메이니 혁명이후의 견제와 균형 정책 조언-
을 하였으나 15년 뒤인 1998년 럼즈는 후세인 전복을 주장했고 결국 그의 뜻대로 이라크
전 막바지 변방 허름한 집 지하 동굴에서 미국 초콜렛으로 연명하던 후세인은 자결하지
않고 아주 치사하게 지금까지 가막소에서 큰소리치며 최후의 날만 기다리는 초라한 신세
로 전락해 있다.- d-day 최후 통첩 48시간전에 망명 신청하여 수많은 자국 국민과 문화재
를 살리는 방향으로 갔거나 아예 대량 살상 무기가 없음을 천명하고 사찰을 받았으면 하
는 아쉬움이 크고 이후 이라크 점령후 스페인 청년 장교 -대위,소령급 7명이 헬기 이동중
로켓포를 맞아 폭사하거나,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출근 통근 열차 폭발 테러로 1800 여명
의 부상자와 180 여명의 아까운 사망자가 나왔으며 영국 런던 폭탄 연쇄 테러가 이어졌고
올해도 어느 유럽 비행기가 비행중 폭탄 테러등으로 그어느 누가
죽음을 당할 지 아무도 장담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으며 이번 레바논에 대한 이
스라엘 침공은 전세계 불특정 다수가 희생자가 될 수 있는 지구 전체의 비극이 아닐 수 없
다.
7.한미 연합사 창설의 주역 럼즈펠드- 만 28년전 한미 연합사 창설을 주도하였던 럼즈는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2009년에 우리측에 넘기겠다고 최근 서한을 보내왔으며 또한 한국
군은 이제 북한의 공격은 막아낼 수 있을거라며 다시 언론에 그 양도 의사를 분명히 하였
다. 만일 한국측이 그 이양 시기를 늦추자고 하면 럼즈는 어떻게 나올 것인가? - 5년전에
그가 언론에 기고했다는 "럼즈펠드 룰 154개 항목"에서 굳이 그 해답을 찾아 본다면?- "의
심스러우면 하지마라!" 아니면 "그래도 의심스러우면 옳은 일을 하라" 아마 둘중의 하나
가 될 것이다.
* 김일성 사후 지금까지 김정일은 "강성대국" "선군정치" 를 아직도 고집하고 있는 바 이
는 그 동기의 측면에서 70년대 박정희의 자주국방과 고슴도치론과 공통된 측면이 있습니
다.남한은 ,특히 보수파들은 30년전 핵개발에 나섰던 기억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체제위
기에 몰린 집권자는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핵개발에 나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또 한.미 안
보동맹이 중요하지만 이해관계가 충돌할 경우 미국은 언제든 한반도에서의 역할을 변화
시킬 수 -지금은 전략적 유연성및 전세계 미군 재편성 계획(g.p.r)-있습니다. 북한 역시
최고 권력자의 피살 이후 영구 동결된 남핵사태를 기억해야 합니다.
*** 다행히도 북핵 문제은 남핵 문제에 비해 훨씬 복잡한 측면을 가지고 있고 또 다양한
평화적 해법이 논의되고 있습니다.그렇지만 당사국들이 상대방을 최대한 이해하면서 냉
철히 움직일 때에만 공동번영의 방향으로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리고,현재의 북한핵 문제에 대해서도 저도 기고할 예정이오니 함께 우선 사이버상
에서 대화를 나누기를 기대해 보면서 우선 마무리 인사에 갈음합니다.
2006.10.15 한준구 올림
** 53회 홈피에 올라오는 한준구 동기에 글이 너무 유익하기에
우리모두 함께 하고자 총동창회 게시판에 퍼 올립니다 - 옮긴이 - 53회 류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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