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전 J.S.A 도끼 만행사건과 김일성 박정희 18년 주기설의 내막은? > 자유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검색

자유

자유

30년전 J.S.A 도끼 만행사건과 김일성 박정희 18년 주기설의 내막은?

페이지 정보

작성자 : 53 한준구 이름으로 검색 댓글 0건 조회 1,833회 작성일 2006-08-24 09:02

본문



30년전 J.S.A 도끼 만행사건과 김일성 박정희 18년 주기설의 내막은?


1976년 8월 18일은 1974년 8월15일 문세광에 의한 육영수여사 저격 사건의 딱 2년 3일 되는 날 - 육여사에게 치명상을 입 힌 그 총알 한방은 아직도 회수가 안되고 있고 최초의 담당 의사는 지금까지도 함구하고 있으며 아직도 풀리지 않는 몇가지 수수께끼- 육여사를 운명하게한 그 문제의 총탄의 괘적은 경호원의 있을 수 없을 오발로 추정하고 있는 등 -당일날의 비표를 어떻게 쉽게 구하고 V.I.P용 비상 통로로 쉽게 들어간 점 등 석연치 않은 점이 다수 있음- 해당 고급 경찰은 함구 무언으로 일관하고 있거나 최근 사망하고 있 는 실정임 -영구 미제 사건이며 당시 검사인 김기춘의 수사 결과 발표도 믿기 어려운 구석이 있음-

판문점 공동 경비 구역내 즉 J.S.A- 우리는 그 유명한 동명의 영화로 친숙하게 되었으며-이영애,송 강호 이병헌주연의 영화-한국 10대 히트 영화중의 하나임 - 에서 유엔사령부 경비대대의 미군 장교인 보니파스 대위와 바레트 중위가 북한군 경비병들에게 무참히 도끼로 살해된 사건을 말한다.

당시 두장교는 속칭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에서 한국 노무자들을 동원,관측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북한 경비병들은 이 두명의 장교들에게 도끼와 몽둥이를 휘둘러 보니파스 대위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바레트 중위는 헬기로 긴급 이송중 사망하였다.그리고 미군 경비병 4명과 한국 경비볓 2명도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3분 만에 벼락같이 끝난 참사라서 대기중이던 유엔군 기동 타격대는 손도 써보지 못하고 당하고 말았다.

**** 당시 휴가차 일본에 머물고 있던 유엔군 사령관 리차드 스틸웰 대장은 다급한 나머지 전투기 뒷자석을 빌어 타고 귀임하였고 즉각 데프콘-3를 발동하였다. 이는 한국전쟁이후 발동한 최고의 경계태세였다.

**** 미국 본토에서--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F-111 전폭기 20대 날아옴.
태평양상의 괌 기지에서-- B-52 폭격기 3대 발진함.
오키나와 미공군 기지에서-- F-4 전투기 24대 날아와 남한측에서 선회.
미 7함대 소속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순양함 등 중무장한 5척의 호위함을 거느리고 동해로 북상함
**** 북한군도 전투 태세에 돌입했고 북한 전역에 준전시 상태가 내려짐.
**** 사건 3일 뒤인 1976.8.21일 오전 7시 미루나무 베기 "폴 버니언 작전' 개시.
작전 투입-- 한국군 1공수 여단 최정예 64명 차출 - M-16 소총,수류탄 크레모어 등으로 무장함.
이 작전의 지휘관은 육사 12기의 박희도 중령으로 -이 장교는 이 작전의 성공으로 승승장구하여 겨우 3년뒤인 1979년 12.12 군사 정변시 전두환의 핵심 측근중의 일원인 1공수 여단장으로 모반에 참여하여 국방부와 육본을 장악하여 1등공신의 반열에 올라 후일 육사 12기 중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육참총장에 오른 바 있음- 전두환 노태우 육사 1년 후배중 3박이 있었는 데 용장의 박희도 지장의 박준병 -대고 선배- 그리고 지-용-덕장을 고루갖춘 박세직 -후일 수경사령관 및 전두환에 의해 강제 예편당함.
-혹시 있을 지 모를 역 쿠테타 걱정으로 -이는 70년대 초반 윤필용 수경사령관 재직시 윤필용 장군은 박정희의 핵심 측근으로 마음만 먹으면 반모-역모는 어렵지 않은 상황이었고 이로인해 결국 윤장군은 다른 사소한 직언으로 인해 설화를 당해 나는새도 떨어뜨린다는 위용을 뒤로 한 채 -강제 예편당한 상황을 전두환은 대령 시절부터 너무나 잘알고 있던 터라 박세직 수경 사령관이 너무 잘나서 잘라버린격이 됨-박희도 중령이 지휘하는 한국군은 북한측의 별 저항을 받지 않고 그 나무를 베어버렸고 내친김에 북한측 인근의 4개초소도 박살내 버렸다.

*** 당시 미군측에서는 이 작전중에 대규모 교전 상태가 벌어지게 되면 ?
---개성 지역 인민군 막사 포격과 인민군 포병부대 궤멸은 물론 연백평야 까지 점령하는 우발 계획도 세워놓기도 하였다. 그리고, 북한군이 전차 부대를 대규모로 남하 시킬 경우에는 전술핵 무기도 사용하려는 계획도 신중히 고려하였다.

*** 다행히도 북한군 경비병은 이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북한 수뇌진의 지시인듯 지켜만 보았고 더이상 큰 사태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 미군측의 대규모 공군및 해군 시위 덕택에

*** 박정희 와 김일성의 18년 주기설의 내막은?
1.박정희-- 1917년생으로 대구사범 거의 꼴찌 졸업-일부러 적성이 맞지 않아- 후 남들은 도회지로 발령 받아 근무지로 가는 데 박정희는 거의 꼴찌로 문경 골짜기 초등교사를 역임하다
이를 과감히 때려 치우고 만주로 가 신경 군관학교 2기로 입교하여 영예의 1등 졸업한 후 당시 만주 괴뢰국 부의황제의 상도 받으며-국내 영화관 늬우스시간에도 소개되어 예를 들면 후일 강문봉 장군이 소년시절 이를 보고 장교의 길로 들어서게 됨
박정희는 1943년 경 어릴 때의 평생 소원인 큰 칼을 차고 일군 장교의 길을 가게 되고18 년뒤 1961년 군사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18년 뒤 최측근의 저격으로 62세로 사망함
2. 김일성-- 1912년생으로 1937년 보천보 전투 승리로 영웅이 되었고 나중에 소련군 88여단에 편입되어 활동하다 해방후 소련군의 도움으로 정권을 잡은 바 있으며 전쟁후 1958년 종파 사건으로 잠시 위기를 겪은후 --18년뒤 이 도끼만행사건으로 죽을 뻔 하였고- 또 18년뒤인 1994년 클린턴 정부 시절 핵위기 자초로 전쟁 직전 까지가서 죽을 뻔 하였고 -얼마 않있다 심장마비로 82살로 죽음

**** 이 도끼 만행 사건은 7년뒤의 버어마 아웅산 폭파 사건(장관급 17명 폭사하고 이기백 국방장관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당시 전두환대통령은 예정시간 보다 늦게와 위기를 모면함)과 마찬가지로 후계체제를 점검해 가던 김정일이 지시한 사건이었고 김일성은 추후에 보고받고 무척 당황했다고 함.

*** 결국 김일성은 유엔사측에 유감표명으로 6.25 이후 가장 전쟁에 접근하였던 이 위기상황을
수습하였고 -- 한국 과 미국측은 이 와중에서 연합작전의 필요성을 절실히 실감하였고 2년뒤인
1978년에 한미연합사를 발족시켰다.

*** 한미 연합사 창설이후 28년이 지난 지금 -- 전시 작전 통제권 문제로 연합사가 해체되고 새로운 상황-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제고차원-에서 새로운 21세기형 연합 작전시스템 구축이 급선무가 되고 있는 상황임. 아무튼 이와 관련된 논란은 추후에 정리해 볼 예정임.

*** 여러 선배 제위의 당시의 군관련 에피소드를 댓글로 달아 주시면 감사하겠음.
*** 시간 관계상 나중에 보완하겠사오며 틀린 점 있으면 반드시 댓글 요망함

53회 한준구 올림.

펌: 53- 류동열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4,047건 207 페이지
자유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957 58 총동창회 이름으로 검색 2204 2006-08-25
956 53 한준구 이름으로 검색 2065 2006-08-24
열람중 53 한준구 이름으로 검색 1834 2006-08-24
954 53 한준구 이름으로 검색 2268 2006-08-24
953 36 이계상 이름으로 검색 2146 2006-08-18
952 54 김용구 이름으로 검색 2208 2006-08-12
951 53 한준구 이름으로 검색 2280 2006-08-11
950 53 한준구 이름으로 검색 2257 2006-08-08
949 53 한준구 이름으로 검색 2478 2006-08-08
948 36 이계상 이름으로 검색 1879 2006-08-08
947 36 이계상 이름으로 검색 2216 2006-08-03
946 53 한 준 구 이름으로 검색 2346 2006-07-28
945 53 한 준 구 이름으로 검색 2144 2006-07-28
944 53 한 준 구 이름으로 검색 2332 2006-07-28
943 53 한 준 구 이름으로 검색 2275 2006-07-28
게시물 검색

34919 대전시 중구 대흥로121번길 8 대전고동창회관 2층 | 회장 : 이왕구
전화 : (042) 257-0005 | 팩스 : (042) 257-0518 | 메일 : daego@daego.kr
Copyright 2001~2024 대전고등학교총동창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