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수수께끼 12가지- 박정희 레드 컴플렉스맥아더의 원폭24발 -백선엽,인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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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이름으로 검색 댓글 0건 조회 2,414회 작성일 2006-07-11 18:17본문
작 성 자 : 한준구 [alfonsohan@yahoo.co.kr] 2006.06.26
글 제 목 : 6.25전쟁의 수수께끼 12가지- 박정희 레드 컴플렉스맥아더의 원폭24발 -백선엽,인엽,채병덕장군!
올해는 6.25사변(또는 전쟁, 또는 한국전쟁--- 보는 관점에 따라 의견이 아직도 분분함)
이 일어난지 56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소직은 할머니가 당시 공산군 포탄의 파편으로 한
쪽 팔이 불구되어 30년을 불편히 사시다 돌아가신 아픔이 있고 지금 생존해 계신 가친께
선 6.25 참전 군인으로 오른 어깨에 적군의 총탄을 3방맞은 상흔을 어릴때 목욕탕 갈때
마다 보아왔고--52년 만에 화랑무공훈장을 보훈처로 부터 받아 ---저의 부모님 두분 모
두 천수를 누리시다 나중에 함께 국립대전현충원에 자랑스럽게 가시게 되어 가문의 영
광으로 생각하고 있는 중임- 어머니로 부터는 6.25피란 과정과 고통을 어릴때 수시로 옛
날얘기 듣듯 들어온 바 있으며 한참뒤인 1985년 고교 교련교사로 부터 귀한 책을 빌려 읽
은 다음부터 개인적으로 한국군부및 6.25전쟁에 대해 틈틈히 공부해온 바 있으며 이제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고 참전 군인도 다수가 맥아더 장군 말씀대로 사라
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 천학비재하지만 용기를 내어 다음의 6.25전쟁에 대한 12가지 수수
께끼를 간략히 밝히오니 관심있는 동기생의 필독과 아울러 주변 어르신이나 참전 군인,또
는 관련 학자및 대선배님들,교사 동기생및 육사 34기 대전고 동기생(현역 군인및 퇴역 동
기생 공히)등의 고견, 조언 참고 발언등을 꼭 해주셧으면 합니다.
**** 6.25전쟁의 수수께끼 12가지
1. 1945년 8월15일 해방 당시 몇주 늦게 한반도 38선 이남에 진주한 해방군(주둔 최고
사령관인 하지중장의 한반도에 대한 매우 미흡한 식견의 여파를 보면 다소 점령군의
의미도 약간 없지는 않음- 필자주) 인 미군이 제 2차대전에서 승전, 재배치, 재정비
명목 으로 전쟁 발발 1년전에 거의 군병력을 철수할 때
이승만 대통령이 10개 사단 병력을 무장시킬 수 있도록 전차,중화기,탄약등을 지원요
청 하였지만 김일성의 남침야욕을 오판하고 비무장 군사 고문단 200명을 남기고 철수.
2. 해방 정국(1945-48) 및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후 6.25 직전 까지도 북한 공산당의 지령
하에 수많은 대남 선전과 위장 평화공세및 제주 4.3, 여수순천 14연대 반란사건(여순사
건),대구 10.1 사건(혹은 폭동), 38선 특히 경기도, 황해도,옹진반도 (17연대:연대장백인
엽) 소규모,중규모 접전의 상시화등으로 후방에서는 위의 진압에 소수 경찰과 경무장한
국방경비대원으로는 최소한의 치안유지에도 벅찬 상황의 연속이었으며 반공자유체제의
확립에 군부는 확고하였으나 이승만 정부는 미온적이었음.
3. 태평양 전쟁에서의 연합군이었던 소련,중국 측에 호의적이고 신뢰를 가져 주한 미군
의 철수및 결정적인 애치슨 라인(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남한 제외 선언) 공언으로
이에 고무된 북한 김일성은 중공,소련과 비밀 군사지원 약속을 확약받고 소련제 t-34 탱
크,야포,중화기,해군 함정,전투기및 각종 장비,탄약을 비축등 대부대 훈련으로 군사력 증
강에 크게 힘을 기울임
4. 1930년대 및 1945년 까지 대일 항전 경험이 풍부한 당시 중국 팔로군 등의 조선족의
정예 2개 사단 규모의 대군을 모택동은 김일성휘하에 넘겨주고 이를 전투부대에 배치
하여 최정예부대로 육성토록 하여 북한의 남침 야욕에 주마가편격이 되어 전력 증강
에 크게 도움을 줌.
5. 북한군은 2차 대전시 항독 (대독일전) 전투 경험이 풍부한 소련 군사고문단의 치밀
한 지도로 대단위 부대 기동훈련,남침 공격 작전 계획및 실시에 대한 작전 명령 작성
과 공격부대 배치까지 훈련함.
(위와 관련한 구소련 극비문서의 다수 공개로 일부 수정주의 시각은 거의 힘을 잃음)
6.당시 북한의 비밀 남침 준비에 장애가 되는 38선 인근 북한주민의 소개(강제 이동)를
은밀히 강제 진행한 것-- 이 정보는 북한에 침투한 우리측 첩보 요원이나 월남 민간인
등이 적어도 800회 이상 정보국에 보고하였고 -- 당시 북한반 반장은 김종필 중위로
그는 여러 차례 요로에 보고하였고 관련 장성들도 미군측에 알려 주었으나 번번히 묵
살 하였음.
7. 당시 남로당 당수 박헌영은 40만 지하당원(일부는 20만 이라고 보는 이도 있음)
을 남침시 봉기시켜 인민군 환영,유도, 선동, 치안 등에 활동할 것을 김일성에게
보고,서약하고 이를 믿고 단기 속결전을 감행하겠다고 100일 작전 계획을 수립,
시행한 것-- 그러나, 막상 남로당은 나타나지 않았고 김일성은 패전책임을 물어
박헌영에게 문책, 나중에 처형하고 본인는 여론의 십자포화에서 빠져 나옴!--
이는 위조지폐 정판사 사건, 제주 4.3사건,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대구10.1 사건등
군부내 빨갱이 색출 작업(당시 사상적으로 건전하였다면 장래 육군 참모총장감이라던
최남근 중령과 김종석 소령,그리고 이런 일련의 숙군 작업에서 박정희는 소설가 이병
주의 글에 의하면 군부내 적색분자 약 300명을 순순히 알려 준 댓가및 김안일 소령,백선엽
대령등 숙군 핵심 책임자들의 건의-- 당시 그 유명한 김창룡도 박정희 만큼은 온정을 베
푼 아주 특이한 사례가 됨--로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목숨을 부지하게 됨--나중에 박정
회 일대기를 장기 연재할 예정이며 이때 조금 더 자세히 밝힐 것임) 전향자 보도연맹 가
입 유도 등으로 남한내 많은 적색분자들이 이미 그 힘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였고 박헌영
이 과대 포장하여 김일성에
게 보고하여 김일성 오판에 역설적으로 기여한 바도 없지는 않을 듯함!
*** 위의 김안일 소령은 후일 준장 예편 후 그때 손에 피를 많이 묻힌 회개로 나중에
목사가 되어 오랜 기간 목회활동을 성실히 수행한 바 있음1
*** 그리고, 백선엽 당시 대령은 6.25당시 육군 1사단장으로 한국군및 유엔군을 통털어
1950년 인천 상륙및 9.28 서울 수복이후 평양시내에 가장 먼저 입성하였고 나중에
는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되는 영광을 누리며--- 동생인 용장 백인엽--6.25당시
옹진 반도 17연대장으로 전쟁 전부터 유명한 부대장이었으며 휴전후 군단장인 소장으로
박정희 대령의 철모 쓴 상태에서 지휘봉으로 머리통을 여러번 두드려 나중에 대통령이 되
어 박정희가 손보려 하였으나 백선엽의 박정희에 대한 엄청난 음덕 덕분에 차마 어떻게
하지는 못했다는 후문이 있었음-- 백선엽 대장은 지금도 미수(88세)를 넘기셨어도 기억력
도 비상하시고 영어도 유창한 한국군 현대사의 살아있는 전설임-- 그리고 백장군은 박정
희가 대령 예편 위기에도 포병사령관 신설로 준장진급에 도움을 주고 준장 예편 위기에
서도 소장 진급을 적극 도와준 은인이었음!
*** 박정희는 6.25 당시 주변 사람들중 다수가 그는 십중팔구는 북으로 넘어갔을 거라고
추측,예단하였으나 그는 6.25직전 백선엽의 배려로 예편후 문관신분으로 의기소침하게 국
방부에 근무하던 중 6월25일 직전 친척 상을 당하여 대구에 내려가 있다가
6.25 직후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 방어가 무너지는 와중에 잠시 생각,망설인 후 지금의 천호대교
옆 광진교 부근을 단신 도강하여 (이때는 한강 이남으로 강을 건너 목숨을 부지하고 레드
낙인도 한강물에 씻게되고 나중에 11년뒤에는 해병대를 이끌고 한강이북으로 제1한강교
를 넘어 혁명에 성공하여 18년간의 장기집권의 서막을 올리게 되어 이 6.25전쟁은 결과적
으로는 이승만의 장기12년 집권에도 다소 도움이 되었고 빨갱이로 사형 직전까지 위기에
몰렸던 박정희에게도 결과적으로는 이 전쟁으로 인해 패자부활전--과거의 몇년간 청룡
기 고교야구 준결승 이후 처럼-- 에 나서게 되었고 이후 불사조처럼 숱한 고비를 넘기고
11년뒤에 대권을 독차지하고 그이후 2년뒤 대통령에 오르고 다섯살 위인 1912년생의 김일
과 숙명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간헐적으로 유지하며 소위 한강의 기적을 이루며 세계경제
12위권을 유지하게 하는 초석을 이룬 공을 세우게 되며 월남 파병후 7.4공동 이후락 사기
성명(우리 고교 2학년 때로 그당시 함용범 교련선생님및 대고 운동장 정면 맞은편에 사시
던 홍종봉 선생님이 떨리는 음성으로 학생들을 시켜 집에가서 라디오를 가져 오도록 시킨
모습도 지금까지 기억되나 -- 10월 유신을 위한 김일성 속이기 전략이 성공하였고--10월
유신을 거쳐--김일성은 이때 열받아 주석제를 견고히 하는 북한 헌법 개정을 서두르는 계
기도 되어 남북이 향후 오랜기간 심한 냉전을 겪게 되고 약 8년뒤부터인 1973,74년을 전
후하여 이젠 북한을 경제및 군사면에서도 다소 자신감을 갖게 된다-- 국군의 서울 방어
선 전열 정비에 참여하여 문관 신분
에서 현지 임관 소령이 되어 빨갱이 색을 한강 물에 완전히 씻어버리고 군부내에서 6.25로
인해 새출발하는 일대 전환점을 이루며 --역설적으로 그는 6.25로 인해 예편 문관에서 현
역으로 복귀하여 적과의 전투는 제외하고-- 혹시 적에게 투항 할까봐 최전방 대대장이나
연대장은 시키지 않았음--그리하여 그는 후방대대장으로 부인 육영수에게 사랑하는시를
보낼 정도로 전시 상황이지만 숨을 잠시 돌리는 시기도 있었음-- 숱한 위기를 과묵한 성
격과 백선엽,송효찬드의 군 수뇌부 등의 위기때 마다의 도움으로 극복하며 6.25 사변 11년
뒤에 감격의 대권을 손에 쥐게 된다.
8.남침 기도 비익차 은폐와 호기를 잡기 위해 북한은 위장 평화 공세로 남한을 현혹시키
기 위하여 남한에서 잡힌 거물 간첩 이주하와 북한의 덕망있는 지도자 조만식과 바꾸
자고 제의하면서 남한의 대북 정세오판과 대북 경계 태세를 느슨하게 만드는 데 성공
을 거둠(남한 국군은 3개월여 대북 경계 비상을 걸다 6.25 하루전에 모든 비상경계령
을 풀고 전방의 많은 장병들을 고향 농사일 돕기및 휴가를 대부분 떠났고 국방부 고급
장교들은 6.25 하루전 미군측과의 댄스파티및 2차 술파티 까지 이어져 군 수뇌부의 개
전 초 새벽 4시부터 8시 까지 공황에 빠지는 큰 우를 범한 바 있으며 심지어 당시 총
참모장(육군 참모총상) 채병덕은 9시 이후 까지도 연락을 할 수 없었고 부관 나종일
-- 나최광 중위라고도 불림--이 군적도 없고 개전초 갑자기 사라져 56년이 지난 지금
까지도 군사 전문가 사이에도 이 나종일 부관의 빨갱이 행위(이적 행위)여부가 아직도
분분할 정도이며 채병덕의 경상남도 하동 전투 전사도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함--
그리고, 채병덕 총참모장은 전군 비상 경계령을 6.25 하루전에 풀었는 지 그리고,
왜 3주전에 전방 사단장과 후방 사단장을 교체하였는 지 위에 언급한 나종일 부관이
어떤 이적행위를 했길래 개전 초 금방 사라져 버렸는 지 , 정보국 북한반등에서 수십
차례 북의 남침이 확실함을 군수뇌진 및 미군 측에 심지어는 일본 주재 미군 최고
사령부에서도 이미 4개월전에 한국동란 d-day, h-hour를 이미 보고하였다고 정보
관련 업무선 상에 있던 박 하리마오의 진술도 3년전 밝혀 졌는 데 그당시 미군 최고
당국은 왜 그렇게 태평하게 대처하여 미군 3만명의 아까운 목숨을 버렸는 지 -최근
미군이 한국전에서 5만 4246명이 사망했다고 언론에 크게 보도된 적이 있었는 데
이는 그 3년기간중 전세계 각국 주둔 미군의 사고 사망자및 6.25 전쟁 부상후유 사망
자 까지 포함된 숫자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으며-- 이후의 베트남전 통킹만 메덕스호
전쟁 촉발 사건 , 남미 최초 사회주의 정권인 아옌데 정권 실각작전(이날이 1973년
9월11일이라서 저 한준구는 미국 뉴욕 쌍둥이 빌딩 테러사건이 9월11일이라서 결국
누군가로 부터 복수를 당하는 구나 하는 생각을 그 당일 컴퓨터 화면을 통해 첫 충격
을 보고 순간적으로 주마등 처럼 남미 칠레 아옌데 대통령이 관저에서 기관단총을 들
고 자국의 공군의 관저 폭격및 쿠데타군의 저격에 대항하던 슬픈 장면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적이 있읍니다만- 그리고, 파나마 노리에가 정권 실각 작전, 남미 그레나
다 침공작전,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침공작전등을 볼 때 -- 미국 국방성 극비 문서만
30년동안 연구 해온 방선주 박사는 맥아더가 중공군을 한반도로 유인한 다음 만주
원폭으로 (당시 미군은 24개 안팎의 사용가능한 원폭이 있었음) 일거에 중국 전 대륙
을 자유국가로 통일하려는 소위 전쟁천재 또는 전쟁광으로서의 계획도 있었다고 하며--
나중에 맥아더 총사령관의 한국전에서의 결과적으로 전략적 큰 실책을 기술하겠음--
어찌하였든 그 유명한 애치슨 라인이 한국전을 촉발한 -- 김일성의 남침에 큰 이적 행
위가 되었고 후에 전문가들에 의하면 김일성및 소련 측은 미군이 참전을 하지 않으리라
믿었다는 증언도 있음-- 가장 큰 촉발 요인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계속됨!
큰 실 나중에 기술하겠음 * ****나중에 이어짐 계속 한준구 올림
- 펌 - 류동열
글 제 목 : 6.25전쟁의 수수께끼 12가지- 박정희 레드 컴플렉스맥아더의 원폭24발 -백선엽,인엽,채병덕장군!
올해는 6.25사변(또는 전쟁, 또는 한국전쟁--- 보는 관점에 따라 의견이 아직도 분분함)
이 일어난지 56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소직은 할머니가 당시 공산군 포탄의 파편으로 한
쪽 팔이 불구되어 30년을 불편히 사시다 돌아가신 아픔이 있고 지금 생존해 계신 가친께
선 6.25 참전 군인으로 오른 어깨에 적군의 총탄을 3방맞은 상흔을 어릴때 목욕탕 갈때
마다 보아왔고--52년 만에 화랑무공훈장을 보훈처로 부터 받아 ---저의 부모님 두분 모
두 천수를 누리시다 나중에 함께 국립대전현충원에 자랑스럽게 가시게 되어 가문의 영
광으로 생각하고 있는 중임- 어머니로 부터는 6.25피란 과정과 고통을 어릴때 수시로 옛
날얘기 듣듯 들어온 바 있으며 한참뒤인 1985년 고교 교련교사로 부터 귀한 책을 빌려 읽
은 다음부터 개인적으로 한국군부및 6.25전쟁에 대해 틈틈히 공부해온 바 있으며 이제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고 참전 군인도 다수가 맥아더 장군 말씀대로 사라
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 천학비재하지만 용기를 내어 다음의 6.25전쟁에 대한 12가지 수수
께끼를 간략히 밝히오니 관심있는 동기생의 필독과 아울러 주변 어르신이나 참전 군인,또
는 관련 학자및 대선배님들,교사 동기생및 육사 34기 대전고 동기생(현역 군인및 퇴역 동
기생 공히)등의 고견, 조언 참고 발언등을 꼭 해주셧으면 합니다.
**** 6.25전쟁의 수수께끼 12가지
1. 1945년 8월15일 해방 당시 몇주 늦게 한반도 38선 이남에 진주한 해방군(주둔 최고
사령관인 하지중장의 한반도에 대한 매우 미흡한 식견의 여파를 보면 다소 점령군의
의미도 약간 없지는 않음- 필자주) 인 미군이 제 2차대전에서 승전, 재배치, 재정비
명목 으로 전쟁 발발 1년전에 거의 군병력을 철수할 때
이승만 대통령이 10개 사단 병력을 무장시킬 수 있도록 전차,중화기,탄약등을 지원요
청 하였지만 김일성의 남침야욕을 오판하고 비무장 군사 고문단 200명을 남기고 철수.
2. 해방 정국(1945-48) 및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후 6.25 직전 까지도 북한 공산당의 지령
하에 수많은 대남 선전과 위장 평화공세및 제주 4.3, 여수순천 14연대 반란사건(여순사
건),대구 10.1 사건(혹은 폭동), 38선 특히 경기도, 황해도,옹진반도 (17연대:연대장백인
엽) 소규모,중규모 접전의 상시화등으로 후방에서는 위의 진압에 소수 경찰과 경무장한
국방경비대원으로는 최소한의 치안유지에도 벅찬 상황의 연속이었으며 반공자유체제의
확립에 군부는 확고하였으나 이승만 정부는 미온적이었음.
3. 태평양 전쟁에서의 연합군이었던 소련,중국 측에 호의적이고 신뢰를 가져 주한 미군
의 철수및 결정적인 애치슨 라인(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남한 제외 선언) 공언으로
이에 고무된 북한 김일성은 중공,소련과 비밀 군사지원 약속을 확약받고 소련제 t-34 탱
크,야포,중화기,해군 함정,전투기및 각종 장비,탄약을 비축등 대부대 훈련으로 군사력 증
강에 크게 힘을 기울임
4. 1930년대 및 1945년 까지 대일 항전 경험이 풍부한 당시 중국 팔로군 등의 조선족의
정예 2개 사단 규모의 대군을 모택동은 김일성휘하에 넘겨주고 이를 전투부대에 배치
하여 최정예부대로 육성토록 하여 북한의 남침 야욕에 주마가편격이 되어 전력 증강
에 크게 도움을 줌.
5. 북한군은 2차 대전시 항독 (대독일전) 전투 경험이 풍부한 소련 군사고문단의 치밀
한 지도로 대단위 부대 기동훈련,남침 공격 작전 계획및 실시에 대한 작전 명령 작성
과 공격부대 배치까지 훈련함.
(위와 관련한 구소련 극비문서의 다수 공개로 일부 수정주의 시각은 거의 힘을 잃음)
6.당시 북한의 비밀 남침 준비에 장애가 되는 38선 인근 북한주민의 소개(강제 이동)를
은밀히 강제 진행한 것-- 이 정보는 북한에 침투한 우리측 첩보 요원이나 월남 민간인
등이 적어도 800회 이상 정보국에 보고하였고 -- 당시 북한반 반장은 김종필 중위로
그는 여러 차례 요로에 보고하였고 관련 장성들도 미군측에 알려 주었으나 번번히 묵
살 하였음.
7. 당시 남로당 당수 박헌영은 40만 지하당원(일부는 20만 이라고 보는 이도 있음)
을 남침시 봉기시켜 인민군 환영,유도, 선동, 치안 등에 활동할 것을 김일성에게
보고,서약하고 이를 믿고 단기 속결전을 감행하겠다고 100일 작전 계획을 수립,
시행한 것-- 그러나, 막상 남로당은 나타나지 않았고 김일성은 패전책임을 물어
박헌영에게 문책, 나중에 처형하고 본인는 여론의 십자포화에서 빠져 나옴!--
이는 위조지폐 정판사 사건, 제주 4.3사건,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대구10.1 사건등
군부내 빨갱이 색출 작업(당시 사상적으로 건전하였다면 장래 육군 참모총장감이라던
최남근 중령과 김종석 소령,그리고 이런 일련의 숙군 작업에서 박정희는 소설가 이병
주의 글에 의하면 군부내 적색분자 약 300명을 순순히 알려 준 댓가및 김안일 소령,백선엽
대령등 숙군 핵심 책임자들의 건의-- 당시 그 유명한 김창룡도 박정희 만큼은 온정을 베
푼 아주 특이한 사례가 됨--로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목숨을 부지하게 됨--나중에 박정
회 일대기를 장기 연재할 예정이며 이때 조금 더 자세히 밝힐 것임) 전향자 보도연맹 가
입 유도 등으로 남한내 많은 적색분자들이 이미 그 힘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였고 박헌영
이 과대 포장하여 김일성에
게 보고하여 김일성 오판에 역설적으로 기여한 바도 없지는 않을 듯함!
*** 위의 김안일 소령은 후일 준장 예편 후 그때 손에 피를 많이 묻힌 회개로 나중에
목사가 되어 오랜 기간 목회활동을 성실히 수행한 바 있음1
*** 그리고, 백선엽 당시 대령은 6.25당시 육군 1사단장으로 한국군및 유엔군을 통털어
1950년 인천 상륙및 9.28 서울 수복이후 평양시내에 가장 먼저 입성하였고 나중에
는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되는 영광을 누리며--- 동생인 용장 백인엽--6.25당시
옹진 반도 17연대장으로 전쟁 전부터 유명한 부대장이었으며 휴전후 군단장인 소장으로
박정희 대령의 철모 쓴 상태에서 지휘봉으로 머리통을 여러번 두드려 나중에 대통령이 되
어 박정희가 손보려 하였으나 백선엽의 박정희에 대한 엄청난 음덕 덕분에 차마 어떻게
하지는 못했다는 후문이 있었음-- 백선엽 대장은 지금도 미수(88세)를 넘기셨어도 기억력
도 비상하시고 영어도 유창한 한국군 현대사의 살아있는 전설임-- 그리고 백장군은 박정
희가 대령 예편 위기에도 포병사령관 신설로 준장진급에 도움을 주고 준장 예편 위기에
서도 소장 진급을 적극 도와준 은인이었음!
*** 박정희는 6.25 당시 주변 사람들중 다수가 그는 십중팔구는 북으로 넘어갔을 거라고
추측,예단하였으나 그는 6.25직전 백선엽의 배려로 예편후 문관신분으로 의기소침하게 국
방부에 근무하던 중 6월25일 직전 친척 상을 당하여 대구에 내려가 있다가
6.25 직후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 방어가 무너지는 와중에 잠시 생각,망설인 후 지금의 천호대교
옆 광진교 부근을 단신 도강하여 (이때는 한강 이남으로 강을 건너 목숨을 부지하고 레드
낙인도 한강물에 씻게되고 나중에 11년뒤에는 해병대를 이끌고 한강이북으로 제1한강교
를 넘어 혁명에 성공하여 18년간의 장기집권의 서막을 올리게 되어 이 6.25전쟁은 결과적
으로는 이승만의 장기12년 집권에도 다소 도움이 되었고 빨갱이로 사형 직전까지 위기에
몰렸던 박정희에게도 결과적으로는 이 전쟁으로 인해 패자부활전--과거의 몇년간 청룡
기 고교야구 준결승 이후 처럼-- 에 나서게 되었고 이후 불사조처럼 숱한 고비를 넘기고
11년뒤에 대권을 독차지하고 그이후 2년뒤 대통령에 오르고 다섯살 위인 1912년생의 김일
과 숙명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간헐적으로 유지하며 소위 한강의 기적을 이루며 세계경제
12위권을 유지하게 하는 초석을 이룬 공을 세우게 되며 월남 파병후 7.4공동 이후락 사기
성명(우리 고교 2학년 때로 그당시 함용범 교련선생님및 대고 운동장 정면 맞은편에 사시
던 홍종봉 선생님이 떨리는 음성으로 학생들을 시켜 집에가서 라디오를 가져 오도록 시킨
모습도 지금까지 기억되나 -- 10월 유신을 위한 김일성 속이기 전략이 성공하였고--10월
유신을 거쳐--김일성은 이때 열받아 주석제를 견고히 하는 북한 헌법 개정을 서두르는 계
기도 되어 남북이 향후 오랜기간 심한 냉전을 겪게 되고 약 8년뒤부터인 1973,74년을 전
후하여 이젠 북한을 경제및 군사면에서도 다소 자신감을 갖게 된다-- 국군의 서울 방어
선 전열 정비에 참여하여 문관 신분
에서 현지 임관 소령이 되어 빨갱이 색을 한강 물에 완전히 씻어버리고 군부내에서 6.25로
인해 새출발하는 일대 전환점을 이루며 --역설적으로 그는 6.25로 인해 예편 문관에서 현
역으로 복귀하여 적과의 전투는 제외하고-- 혹시 적에게 투항 할까봐 최전방 대대장이나
연대장은 시키지 않았음--그리하여 그는 후방대대장으로 부인 육영수에게 사랑하는시를
보낼 정도로 전시 상황이지만 숨을 잠시 돌리는 시기도 있었음-- 숱한 위기를 과묵한 성
격과 백선엽,송효찬드의 군 수뇌부 등의 위기때 마다의 도움으로 극복하며 6.25 사변 11년
뒤에 감격의 대권을 손에 쥐게 된다.
8.남침 기도 비익차 은폐와 호기를 잡기 위해 북한은 위장 평화 공세로 남한을 현혹시키
기 위하여 남한에서 잡힌 거물 간첩 이주하와 북한의 덕망있는 지도자 조만식과 바꾸
자고 제의하면서 남한의 대북 정세오판과 대북 경계 태세를 느슨하게 만드는 데 성공
을 거둠(남한 국군은 3개월여 대북 경계 비상을 걸다 6.25 하루전에 모든 비상경계령
을 풀고 전방의 많은 장병들을 고향 농사일 돕기및 휴가를 대부분 떠났고 국방부 고급
장교들은 6.25 하루전 미군측과의 댄스파티및 2차 술파티 까지 이어져 군 수뇌부의 개
전 초 새벽 4시부터 8시 까지 공황에 빠지는 큰 우를 범한 바 있으며 심지어 당시 총
참모장(육군 참모총상) 채병덕은 9시 이후 까지도 연락을 할 수 없었고 부관 나종일
-- 나최광 중위라고도 불림--이 군적도 없고 개전초 갑자기 사라져 56년이 지난 지금
까지도 군사 전문가 사이에도 이 나종일 부관의 빨갱이 행위(이적 행위)여부가 아직도
분분할 정도이며 채병덕의 경상남도 하동 전투 전사도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함--
그리고, 채병덕 총참모장은 전군 비상 경계령을 6.25 하루전에 풀었는 지 그리고,
왜 3주전에 전방 사단장과 후방 사단장을 교체하였는 지 위에 언급한 나종일 부관이
어떤 이적행위를 했길래 개전 초 금방 사라져 버렸는 지 , 정보국 북한반등에서 수십
차례 북의 남침이 확실함을 군수뇌진 및 미군 측에 심지어는 일본 주재 미군 최고
사령부에서도 이미 4개월전에 한국동란 d-day, h-hour를 이미 보고하였다고 정보
관련 업무선 상에 있던 박 하리마오의 진술도 3년전 밝혀 졌는 데 그당시 미군 최고
당국은 왜 그렇게 태평하게 대처하여 미군 3만명의 아까운 목숨을 버렸는 지 -최근
미군이 한국전에서 5만 4246명이 사망했다고 언론에 크게 보도된 적이 있었는 데
이는 그 3년기간중 전세계 각국 주둔 미군의 사고 사망자및 6.25 전쟁 부상후유 사망
자 까지 포함된 숫자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으며-- 이후의 베트남전 통킹만 메덕스호
전쟁 촉발 사건 , 남미 최초 사회주의 정권인 아옌데 정권 실각작전(이날이 1973년
9월11일이라서 저 한준구는 미국 뉴욕 쌍둥이 빌딩 테러사건이 9월11일이라서 결국
누군가로 부터 복수를 당하는 구나 하는 생각을 그 당일 컴퓨터 화면을 통해 첫 충격
을 보고 순간적으로 주마등 처럼 남미 칠레 아옌데 대통령이 관저에서 기관단총을 들
고 자국의 공군의 관저 폭격및 쿠데타군의 저격에 대항하던 슬픈 장면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적이 있읍니다만- 그리고, 파나마 노리에가 정권 실각 작전, 남미 그레나
다 침공작전,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침공작전등을 볼 때 -- 미국 국방성 극비 문서만
30년동안 연구 해온 방선주 박사는 맥아더가 중공군을 한반도로 유인한 다음 만주
원폭으로 (당시 미군은 24개 안팎의 사용가능한 원폭이 있었음) 일거에 중국 전 대륙
을 자유국가로 통일하려는 소위 전쟁천재 또는 전쟁광으로서의 계획도 있었다고 하며--
나중에 맥아더 총사령관의 한국전에서의 결과적으로 전략적 큰 실책을 기술하겠음--
어찌하였든 그 유명한 애치슨 라인이 한국전을 촉발한 -- 김일성의 남침에 큰 이적 행
위가 되었고 후에 전문가들에 의하면 김일성및 소련 측은 미군이 참전을 하지 않으리라
믿었다는 증언도 있음-- 가장 큰 촉발 요인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계속됨!
큰 실 나중에 기술하겠음 * ****나중에 이어짐 계속 한준구 올림
- 펌 - 류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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