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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세 이상 필독-ㄱ.효도 要求? ㄴ.100세 비결 ㄷ..95세-김형석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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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3,824회 작성일 2015-11-06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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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재 일자 : 2015년 08월 28일(金)
100세 이상 살고싶다면 ‘접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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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지 이펙트 / 수전 핀커 지음, 우진하 옮김/21세기북스

이탈리아의 사르데냐 섬 주민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녀 평균수명이 비슷하다. 100세 노인이 세계 평균보다 여섯 배 이상 많고, 특히 100세 이상 남성의 숫자는 무려 열 배 이상이다. 다른 지역보다 20∼30년을 더 오래 살며, 섬의 어느 마을은 열 명 중 한 명이 100세 이상이다.

이 마을 사람들에서 불로장생의 영약은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알아낸 결정적 요소는 접착제처럼 아주 끈끈한 사회적 유대감이었다. 이 마을을 오래 연구해온 반니 페스 박사는 이곳의 장수 비결이 가족·이웃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유전적인 고립, 산지의 지형적 특성, 식습관 등 구별되는 요소도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가족이나 친지, 이웃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접촉이 많다는 것이다. 자식은 성장한 뒤에도 부모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이웃과 친구 관계는 마치 가족 같다.

이 책의 부제목은 ‘페이스 투 페이스-접속하지 말고 접촉하라’이다. 발달심리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 수전 핀커는 ‘접속’과 ‘접촉’의 차이에 대해 책 전체를 통해 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컴퓨터를 통해 하나로 통합된 네트워크, 즉 ‘접속’의 연결망은 사람의 관계를 예전보다 훨씬 다양하게, 거미줄처럼 얽어놓았지만, 마주하는 실제 관계, 즉 ‘접촉’을 모두 삼켜버렸다. 그 결과는?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책은 사람과 얼굴을 맞대는 접촉이 몸의 면역력을 증가시키고,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암 완치율을 네 배나 높이며, 치매에 걸릴 확률을 낮추고, 평균수명을 15년 이상 늘릴 방법이라고 여러 증거자료를 통해 말한다. 디지털 시대에서 더욱 고립돼 불행해지는 현대인들에게 가족과 친구, 그리고 공동체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엄주엽 기자 ejyeob@munhwa.com
e-mail 엄주엽 기자 / 문화부 /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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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사회 자녀도
 
 
고령화 사회 자녀도 힘들어요,
 
 
효도 요구 맙시다
 
중앙일보 A27면 TOP 2015.09.07. 네이버뉴스
김일순 대표는 "고령층이 스스로 미래 세대의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고 했다. [사진 골든에이지포럼]“자녀에게 효(孝)를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말자. 독립적으로 사생활을 유지하며 살자.” 고령화 사회의 대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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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年에 외롭지 않으려면

 

 

 

異性 친구‘友情의 同居’

 

 

하세요”

 
 
 
 
 
 
 
 
입력 2015-10-05 03:00:00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 올해 95세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답변은 흠잡을 데 없이 또박또박했다. 1시간 반의 인터뷰 동안 전혀 지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건강한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더욱 놀라운 것은 지적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달에만 40회의 강연을 했다. 강연만이 아니다. 매일 평균 원고지 40장을 집필하고 있다. 최근의 글을 모은 책 ‘나는 아직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가 이번주에 나온다. 다음 달에는 최근 강연 내용을 담은 ‘희망과 사랑이 있는 이야기’(가제)가 나온다. 95세의 현역이라니 경이롭다. 김 교수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정년 은퇴했다. 그렇지만 나 같은 586세대(5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까지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나도 중고교 시절에 사촌형들의 책꽂이에 있던 그의 수필집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읽었다.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95세의 나이에도 매일 원고지 40장을 집필할 만큼 경이적인 건강과 집중력을 지녔다. “일이 건강”이라는 그의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맑았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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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논설위원
―선생님의 대표작은 역시 ‘영원과 사랑의 대화’라고 할 수 있겠죠.

“1961년 출판사에 원고를 맡기고 미국으로 나가 있었습니다. 대학에서는 본봉밖에 나오지 않아 생활에 보탬이 될까 해서 책을 냈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그해 출판 연감을 보니 출판 역사의 2가지 신기록을 세웠더군요. 소설보다 비소설이 더 많이 팔린 것과 단행본으로는 최초로 한 해 60만 부 이상 팔린 겁니다.”

95세 건강 비결은 일

―왜 그렇게 많이 읽혔을까요.

“충북 영동에 강연을 갔더니 어느 나이 드신 분이 오셔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1960, 70년대는 경제적으로만 가난했던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황무지에서 살았다고요. 당시 안병욱 선생과 저의 책을 읽고 마음의 안정을 얻고 희망도 가졌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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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70년대 철학자가 쓴 인생에세이로 이름을 떨쳤던 김형석 안병욱 김태길 교수는 모두 1920년생으로 동갑이고 마지막 길까지 친구로 지냈다. 김태길 전 서울대 교수가 2009년 89세로 가장 먼저 세상을 떴다. 2013년 별세한 안병욱 전 숭실대 교수는 2009년부터 몸져누웠기 때문에 사실상 89세에 활동을 중단한 셈이다. 김 명예교수만 지금도 정정하게 활동하고 있다.

―100세까지 거뜬하실 듯합니다.

“제 나이에 5년 후를 기약하지 않습니다. 2년 앞만 내다보고 그 이후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2년 정도는 더 살 자신이 있습니다.”

―도대체 비결이 뭡니까.

“일이 건강이라고 생각합니다. 30년 전 65세로 연세대에서 은퇴하고 15년간 사회교육 활동을 했습니다. 80세가 됐을 때 이제는 쉬어 볼까 하고 외국으로 여행도 다녔습니다. 돌아다녀 보니 일하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일에서 일로 옮겨 다니다 보니 정신적 에너지가 계속 충전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운동은 하십니까.

“50대 중반부터 수영을 시작해 지금도 이틀에 한 번 30분 정도 합니다.”

―아무리 건강해도 글쓰기같이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은 힘들지 않나요.

“매일같이 긴 일기를 씁니다.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도 글을 쓰면 또렷해집니다. 일기를 쓸 때 꼭 재작년과 작년의 오늘 날짜 일기를 읽어보고 나서 씁니다. 그래야 제 생각이 후퇴하고 있지 않나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글 쓸 때의 집중력을 물었는데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95세 나이에도 낡은 글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얘기까지 했다. 그는 단정히 차려입은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나타났다. 선비도 이런 선비가 없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드는 법이지만 그의 경우는 흐트러지려는 정신력을 끊임없이 다잡기에 건강을 유지하는 것 같다.

―선생님의 인생론식 철학에 불만인 사람도 있습니다.

“전 한국 사람의 문제가 철학이지 칸트나 헤겔 그 자체가 우리 철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칸트를 읽고 나오고 헤겔을 읽고 나오고 하면서 이게 내 문제에 얼마나 의미가 있느냐 찾으려고 하니까 건방지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공감한다고 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나 같은 고민을 한 사람이 서울대의 박종홍, 김태길 교수였습니다. 대개는 칸트나 헤겔 소개하다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인생 아는 60… 75세가 좋을 때

―철학을 한 사람이 어떻게 선생님처럼 종교적(기독교적)일 수 있습니까.

“철학자들 가운데 겸손한 사람, 즉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철학자니까 철학과 종교의 한계를 넘어가지는 않지만 종교와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칸트는 읽어보면 하나님 얘기도 않고 예수님 얘기도 않지만 결론을 낸 것을 보면 기독교입니다. 그의 ‘실천이성비판’의 기본은 예수가 말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원하는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칸트와 같이 경건한 이성을 가진 사람은 결국 요청적(要請的) 유신론자가 되고 맙니다.”

―가장 힘든 때는 언제였나요.

“김태길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1년간 참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2년 전 안 선생마저 떠났을 때 혼자만 남았다는 생각에 더 힘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95세 무렵의 진짜 문제는 외로움이다. 어떻게 해서 95세의 나이까지 산다 해도 주변에 친구가 남아 있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는 아내와 10년 전 사별했다. 아내는 20년 동안 병중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 30년간 혼자였다. 공백을 달래주던 벗들마저 잇달아 세상을 떴다.

“아내와 사별했을 때 제 나이가 85세였습니다. 80대 중반을 넘어서면 애욕 같은 것은 없습니다. 남녀 관계에 애정을 넘어선 우정이 어렵다고 하지만 그 나이가 되면 가능합니다. 이번 주 나오는 신간에 ‘누나의 선택이 옳았다’는 제목의 글을 실었습니다. 누님은 나이가 많아 남편과 사별하고 다른 남자를 만났는데 그 선택이 옳았습니다. 무슨 애욕이 있어서가 아니라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같이 살아야 합니다. 새로 결혼하는 것이 재산 문제 때문에 어렵다면 동거 선언이라도 하고 살면 됩니다. 기독교인입니다만 교리를 떠나 저부터 먼저 여자친구를 사귀는 모범을 보였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인생을 다시 산다면 몇 살로 돌아가고 싶으신가요.

“제일 좋은 나이가 60세에서 75세가 아닌가 합니다. 60세 이전에는 인생이 뭐냐고 물어보면 자신이 없고,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인생이 뭔지 알고 행복이 뭔지 알면서 발전하는 시기가 60에서 75세라고 생각합니다.”

청춘이여 낮은 데서 출발하라

―요새 청춘들 취업도 잘 안 되고 불쌍합니다.

“일거리가 정말 없어서인가요, 자신에게 맞는 일거리가 없어서인가요. 대학을 너무 많이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는 직장을 찾다 보니 어려운 건 아닐까요. 제가 보잉사의 아시아 지역 간부들을 모아놓고 강연한 적이 있습니다. 참석자들의 프로필을 봤는데 매사추세츠공대(MIT) 같은 명문 공대 출신은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물어봤더니 ‘우리는 기술자들을 뽑아서 낮은 데서부터 키운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명문 공대생은 다 어디 있느냐 했더니 ‘연구소 같은 데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제도를 이렇게 바꿔야 합니다.”

김 명예교수는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컴퓨터도 사용하지 않는다. 아니 사용해본 적도 없다. 지금도 종이신문만 읽고 원고지에 글을 쓴다. 그래도 그는 최신 뉴스를 잘 알고 많은 강연에 초청받을 만큼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저명한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2008년 100세 생일을 맞았을 때 당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직접 집으로 찾아가 축하해줬다. 그와 헤어지면서 “100세까지도 건강하고 총명하셔서 그때 다시 한번 인터뷰할 기회가 온다면 좋겠다”는 인사를 건넸다.


:: 김 명예교수가 본 인촌 김성수 선생 ::


사랑과 지혜로 대하신 선생… 그분 밑에서 있던 교단시절 가장 많이 배우고 행복했죠
김형석 명예교수의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읽어보면 인생에서 친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승만 박사와 인촌 김성수 선생을 비교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박사는 언제나 친구가 없었다. 그가 아무리 위대한 정치 역량을 지녔다 해도 마침내 친구를 못 가졌기 때문에 고독했다. 그러나 인촌 같은 분은 항상 좋은 친구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일생을 보냈다. 두 분 중에 누가 더 우리 사회에 업적을 남겨주었는가는 오늘(4·19혁명 직후)에 와서는 의심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김 교수는 연세대로 옮기기 전에 중앙고에 근무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1947년 가을 학기에 중앙고에 부임해서 교사로 3년, 교감으로 3년 있으면서 인촌 선생을 가까이에서 모셨다”며 “당시 인촌 선생은 중앙고의 교주(校主), 오늘날로 말하자면 이사장이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인생에서 직접 보고 배운 두 명의 은사로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인촌 선생을 꼽았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부하를 사랑하고 지혜롭게 대해 주는 데 인촌 선생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며 “인촌 선생 밑에서 있었던 때가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행복했으며, 그 이후에 그런 분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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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려대에서 영국사를 가르쳤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까지 이름이 올랐던 고 김성식 교수로부터 ‘인촌이 살아있을 때 야당은 분열한 일이 없었는데 인촌이 돌아가시고 나니까 야당이 한 번도 합쳐본 적이 없다’는 평가를 직접 들었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인촌 선생의 인덕은 늘 제1선이 아니라 제2선에 있으면서 한번 믿고 쓴 사람을 끝까지 믿고 썼다는 데 있다”며 생전에 인촌을 알고 지낸 사람들이 거의 사라지면서 인촌이 일각에서 부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 데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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