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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솟는 황우석교수님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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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74 한모인 이름으로 검색 댓글 0건 조회 2,099회 작성일 2005-06-09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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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가난 속에서 ‘생명’을 보았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이렇게 인기 있는 과학자는 없었다.”

황우석 서울대 석좌교수(52)를 가리키는 말이다. 급기야는 ‘국민 과학자’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으레 “장래에 과학자가 될래요”라고 말하던 어린이들도 이제는 “황우석 교수처럼 될래요”라고 말할 정도다. 일각에서는 우스갯소리로 황 교수를 가리켜 “과거 로보트태권V를 만들었던 ‘윤 박사’ 이후 어린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과학자로 자리매김했다”는 말까지 들린다.

과학이란 분야가 일반인들에게 다소 어렵고 낯설게 다가서는 괴리감도 없지 않건만, 황 교수에게 ‘국민 과학자’란 호칭까지 붙여가며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내에서보다는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는 그의 빛나는 연구 성과도 큰 몫을 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그의 타고난 대중적 어필 능력을 손꼽는 이들이 많다.

학계 일부에서는 황 교수에 대해 “너무 언론에 나서려 한다”며 다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 같은 지적도 “황 교수는 미디어를 제대로 다룰 줄 안다”는 목소리에 파묻히고 만다. “딱딱한 과학을 미디어의 관심 대상으로 끌어들이는 데 남다른 재주를 타고났다”는 찬사 일색이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깡촌 ‘촌놈’ 출신인 그에게 여전히 ‘사람 냄새’, ‘자연 냄새’가 난다는 것도 친밀한 대중적 인기에 톡톡히 한몫을 하고 있다.

황우석 교수의 고향은 충남 부여군 은산면 홍산리의 계룡 부락이다. 하늘도 푸르고 계곡도 푸른 청정한 ‘파란 마을’이라고 해서 ‘파래골’로 불렸다. 그가 중학교 진학을 위해 대전으로 유학하기 전까지 10여 년의 유년기를 보낸 파래골은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는 한 과학자의 순수한 영혼의 자양분을 마련해준 곳이었다.

황 교수는 한국전쟁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던 1953년에 태어났다. 황 교수네 가족 역시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3남3녀 가운데 다섯째였던 황 교수는 그나마 5세 때 아버지마저 돌아가셔서 가난을 숙명처럼 여기고 자라나야 했다.

지금도 황 교수에게 ‘가장 귀중한 이’로 남아 있는 이는 그래서 어머니 조용연 여사(87)다. 홀로 되어서 6남매를 키운 어머니는 황 교수의 정신적 지주였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황 교수와 그야말로 ‘불알친구’였던 홍산리 이장 이광희씨(54)는 “황 교수가 어머니에게 보이는 극진한 효도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내 어린 기억에도 그의 모친은 하루 종일 일만 하느라 젊은 나이부터 허리가 항상 구부정해 계셨다”고 회상했다.

지금의 황우석을 있게 해준 또 하나의 ‘인생 스승’은 바로 소였다. 소는 어린 우석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황 교수 역시 틈날 때마다 “어린 시절 소는 땅 한 마지기 없던 우리 집을 먹여 살리는 구세주나 다름 없었다”고 말하곤 했다. 이씨 역시 “황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항상 소를 뚝방에 끌고 나와 풀을 뜯기면서 소와 함께 하루를 보냈다. 소 옆에서 책을 읽으면서도 이따금씩 소와 눈을 마주친 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기억했다. 그는 “황 교수 집은 어린 시절 농사 지을 땅 한 평도 없었기에 다른 사람의 소를 대신 키워주는 일을 했다”고 전했다.

황 교수네가 키우던 소는 이른바 ‘배냇소’라고 하는 것인데, 돈 많은 사람이 사서 키워달라고 맡기는 그런 소였다. 황 교수 집이 이런 소를 맡아서 대신 키워주고 그 대가로 그 소가 낳은 새끼 한 마리를 갖는 식이었다.



황 교수가 대전고 시절, 서울대 의대에 진학하고도 남을 만한 충분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담임선생님에게 뺨을 맞아가면서까지 수의대 진학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때부터 품게 된 소에 대한 각별한 애정 때문이었다. 그는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소의 눈망울을 들여다보며 “소에 관한 한 내가 대한민국 최고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한번 하고자 하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우직함 역시 어린 시절 어머니와 소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 통하는 그의 별명은 ‘확신범’과 ‘찍소’였다. 뭔가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했다. 또한 한번 찍었다 하면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그 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고 한다.

황 교수의 형과 누나들은 모두 초등학교만 졸업했다. 이씨는 “당시는 초등학교도 의무교육이 아니어서 학비 걱정이 만만찮았던 시절”이라며 “그나마 손바닥만한 땅이라도 자기 땅을 갖고 있어야 중학교 진학을 욕심낼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런 가난 속에서 어린 우석이 대전으로 유학까지 갈 수 있었던 것도 기실 따지고 보면 어머니 덕분이었다. 대전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당숙이 어느 날 “집안에서 한 명 정도는 제대로 공부를 시켜야 하지 않겠느냐”며 총명한 막내아들 우석을 대전으로 데려갔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 때 당숙이 입은 황 교수 어머니의 은혜 때문이었다. 당숙은 지역에서 인텔리로 통했기에 한국전쟁 당시 인민위원장을 맡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공산주의자로 몰려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런 당숙을 황 교수의 어머니가 위험을 무릅쓰고 천장에 2년 동안 숨겨주면서 살려낸 것이다.

황 교수는 당시 지역 최고의 명문인 대전중학교에 합격했지만 3년 전액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대전서중학교로 진학했다. 그리고 역시 지역 최고 명문인 대전고등학교에 합격했다.

오늘날 황 교수의 든든한 인맥군 형성은 바로 이 대전고 51회 졸업 동기생들이 주축을 이루게 된다. 조석준 전 KBS 기상캐스터, 이경재 서울북부지검 부장검사, 신영철 서울중앙지법 수석 부장판사, 오연군 공군 준장, 조성남 <중도일보> 주필 등이 그들. 아무리 바빠도 동기 모임에는 빠지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공군 장교인, 오 준장의 아들이 득남을 했다고 해서 동기모임에서 “에이구, 우리들이 벌써 할배가 되었네”하며 서로 웃었다고 한다.



황 교수의 학창 시절은 꿈도 많았지만 역시 불우했다. 가난과 함께 그를 쫓아다닌 건강 문제 때문이었다. 지금도 대전고 동기들은 “우석이는 집주소가 학교 도서관일 정도로 거의 매일 도서관에서만 틀어박혀 지내다시피 했다”고 기억한다. 당시 황 교수 등이 멤버였다는 ‘등안대기 클럽’ 또한 따지고 보면 등을 대고 편히 누울 만한 공간이 없었기에 생겨난 가난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쉬지도 못하는데 건강이 좋을 리 없었다.

가난 때문에 상처 받았던 아픈 일화도 적지 않다. 현재 황 교수의 종교는 불교지만, 사실 학창시절에는 천주교에 심취해서 성당을 자주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그에게 매주 헌금을 하는 시간은 큰 고통이었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헌금을 했는데, 황우석은 그 시간만 되면 마치 죄인이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자리 한구석에서 안절부절 못했다는 것이다. 한 보좌신부가 “왜 헌금 않고 자리에 앉아 있느냐”고 한 말이 결국 그를 다시는 성당에 가지 못하게 하고 말았다.

가난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던 숙명적 굴레였다면, 건강문제는 그의 몸을 짓누르던 또 하나의 굴레였다. 고교시절 황 교수는 ‘가난병’이라 일컬어지던 결핵을 앓았다. 특히 대학 입학 후에는 고3 후유증으로 병세가 더욱 심각해져 부득이 입학하자마자 휴학을 해야 할 정도로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당시 황 교수가 ‘과연 학업을 계속할 수나 있을까’ 하고 걱정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를 괴롭힌 건강 문제는 서울대학과 대학원을 나와 모교의 교수로 임용된 이후인 86년과 95년에도 찾아왔다. 8시간 이상의 대수술을 받는 힘겨운 사투를 벌이기도 했고, 간암 판정을 받고 절망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매일 새벽 4시반에 기상해서 단전호흡을 거르지 않고, 한 달에 한 번씩 예불을 드린다. 몸과 마음의 조화와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어쩌면 그가 과학자로서 ‘생명과학’에 올인하는 것도 이미 좌절의 끝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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