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써보는 유언장(遺言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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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42 조중호 이름으로 검색 댓글 0건 조회 3,193회 작성일 2003-10-21 21:16본문
미리 써보는 유언장(遺言狀)
내가 이렇게 건강하고 멀쩡한 상태에서 유언장을 쓴다는 사실이, 죽음에 대하여 너무 쉽게 생각하는, 어쩌면 막연한 관념적(觀念的)인 감상(感想)에 젖은 경박(輕薄)한 행위일 수도 있음을 잘 안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지를 나 자신 알 수 없었음과 같이 죽음 또한 나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 한, 언제 어떻게 닥쳐올는지를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기에 한 인간으로 태어나 살다가 떠날 즈음에 언젠가는 한 번 남겨야 할 말이 있다면 미리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이 유언장을 쓰게 되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그것도 한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 지금 이 순간까지도 건강하게 존재하여 이렇게 유언장을 쓸 수 있다는 것에 무한히 감사한다.
날 낳아주시고 키워주시고 사랑해주신 부모님께, 특히 어머님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고(最高)의 존경(尊敬)과 숭모(崇慕)의 정(情)을 무릎 꿇어 바치고 싶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마침내 그 삶을 마감할 때면, 어찌 미련(未練)과 애착(愛着), 회한(悔恨)과 후회(後悔)가 없겠는가.
나 또한 그 예외(例外)일 수는 없음을 잘 알고 있으며, 설령 다시 태어나 새로이 산다고 해도, 역시 나 스스로에 대하여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갈 것이란 자신(自信)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살고 있는 지금 오늘 이 현재의 삶 그 자체를 완벽하게, 다가오는 내일(來日)의 삶, 그 역시 나 자신 후회 없는 온전한 삶을 영위(營爲)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터에, 어찌 다시 사는 그 긴 삶인들 이보다 더 나은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오늘의 삶에 충실하여 그 의미를 찾고, 가벼이 떠날 수 있도록 이젠 버리고 비우는 마음으로 홀가분하게 자유를 누리고 싶을 뿐이다.
때문에 나는 나의 지난날이 어떠하였고 그 결과 나의 현재가 어떠한 것이든 그것의 성패(成敗)나 지닌 것의 많고 적음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에 스스로 자족(自足)하면서 남은 삶을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보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나는 살아오면서 차마 말할 수 없이 부끄럽고 파렴치한 과오를 범한 일도 있고,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굴복(屈服)할 밖에 없을 때에는 나 자신(自身)이 비굴(卑屈)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으며,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그 자괴감(自塊感)으로 괴로워하면서 숱한 날들, 잠 못 이룬 적도 있었다.
또한 윤리(倫理)나 도덕률(道德律)의 엄격한 측면에서 결코 떳떳하거나 자유로울 수 없는 자신의 한계(限界)를 아전인수(我田引水)식으로 스스로를 합리화(合理化)하여온 이중적(二重的)이고 위선적(僞善的)인 인격(人格)의 흠결(欠缺)도 있어왔다.
다만, 나 자신이 그랬던 아니면 다른 사람의 경우를 보고 느낀 경우였던,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는 경험적 사례만큼은 결코 또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실제로 평생 동안 지켜온 것도 있고 대체로 그 방향만큼은 흩뜨리지 아니하려는 노력을 지금도 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상황 어떤 경우에도 언제나 온당한 나’일 수는 없을 것이며, 다만 죽는 날 까지 나 스스로를 돌아보며 ‘온당한 나’로 살 수 있도록 노력하련다.
나는 사회적으로 크게 이룬 것도 없고, 경제적으로 많은 재물을 모으지도 못했다.
말하자면 사회통념상(社會通念上)의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성공(成功)하지 못한 보통의 소시민(小市民)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국가공무원(세무공무원)으로서의 10년, 통일원 기획예산실1년, 학교법인 선인학원(인천대학교 학교법인) 총무책임자 7년, 레이크사이드골프장 경리책임자 5년, 그리고 공인중개사로서 부동산중개업 직영 5년, 한 때의 공백기간을 거쳐서 지금은 타인이 운영하는 공인중개사사무실에 나의 자격증을 활용, 함께 일하고 있다.
나는 비교적 정직하고 성실하게 항상 나에게 주어진 소임에 최선을 다하였으며(근무한 곳마다 1회 이상 포상 및 모범중개업소 표창), 그만큼의 가시적(可視的)인 성과를 거양(擧揚)하였다. 또 윗사람이나 동료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중에도 잘못된 사례(事例)에 대하여는 과감하게 시정(是正)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비록 상관(上官)이라 해도 위법부당(違法不當)한 지시나 명령은 분명한 자세로 거부한 경우도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지방으로의 좌천(左遷/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여 훗날 원상회복을 하였지만), 마침내는 두 번이나 직장을 떠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우여곡절(迂餘曲折)이 많았던 이러한 삶의 과정은 나 자신은 물론 아내와 가족들에게도 현실적인 큰 고통(苦痛)을 겪게 하였으며, 가족들에겐 나에 대한 불만(不滿)의 요인(要因)이 되게도 하였다.
나는 때때로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게 될 때면, 그때 굳이 그렇게까지 하여야만 했던가? 적당히 굽히고 타협할 수 도 있었는데...하며 스스로 자문(自問)할 때도 있다.
그러나 힘 있는 자에 아첨(阿諂)하여 굴종(屈從)하지 아니하고, 부정(不正)한 일에 야합(野合)하지 아니하고, 이익(利益)을 좇아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도 아니하면서 ‘나 스스로를 지키면서 산다는 것’ 그 길은 험난하였지만, 그래도 나의 신념(信念)이나 양심(良心)에 비추어 언제나 나 자신 떳떳할 수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훗날, 내 인생역정(人生歷程)에서 심적(心的)으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마지막 직장(골프장)에서 그 인고(忍苦)의 세월, 더 이상 가족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하여 철저하게 '나‘를 죽이고 또 죽이며 때로는 홀로 눈물을 삼키면서 감내(堪耐)했던 나에게, 그즈음 다 성장한 아들딸들이 따뜻한 위로를 해주면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 어떠한 선택을 하셔도 존중하겠노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었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지난날들 직장문제로 가족들에게 준 고통에 대한 보속(補贖:죄를 짓는데 대한 나쁜 결과를 보상함)과 해방(解放)된 마음으로 마지막 직장을 미련 없이 정리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대로 그 곳에 남아있었다면, 나의 지위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지금보다 훨씬 더 윤택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지위나 돈이 진정한 ‘나’의 모습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진정한 ‘나’의 삶을 가질 수 있게 인정하고 격려해준 가족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언제 어떤 장소에 어떤 모습으로 가더라도 누구에게나 당당할 수 있는, 다만 깍듯이 예의를 다 하면 그뿐 그 누구에게도 비굴(卑屈)한 웃음을 흘리지 않아도 되는, 굳이 나 자신의 실상(實像)을 과장(誇張)하고 뽐내거나 가식(假飾)이 필요 없는, 서로 고고(孤高)한 척 견주고 눈치 보면서 허례허식의 틀에 구속되기보다는, 실제 있는 그대로 편안하고 자유로운, 한 마디로 거리낌 없는 삶의 여유(餘裕), 딱히 남들이 그렇게 부러울 것도 없는 삶이라면 뭐가 그리 안타까울 것인가.
나를 가리켜 ‘좋은 사람’이란 말을 들을 자신은 없지만, 그러나 ‘나쁜 놈’이라는 소리는 듣지 않으리라 목표를 삼고 살아왔다.
나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속인다거나,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害)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으려 극구 노력하였으며, 어떠한 약속이든 그것이 큰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내 스스로 한 약속은 꼭 지키고자 하였다.
능산회(대전고등학교 42회 산악회) 산행모임에 내 개인적으로 참석한 횟수가 현재까지 대략 260여회 쯤 되지만 그 만나는 시간에 늦었다거나, 살아오면서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에 내가 늦은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 수를 헤아릴 정도이니까.
다만 이행할 수 없는 특별한 상황이 발생한 경우에는 반드시 사전에 상대방에게 그 사유를 밝히고 이해를 구하곤 했다.
별스럽게 내 자랑을 늘어놓으려는 것이 아니고, 그만큼 나로 하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하며 살아왔다는 실증적인 한 예를 들어본 것이다.
무슨 유서(遺書)가 이리 장황하고 말이 많은가?
여기저기 널려놓은 부동산(땅, 상가, 주택)에, 금융자산에, 귀금속, 골동품, 고가의 미술품 등등, 헤아리기에도 대갈통 아플 만큼 재산이나 많다고 하면 그걸 조목조목 구분 예시하여 누구누구에게 어찌어찌한다는 둥, 그야말로 초미(焦眉)의 관심사로 이어지면서 길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런 얘기는 하나도 없이 웬 흰소리가 그리도 길까 조급해하지 말기 바란다.
이 세상 모든 재물(財物)들은 사는 동안 잠시 빌린 것일 뿐 나죽을 때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는 것, 죽어가면서 까지 온통 그 얘기로 채운다는 건 너무 허망(虛妄)하지 아니한가? 또 많은 재산 남길 거 없는 놈이라 해서 유언조차 많이 할 수 없다면 다시 못 올 이 세상 떠나는 놈 섭섭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죽어갈 때에는 긴 말도 하기 어려울 터, 또 맥없이 들어 누워서 들릴 듯 말 듯 이런 저런 얘기 늘어놓는 모습이 얼마나 애처롭고 처량하겠는가.
그래서 당당하게 하고픈 말 실컷 하기 위하여 ‘미리 써보는 유언장’ 아닌가.
*1. 내가 죽은 후에는 화장(火葬)하여 그야말로 한줌(아주 小量)의 재로 어느 산이든, 산에 뿌려지고 싶다. 가능하다면 소나무아래 뿌려지기를 바란다.
이 세상에 와서 살다 가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인데, 죽은 자가 산 자보다 더 많은 땅을 차지하고, 묘를 쓰기 위하여 그 많은 초목(草木)들을 파내고 베어내는 것, 자연과 환경을 훼손하는 것은 살아남는 자손을 생각해서라도 할 일이 아니다.
많은 재산을 물려주려고 발버둥치느니, 좋은 자연을 물려주는 것이 진정 자손을 사랑하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또 살기 바쁜 세상에 때마다 철마다 벌초(伐草)다, 성묘(省墓)다 어찌 다 챙길 수 있단 말인가.
만약 나에게 영혼이 있다면, 푸른 솔의 거름이 되어 시린 겨울바람에도 의연하게 청청하고, 더운 여름엔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서 오가는 이의 쉼터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원하기만 하면 고향 선산(先山)에 묻힐 자리가 있다고는 하지만, 내 자리만큼의 푸른 초목(草木)이 우거진 그대로 새들의 둥지가 되고, 그만큼 세상의 공기를 조금이라도 맑게 하는데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2. 장례는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주기를 바란다.
나는 특별히 믿는 종교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을 모르 듯, 이 세상을 떠난 후의 일을 어찌 알겠는가?
우주만물(宇宙萬物)이 신(神)의 섭리(攝理)와 자연(自然)의 이치(理致)에 따라 지구(地球)가 생겨난 지 45억년 전, 인류의 탄생이 100만년 전, 그 생성소멸(生成消滅)과 부침(浮沈)을 거듭하여 왔거늘, 내 어찌 ‘믿음’ 하나의 증표(證票)만으로 현세(現世)에서도 복을 받고 내세(來世)에도 천국에 이르기를 바랄 것인가.
예수든, 부처든, 이슬람이든, 나는 인류의 성인(聖人)으로 지각(知覺)하며 그 훌륭한 가르침엔 경외(敬畏)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지만, 천국(天國)과 극락(極樂)을 담보받기 위하여 그 교리(敎理)에 얽매이고 속박(束縛)받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
나는 자유인인 나대로의 뜻대로 살고 싶다. 불과 수 천 년 전에 나타난 그 성인(聖人)들이 복음(福音)을 전파하기 전, 그 경전(經典)조차 없었던 시절의 옛 조상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천국과 지옥의 택일을 강요할 뿐, 중간지대는 왜 없을까?
내가 죽은 후의 나에 대하여는 신(神)의 뜻이든, 자연(自然)의 이치(理致)이든, 기타 그 어떤 척도(尺度)에 의하여든 사후세계(死後世界)의 법도(法度)에 따를 뿐이다.
다만, 신앙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여 인류에 공헌한 슈바이처박사, 테레사수녀.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 소외받는 이들을 위하여 참 사랑을 실천한 신앙인들, 호국불교(護國佛敎)로 나라가 어려울 때 자진하여 목숨을 바쳐서 싸웠던 승려들, 사랑과 보시(普施)를 통하여 남을 돕고, 신앙의 참 진리를 터득하여 맑고 고매한 정신으로 착하고 선하게 살아가는 신앙인들을 그 종교에 관계없이 나는 존경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위대한 헌신(獻身)과 희생(犧牲), 맑고 고운 착한 삶이야말로 신실한 신앙의 힘이 아니고서는 발현(發現)될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두운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는 신앙의 가르침과 그 힘을 부정하지 아니한다.
이 부분에 많은 언급을 하는 것은 내 나름대로의 종교관을 밝히는 과정에서, 나 자신 종교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하여 신실한 신앙인들에게까지 혹시 누(累)가 되지 않을까 저어해서이다.
부부가 아르바이트(Arbeit)를 하며 캐나다 토론토대학캠퍼스의 선교활동(宣敎活動)을 위하여 현재 선교사(宣敎師)로 살고 있는 내 딸 은영 그리고 사위 형석 군.
집도 살림도 아무 것도 없으면서, 그러나 세상의 필요한 것을 모두 가진 것처럼 귀여운 아기(正道/크리스토퍼)와 항상 밝고 맑게 웃음을 잃지 아니하고 늘 감사하면서 사는 모습. 외국에서의 아르바이트가 그리 쉬운 일이던가!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언제나 밝은 목소리, 혹시나 걱정스러워 어찌 사는지 물을라치면 모든 것이 충족하여 필요한 것이 없노라. 정말 어려운 일이 있을 땐 부모님께 말씀드리겠노라 하면서 이대로도 너무 행복하고, 감사한다는 아이들.
욕심 없이 때 묻지 아니한 그 마음이 갸륵하고, 나 또한 행복을 느끼게 한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고, 만나고 싶을 때 만나볼 수 없는 그 안타까움이 때로는 야속할 때도 있지만, 딸이 이 아버지의 삶을 존중했듯이 나도 딸이 선택한 삶과 그 신앙생활을 존중한다.
*3. 의학적으로 완전치료나 소생(蘇生)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이 내려졌을 경우엔, 절대로 내 생명을 기계에 의존하여 연장시키지 말라.
오직 자연사(自然死)를 원할 뿐, 차라리 안락사(安樂死)를 시켜다오!
만에 하나라도, 나의 병이 금방 죽음에 이르지는 아니하되 주변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줄 염려가 있거나, 가족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치매, 기타 등등)에 이르러 의술(醫術)로는 그 치유(治癒)가 불가능하다고 판정이 내려졌을 경우엔, 지체 없이 일정한 격리수용시설에 의탁하라.
의료기기에 의하여 단지 숨만 쉬더라도 아직은 생존(生存)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족들에게는 다소 위안이 될는지는 모르되, 그러나 어차피 한 번 죽는 몸이 아닌가!
피차(彼此)에 고통의 연장일 뿐인, 내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그런 쓸모없는 생에 매달려 버둥거리는 비참한 삶은 정말 싫다. 차라리 안락사(安樂死)가 백번 낫다.
또한 내가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위해(危害)를 끼치는 병의 경우라면, 본래의 나는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요 다만 그 육신(肉身)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인즉, 즉시 격리수용시설에 보내달라는 것이다. 가족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공연한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아니하리라.
만약, 특별한 상황에서는 차라리 나의 명운(命運)을 나 스스로 결단하는 일이 혹시 있더라도 나를 탓하지 말아다오.
*4. 재산이라야 집하나 밖에 없지만, 그 사후처리는 아내의 뜻을 따를 것이다.
현재의 사는 집을 줄여서 한 단계 적은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친 상태이다. 가능하다면 자녀들에게 부양(扶養)의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옮겨갈 아파트는 아내의 명의로 했다.
명의야 무슨 상관이겠냐 만, 평생 자기이름으로의 재산이라곤 가져보지 못했던 아내에 대한 조그마한 배려인 동시에, 혹시 내가 죽은 이후에 조금이라도 남는 것이 있다면 그 처분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아내에게 위임한다는 뜻임을 실행한 것이다.
그 외의 어떠한 경우라도, 아내의 뜻을 곧 나의 결정으로 대신한다.
*5. 가족들에게
내가 국민학교 시절(1956년 5월), 대통령후보였던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선생이 당시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선거전을 치르다가 급서(急逝:갑자기 세상을 떠남)한 사건이 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분이 서거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나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어린 나이에 우국충정(憂國衷情)이란 말이 어울릴는지 모르는 일이로되 젊은 날 한 때, 나 역시 드높은 이상(理想)과 청운(靑雲)의 꿈을 품은 적도 있었다.
어린시절부터 성장기까지 끼니도 제대로 못 찾아먹을 만큼 헐벗고 굶주리며 가난했었다는 쾌쾌 묵은 얘기는 그만두기로 하자. 우리세대 농촌출신들 대부분의 공통된 레퍼토리(repertory)일 테니까.
이상(理想)의 나래를 한껏 부풀려 다듬어 보았던 터전, 당시 전국에서 손꼽을 정도의 명문 고등학교 [지난 5월24일 오후 6시 대전-금산 가는 길 추부터널 근처에 있는 만인산 푸른학습원에서 대전고등학교 제42회 동기동창들의 졸업40주년기념모임 행사가 있었다.
가족동반을 권장했던 터라 나는 아내와 아들, 며느리인 새아기를 동반하여 참석했었다. 대전에서 부부동반 포함 64명, 서울에서 가족동반 포함 72명, 은사님들 여섯 분, 총 142명이 모인 가운데 뽀빠이 이상룡 친구의 사회로 성대하게 치러졌었다.
고교 재학시절당시 경희대학교에서 실시한 전국고등학교 학력경시대회에서 대전고등학교가 1등을 차지한 일이 있었다든가, 한때는 서울대학교에 최고 150명 선까지 합격하였다든가 하는 사항 등은 차치(且置)하고라도, 40년 전에 졸업하여 교문을 함께 나온 고등학교 동창생들이 40년 전에 담임을 맡으셨던 은사(恩師)님들을 모시고 한 자리에 모여서, 세월의 징검다리를 뛰어넘어 그 옛날 추억의 학교시절로 되돌리는 시간여행을 펼칠 수 있었다는 것!
반별로 담임선생님을 모시고 다정하게 기념사진도 촬영하고, 남편과 함께 참석한 부인들이 모두 친구가 되어 흥겹게 노래 부르는 모습!
이 얼마나 흐뭇하고 뿌듯한 정경인가.
공교롭게도 직계 가족을 동반한 경우는 나 혼자였지만, 그날 그 자리에 참석했었던 아들과 새아기에게 이 아버지의 출신 고등학교를 자신 있게 명문(名門) 이라고 호칭(呼稱)함에 결코 지나침이 없다는 사실을 수긍(首肯)할 것으로 믿는다.] 를 졸업하고도 대학에 진학하지 못 했을 때의 그 절망적인 좌절(挫折), 비애(悲哀), 열등감(劣等感), 자격지심(自激之心)으로 뒤엉킨 울분(鬱憤)이 마침내 한(恨)이 되었던, 그러나 40대 중반에 내 실력(고등학교 졸업증명서, 성적증명서 등의 구비서류를 떼기 위하여 당시 대전에 계셨던 장모님께서 모교(母校)에 가셨을 때, 그때의 담당직원이 ‘사위님 되시는 분이 공부를 참 잘 하셨네요. 우등상도 타시고...’ 하며 칭송을 들었다면서 매우 좋아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으로 야간 대학에 진학하여 4년의 전 과정을 마치고, 역시 정식으로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대학원 정규과정을 이수(履修)하고 행정학 석사학위(碩士學位)를 취득함으로써 다소나마 그 한을 달랠 수 있었다.
이제 살아온 날, 60년의 세월. 삶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었던가.
그 꿈을 이룬다는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苦痛)과 해악(害惡)을 끼치는가 하면, 마침내는 손가락질 받는 존재로 전락(轉落)하는 모습들.
많은 재물을 모을 줄만 알았지 훌륭하게 쓸 줄을 모르고 남의 입에 오르내리다가, 마침내는 혈육(血肉)간에 아귀다툼 싸움질로 편한 날 없는 그 실패한 삶의 모습들.
자신의 지위(地位)나 부(富), 그 허울에 싸여서 교만(驕慢)하고 인색(吝嗇)하며 오히려 자신의 참 모습을 잃어버리고 허둥대다가 주위의 빈축(嚬蹙)을 사는 사람들.
출세하고 성공한, 혹은 부자가 된 나의 모습일 수도 있다.
비록 소시민(小市民)으로서 살아왔지만, 그때 그 자리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서의 제몫을 다하여 주변사람들로부터도 충분히 인정을 받고, 또 그러한 역할이 그 조직에, 사회에, 나아가서는 국가에, 또한 다른 사람의 삶에 조금이라도 기여(寄與)한 바가 되었다면, 그것으로 보람을 삼고자 한다.
집안의 가장(家長)으로서, 아내에겐 지아비로서, 아이들에겐 아버지로서, 훌륭하진 못하나마 부족함이 없도록 가정에 충실한 ‘나’가 되고자 때로는 막노동도 마다않고 열심히 살아왔으며, 잘했든 못했든 아이들이 곧고 올바르게 성장하여 스스로 저희의 삶을 선택하여 새 출발을 하였고, 비록 그것이 아이들을 향하여 한 말이지만 아내의 입에서 ‘행복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음에, 나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기본적인 책무(責務)는 마무리했다는 홀가분함으로 마음이 편하다.
이제 나에겐 어디에나 내가 좋아하는 산이 있고, 언제나 흉금(胸襟)을 털어놓고 마주할 수 있는 좋은 벗들이 있거늘, 노년(老年)의 삶이 이만하면 흡족하지 아니한가.
*6 아내에게
'나를 낳아 길러준 이는 부모님이지만,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는 오르지 아내의 덕분(德分)이다’라고 평소에도 말해왔었다. 말없이 헌신(獻身)과 희생(犧牲)을 아끼지 아니한 아내의 깊은 정(情)에 고개를 숙인다.
항상 나보다 착하고 맑은 심성(心性)과 지혜(智慧), 그리고 넓은 아량(雅量)으로 훌륭하게 가정을 가꾸면서, 아이들을 바르고 곧게 성장할 수 있도록 묵묵히 자신을 태워온 아내.
이제 아이들도 각기 좋은 배필(配匹)을 만나, 스스로 독립하여 저들의 삶을 성실하게 펼쳐가고 있다. 그 모든 터전과 밑거름이 되어준 아내가 언제나 고마울 뿐이다.
때로는 아내의 조언(助言)을 따르지 아니하여 큰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이런 저런 일로 속도 많이 썩힌 일, 내가 잘 한 일 보다는 잘 못한 일이 더 많은 것 같아 늘 미안한 생각을 하면서도, 잘 실천하지 못한 점, 단지 용서를 구할밖에 없다.
너무 이기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할 수 있다면 아내의 눈길아래 내가 먼저 죽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러한 내 마음을 아내 역시 알아 줄 것으로 믿는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내가 바라고 기원하는 제일의 소원은 아내가 건강하게 나보다 오래 사는 일이다.
*7. 아이들에게
너희들에겐 평소 대화를 나누면서 얘기 했던 것 들, 때로는 특별히 반복하여 강조하였던 것들, 또 아버지나 어머니의 살아온 실제의 모습들을 보면서 그때그때 배우거나 혹은 버려야 할 것들을 나름대로 터득(攄得)하였으리라 믿는다.
굳이 하고픈 말이 있다면, 이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바로 ‘가정(家庭)’이라는 생각이다.
삶의 터전이요, 보금자리이자, 둥지가 아니던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편안한 곳. 행복이 피어나는 곳.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성어(成語)가 과연 허언(虛言)이 아니더라.
서로 존중(尊重)하면서 이해(理解)와 양보(讓步)로, 세상에서도 지는 것이 진정한 승리(勝利)일 때도 있지만, 가정에서만은 그것이 곧 모두의 승리가 된다는 것을!
나는 너희(딸 은영, 사위 형석, 외손자 정도, 아들 한욱, 새아기 성희)가 있어 내 삶이 풍요(豊饒)하고, 나의 인생에 진정한 보람을 느낀다.
나는 이제까지의 삶. 이 자체만으로 만족하며, 내 나이 29세 때 향년 62세로 세상을 떠나신 나의 어머니(너희들에겐 할머니)께 효도를 다하지 못한 깊은 슬픔 말고는 특별한 여한(餘恨)이 따로 없구나.
천둥번개를 동반하여 비바람이 몰아치거나, 때로는 눈보라가 휘몰아칠 때에도, 그 구름 위에는 언제나 따스한 해님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세상의 그 어떤 고통이나 슬픔, 또는 기쁨조차도 그 모든 것은 흐르는 세월(歲月)이 언젠가는 말해 줄 거란 사실을 꼭 기억(記憶)하여주기 바란다.
2003년 6월 9일.
내가 태어난 달(6월) 60년을 맞으며,
용인 죽전에서 趙 重 鎬
내가 이렇게 건강하고 멀쩡한 상태에서 유언장을 쓴다는 사실이, 죽음에 대하여 너무 쉽게 생각하는, 어쩌면 막연한 관념적(觀念的)인 감상(感想)에 젖은 경박(輕薄)한 행위일 수도 있음을 잘 안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지를 나 자신 알 수 없었음과 같이 죽음 또한 나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 한, 언제 어떻게 닥쳐올는지를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기에 한 인간으로 태어나 살다가 떠날 즈음에 언젠가는 한 번 남겨야 할 말이 있다면 미리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이 유언장을 쓰게 되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그것도 한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 지금 이 순간까지도 건강하게 존재하여 이렇게 유언장을 쓸 수 있다는 것에 무한히 감사한다.
날 낳아주시고 키워주시고 사랑해주신 부모님께, 특히 어머님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고(最高)의 존경(尊敬)과 숭모(崇慕)의 정(情)을 무릎 꿇어 바치고 싶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마침내 그 삶을 마감할 때면, 어찌 미련(未練)과 애착(愛着), 회한(悔恨)과 후회(後悔)가 없겠는가.
나 또한 그 예외(例外)일 수는 없음을 잘 알고 있으며, 설령 다시 태어나 새로이 산다고 해도, 역시 나 스스로에 대하여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갈 것이란 자신(自信)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살고 있는 지금 오늘 이 현재의 삶 그 자체를 완벽하게, 다가오는 내일(來日)의 삶, 그 역시 나 자신 후회 없는 온전한 삶을 영위(營爲)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터에, 어찌 다시 사는 그 긴 삶인들 이보다 더 나은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오늘의 삶에 충실하여 그 의미를 찾고, 가벼이 떠날 수 있도록 이젠 버리고 비우는 마음으로 홀가분하게 자유를 누리고 싶을 뿐이다.
때문에 나는 나의 지난날이 어떠하였고 그 결과 나의 현재가 어떠한 것이든 그것의 성패(成敗)나 지닌 것의 많고 적음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에 스스로 자족(自足)하면서 남은 삶을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보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나는 살아오면서 차마 말할 수 없이 부끄럽고 파렴치한 과오를 범한 일도 있고,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굴복(屈服)할 밖에 없을 때에는 나 자신(自身)이 비굴(卑屈)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으며,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그 자괴감(自塊感)으로 괴로워하면서 숱한 날들, 잠 못 이룬 적도 있었다.
또한 윤리(倫理)나 도덕률(道德律)의 엄격한 측면에서 결코 떳떳하거나 자유로울 수 없는 자신의 한계(限界)를 아전인수(我田引水)식으로 스스로를 합리화(合理化)하여온 이중적(二重的)이고 위선적(僞善的)인 인격(人格)의 흠결(欠缺)도 있어왔다.
다만, 나 자신이 그랬던 아니면 다른 사람의 경우를 보고 느낀 경우였던,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는 경험적 사례만큼은 결코 또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실제로 평생 동안 지켜온 것도 있고 대체로 그 방향만큼은 흩뜨리지 아니하려는 노력을 지금도 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상황 어떤 경우에도 언제나 온당한 나’일 수는 없을 것이며, 다만 죽는 날 까지 나 스스로를 돌아보며 ‘온당한 나’로 살 수 있도록 노력하련다.
나는 사회적으로 크게 이룬 것도 없고, 경제적으로 많은 재물을 모으지도 못했다.
말하자면 사회통념상(社會通念上)의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성공(成功)하지 못한 보통의 소시민(小市民)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국가공무원(세무공무원)으로서의 10년, 통일원 기획예산실1년, 학교법인 선인학원(인천대학교 학교법인) 총무책임자 7년, 레이크사이드골프장 경리책임자 5년, 그리고 공인중개사로서 부동산중개업 직영 5년, 한 때의 공백기간을 거쳐서 지금은 타인이 운영하는 공인중개사사무실에 나의 자격증을 활용, 함께 일하고 있다.
나는 비교적 정직하고 성실하게 항상 나에게 주어진 소임에 최선을 다하였으며(근무한 곳마다 1회 이상 포상 및 모범중개업소 표창), 그만큼의 가시적(可視的)인 성과를 거양(擧揚)하였다. 또 윗사람이나 동료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중에도 잘못된 사례(事例)에 대하여는 과감하게 시정(是正)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비록 상관(上官)이라 해도 위법부당(違法不當)한 지시나 명령은 분명한 자세로 거부한 경우도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지방으로의 좌천(左遷/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여 훗날 원상회복을 하였지만), 마침내는 두 번이나 직장을 떠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우여곡절(迂餘曲折)이 많았던 이러한 삶의 과정은 나 자신은 물론 아내와 가족들에게도 현실적인 큰 고통(苦痛)을 겪게 하였으며, 가족들에겐 나에 대한 불만(不滿)의 요인(要因)이 되게도 하였다.
나는 때때로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게 될 때면, 그때 굳이 그렇게까지 하여야만 했던가? 적당히 굽히고 타협할 수 도 있었는데...하며 스스로 자문(自問)할 때도 있다.
그러나 힘 있는 자에 아첨(阿諂)하여 굴종(屈從)하지 아니하고, 부정(不正)한 일에 야합(野合)하지 아니하고, 이익(利益)을 좇아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도 아니하면서 ‘나 스스로를 지키면서 산다는 것’ 그 길은 험난하였지만, 그래도 나의 신념(信念)이나 양심(良心)에 비추어 언제나 나 자신 떳떳할 수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훗날, 내 인생역정(人生歷程)에서 심적(心的)으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마지막 직장(골프장)에서 그 인고(忍苦)의 세월, 더 이상 가족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하여 철저하게 '나‘를 죽이고 또 죽이며 때로는 홀로 눈물을 삼키면서 감내(堪耐)했던 나에게, 그즈음 다 성장한 아들딸들이 따뜻한 위로를 해주면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 어떠한 선택을 하셔도 존중하겠노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었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지난날들 직장문제로 가족들에게 준 고통에 대한 보속(補贖:죄를 짓는데 대한 나쁜 결과를 보상함)과 해방(解放)된 마음으로 마지막 직장을 미련 없이 정리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대로 그 곳에 남아있었다면, 나의 지위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지금보다 훨씬 더 윤택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지위나 돈이 진정한 ‘나’의 모습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진정한 ‘나’의 삶을 가질 수 있게 인정하고 격려해준 가족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언제 어떤 장소에 어떤 모습으로 가더라도 누구에게나 당당할 수 있는, 다만 깍듯이 예의를 다 하면 그뿐 그 누구에게도 비굴(卑屈)한 웃음을 흘리지 않아도 되는, 굳이 나 자신의 실상(實像)을 과장(誇張)하고 뽐내거나 가식(假飾)이 필요 없는, 서로 고고(孤高)한 척 견주고 눈치 보면서 허례허식의 틀에 구속되기보다는, 실제 있는 그대로 편안하고 자유로운, 한 마디로 거리낌 없는 삶의 여유(餘裕), 딱히 남들이 그렇게 부러울 것도 없는 삶이라면 뭐가 그리 안타까울 것인가.
나를 가리켜 ‘좋은 사람’이란 말을 들을 자신은 없지만, 그러나 ‘나쁜 놈’이라는 소리는 듣지 않으리라 목표를 삼고 살아왔다.
나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속인다거나,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害)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으려 극구 노력하였으며, 어떠한 약속이든 그것이 큰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내 스스로 한 약속은 꼭 지키고자 하였다.
능산회(대전고등학교 42회 산악회) 산행모임에 내 개인적으로 참석한 횟수가 현재까지 대략 260여회 쯤 되지만 그 만나는 시간에 늦었다거나, 살아오면서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에 내가 늦은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 수를 헤아릴 정도이니까.
다만 이행할 수 없는 특별한 상황이 발생한 경우에는 반드시 사전에 상대방에게 그 사유를 밝히고 이해를 구하곤 했다.
별스럽게 내 자랑을 늘어놓으려는 것이 아니고, 그만큼 나로 하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하며 살아왔다는 실증적인 한 예를 들어본 것이다.
무슨 유서(遺書)가 이리 장황하고 말이 많은가?
여기저기 널려놓은 부동산(땅, 상가, 주택)에, 금융자산에, 귀금속, 골동품, 고가의 미술품 등등, 헤아리기에도 대갈통 아플 만큼 재산이나 많다고 하면 그걸 조목조목 구분 예시하여 누구누구에게 어찌어찌한다는 둥, 그야말로 초미(焦眉)의 관심사로 이어지면서 길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런 얘기는 하나도 없이 웬 흰소리가 그리도 길까 조급해하지 말기 바란다.
이 세상 모든 재물(財物)들은 사는 동안 잠시 빌린 것일 뿐 나죽을 때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는 것, 죽어가면서 까지 온통 그 얘기로 채운다는 건 너무 허망(虛妄)하지 아니한가? 또 많은 재산 남길 거 없는 놈이라 해서 유언조차 많이 할 수 없다면 다시 못 올 이 세상 떠나는 놈 섭섭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죽어갈 때에는 긴 말도 하기 어려울 터, 또 맥없이 들어 누워서 들릴 듯 말 듯 이런 저런 얘기 늘어놓는 모습이 얼마나 애처롭고 처량하겠는가.
그래서 당당하게 하고픈 말 실컷 하기 위하여 ‘미리 써보는 유언장’ 아닌가.
*1. 내가 죽은 후에는 화장(火葬)하여 그야말로 한줌(아주 小量)의 재로 어느 산이든, 산에 뿌려지고 싶다. 가능하다면 소나무아래 뿌려지기를 바란다.
이 세상에 와서 살다 가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인데, 죽은 자가 산 자보다 더 많은 땅을 차지하고, 묘를 쓰기 위하여 그 많은 초목(草木)들을 파내고 베어내는 것, 자연과 환경을 훼손하는 것은 살아남는 자손을 생각해서라도 할 일이 아니다.
많은 재산을 물려주려고 발버둥치느니, 좋은 자연을 물려주는 것이 진정 자손을 사랑하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또 살기 바쁜 세상에 때마다 철마다 벌초(伐草)다, 성묘(省墓)다 어찌 다 챙길 수 있단 말인가.
만약 나에게 영혼이 있다면, 푸른 솔의 거름이 되어 시린 겨울바람에도 의연하게 청청하고, 더운 여름엔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서 오가는 이의 쉼터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원하기만 하면 고향 선산(先山)에 묻힐 자리가 있다고는 하지만, 내 자리만큼의 푸른 초목(草木)이 우거진 그대로 새들의 둥지가 되고, 그만큼 세상의 공기를 조금이라도 맑게 하는데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2. 장례는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주기를 바란다.
나는 특별히 믿는 종교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을 모르 듯, 이 세상을 떠난 후의 일을 어찌 알겠는가?
우주만물(宇宙萬物)이 신(神)의 섭리(攝理)와 자연(自然)의 이치(理致)에 따라 지구(地球)가 생겨난 지 45억년 전, 인류의 탄생이 100만년 전, 그 생성소멸(生成消滅)과 부침(浮沈)을 거듭하여 왔거늘, 내 어찌 ‘믿음’ 하나의 증표(證票)만으로 현세(現世)에서도 복을 받고 내세(來世)에도 천국에 이르기를 바랄 것인가.
예수든, 부처든, 이슬람이든, 나는 인류의 성인(聖人)으로 지각(知覺)하며 그 훌륭한 가르침엔 경외(敬畏)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지만, 천국(天國)과 극락(極樂)을 담보받기 위하여 그 교리(敎理)에 얽매이고 속박(束縛)받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
나는 자유인인 나대로의 뜻대로 살고 싶다. 불과 수 천 년 전에 나타난 그 성인(聖人)들이 복음(福音)을 전파하기 전, 그 경전(經典)조차 없었던 시절의 옛 조상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천국과 지옥의 택일을 강요할 뿐, 중간지대는 왜 없을까?
내가 죽은 후의 나에 대하여는 신(神)의 뜻이든, 자연(自然)의 이치(理致)이든, 기타 그 어떤 척도(尺度)에 의하여든 사후세계(死後世界)의 법도(法度)에 따를 뿐이다.
다만, 신앙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여 인류에 공헌한 슈바이처박사, 테레사수녀.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 소외받는 이들을 위하여 참 사랑을 실천한 신앙인들, 호국불교(護國佛敎)로 나라가 어려울 때 자진하여 목숨을 바쳐서 싸웠던 승려들, 사랑과 보시(普施)를 통하여 남을 돕고, 신앙의 참 진리를 터득하여 맑고 고매한 정신으로 착하고 선하게 살아가는 신앙인들을 그 종교에 관계없이 나는 존경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위대한 헌신(獻身)과 희생(犧牲), 맑고 고운 착한 삶이야말로 신실한 신앙의 힘이 아니고서는 발현(發現)될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두운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는 신앙의 가르침과 그 힘을 부정하지 아니한다.
이 부분에 많은 언급을 하는 것은 내 나름대로의 종교관을 밝히는 과정에서, 나 자신 종교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하여 신실한 신앙인들에게까지 혹시 누(累)가 되지 않을까 저어해서이다.
부부가 아르바이트(Arbeit)를 하며 캐나다 토론토대학캠퍼스의 선교활동(宣敎活動)을 위하여 현재 선교사(宣敎師)로 살고 있는 내 딸 은영 그리고 사위 형석 군.
집도 살림도 아무 것도 없으면서, 그러나 세상의 필요한 것을 모두 가진 것처럼 귀여운 아기(正道/크리스토퍼)와 항상 밝고 맑게 웃음을 잃지 아니하고 늘 감사하면서 사는 모습. 외국에서의 아르바이트가 그리 쉬운 일이던가!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언제나 밝은 목소리, 혹시나 걱정스러워 어찌 사는지 물을라치면 모든 것이 충족하여 필요한 것이 없노라. 정말 어려운 일이 있을 땐 부모님께 말씀드리겠노라 하면서 이대로도 너무 행복하고, 감사한다는 아이들.
욕심 없이 때 묻지 아니한 그 마음이 갸륵하고, 나 또한 행복을 느끼게 한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고, 만나고 싶을 때 만나볼 수 없는 그 안타까움이 때로는 야속할 때도 있지만, 딸이 이 아버지의 삶을 존중했듯이 나도 딸이 선택한 삶과 그 신앙생활을 존중한다.
*3. 의학적으로 완전치료나 소생(蘇生)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이 내려졌을 경우엔, 절대로 내 생명을 기계에 의존하여 연장시키지 말라.
오직 자연사(自然死)를 원할 뿐, 차라리 안락사(安樂死)를 시켜다오!
만에 하나라도, 나의 병이 금방 죽음에 이르지는 아니하되 주변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줄 염려가 있거나, 가족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치매, 기타 등등)에 이르러 의술(醫術)로는 그 치유(治癒)가 불가능하다고 판정이 내려졌을 경우엔, 지체 없이 일정한 격리수용시설에 의탁하라.
의료기기에 의하여 단지 숨만 쉬더라도 아직은 생존(生存)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족들에게는 다소 위안이 될는지는 모르되, 그러나 어차피 한 번 죽는 몸이 아닌가!
피차(彼此)에 고통의 연장일 뿐인, 내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그런 쓸모없는 생에 매달려 버둥거리는 비참한 삶은 정말 싫다. 차라리 안락사(安樂死)가 백번 낫다.
또한 내가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위해(危害)를 끼치는 병의 경우라면, 본래의 나는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요 다만 그 육신(肉身)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인즉, 즉시 격리수용시설에 보내달라는 것이다. 가족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공연한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아니하리라.
만약, 특별한 상황에서는 차라리 나의 명운(命運)을 나 스스로 결단하는 일이 혹시 있더라도 나를 탓하지 말아다오.
*4. 재산이라야 집하나 밖에 없지만, 그 사후처리는 아내의 뜻을 따를 것이다.
현재의 사는 집을 줄여서 한 단계 적은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친 상태이다. 가능하다면 자녀들에게 부양(扶養)의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옮겨갈 아파트는 아내의 명의로 했다.
명의야 무슨 상관이겠냐 만, 평생 자기이름으로의 재산이라곤 가져보지 못했던 아내에 대한 조그마한 배려인 동시에, 혹시 내가 죽은 이후에 조금이라도 남는 것이 있다면 그 처분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아내에게 위임한다는 뜻임을 실행한 것이다.
그 외의 어떠한 경우라도, 아내의 뜻을 곧 나의 결정으로 대신한다.
*5. 가족들에게
내가 국민학교 시절(1956년 5월), 대통령후보였던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선생이 당시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선거전을 치르다가 급서(急逝:갑자기 세상을 떠남)한 사건이 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분이 서거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나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어린 나이에 우국충정(憂國衷情)이란 말이 어울릴는지 모르는 일이로되 젊은 날 한 때, 나 역시 드높은 이상(理想)과 청운(靑雲)의 꿈을 품은 적도 있었다.
어린시절부터 성장기까지 끼니도 제대로 못 찾아먹을 만큼 헐벗고 굶주리며 가난했었다는 쾌쾌 묵은 얘기는 그만두기로 하자. 우리세대 농촌출신들 대부분의 공통된 레퍼토리(repertory)일 테니까.
이상(理想)의 나래를 한껏 부풀려 다듬어 보았던 터전, 당시 전국에서 손꼽을 정도의 명문 고등학교 [지난 5월24일 오후 6시 대전-금산 가는 길 추부터널 근처에 있는 만인산 푸른학습원에서 대전고등학교 제42회 동기동창들의 졸업40주년기념모임 행사가 있었다.
가족동반을 권장했던 터라 나는 아내와 아들, 며느리인 새아기를 동반하여 참석했었다. 대전에서 부부동반 포함 64명, 서울에서 가족동반 포함 72명, 은사님들 여섯 분, 총 142명이 모인 가운데 뽀빠이 이상룡 친구의 사회로 성대하게 치러졌었다.
고교 재학시절당시 경희대학교에서 실시한 전국고등학교 학력경시대회에서 대전고등학교가 1등을 차지한 일이 있었다든가, 한때는 서울대학교에 최고 150명 선까지 합격하였다든가 하는 사항 등은 차치(且置)하고라도, 40년 전에 졸업하여 교문을 함께 나온 고등학교 동창생들이 40년 전에 담임을 맡으셨던 은사(恩師)님들을 모시고 한 자리에 모여서, 세월의 징검다리를 뛰어넘어 그 옛날 추억의 학교시절로 되돌리는 시간여행을 펼칠 수 있었다는 것!
반별로 담임선생님을 모시고 다정하게 기념사진도 촬영하고, 남편과 함께 참석한 부인들이 모두 친구가 되어 흥겹게 노래 부르는 모습!
이 얼마나 흐뭇하고 뿌듯한 정경인가.
공교롭게도 직계 가족을 동반한 경우는 나 혼자였지만, 그날 그 자리에 참석했었던 아들과 새아기에게 이 아버지의 출신 고등학교를 자신 있게 명문(名門) 이라고 호칭(呼稱)함에 결코 지나침이 없다는 사실을 수긍(首肯)할 것으로 믿는다.] 를 졸업하고도 대학에 진학하지 못 했을 때의 그 절망적인 좌절(挫折), 비애(悲哀), 열등감(劣等感), 자격지심(自激之心)으로 뒤엉킨 울분(鬱憤)이 마침내 한(恨)이 되었던, 그러나 40대 중반에 내 실력(고등학교 졸업증명서, 성적증명서 등의 구비서류를 떼기 위하여 당시 대전에 계셨던 장모님께서 모교(母校)에 가셨을 때, 그때의 담당직원이 ‘사위님 되시는 분이 공부를 참 잘 하셨네요. 우등상도 타시고...’ 하며 칭송을 들었다면서 매우 좋아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으로 야간 대학에 진학하여 4년의 전 과정을 마치고, 역시 정식으로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대학원 정규과정을 이수(履修)하고 행정학 석사학위(碩士學位)를 취득함으로써 다소나마 그 한을 달랠 수 있었다.
이제 살아온 날, 60년의 세월. 삶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었던가.
그 꿈을 이룬다는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苦痛)과 해악(害惡)을 끼치는가 하면, 마침내는 손가락질 받는 존재로 전락(轉落)하는 모습들.
많은 재물을 모을 줄만 알았지 훌륭하게 쓸 줄을 모르고 남의 입에 오르내리다가, 마침내는 혈육(血肉)간에 아귀다툼 싸움질로 편한 날 없는 그 실패한 삶의 모습들.
자신의 지위(地位)나 부(富), 그 허울에 싸여서 교만(驕慢)하고 인색(吝嗇)하며 오히려 자신의 참 모습을 잃어버리고 허둥대다가 주위의 빈축(嚬蹙)을 사는 사람들.
출세하고 성공한, 혹은 부자가 된 나의 모습일 수도 있다.
비록 소시민(小市民)으로서 살아왔지만, 그때 그 자리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서의 제몫을 다하여 주변사람들로부터도 충분히 인정을 받고, 또 그러한 역할이 그 조직에, 사회에, 나아가서는 국가에, 또한 다른 사람의 삶에 조금이라도 기여(寄與)한 바가 되었다면, 그것으로 보람을 삼고자 한다.
집안의 가장(家長)으로서, 아내에겐 지아비로서, 아이들에겐 아버지로서, 훌륭하진 못하나마 부족함이 없도록 가정에 충실한 ‘나’가 되고자 때로는 막노동도 마다않고 열심히 살아왔으며, 잘했든 못했든 아이들이 곧고 올바르게 성장하여 스스로 저희의 삶을 선택하여 새 출발을 하였고, 비록 그것이 아이들을 향하여 한 말이지만 아내의 입에서 ‘행복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음에, 나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기본적인 책무(責務)는 마무리했다는 홀가분함으로 마음이 편하다.
이제 나에겐 어디에나 내가 좋아하는 산이 있고, 언제나 흉금(胸襟)을 털어놓고 마주할 수 있는 좋은 벗들이 있거늘, 노년(老年)의 삶이 이만하면 흡족하지 아니한가.
*6 아내에게
'나를 낳아 길러준 이는 부모님이지만,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는 오르지 아내의 덕분(德分)이다’라고 평소에도 말해왔었다. 말없이 헌신(獻身)과 희생(犧牲)을 아끼지 아니한 아내의 깊은 정(情)에 고개를 숙인다.
항상 나보다 착하고 맑은 심성(心性)과 지혜(智慧), 그리고 넓은 아량(雅量)으로 훌륭하게 가정을 가꾸면서, 아이들을 바르고 곧게 성장할 수 있도록 묵묵히 자신을 태워온 아내.
이제 아이들도 각기 좋은 배필(配匹)을 만나, 스스로 독립하여 저들의 삶을 성실하게 펼쳐가고 있다. 그 모든 터전과 밑거름이 되어준 아내가 언제나 고마울 뿐이다.
때로는 아내의 조언(助言)을 따르지 아니하여 큰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이런 저런 일로 속도 많이 썩힌 일, 내가 잘 한 일 보다는 잘 못한 일이 더 많은 것 같아 늘 미안한 생각을 하면서도, 잘 실천하지 못한 점, 단지 용서를 구할밖에 없다.
너무 이기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할 수 있다면 아내의 눈길아래 내가 먼저 죽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러한 내 마음을 아내 역시 알아 줄 것으로 믿는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내가 바라고 기원하는 제일의 소원은 아내가 건강하게 나보다 오래 사는 일이다.
*7. 아이들에게
너희들에겐 평소 대화를 나누면서 얘기 했던 것 들, 때로는 특별히 반복하여 강조하였던 것들, 또 아버지나 어머니의 살아온 실제의 모습들을 보면서 그때그때 배우거나 혹은 버려야 할 것들을 나름대로 터득(攄得)하였으리라 믿는다.
굳이 하고픈 말이 있다면, 이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바로 ‘가정(家庭)’이라는 생각이다.
삶의 터전이요, 보금자리이자, 둥지가 아니던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편안한 곳. 행복이 피어나는 곳.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성어(成語)가 과연 허언(虛言)이 아니더라.
서로 존중(尊重)하면서 이해(理解)와 양보(讓步)로, 세상에서도 지는 것이 진정한 승리(勝利)일 때도 있지만, 가정에서만은 그것이 곧 모두의 승리가 된다는 것을!
나는 너희(딸 은영, 사위 형석, 외손자 정도, 아들 한욱, 새아기 성희)가 있어 내 삶이 풍요(豊饒)하고, 나의 인생에 진정한 보람을 느낀다.
나는 이제까지의 삶. 이 자체만으로 만족하며, 내 나이 29세 때 향년 62세로 세상을 떠나신 나의 어머니(너희들에겐 할머니)께 효도를 다하지 못한 깊은 슬픔 말고는 특별한 여한(餘恨)이 따로 없구나.
천둥번개를 동반하여 비바람이 몰아치거나, 때로는 눈보라가 휘몰아칠 때에도, 그 구름 위에는 언제나 따스한 해님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세상의 그 어떤 고통이나 슬픔, 또는 기쁨조차도 그 모든 것은 흐르는 세월(歲月)이 언젠가는 말해 줄 거란 사실을 꼭 기억(記憶)하여주기 바란다.
2003년 6월 9일.
내가 태어난 달(6월) 60년을 맞으며,
용인 죽전에서 趙 重 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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