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잔재 청산과 민족혼 회복 김용구동문답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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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25 안병섭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 댓글 0건 조회 2,436회 작성일 2003-05-27 14:24본문
지금 사용하고 있는 ‘대전’이란 이름도 본래의 이름이 아닙니다. 대전의 본래 이름은 콩밭인 콩 태자 한밭 태전입니다. 1917년 일본인 다나까 이찌노스께田中市之助가 엮은 『조선대전발전지朝鮮大田發展誌』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총감 이토오 히로부미가 순종 황제를 수행하고 태전역을 지나다가, 이 곳의 지형이 웅위雄偉함을 보고, 차라리 ‘태전이라는 지명을 바꾸어 대전으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역설함에 따라 ‘태전’이 ‘대전’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지세地勢가 뛰어난 이 곳 이름 ‘太’ 자에서 점을 빼어 평범한 ‘大’ 자로 만든 것입니다. ‘太’ 자는 태조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국가를 창건한 창건군주에게만 주는 칭호 혹은 무로써 나라를 건국한 창건군주에 이어 동일 왕조에서 새로 혁명하여 나라명을 안바꾸고 그대로 계승한 실질적인 개창군주(태종)나 왕의 부왕 태상왕 등에서 보다시피 지엄하고 고귀한 대상에게 쓰이는 말입니다. 철학에서는 태극이라 하여 음양을 품고 이발되어 가장 작을 수 있고 동시에 가장 클 수 있는 성장에너지를 가진 현실태를 말합니다.
반면 ‘大’ 자는 단지 크다는 뜻밖에는 없습니다. 이등박문이 일본황실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말이라 하여 태전의 지명을 바꾸어 오늘날 대전으로 바뀌었으니 원래대로 하면 ‘대전’은 ‘태전’으로 바뀌어야 하며, 역사성이나 정명正名학상으로 봐도 ‘태전’이 바른 지명이므로 대전고교는 태전고교로 바뀌어야 옳을 것입니다. 일제가 대전고로 이름을 붙여 해방이후 1950년까지 그 전통을 다하고 51년부터 다시 1기로 붙여 사용한 것이 사실이라면(51년부터 앨범에 1기로 사용) 원래 그 이름도 태전으로 바뀌었어야 옳았다.
그러니 늦었지만 이등박문이 지은 대전이라는 용어를 바꾸어 태전고로 개명해야 한다. 황국신민의 국민학교 칭호도 결국 초등학교로 바뀌었듯이 대전, 대전중, 대전고는 당연히 태전, 태전중, 태전고로 바뀌어야 옳다. 중국의 선양(심양)도 일본이 봉천으로 바꾸었으나 모택동이 선양으로 다시 바꾸었고 레닌이 볼셰비키 혁명후 페테스부르그에서 바꾼 레닌그라드도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옐친 시대로 넘어오면서 민족주의자 소브챠크에 의해 원이름 페테스부르그로 원상복귀되었습니다. 일제 시대를 계승하는 고교 기수는 아무 역사 의식 없이 대세에 밀려 그냥 쓰고 있고 그냥 따라가고 있지만 민족정사와 민족혼을 깨닫고 보면 참으로 한심한 것입니다.
일제시대의 기수 30년을 빼고 순수한 기수만을 사용하자는 주장과 용기에 찬사를 보냅니다. 저도 뜻을 따라 25기로 사용합니다. 민족정기 수립. 이제는 대전고 동창회가 나설때입니다. 대전고 출신의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반민족적 이승만 동상 세우기에 찬성이나 하는 등 반민족 작태를 벌였음에도 역사혼에 눈뜬 동문 하나없이 비판하나없는 죽은 빈껍데기의 동창회로 전락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동창회에 누가 되고 민족사에 누가 되어도 오직 같은 동창이라 하여 이를 감싸고 돌 기만 할 뿐 뿐 누구도 이를 지적하지 않는 것은 민족적 차원에서 보면 동조내지 방관 방조의 범죄행위에 불과할 뿐입니다.
다음 자료글은 김용구 동문이 알고 싶다한 자료중의 참고답변 중 일부입니다.
<< 일제잔재 청산과 민족혼 회복 >>
金 三 雄
언제까지 잔재청산인가
3·1운동 75주년 기념을 맞아 열린 세미나에서 주제 발표를 하게 되어 보람스럽게 생각합니다.
내년이면 해방 반세기가 되는데 언제까지 우리는 일제잔재 청산문제를 논의하고 있어야 하는지, 참으로 답답하고 가슴아픈 일입니다. 일제가 남긴 잔재가 얼마나 뿌리깊고 광범위하면 강산이 변해도 다섯차례나 변할 세월동안 여전히 잔재청산 타령을 해야 하는지 자괴감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두가지 요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일제가 남긴 잔재의 뿌리가 그만큼 깊고 광범위하다는데 있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청산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사실 일제의 한국지배 35년은 세계식민지사상 일찌기 유례가 없을만큼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정신적, 물질적, 개인적, 국가적으로 모든 영역, 모든 분야에 걸쳐 수탈과 왜곡과 멸살을 당했습니다. 우리민족이 살아남고 강토가 보전된 것만도 다행이라 할만큼 가혹한 수탈체제였습니다. 따라서 그만큼 잔재가 많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한 인간에게도 나이 50이 되면 知天命의 연륜인 것과 같이 한 국가로서도 해방 반세기쯤 되면 과거 異族支配의 악몽을 씻고 민족혼을 회복하여 자주국가로써 자강불패할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知天命의 연륜인 오늘에서도 여전히 일제잔재 청산 문제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지구상의 많은 국가 가운데 유일한 분단국인 것처럼 식민지를 겪은 나라중에 유일하게 식민잔재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나라가 우리입니다.
우리역사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지적처럼 ‘혁명적인 정화’를 이루지 못한 민족입니다. 단재선생이 생존하였을 때의 역사도 그랬지만 그 이후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잔재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비롯, 이승만 독재·박정희·전두환·노태우씨 등 군사독재의 잔재에 대해서도 제대로 청산과 개혁을 단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승만 대통령의 실정으로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하고, 분단정권 수립에 급급하고, 장기독재를 자행했다고 지적합니다. 물론 이것은 적절한 지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여전히 군사독재의 잔재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선대들이 일제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만을 개탄하고 있습니다.
쿠데타, 혁명, 정변, 반정, 역성혁명, 개혁 등 그동안 우리역사는 있을 것은 다 있어 왔습니다. 유신도 있었고 정권교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재선생이 지적했듯이 ‘혁명적 정화’가 없다 보니 프랑스의 격언처럼 ‘바뀔수록 옛모습을 닮아가는’ 모습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친일잔재’ 운운합니다. 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에서 유신잔재 청산을 말할때 모 인사가 “유신잔재가 아니라 유신본당”이라고 말했듯이 그야말로 ‘친일잔재’가 아닌 친일본류가 그대로 해방정국을 장악하였고, 이들이 건국반세기를 주도하였습니다. 이들이 이승만정권과 군사정권에 인적·물적 토대를 마련해주면서 행정·사법·검찰·군부·정보·금융 등 모든 분야를 장악했습니다. 이들은 신판 세습제를 통해 친일독재 정권을 유지했고 분단체제를 강화하는 중추세력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친일매족의 본류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마당에 잔가지 몇 개 잘라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습니다. 그나마 잔가지도 제대로 전지(箭枝)해내지도 못했습니다. 반민특위가 친일세력에 의해 무참히 파괴된 이래 친일잔재는 다시 이 나라의 지배층으로 군림하게 된 것입니다.
과오처벌 않으면 되풀이된다.
친일파나 군사독재세력 등 민족반역자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지배층은 그때마다 묘한 논리를 전개해왔습니다. 해방후에는 그들의 행정력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는데, 요즘에는 국제경쟁력을 위해서라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민화합이라는 명분이 약방의 감초처럼 섞이기도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있었던 독일 뉘렌베르크의 법정에서는 “반역자들을 처벌하는 것이 부정이 아닐뿐 아니라 그들의 악행이 처벌되지 아니하고 방치된다는 것이야말로 부정”이라고 준엄히 선고했습니다.
전후 프랑스의 문예지 레 레트르 프랑세스는 나치협력자들의 숙정문제에 대해 “지난날 과오를 범한 자를 처벌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같은 과오를 반복하게 만든 원인이다. 따라서 어제의 범죄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를 고무시키는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독일의 폰 바이체커 대통령은 “과거에 눈을 가리고 있는 사람은 결국은 현재에 대하여도 장님이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역사학자 E.H.카아는 “역사에 의해서 체험적 교훈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미래의 진보가능성에 대해서 상실한 사회”라고 평가했습니다.
프랑스는 2차대전후 대독협력자들을 ‘조국에 대한 반역자’로 규정하고 4만 8천여명을 공직에서 추방하고 이 중에서 3만 8천여명에게 유죄선고를 내리고, 2천여명에게 사형선고를 했으며, 391명을 처형했습니다. 그들은 반역자들을 이토록 엄격하게 다스렸습니다. 민족정기를 세우고 사회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단 한 사람의 매국노·친일파를 처벌하지 못한 것과 비교하면 참으로 엄격한 정의의 실현이고 양식의 구현입니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독일, 베트남, 중국, 이탈리아, 벨기에 등 모든 나라가 민족반역자들을 처벌했습니다. 지금도 독일과 프랑스, 이스라엘에서는 이들 반역자들에 대한 처벌은 공소시효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구끝까지 그들을 추격하면서 체포하여 법정에 세웁니다.
얼마전 이스라엘에서는 온 나라가 바그너曲의 연주를 둘러싸고 한바탕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스라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반유태주의 선봉에 섰던 독일음악가 바그너의 曲을 연주하기로 결정하자 국회의원을 비롯한 국민들이 벌떼같이 일어난 것입니다. 1883년에 죽은 바그너는 사실 금세기의 잔혹했던 유태인 탄압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다만 100년도 더 지난 19세기에 그의 철저한 반유태주의적인 언행과, 독일 문화계에 유태인의 영향력이 높아지는 것을 비판한 글을 여러차례 쓴 적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유태인을 협량하다고, 과거사에 얽매여 음악예술을 외면하는 반문명국가라고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친일음악인 윤해영의 <선구자>가 지난해 대통령 취임식전 행사에서 연주되었고, 3·1절 행사때는 모 텔레비젼이 이 곡을 의미있게 방영했습니다. 심지어 8·15 광복절 전야에는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하루종일 이 곡이 방송되고 있었습니다. 독립기념관을 지으면서 일제 재료를 사용하고 기념관 앞 뜰에 일본산 무궁화를 심는 따위의 정신자세가 오늘 이땅의 현실입니다.
최근 공노명 주일대사가 일본문화 개방론을 펴서 국민을 놀라게 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국 대사가 아닌 한국정부의 대사가 이런 주장을 하게 된데 대해 참으로 놀랍고 분통한 국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을 보면 일본문화는 새삼스럽게 개방하고 닫히고 할 것도 없이 이미 들어올 것은 다 들어 왔습니다. 지금 이땅에서는 방송심의에 걸려 금지된 국내가요중 70%가량이 왜색이거나 일본의 것을 표절한 것으로 나타날 정도로 왜색가요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식민지 시대에는 엥까(演歌)를 들여와서 민족음악을 말살시켰는데 이제는 ‘가라오케’와 ‘뽕짝’이 들어와 국민정서를 해치고 민족음악을 도태시키고 있습니다.
일본의 종교 20여 종파가 들어와서 날로 세를 늘려가고 그 가운데는 일본쪽을 향해 요배를 드리고 일본식 독경을 하고 있을만큼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일본은 싫지만 일제는 좋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국민학교때부터 ꡔ닌텐도ꡕ전자오락을 즐기고 ꡔ드래곤볼ꡕꡔ시티헌터ꡕ만화를 보고 ꡔ마징가Zꡕ를 보면서 성장하여, 여대생은 물론 여고생들까지 ꡔ논노ꡕꡔ워드ꡕꡔ모아ꡕ 등 일본패션잡지를 끼고 다니는 학생이 부쩍 늘고 있습니다. 일본담배 ꡔ마일드 세븐 라이트ꡕ의 판매가 외제 담배 가운데 단연 수위를 차지하고, 일본의 상업위성방송의 시청률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습니다.
일본패션·일본노래·일본만화·일본술집 그리고 안방까지 침투한 위성통신, 일본 ꡔ고도리판ꡕ이 변형된 ꡔ고스톱 판ꡕ, 일본가전제품, 여자대학 주변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일본가요 복제 카세트 테이프, 부유층 동네에 흥청대는 비디오케 술집 등 일일히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왜색문화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파먹고 있습니다.
지식인들의 정신자세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는 묘한 ‘허위의식’같은 것이 존재합니다. 미국을 비판하면 진보적인 지식인 취급을 받는데 비해 일본을 비판하면 마치 조선조 말기 위정척사의 인물처럼 취급당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일본의 실체가 제대로 조명되지 않기 때문이거나 우리사회의 친일무드가 그만큼 광범위하다는 반증인 셈입니다.
핵문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의 핵문제에는 지나칠 만큼 민감합니다. 물론 어떤 이유로서도 북한의 핵보유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유사시 민족의 공멸을 가져올 재앙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을 조금만 밖으로 돌리면 북한핵의 위협에 못지않는 일본의 핵잠재력과 만나게 됩니다. 일본은 최근까지 1차분으로 프랑스에서 소형원자폭탄 1백 20개를 만들고도 남을 플루토늄을 반입했습니다. 미국의 ꡔ헤럴드 트리뷴ꡕ과 ꡔ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ꡕ지가 일본은 1993년부터 2천개의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플루토늄을 상시 보유하며 1995년에는 미국과 프랑스에 이어 세계 세번째의 핵연료 재처리 능력을 갖게 된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일본은 이미 고속증식로와 신형전환로 그리고 핵융합장치를 자체기술로 개발했습니다. 따라서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기술을 완벽하게 갖추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이미 확보한 핵기술 및 핵물질이 세계최첨단의 전자산업, 항공산업, 우주산업 등과 결합할때 핵의 무기화는 시간문제로 보입니다. 일본은 자체개발한 50여기의 단거리 미사일(SSM)을 보유하고 있어 운반수단까지 갖춘 상태인 것입니다.
일본은 미국과 러시아가 핵무기를 감축하여 세계적으로 플루토늄이 남아돌게 된 시기에 재빠르게 플루토늄 확보를 본격화하여 핵대국화로 치닫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일본 핵문제에 대해서 대부분이 침묵하다시피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얼마전 국회의장과 한일의원연맹 한국회장을 지내고 재산공개 파동으로 의원직을 물러난 金 모씨는 일본 산케이(産經) 신문과의 회견에서 “과거의 친일은 매국노였으나 현재의 친일은 애국자라고 확신한다”는 망언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 사람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지도층 인사라는 사람 가운데는 상당수가 일본에 대해 맹목적인 애정을 갖고서 일본의 재무장과 왜색문화의 범람에는 침묵합니다.
50대 이상의 식민지 세대는 옛날의 추억 또는 향수에서, 해방 후 세대는 막연한 동경과 무국적주의적 얼빠진 정신상태에서 왜색문화, 일본상품을 선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해 서울에서는 이른바 韓日心話會라는 복면의 단체가 일본의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일본의 한국통치를 찬양하는 등의 토론회를 벌였습니다. 한국에서 내노라하는 지식인, 학자들도 이런 복면의 단체에 가입하여 심포지움에 참가하여 일본제국주의 미화발언을 했습니다.
지금 현재 한국여성 4만여명이 일본에서 ‘취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취업’의 직종이 문제인 것입니다. 대부분이 일본인 상대의 접대부라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사회에서는 이 신판 정신대와 같은 일이 별로 문제시되지 않고 있습니다.
식민지 시대에는 우리의 젊은 누이들이 강제로 끌려 간데 비해 오늘의 젊은 여성들은 돈 벌기 위해 제 발로 현해탄을 건너간다는 차이점은 있을 지언정 이들의 행위는 그때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는 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국제화라는 이름으로, 인력송출이라는 구실로, 외화벌이라는 미명으로 이를 침묵하고 방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박정희정권때는 ‘관광기생’을 외화벌이라 하여 정책적으로 장려하였는데 요즘은 아예 이 ‘관광자원’이 일본 현지로 나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민족혼을 회복해야
민족혼을 회복해야 합니다. 아무리 친일잔재들이 기득세력으로 세습되고, 국제화·개방화라는 국제조류에 밀려 왜색문화·일제상품이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유혹하더라도 꿋꿋한 민족혼만 간직한다면 민족자존과 주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역사는 언제나 민족혼을 지켜온 양심세력, 주체세력에 의해 유구한 민족사가 전개되어 왔습니다. 고조선의 국선, 고구려의 조의선인, 신라의 화랑, 고려의 호록 또는 육두품, 조선의 사림·선비, 조선후기의 실학파, 망국기의 의병·독립운동가, 건국 이후의 민주인사·민족운동가·통일세력이 바로 진정한 양심세력이고 주체세력입니다.
우리의 양심세력은 망국시절에도 26년 동안이나 해외 임시정부를 세워서 항일독립전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임시정부가 있었고 백범 김구선생과 같은 지도자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장개석 총통과의 친분관계로 전후처리 과정에서 한국의 독립문제가 제기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여기 앉아계신 이현희 교수께서 지적하신 글을 읽었습니다.
이땅의 지배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외세에 예속되고 영합하여 권력유지와 보신에 연연했으나 우리의 민중, 양심세력은 항상 올곧은 민족혼을 간직하며 민족적 자주성을 지켜왔습니다. 지배층이 외세를 종주국으로 삼을때 민중은 중국인을 ‘되놈’, 일본인에는 ‘왜놈’, 러시아인에게는 ‘로스케’, 만주인에게는 ‘오랑케’, 미국인에게는 ‘양키’라고 부르면서 그들에의 동화를 거부하면서 민족적 자존과 주체성을 지켜온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무조건적으로 외국을 비판하고 외국인을 혐오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민중이 민족적 주체성과 독립성을 지켜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많은 민족이 강대국에 동화되거나 사라졌는데 이 좁은 땅의 우리민족만이 이토록 건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매국노의 재산찾기에 일본 친일파 재산환수 입법문제가 지지부진하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만년 권력의 요직에서 伏地不動하는 친일파, 군사정권의 잔당들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역사의 대세는 양심세력의 편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제잔재 청산과 민족혼을 지키기 위해 거창한 명분이나 과제 보다도 작은 일부터 시작해 나가야 합니다. 7년 장병에 5년 묵은 쑥대가 약이라면 이제부터라도 쑥을 묵혀야 합니다.
일제잔재 청산을 하지 못한 과거의 비판도 중요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시작은 언제나 늦지 않습니다.
그래서 국민학교 이름 고치기 운동이 시작되었고, 태전지명찾기 운동이 전개되고 있으며, 진주성 논개영정 폐출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일제가 민족정기 말살정책으로 우리의 명산 거암에 박아놓은 쇠말뚝 뽑기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새로운 민족운동은 이런데서부터 시작하여 점차 확대시켜 나가야 합니다. 친일파 사전을 펴내야 하고, 새로 독립지사 묘소를 만들어야 하고, 가짜 독립운동가를 가려내야 합니다. 독립유공자의 처우는 제대로 해야하고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민주인사들을 보훈대상으로 선정해야 하며 반독재투쟁에서 실종·의문사로 희생된 민주인사들의 진상을 밝히는 작업을 서둘러야 합니다.
임진왜란때 일본은 조총을 들고 왔고 병자수호조약때는 대포를 끌고 왔지만 지금 일본은 왜색문화와 일본제품으로 이 땅을 누비고 있습니다.
새롭게 전개되고 있는 국제화시대에 전시대적인 쇄국주의는 배척되어 마땅합니다. 하지만 민족주의적 특수성을 지키지 못하는 국제주의나 국제화는 자기소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도표가 모조리 깨져 나오고 있어 원본을 파일로 올리려 했으나 파일이 100킬로 바이트가 넘어 본인 홈페이지에 올린후 링크시켰습니다. 원본으로 보아야 자료를 볼 수 있을 겁니다.(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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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세地勢가 뛰어난 이 곳 이름 ‘太’ 자에서 점을 빼어 평범한 ‘大’ 자로 만든 것입니다. ‘太’ 자는 태조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국가를 창건한 창건군주에게만 주는 칭호 혹은 무로써 나라를 건국한 창건군주에 이어 동일 왕조에서 새로 혁명하여 나라명을 안바꾸고 그대로 계승한 실질적인 개창군주(태종)나 왕의 부왕 태상왕 등에서 보다시피 지엄하고 고귀한 대상에게 쓰이는 말입니다. 철학에서는 태극이라 하여 음양을 품고 이발되어 가장 작을 수 있고 동시에 가장 클 수 있는 성장에너지를 가진 현실태를 말합니다.
반면 ‘大’ 자는 단지 크다는 뜻밖에는 없습니다. 이등박문이 일본황실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말이라 하여 태전의 지명을 바꾸어 오늘날 대전으로 바뀌었으니 원래대로 하면 ‘대전’은 ‘태전’으로 바뀌어야 하며, 역사성이나 정명正名학상으로 봐도 ‘태전’이 바른 지명이므로 대전고교는 태전고교로 바뀌어야 옳을 것입니다. 일제가 대전고로 이름을 붙여 해방이후 1950년까지 그 전통을 다하고 51년부터 다시 1기로 붙여 사용한 것이 사실이라면(51년부터 앨범에 1기로 사용) 원래 그 이름도 태전으로 바뀌었어야 옳았다.
그러니 늦었지만 이등박문이 지은 대전이라는 용어를 바꾸어 태전고로 개명해야 한다. 황국신민의 국민학교 칭호도 결국 초등학교로 바뀌었듯이 대전, 대전중, 대전고는 당연히 태전, 태전중, 태전고로 바뀌어야 옳다. 중국의 선양(심양)도 일본이 봉천으로 바꾸었으나 모택동이 선양으로 다시 바꾸었고 레닌이 볼셰비키 혁명후 페테스부르그에서 바꾼 레닌그라드도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옐친 시대로 넘어오면서 민족주의자 소브챠크에 의해 원이름 페테스부르그로 원상복귀되었습니다. 일제 시대를 계승하는 고교 기수는 아무 역사 의식 없이 대세에 밀려 그냥 쓰고 있고 그냥 따라가고 있지만 민족정사와 민족혼을 깨닫고 보면 참으로 한심한 것입니다.
일제시대의 기수 30년을 빼고 순수한 기수만을 사용하자는 주장과 용기에 찬사를 보냅니다. 저도 뜻을 따라 25기로 사용합니다. 민족정기 수립. 이제는 대전고 동창회가 나설때입니다. 대전고 출신의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반민족적 이승만 동상 세우기에 찬성이나 하는 등 반민족 작태를 벌였음에도 역사혼에 눈뜬 동문 하나없이 비판하나없는 죽은 빈껍데기의 동창회로 전락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동창회에 누가 되고 민족사에 누가 되어도 오직 같은 동창이라 하여 이를 감싸고 돌 기만 할 뿐 뿐 누구도 이를 지적하지 않는 것은 민족적 차원에서 보면 동조내지 방관 방조의 범죄행위에 불과할 뿐입니다.
다음 자료글은 김용구 동문이 알고 싶다한 자료중의 참고답변 중 일부입니다.
<< 일제잔재 청산과 민족혼 회복 >>
金 三 雄
언제까지 잔재청산인가
3·1운동 75주년 기념을 맞아 열린 세미나에서 주제 발표를 하게 되어 보람스럽게 생각합니다.
내년이면 해방 반세기가 되는데 언제까지 우리는 일제잔재 청산문제를 논의하고 있어야 하는지, 참으로 답답하고 가슴아픈 일입니다. 일제가 남긴 잔재가 얼마나 뿌리깊고 광범위하면 강산이 변해도 다섯차례나 변할 세월동안 여전히 잔재청산 타령을 해야 하는지 자괴감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두가지 요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일제가 남긴 잔재의 뿌리가 그만큼 깊고 광범위하다는데 있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청산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사실 일제의 한국지배 35년은 세계식민지사상 일찌기 유례가 없을만큼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정신적, 물질적, 개인적, 국가적으로 모든 영역, 모든 분야에 걸쳐 수탈과 왜곡과 멸살을 당했습니다. 우리민족이 살아남고 강토가 보전된 것만도 다행이라 할만큼 가혹한 수탈체제였습니다. 따라서 그만큼 잔재가 많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한 인간에게도 나이 50이 되면 知天命의 연륜인 것과 같이 한 국가로서도 해방 반세기쯤 되면 과거 異族支配의 악몽을 씻고 민족혼을 회복하여 자주국가로써 자강불패할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知天命의 연륜인 오늘에서도 여전히 일제잔재 청산 문제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지구상의 많은 국가 가운데 유일한 분단국인 것처럼 식민지를 겪은 나라중에 유일하게 식민잔재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나라가 우리입니다.
우리역사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지적처럼 ‘혁명적인 정화’를 이루지 못한 민족입니다. 단재선생이 생존하였을 때의 역사도 그랬지만 그 이후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잔재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비롯, 이승만 독재·박정희·전두환·노태우씨 등 군사독재의 잔재에 대해서도 제대로 청산과 개혁을 단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승만 대통령의 실정으로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하고, 분단정권 수립에 급급하고, 장기독재를 자행했다고 지적합니다. 물론 이것은 적절한 지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여전히 군사독재의 잔재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선대들이 일제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만을 개탄하고 있습니다.
쿠데타, 혁명, 정변, 반정, 역성혁명, 개혁 등 그동안 우리역사는 있을 것은 다 있어 왔습니다. 유신도 있었고 정권교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재선생이 지적했듯이 ‘혁명적 정화’가 없다 보니 프랑스의 격언처럼 ‘바뀔수록 옛모습을 닮아가는’ 모습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친일잔재’ 운운합니다. 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에서 유신잔재 청산을 말할때 모 인사가 “유신잔재가 아니라 유신본당”이라고 말했듯이 그야말로 ‘친일잔재’가 아닌 친일본류가 그대로 해방정국을 장악하였고, 이들이 건국반세기를 주도하였습니다. 이들이 이승만정권과 군사정권에 인적·물적 토대를 마련해주면서 행정·사법·검찰·군부·정보·금융 등 모든 분야를 장악했습니다. 이들은 신판 세습제를 통해 친일독재 정권을 유지했고 분단체제를 강화하는 중추세력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친일매족의 본류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마당에 잔가지 몇 개 잘라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습니다. 그나마 잔가지도 제대로 전지(箭枝)해내지도 못했습니다. 반민특위가 친일세력에 의해 무참히 파괴된 이래 친일잔재는 다시 이 나라의 지배층으로 군림하게 된 것입니다.
과오처벌 않으면 되풀이된다.
친일파나 군사독재세력 등 민족반역자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지배층은 그때마다 묘한 논리를 전개해왔습니다. 해방후에는 그들의 행정력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는데, 요즘에는 국제경쟁력을 위해서라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민화합이라는 명분이 약방의 감초처럼 섞이기도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있었던 독일 뉘렌베르크의 법정에서는 “반역자들을 처벌하는 것이 부정이 아닐뿐 아니라 그들의 악행이 처벌되지 아니하고 방치된다는 것이야말로 부정”이라고 준엄히 선고했습니다.
전후 프랑스의 문예지 레 레트르 프랑세스는 나치협력자들의 숙정문제에 대해 “지난날 과오를 범한 자를 처벌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같은 과오를 반복하게 만든 원인이다. 따라서 어제의 범죄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를 고무시키는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독일의 폰 바이체커 대통령은 “과거에 눈을 가리고 있는 사람은 결국은 현재에 대하여도 장님이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역사학자 E.H.카아는 “역사에 의해서 체험적 교훈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미래의 진보가능성에 대해서 상실한 사회”라고 평가했습니다.
프랑스는 2차대전후 대독협력자들을 ‘조국에 대한 반역자’로 규정하고 4만 8천여명을 공직에서 추방하고 이 중에서 3만 8천여명에게 유죄선고를 내리고, 2천여명에게 사형선고를 했으며, 391명을 처형했습니다. 그들은 반역자들을 이토록 엄격하게 다스렸습니다. 민족정기를 세우고 사회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단 한 사람의 매국노·친일파를 처벌하지 못한 것과 비교하면 참으로 엄격한 정의의 실현이고 양식의 구현입니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독일, 베트남, 중국, 이탈리아, 벨기에 등 모든 나라가 민족반역자들을 처벌했습니다. 지금도 독일과 프랑스, 이스라엘에서는 이들 반역자들에 대한 처벌은 공소시효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구끝까지 그들을 추격하면서 체포하여 법정에 세웁니다.
얼마전 이스라엘에서는 온 나라가 바그너曲의 연주를 둘러싸고 한바탕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스라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반유태주의 선봉에 섰던 독일음악가 바그너의 曲을 연주하기로 결정하자 국회의원을 비롯한 국민들이 벌떼같이 일어난 것입니다. 1883년에 죽은 바그너는 사실 금세기의 잔혹했던 유태인 탄압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다만 100년도 더 지난 19세기에 그의 철저한 반유태주의적인 언행과, 독일 문화계에 유태인의 영향력이 높아지는 것을 비판한 글을 여러차례 쓴 적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유태인을 협량하다고, 과거사에 얽매여 음악예술을 외면하는 반문명국가라고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친일음악인 윤해영의 <선구자>가 지난해 대통령 취임식전 행사에서 연주되었고, 3·1절 행사때는 모 텔레비젼이 이 곡을 의미있게 방영했습니다. 심지어 8·15 광복절 전야에는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하루종일 이 곡이 방송되고 있었습니다. 독립기념관을 지으면서 일제 재료를 사용하고 기념관 앞 뜰에 일본산 무궁화를 심는 따위의 정신자세가 오늘 이땅의 현실입니다.
최근 공노명 주일대사가 일본문화 개방론을 펴서 국민을 놀라게 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국 대사가 아닌 한국정부의 대사가 이런 주장을 하게 된데 대해 참으로 놀랍고 분통한 국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을 보면 일본문화는 새삼스럽게 개방하고 닫히고 할 것도 없이 이미 들어올 것은 다 들어 왔습니다. 지금 이땅에서는 방송심의에 걸려 금지된 국내가요중 70%가량이 왜색이거나 일본의 것을 표절한 것으로 나타날 정도로 왜색가요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식민지 시대에는 엥까(演歌)를 들여와서 민족음악을 말살시켰는데 이제는 ‘가라오케’와 ‘뽕짝’이 들어와 국민정서를 해치고 민족음악을 도태시키고 있습니다.
일본의 종교 20여 종파가 들어와서 날로 세를 늘려가고 그 가운데는 일본쪽을 향해 요배를 드리고 일본식 독경을 하고 있을만큼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일본은 싫지만 일제는 좋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국민학교때부터 ꡔ닌텐도ꡕ전자오락을 즐기고 ꡔ드래곤볼ꡕꡔ시티헌터ꡕ만화를 보고 ꡔ마징가Zꡕ를 보면서 성장하여, 여대생은 물론 여고생들까지 ꡔ논노ꡕꡔ워드ꡕꡔ모아ꡕ 등 일본패션잡지를 끼고 다니는 학생이 부쩍 늘고 있습니다. 일본담배 ꡔ마일드 세븐 라이트ꡕ의 판매가 외제 담배 가운데 단연 수위를 차지하고, 일본의 상업위성방송의 시청률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습니다.
일본패션·일본노래·일본만화·일본술집 그리고 안방까지 침투한 위성통신, 일본 ꡔ고도리판ꡕ이 변형된 ꡔ고스톱 판ꡕ, 일본가전제품, 여자대학 주변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일본가요 복제 카세트 테이프, 부유층 동네에 흥청대는 비디오케 술집 등 일일히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왜색문화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파먹고 있습니다.
지식인들의 정신자세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는 묘한 ‘허위의식’같은 것이 존재합니다. 미국을 비판하면 진보적인 지식인 취급을 받는데 비해 일본을 비판하면 마치 조선조 말기 위정척사의 인물처럼 취급당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일본의 실체가 제대로 조명되지 않기 때문이거나 우리사회의 친일무드가 그만큼 광범위하다는 반증인 셈입니다.
핵문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의 핵문제에는 지나칠 만큼 민감합니다. 물론 어떤 이유로서도 북한의 핵보유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유사시 민족의 공멸을 가져올 재앙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을 조금만 밖으로 돌리면 북한핵의 위협에 못지않는 일본의 핵잠재력과 만나게 됩니다. 일본은 최근까지 1차분으로 프랑스에서 소형원자폭탄 1백 20개를 만들고도 남을 플루토늄을 반입했습니다. 미국의 ꡔ헤럴드 트리뷴ꡕ과 ꡔ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ꡕ지가 일본은 1993년부터 2천개의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플루토늄을 상시 보유하며 1995년에는 미국과 프랑스에 이어 세계 세번째의 핵연료 재처리 능력을 갖게 된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일본은 이미 고속증식로와 신형전환로 그리고 핵융합장치를 자체기술로 개발했습니다. 따라서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기술을 완벽하게 갖추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이미 확보한 핵기술 및 핵물질이 세계최첨단의 전자산업, 항공산업, 우주산업 등과 결합할때 핵의 무기화는 시간문제로 보입니다. 일본은 자체개발한 50여기의 단거리 미사일(SSM)을 보유하고 있어 운반수단까지 갖춘 상태인 것입니다.
일본은 미국과 러시아가 핵무기를 감축하여 세계적으로 플루토늄이 남아돌게 된 시기에 재빠르게 플루토늄 확보를 본격화하여 핵대국화로 치닫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일본 핵문제에 대해서 대부분이 침묵하다시피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얼마전 국회의장과 한일의원연맹 한국회장을 지내고 재산공개 파동으로 의원직을 물러난 金 모씨는 일본 산케이(産經) 신문과의 회견에서 “과거의 친일은 매국노였으나 현재의 친일은 애국자라고 확신한다”는 망언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 사람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지도층 인사라는 사람 가운데는 상당수가 일본에 대해 맹목적인 애정을 갖고서 일본의 재무장과 왜색문화의 범람에는 침묵합니다.
50대 이상의 식민지 세대는 옛날의 추억 또는 향수에서, 해방 후 세대는 막연한 동경과 무국적주의적 얼빠진 정신상태에서 왜색문화, 일본상품을 선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해 서울에서는 이른바 韓日心話會라는 복면의 단체가 일본의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일본의 한국통치를 찬양하는 등의 토론회를 벌였습니다. 한국에서 내노라하는 지식인, 학자들도 이런 복면의 단체에 가입하여 심포지움에 참가하여 일본제국주의 미화발언을 했습니다.
지금 현재 한국여성 4만여명이 일본에서 ‘취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취업’의 직종이 문제인 것입니다. 대부분이 일본인 상대의 접대부라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사회에서는 이 신판 정신대와 같은 일이 별로 문제시되지 않고 있습니다.
식민지 시대에는 우리의 젊은 누이들이 강제로 끌려 간데 비해 오늘의 젊은 여성들은 돈 벌기 위해 제 발로 현해탄을 건너간다는 차이점은 있을 지언정 이들의 행위는 그때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는 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국제화라는 이름으로, 인력송출이라는 구실로, 외화벌이라는 미명으로 이를 침묵하고 방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박정희정권때는 ‘관광기생’을 외화벌이라 하여 정책적으로 장려하였는데 요즘은 아예 이 ‘관광자원’이 일본 현지로 나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민족혼을 회복해야
민족혼을 회복해야 합니다. 아무리 친일잔재들이 기득세력으로 세습되고, 국제화·개방화라는 국제조류에 밀려 왜색문화·일제상품이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유혹하더라도 꿋꿋한 민족혼만 간직한다면 민족자존과 주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역사는 언제나 민족혼을 지켜온 양심세력, 주체세력에 의해 유구한 민족사가 전개되어 왔습니다. 고조선의 국선, 고구려의 조의선인, 신라의 화랑, 고려의 호록 또는 육두품, 조선의 사림·선비, 조선후기의 실학파, 망국기의 의병·독립운동가, 건국 이후의 민주인사·민족운동가·통일세력이 바로 진정한 양심세력이고 주체세력입니다.
우리의 양심세력은 망국시절에도 26년 동안이나 해외 임시정부를 세워서 항일독립전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임시정부가 있었고 백범 김구선생과 같은 지도자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장개석 총통과의 친분관계로 전후처리 과정에서 한국의 독립문제가 제기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여기 앉아계신 이현희 교수께서 지적하신 글을 읽었습니다.
이땅의 지배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외세에 예속되고 영합하여 권력유지와 보신에 연연했으나 우리의 민중, 양심세력은 항상 올곧은 민족혼을 간직하며 민족적 자주성을 지켜왔습니다. 지배층이 외세를 종주국으로 삼을때 민중은 중국인을 ‘되놈’, 일본인에는 ‘왜놈’, 러시아인에게는 ‘로스케’, 만주인에게는 ‘오랑케’, 미국인에게는 ‘양키’라고 부르면서 그들에의 동화를 거부하면서 민족적 자존과 주체성을 지켜온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무조건적으로 외국을 비판하고 외국인을 혐오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민중이 민족적 주체성과 독립성을 지켜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많은 민족이 강대국에 동화되거나 사라졌는데 이 좁은 땅의 우리민족만이 이토록 건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매국노의 재산찾기에 일본 친일파 재산환수 입법문제가 지지부진하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만년 권력의 요직에서 伏地不動하는 친일파, 군사정권의 잔당들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역사의 대세는 양심세력의 편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제잔재 청산과 민족혼을 지키기 위해 거창한 명분이나 과제 보다도 작은 일부터 시작해 나가야 합니다. 7년 장병에 5년 묵은 쑥대가 약이라면 이제부터라도 쑥을 묵혀야 합니다.
일제잔재 청산을 하지 못한 과거의 비판도 중요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시작은 언제나 늦지 않습니다.
그래서 국민학교 이름 고치기 운동이 시작되었고, 태전지명찾기 운동이 전개되고 있으며, 진주성 논개영정 폐출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일제가 민족정기 말살정책으로 우리의 명산 거암에 박아놓은 쇠말뚝 뽑기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새로운 민족운동은 이런데서부터 시작하여 점차 확대시켜 나가야 합니다. 친일파 사전을 펴내야 하고, 새로 독립지사 묘소를 만들어야 하고, 가짜 독립운동가를 가려내야 합니다. 독립유공자의 처우는 제대로 해야하고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민주인사들을 보훈대상으로 선정해야 하며 반독재투쟁에서 실종·의문사로 희생된 민주인사들의 진상을 밝히는 작업을 서둘러야 합니다.
임진왜란때 일본은 조총을 들고 왔고 병자수호조약때는 대포를 끌고 왔지만 지금 일본은 왜색문화와 일본제품으로 이 땅을 누비고 있습니다.
새롭게 전개되고 있는 국제화시대에 전시대적인 쇄국주의는 배척되어 마땅합니다. 하지만 민족주의적 특수성을 지키지 못하는 국제주의나 국제화는 자기소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도표가 모조리 깨져 나오고 있어 원본을 파일로 올리려 했으나 파일이 100킬로 바이트가 넘어 본인 홈페이지에 올린후 링크시켰습니다. 원본으로 보아야 자료를 볼 수 있을 겁니다.(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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