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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은 신화의 영역일 뿐 역사 연구의 대상은 아니다”고 잘라 말하는 반민족적 송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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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25 안병섭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 댓글 0건 조회 2,197회 작성일 2003-02-27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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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족적 송호정 기사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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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은 신화 영역, 역사 연구 대상은 아니다”는 반민족 송호정기사를 보고....

본인은 한민족 대륙상고사학과 관련해 주로 대륙의 사료만 보는 사람이라 국내의 주장을 일일이 살피지 못하고 있는데 근자에 강단사학파의 신예 송호정의 주장이 인터넷에 난무해 이곳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송호정의 논문을 자세히 살피지 못해 유감으로 생각하지만 그의 정통 식민사학의 학맥, 이병도-김철준-노태돈-송호정 등의 맥으로 보면 그의 전형적인 반민족적 단군사관을 헤아림직하다. 디지털 시대에 발전적 사관을 펴도 민족에 누가 될터에 네가티브한 반골 학문을 편다는 것은 학계의 연구반경을 넓힌다는 무한한 학문자유의 만끽과 민족정사확립차원에서 반면스승으로서의 귀감 외에는 무슨 도움이 될지 의아스러울 뿐이다.

상고사학으로 들어가면 우리 피붙이의 종족 이름이 매우 다양해 이들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고고학적 계통을 확실히 파악하지 않으면 거란을 다른 종족으로 파악하기 쉽고 하다못해 만주족은 물론이고 양자강 중류의 초나라와 양자강 하류의 월나라가 동이족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종족으로 치부하기 쉽상이다. 혈통적으로 보면 연나라가 동이족인데 정치적 국가형성의 칸셉으로 대하여 우리와 연이 전쟁을 벌였다 하여 이민족으로 치부한다면 병자, 정묘호란을 빌미삼아 만주족을 이민족시하는 것과 별 다를 바 없다.

산서성의 삼진이 동이족임은 춘추전국의 6국과 전국 7웅이 동이족임을 파악하면 고구마 줄거리를 캐면 상고 대륙사가 줄줄이 고구마 뿌리캐지듯 캐지는 것인데 이는 국내 사료를 가지면 절대 캘 수 없고 대륙의 향토사료를 연구해야 가능한 것이다. 혈통적인 뿌리캐기는 석학 임혜상 이상으로 연구한 사람이 대만 중국을 통틀어 없다. 임혜상은 양자강 뿐 아니라 황하의 주인공이 바로 동이족임을 밝히고 있으며 동이 제 족은 수많은 종족명으로 대륙 전체를 석권했음을 밝히고 있는 바다. ( 무시해서 미안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노태돈이나 송호정이 평생을 공부해도 그 연구성과가 서량지나 임혜상의 발바닥도 못가리라 확신한다. Anyway)

동시에 서량지는 고고학적 차원에서 임혜상의 문화인류학적 종족 계통의 분류에 대해 뒷받침하고 있는바 이들의 사관은 지금 서울대 등 일제 식민사관의 전수자들인 이들 다 낡아빠진 강단사학파들이 부정하는 환단고기 등의 사료를 불변의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못믿으면 읽어보라. 맹장불여 지장이요 지장불여 덕장이요 덕장불여 운장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의 사학은 죽어있다. 한국의 사학은 일제 식민지 연장선 속의 반도사학으로 매몰되어 고고학을 해도 우물안의 반도 고고학일 뿐 대륙고고학이 없다. 그러니 다양한 이름으로 대륙 전체에 산재한 동이 제족의 분류를 이민족으로 치부한다. 반도사학의 병폐는 이미 첫 출발점부터 정도에서 벗어나 산지 사방으로 흩어지는 오합지졸의 반민족적 학문적 성취-아무데나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오물같은 똥을 내리깔기는 것과 같다.

비록 반민족적 패역사관이라 할지라도 머리좋은 학자는 학문의 자유로운 영역확장에는 기여하겠지만 역사왜곡의 논조를 고도의 학문적 논리로 비벼놓아 철옹성을 만들어 놓으면 특히 역사라는 분야에 있어서는 조용히 살아가는 서민중생의 값어치보다 그 삶이 못한 것이다. 지장불여 덕장이니 지장이 이러한 머리좋은 패역사관의 학자라면 덕장은 머리는 모자라나 죄는 짓지 않고 사는 범인이다. 사관이 잘못서면 천재 이완용이 처럼 나라도 말아먹고 민족도 팔아 먹는다.

이완용도 민족을 위한다고 생각하며 친일을 했고 고종을 협박해 나라를 넘겼다. 학문은 자유다. 그러나 학문에는 책임이 따른다. 특히 사학을 다루는 학자는 민족의 굴레에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송호정은 대한민국 최고학부의 박사를 받았다 하니 그 사학적 내공이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국제화, 세계화 시대에 서울대는 세계 100위권 안팎으로 서있는 보잘것없는 대학으로 국내에서만 그 권위를 지키고 있는 정저지와에 불과하고 있음을 알아야 하며 일제교육잔재의 무한정 경쟁, 주입식 획일교육의 병폐로 교육이 무너진 시점에서 과대포장된 감이 없지 않다. 일제 식민사학의 청산은 이제 친일 수구파가 철퇴를 맞은 새 시대를 맞아 이들 반민족적 사관을 옹호하는 매국학자들을 학계에서 몰아내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한민족의 역사왜곡과정과 수탈의 역사를 상기해 본다면 그들은 이미 학술토론을 해야할 t상대로서의 학자가 아니다. 이제는 역사정립을 위해서나 민족정기 수립을 위해서나 학계에서 영구히 쫓아내야 할 대상이다. 그것이 민족적 정의이며 공의이다.


참고)
*「환단고기」<태백일사>는 정 강성(鄭康成)이 5경을 논박해 이의를 제기해 말하기를 황제의 희(姬) 씨 성은 염제가 하사한 것이라 했다. 황보밀(皇甫謐)이 「제왕세기」에서 말하기를 황제는 유웅(有熊)씨인 소전(少典)의 아들 희(姬)씨 성이라(헌원의 후예로 황제헌원이다), 그 선조는 곧 염제의 어머니 집안인 유교(有喬)씨의 장녀로 소전의 가문과 혼인한 고로 「국어(國語)」에서 병칭했다. 이에 신농씨 말기에 유웅씨로부터 나라를 받아 헌원의 땅에 살았다.
「죽서기년」의 황제헌원 파트를 서술한 뇌학기는 이를 근거로 하여 황제는 신농의 모제(母弟)의 후예 소전의 임금 자손이며, 후일 염제(炎帝)대에 유웅(有熊)에 봉해져 희(姬) 씨를 사성 받았다고 말한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 "염제신농씨는 강씨 성이라. 어머니는 임사(任 )라 하였는 바, 유교(有 )씨의 여식(女息) 등(登)으로 소전(少典)의 비(妃)가 되었다. 화양(華陽)에 유(遊)할쎄, 신룡의 머리가 있어 이에 감응해 염제를 낳았더니, 몸은 사람인데 머리는 소로 오랫동안 강수(姜水)에 머물러 살았다."고 하였고, 「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에 "소전(少典)의 비(妃)는 안등(安登)이니, 화양(華陽)에 유(遊)할쎄, 신룡의 머리가 있어 상양(常羊)에 감응하여 신자(神子)를 낳았으며, 인면용안(人面龍顔)으로 밭가는 것을 좋아했으니 곧 신농(神農)이다"고 했다. 「일주서(逸周書)」<고덕편(考德篇)>에 "작도야근부(作陶冶斤釜), 위뢰사누(爲   : 쟁기 뢰, 보습 사, 김맬 누.)라 하였고 「태평어람(太平御覽)」에 "신농이 밭갈고 도자기를 만들었다(神農耕而作陶)"라 했고, 「광운(廣韻)」에 "신농이 와기를 만들었다(神農作瓦器)"라 했고, 「물원(物原)」에 "신농이 옹기를 만들었다(神農作甕)"이라 했다. 복희로부터 신농에 이르는 세석기 회도문화의 주인공임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필자의 기억에 「환단고기(桓檀古記)」를 비롯 어떠한 사료에도 배달 환웅국의 성씨에 대해 언급한 것은 없다. 그러나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神農亦世及之君末帝楡罔時同姓黎君蚩尤作亂'이라 해서 14세 환웅인 치우천왕이 신농씨의 나라와 성씨(姜)가 같음을 말하고 있다.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신농의 도를 추종하는 무리가 있음은 「맹자」에도 보이고 있거니와, 「환단고기」에 5세 태우의 환웅의 12째 계자로부터 풍씨 성이 시작되었고, 또한 9세 안부연 환웅때 소전으로부터 그 아들 신농에 이르러 비로소 강수의 강(姜) 성이 시작되었으니, 유망은 비록 강씨 성의 적장자이자 신농의 후예였지만 배달 환웅국에서 가지치고 나아간 일개 제후국으로 모국이자 형제국인 배달국을 쳤다가 다시 황제와 싸워 패망하니 동족인 치우천왕이 복수전을 치른 것이 바로 유명한 탁록과 판천전투이다.


*주나라의 뿌리는 「시경」의 대아(大雅)편 면( )에 잘 소개 되어있다. 이 기록은 지나족이 자신들의 뿌리로 삼고 있는 주 왕실의 뿌리 문왕의 시조 고공단보(古公亶父)가 바로 동이족인 신농씨의 강(姜)씨 처녀와 결혼해 자손을 번창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공단보께서 어느아침 말을 달려 기산 밑에 이르러 강녀와 함께 살림을 차렸다(古公亶父 來朝走馬... 至于岐下 爰及姜女 聿來胥宇)"
*저강( 羌)계는 장(藏)족을 이루고 있는 제 1의 기원민족이자 근간민족인데(신농씨 직계후예임은 앞서 말한 바 있을 것이다) 은나라 때부터 기록에 보이고 있으며, 춘추시대의 서융(西戎) 대도(大都)가 곧 이 부족이다.


*태행(太行) 산맥을 중심으로 서는 산서(山西) 동은 산동(山東)이다. 산서성(山西省)은 춘추시대의 진(晋) 왕조의 발흥지로 뒤에 전국시절,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나뉘어 소위 3진(晋)의 시대를 연다. 산동이 전통적 동이족의 근거지로 동이족 은(殷)의 영향권에 속하고 주의 제후국 백금의 노나라가 있던 곳이라면 산서 역시 동이족에 뿌리를 대고 있는 요(堯), 순(舜),우(禹)가 근거한 동이족의 근거지였다. 장량과 한신이 바로 이 3진(晋) 가운데 한(韓)의 후예니 한(韓)은 환단의 동이겨레 고유의 명칭이었으니 한신이 처음 초패왕 항우에게 간 것은 초(楚)나라가 전통적인 동이족 국가였기 때문이었다.(안원전) 또 <삼성기전>이 서술하고 있듯이 진시황 정(政)을 친 것은 장자방(장 량)이 개입된 동이족 한(韓)족으로, 정(政)이 그 황실(瀛씨 성)과 혈통(신농씨 姜씨 성의 후예 呂씨 성) 모두 동이족이었으나 장성을 쌓아 중원대륙을 석권하고 있던 동이 제 족을 압박하고 동족인 모든 동이 제 족을 흩어 민호(民戶)로 삼아 한족(漢族)화 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동이 제 족의 반발을 샀다. 뿐만 아니라 「북사(北史)」에 포함되어 있는 북주(北周)왕조 역시 우문(宇文)씨에 의해 개국되었는데,「북사(北史)」는 우문(宇文)씨를 염제의 후예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능히 우리 핏줄 국가임을 알 수 있으며 , 모용(慕容)씨 또한 동이족의 하나인 선비족 출신으로 중국에 들어가 5호16국의 하나인 연(燕) 왕조를 열었으니 연(燕) 또한 우리 핏줄 국가가 아니라고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이상 안원전)

):「시경(詩經)」<상송(商頌)․현조(玄鳥)>에 설명하기를:“하늘이 현조(玄鳥)를 명해 내려가 상(商)을 낳게 하다(天命玄鳥,降而生商)”, 연(燕)이 곧 현조(玄鳥)니, 고대 선주민(先民)인 동이족은 새(鳥)를 사랑해 부락 도등(圖騰:부대 상징깃발)으로 삼았다. 지금의 북경(北京) 옛 칭호는 바로 “연(燕)”이라 칭했으며, 북경 뒷 산맥을 칭해 “연산(燕山)”이라 불렀으니 이는 바로 아주 먼 옛날에 연(燕)의 자족(子族)이 남쪽으로 이동한 것과 관련이 있으니 이 모두 동이족의 중심무대라 할 수 있다. 주나라의 뿌리는 「시경」의 대아(大雅)편 면( )에 잘 소개 되어있다. 이 기록은 지나족이 자신들의 뿌리로 삼고 있는 주 왕실의 뿌리 문왕의 시조 고공단보(古公亶父)가 바로 동이족인 신농씨의 강(姜)씨 처녀와 결혼해 자손을 번창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공단보께서 어느아침 말을 달려 기산 밑에 이르러 강녀와 함께 살림을 차렸다(古公亶父 來朝走馬... 至于岐下 爰及姜女 聿來胥宇)" 저강( 羌)계는 장(藏)족을 이루고 있는 제 1의 기원민족이자 근간민족인데(신농씨 직계후예임은 앞서 말한 바 있을 것이다) 은나라 때부터 기록에 보이고 있으며, 춘추시대의 서융(西戎) 대도(大都)가 곧 이 부족이다. 태행(太行) 산맥을 중심으로 서는 산서(山西) 동은 산동(山東)이다. 산서성(山西省)은 춘추시대의 진(晋) 왕조의 발흥지로 뒤에 전국시절,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나뉘어 소위 3진(晋)의 시대를 연다. 산동이 전통적 동이족의 근거지로 동이족 은(殷)의 영향권에 속하고 주의 제후국 백금의 노나라가 있던 곳이라면 산서 역시 동이족에 뿌리를 대고 있는 요(堯), 순(舜),우(禹)가 근거한 동이족의 근거지였다. 장량과 한신이 바로 이 3진(晋) 가운데 한(韓)의 후예니 한(韓)은 환단의 동이겨레 고유의 명칭이었으니 한신이 처음 초패왕 항우에게 간 것은 초(楚)나라가 전통적인 동이족 국가였기 때문이었다.(안원전) 또 <삼성기전>이 서술하고 있듯이 진시황 정(政)을 친 것은 장자방(장 량)이 개입된 동이족 한(韓)족으로, 정(政)이 그 황실(瀛씨 성)과 혈통(신농씨 姜씨 성의 후예 呂씨 성) 모두 동이족이었으나 장성을 쌓아 중원대륙을 석권하고 있던 동이 제 족을 압박하고 동족인 모든 동이 제 족을 흩어 민호(民戶)로 삼아 한족(漢族)화 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동이 제 족의 반발을 샀다. 뿐만 아니라 「북사(北史)」에 포함되어 있는 북주(北周)왕조 역시 우문(宇文)씨에 의해 개국되었는데,「북사(北史)」는 우문(宇文)씨를 염제의 후예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능히 우리 핏줄 국가임을 알 수 있으며 , 모용(慕容)씨 또한 동이족의 하나인 선비족 출신으로 중국에 들어가 5호16국의 하나인 연(燕) 왕조를 열었으니 연(燕) 또한 우리 핏줄 국가가 아니라고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이상 안원전)

왜곡된 역사감잡기Click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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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증언 : OOO계의 비리)


(식민매국사학의 계보 : 이병도, 신석호와 그제자들)


(문) 식민매국사학의 태두는 누구로 보아야 하는지요
(답) 왜놈들의 조선사편수회 앞잡이로 들어간 이병도, 신석호 둘입니다

(문) 이후 두사람은 어떻게 되었지요
(답) 역사왜곡의 댓가로 이병도는 국립서울대학교 교수로 신석호는 고려대 교수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문) 둘의 직계제자들은 누구인지요
(답) 이병도 직계는 이기백, 이기동, 최몽룡, 노태돈이고 신석호 직계는 김정배입니다


(국정교과서를 고집하는 이유는 돈때문)


(문) OO에서 국정교과서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답) (길게 답변합니다)

왜놈들이 조선사편수회를 통하여 조작한 "조선사"를 근간으로
이병도 및 그 제자들은 "국사대관"을 저술하여 현재까지 식민매국 국사교육을 하고 있는데

교육부에서는 이 "국사대관"에 인용댓가로 저술에 참가한 식민매국사학자들에게
연간 "OOO억원"의 사용료를 지급하고 있습니다

국사 교과서가 검인정이 되어 국사교과서가 다영화 되면 학교에서 식민매국 국사교과서를
채택할리 만무한데 이렇게 되면 "OOO억원"의 사용료가 날아 가버리니
이놈들이 검인정 교과서를 원할 리가 있습니까 ?

가만히 앉아 있어도 돈이 들어오는데 이놈들이 가만 있겠습니까
목숨걸고 반대를 하겠지요

지하에 있는 독립투사들이 통곡할 일이예요
일본놈들이 조작왜곡해 놓은 책을 근거로 아직도 빌어먹고 사는 놈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2002년 6월 18일 정부는 국사교과서를 검인정으로 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놈들이 검인정 결정을 번복 시키려 각계에 로비를 하고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해방이후 지금까지 친일로 빌어먹고 사는 놈들, 도대체 이를 어찌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


(일본놈들의 돈에 놀아나고 있는 OO)


(문) 일본역사학계가 국내OOOO를 좌지우지 한다는데 사실입니까 ?
(답) (역시 긴 답변입니다)

골 빠진 OO들이 거의 매월 일본에 가서 역사강연을 합니다
1회 강연료가 시간당 30만엔입니다
한국의 영광을 강의하는 줄 아십니까 ?

강의가 끝나면 O접대해주지요. 저녁에 재워주지요
그기다가 돌아올 때 몇몇가지 연구자료를 손에 쥐어 줍니다

몇 번 다녀오면 논문 한편이 그냥나오는데 안갈 리가 만무하지요

그러니 해방이후 진정한 역사독립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
아직도 우리는 역사 식민지입니다
이런놈들을 다 처단하고 진정한 역사독립을 이루어야합니다


(일본자금이 OO에 지금도 유입되고 있다는데)


(문) (긴 질문)

2년마다 오는 문화사절단의 상당수가
우리역사학계의 고대사 발전정도를 조사하고
발전을 방해하기 위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파견되어
2개월이상 활동하다 돌아간다는데
사실인지....

그리고 OO에 무마댓가로 자금이 유입된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답) OO입니다

그 중간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이 각OO의 O본 연구소입니다
여기에 파견되는 일본OO들이 그 중간 역할을 하고 있으며

대표적 S대의 경우 연간 OO억원 규모로
기타 OO의 경우 연간 O ~ O억원 규모로 학계 학술활동 지원 명목으로
일본에서 자금이 유입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는 떡을 거부 못하는 것이지요
O일 놈들입니다


(친일매국OO자들이 경력위조 작업에 들어갔다)


(문) 이병도, 신석호 제자들이 경력개조 작업에 들어갔다는데요
(답) 맞습니다

이자들이 국사학계 전반에 해방이후 한결같이 써먹었던 식민사학이 여러경로를
통하여 버틸수 없게 되자 본인들의 경력 바꾸기 작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즉, 애국 민족사학자로 경력 위조 탈바꿈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본인들은 뒤로 물러나고 젊은 친구들을 대신 전위대로 내세운후 뒤에서
조종을 하고 있지요

개탄스러운 일이며 나라의 장래가 걱정됩니다


(중 략)

http://www.coo2.net/bbs/viewbody.html?code=col&page=1&number=351&keyfield=&k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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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은 역사 아닌 신화일뿐"
“역사적 사실로서의 단군과 민족 시조로서의 단군은 엄격히 구분해야 합니다.”
재야 사학자들의 단군조선론에 맞서 주류학계의 입장을 대변해 온 신세대학자 송호정(39) 한국교원대 교수가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푸른역사 발행)를 통해 또 다시 고조선 논쟁에 불을 지폈다.

그 동안 ‘고조선’부분은 문헌사료가 거의 없다는 기본적 한계에다 민족주의사관과 식민사관의 대립, 재야 사학자들과 주류학계의 인식차, 민족정체성을 고양하려는 정권 차원의 의도, 단군을 둘러싼 종교적 해석 등이뒤섞여 혼돈 상태였다.

1998년 국내 최초로 고조선 연구로 박사 학위(서울대)를 받은 후 관련 연구에 매달려 온 송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을 단군조선으로 알고,교과서에까지 버젓이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부정확한 기록과 상상에 의거한 몰상식이자 소설”이라며 재야 사학자의 주장과 정부의 눈치보기를 통렬히 비판했다.

그런 주장은 재야 사학자들이 진위가 밝혀지지 않은 고대 문헌을 국수주의적 태도에서 필요한 부분만 자의적으로 확대 해석한 내용인데도 정부가관련 내용을 개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의 각종 문헌, 유물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통해 고조선의 등장시기와 성격을 달리 규정한다. 우선 고조선의 등장 시기와 관련, BC 2333년은 삼국유사에 언급된 내용이나 중국 학계에서는 거의 믿지 않는 자치통감(資治通鑑)에 근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고대국가 성립 시기는 청동기시대(BC 10세기) 들어서라고 보는 것이 정설인데 그보다 훨씬 전에 국가가 등장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 고조선의 실제 성립 시기는 선진(先秦)의 문헌인 관자(管子)의 관련 기록에 나오는 BC 8~7세기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재야 사학자들이 고조선 영역을 랴오시(遼西)와 산둥(山東)지역으로까지 확대하면서 그 근거로 비파형 동검 출토를 드는 데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비파형 동검은 랴오시에서 활동하던 산융(山戎) 동호(東胡)족이 주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들의 문화로 봐야 하며, 고조선의 영역은 북방식(탁자식) 고인돌과 팽이형 토기가 집중 출토된 랴오둥(遼東)과 한반도 서북지방에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송 교수는 이런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1993년부터 랴오닝(遼寧)성과 지린(吉林)성을 10여 차례 답사했고 지난해 9월에는 2주간 평양과 서북한 지역을 조사했다.

그가 고조선 연구와 함께 관심을 갖는 분야는 부여(夫餘)사. 고조선이 과장 해석된 데 비해 부여는 지나치게 축소 해석됐다고 보고 있다. 그는 “부여야말로 우리 민족의 원류인 예ㆍ맥족이 세운 나라이며 삼국과의 연계성도 고조선보다 뚜렷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런 주장을 담은 부여사연구서도 조만간 낼 예정이어서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는 “최근 KBS 위성방송 ‘N세대 특강’에서 이런 내용을 강의한 후 엄청난 비난과 인격적 모독, 협박에 시달렸다”며 우리나라의 미성숙한 토론문화를 아쉬워했다.

또 “제 주장에 대해 중국 학계의 시각에 기울었다거나 이병도(李丙燾)씨등 식민사관의 아류라는 비판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며 “하지만 한국사도 동양사, 나아가 세계사라는 보편적 틀 속에서 보아야 제대로 의미가사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사진설명> 송호정 교수는 “단군조선은 신화의 영역일 뿐 역사 연구의 대상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최종욱기자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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