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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로 간단히 보는 한민족사&임승국.박성수 역사를 보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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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25 안병섭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 댓글 0건 조회 2,795회 작성일 2003-02-27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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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백제는 말한다-임승국 교수의 역사입문 이야기

재야사학자 임승국씨 별세 [인물] 2001년 08월 29일 (수) 16:57

재야사학자 임승국(林承國)씨가 지난 28일 경기 고양시 일산병원에서 별세했다.향년 74세.고인은 고려대 영문학과 출신으로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를 지내다 백제사를 고리로 한국고대사 연구에 나서 이른바 강단사학계와는 다른 길을 걸은 대표적인재야사학자다.고 안호상 박사,박시인 전 서울대 교수 등과 함께 "국사찾기협의회"를 설립,기존 교과서가 단군 존재를 부정하고 한사군을 한반도에 설정하는 등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며 정부를 상대로소송을 제기하고 국회청원활동도 벌였다.유족은 부인 최혜옥씨와 TV탤런트 출신인 성원씨 등 3남1녀.

아!백제여

대륙 백제는 말한다 [퍼온글]




대륙 백제는 말한다.

(임승국 교수의 역사입문 潔薩? href="http://cheramia.net/board/view.php?id=board1&no=121">원문Click here!


제가 경희대 영문학 교수시절 때 우연히 중국 25사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25사 가운데 사기(史記),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다음으로

여섯번째 책이 송서(宋書)입니다.

하루는 윤영춘 박사댁에 놀러갔다가 그 분이 갖고있는 장서 중에서 우연히 이 송서를 끄집어 냈습니다.

윤 박사가 이걸 보라고 권한 것도 아닌데, 제가 펼친 곳이 송서 97권 '백제의 전'이라는 대목이었습니다.

그 기록을 무심코 쭉 읽어 내려갔지요.

중국에서 태어나 중학교 4학년까지 그곳에서 성장했으니 한문실력은 그런대로 있어서 쭉 읽어보니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송서에 기록되어있는 백제는 우리가 알고있는 백제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우리는 의례히 백제를 생각할 때면 연상되는 것이 의자왕이고, 의자왕 하면 삼천궁녀, 삼천 궁녀와 낙화암과 백마강, 그리고 다이빙 앤드 풍덩 등입니다.



그런데 송서 97권을 보니까 아예 백제의 위치부터가 달랐습니다. 반도가 아니었습니다.

현 수도인 북경으로부터 남쪽으로는 산동반도를 지나 양자강 남북의 평야지대를 포함한

중국동해안 일대를 백제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록을 보고서 그 때 하고 있던 영문학이라는 낡아빠진 학문을 집어 치우고

스승도 안내자도 없이 한국상고사라는 난장판 학문에 뛰어 들었습니다.

만 5년동안 학교도 나가지 않고 직장도 없이 도서관에 파묻혀서 사서삼경과 25史와 씨름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6년 만에 다행히 명지대학으로부터 다시 교수발령을 받은 후에,

영문학 교수가 아닌 한국고대사를 강의하는 사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제 학문의 안내자가 바로 백제사였으니, 오늘 강의하는 것도 백제사의 이해라고
하면 비로소 말문이 열립니다.

송서 97권 백제전의 머릿부분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독자를 위해 안원전이 풀이해 삽입: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리에 함께 있었으며, 그 후 고려는 대략 요동에 있었으며, 백제는 대략 요서에 있었고,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 (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 불렀다. 요서는 북경을 포함한 하북,하남, 산서 등을 포괄한다. 산서성의 옛이름이 晉이다


송서에만 이런 기록이 있고 다른 기록에는 이런 것이 없다고 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겠지
만, 그게 아닙니다.

25사 중 송서 다음이 양서(梁書)인데, 양서 54권 백제전에도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양서 다음은 남제서(南濟書)입니다. 당시 양자강 남쪽에는 제(濟)나라가 있었고, 북쪽에는
북위(北魏)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남제서에도 백제전이 있는데, 그 내용은 더 엄청납니다.

당시의 백제왕은 무령왕의 아버지인 동성왕이었습니다.

동성왕의 무덤이 산동반도에 있다고 25사에 기록되어있고요, 동성왕은 산동반도에 서경(西京)을 설치하여 직접 도읍하면서 대륙을 경영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의 군사·외교정책은 가까이에 있는 위나라와는 전쟁으로 상대하고,

양자강 남쪽의 남제와는 우호관계를 맺는 등의 정책을 폈습니다.

동성왕은 남제의 소도왕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실로 엄청납니다.

아마 간덩이가 작은 사람은 이 글만 보아도 깜짝 놀랄 것입니다.

요서나 진평이라고 했던 백제의 세력이 놀랍게도 남쪽으로 확장되어 북위의 군대와 싸워 이겼고,

또 한 때는 양자강 남쪽까지 점령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땅을 일곱구역으로 나누어서 백제장군 일곱을 각각 파견하여 통치하게 합니다.


쉽게 말하면 총독 일곱명을 두고 중국동해안을 싸그리 지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록을 중국인들은 다 없애 버렸습니다. 남제서 백제전의 머리부분을 다 뜯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현재 한국으로 오는 25사 중 남제서를 보면, 백제전의 앞부분이 뜯겨나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글씨가 없는 공백이 하얗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게 '똥되는 놈'(지나인)의 심뽀입니다. 오죽하면 똥되는 놈이라고 하겠습니까?

백제전이라는 제목은 있는데 그 다음이 빈칸이란 말이예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강시단야(降屍丹野: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붉게 물들였다)인데, 똥되는 놈을 시체로 만든 자는 백제 군대이겠죠. 그리고 그 빈칸은 그냥 남겨두었습니다.


중국본토에는 오리지날 25사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대만에는 물론이고요.

중국본토와 대만에 가공하지 아니한 원본 25사가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흔하지 않지만. 중국 가는 사람들은 오리지날 25사를 구해서 남제서 백제전을 펼쳤을 때, 공백이 아灸?글씨가 꽉 차 있다고 한다면 무조건 갖고와야 합니다.

요즘 중국에 많이 갔다왔다 하는 모양인데 다 소용없어요. 강아지 눈에 보이는 건 누런 똥 밖에 없습니다.

근래 중국갔다 온 사람들의 눈에는 누런 황금덩어리만 보일 뿐입니다.

'백제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딱 꼬집어서 얘기할 때는 위와 같은 것이 적절
한 예화가 될 겁니다.

백제가 이렇다는 것은 감히 생각을 못합니다. 그저 '낙화암 풍덩'만을 연상할 뿐입니다.


중국지도에 있어 동해안 지역은 사실상 중국땅의 전체나 다름없습니다. 깊은 오지에는 사람 들이 살지를 못합니다.

중국사람들이 집결되어있고 중국문화가 한데 모여 있는 곳이 중국 동해안 지역입니다.

모택동도 여기에 사는 중국인구의 수를 十億에서 二億을 뺀 수억이라고 했습니다.

전체 10억 중에서 (십억에서 이억을 밴 수억)의 인구가 이곳에 몰려 살고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지역을 몽땅 백제가 지배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요즘 남북사학자들이 한 테이블에 모여 토론하자고 하는데, 그건 위험천만한 얘기입니다.

우리 사학계는 아직도 식민사관에 푹 젖어있어서 노태우정권은 또 그런 사람을 뽑을테고,

그래서 '마피아단'을 남한대표로 보내면 북한사학자들한테 비웃음만 당할 것입니다.

북한 사학은 60년대 초에 한사군문제를 싹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낙랑현도진번임둔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마주 앉으면 남쪽이 망신당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 사학의 주류가 민족주의 정예학자로 되기 전에는 위험한 주장입니다.

얼마 전에 KBS에서 사학 관계서류를 모아서 연변대학에 기증을 했습니다. 약 몇 천권 보낸 모양입니다.

연변대학 총장이 그걸 받아서 읽어 보니까 식민사관이 그대로 남아있길래,

예를 들어 김철준씨가 쓴 문화사관이나 이기백씨가 쓴 한국사의 무엇 등등이었는데,

무슨 이런 책을 보냈느냐 하면서 모조리 폐기처분해 버렸다고 합니다.

남한에서 보내 온 사서는 모조리 식민사학에 젖어 있어서 폐기처분했다는 사실,

이것만큼 대한민국 망신시킨 적이 어디 있습니까?

해방 이후 40-50년동안 우리는 식민사학을 복창 복습했다는 것을 여기서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대방이라고 하면 보통 황해도 사리원으로 알고들 있습니다.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을 쓴 김성호씨는 나름대로 식민사관을 비판하면서 글을 썩 잘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잘못한 것은 사리원이 대방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일본사람들이 한 얘기를 그대로 고스란히 믿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백제시건국어대방고지(百濟始建國於帶方고지)'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백제가 처음 나라를 세운 땅이 대방이라는 뜻인데,

대방이 황해도 사리원이니까 사리원에서 백제가 건국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사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흠이 있다고 해도 공격할만한 흠은 아니지만, 백제사 출발점은 대륙인데,

황해도 사리원에서 출발했다고 하니 참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학계에서는 미추골을 미추홀이라고 합니다. 홀(忽)자를 역사에서는 골이라고 읽습니다.

밤골이다 무슨 골이다 할 때처럼, 고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김성호씨는 이 미추골을 인천이 아니라 아산면 인주면이라고 했습니다.

미추골이 인천이라는 것도 마땅치 않은데, 거기에서 더 내려가 아산면 인주면이라고 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제가 번역한 책 '한단고기'에도 미추골이 나오는데, 그 곳의 위치는 바로 하북성입니다.

하북성에 있는 미추골에서 비류수가 흐릅니다. 비류백제라고 할 때의 비류수가 바로 거기서 흐릅니다.



우리 사학계는 정말 답답합니다. 오죽 답답하면 제가 유신정권 때 정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벌였겠습니까?

국사를 바로 잡으라고 행정소송을 했을 때, 원고는 명지대 교수 임승국이 되고 피고는 박정희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학계에서는 저보고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송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요?

결과는 '피고 패소, 원고 승소' 이렇게 났습니다. 제가 이겼습니다.



그래서 그 때 판결장을 들고 문교부장관을 찾아가 집행할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피고가 억울하다고 대법원에 항고를 했습니다.

문교부에서는 아직 사건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집행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마지막 판결날짜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꼭 일주일 남겨두고 박대통령이 피살당해 버렸습니다.

조금 뒤 대법원에서, 그 재판은 피고의 유고로 인하여 무기한 연기한다는 통지가 왔습니다.

그 때의 무기연기가 지금까지도 무기연기 중입니다.

대법원장이 몇 번이나 바뀌고 정권이 몇 번 바뀌었는데도 지금까지 무기연기라니, 이거 법이론상 맞지 않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래서 이번 국정감사 시, 모 국회의원에게 그것을 좀 알아봐 달라고 했더니 그 국회의원이 하는 얘기인 즉,

그 재판은 판결하지 않은 채 폐기처분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폐기하려면 원고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하기야 뭐 5공화국시절이니까 법이 없었죠.



저는 억울한 나머지 국회에 청원서를 냈습니다. 그래서 청원서에 입각한 공청회가 열렸지요.

앞서 강연한 박시인 박사, 안호상 박사와 함께 셋이서 공청회에 나가 열변을 토했습니다.

박시인 박사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투쟁형이 못되어 제가 대표격으로 싸웠습니다.



제안설명을 하면서 "낙랑현도진번임둔의 증거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문교부 장관이 하는 말이,

자기는 역사학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답변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국무위원이 반드시 역사학 공부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없기 때문에 그냥 넘어 갔습니다.

그 다음 앉은 사람이 차관인데,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은 사학은 고사하고 인문사회과학계통이 아닌 자연과학계통을 공부한 사람이라 내가 차관에게 질문하면,

그 사람은 속으로 '저 양반이 나 망신줄려고 국회에 불러온 것 아니냐'할 것 같아서 그냥 뛰어 넘었습니다.



다음은 국사편찬위원장이 나왔습니다. 3년동안 행정소송을 할 때 대통령 대리인으로 피고석에 있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도 장관과 꼭같은 답변을 하길래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장이라는 직위에 있는 사람이 무책임한 발언을 하니 너무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 때 방청석에 있던 국회의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국사편찬위원장 임명권자인 문교부장관은 사임하라고 외쳤습니다.

목표는 국사개정인데 인사문제로 번지니 다시 한번 더 국사개정의 방향에서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한 뒤,

장차관과 국사편찬위원장도 한사군 문제를 공부안했다고 발뺌하니 앞서 얘기한 대로 쭉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국사개정을 하기로 결정하고 공청회는 끝났습니다.



이제 백제사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제 전공이 백제사이고 백제사는 그야말로 저의 의중의 역사입니다.

제가 경희대 영문학 교수시절 때 우연히 중국 25사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25사 가운데 사기(史記),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다음으로

여섯번째 책이 송서(宋書)입니다.

하루는 윤영춘 박사댁에 놀러갔다가 그 분이 갖고있는 장서 중에서 우연히 이 송서를 끄집어 냈습니다.

윤 박사가 이걸 보라고 권한 것도 아닌데, 제가 펼친 곳이 송서 97권 '백제의 전'이라는 대목이었습니다.

그 기록을 무심코 쭉 읽어 내려갔지요.

중국에서 태어나 중학교 4학년까지 그곳에서 성장했으니 한문실력은 그런대로 있어서 쭉 읽어보니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송서에 기록되어있는 백제는 우리가 알고있는 백제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우리는 의례히 백제를 생각할 때면 연상되는 것이 의자왕이고, 의자왕 하면 삼천궁녀, 삼천궁녀와 낙화암과 백마강, 그리고 다이빙 앤드 풍덩 등입니다.



그런데 송서 97권을 보니까 아예 백제의 위치부터가 달랐습니다. 반도가 아니었습니다.

현 수도인 북경으로부터 남쪽으로는 산동반도를 지나 양자강 남북의 평야지대를 포함한

중국동해안 일대를 백제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록을 보고서 그 때 하고 있던 영문학이라는 낡아빠진 학문을 집어 치우고

스승도 안내자도 없이 한국상고사라는 난장판 학문에 뛰어 들었습니다.

만 5년동안 학교도 나가지 않고 직장도 없이 도서관에 파묻혀서 사서삼경과 25史와 씨름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6년 만에 다행히 명지대학으로부터 다시 교수발령을 받은 후에,

영문학 교수가 아닌 한국고대사를 강의하는 사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제 학문의 안내자가 바로 백제사였으니, 오늘 강의하는 것도 백제사의 이해라고 하면 비로소 말문이 열립니다.

송서 97권 백제전의 머릿부분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

송서에만 이런 기록이 있고 다른 기록에는 이런 것이 없다고 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25사 중 송서 다음이 양서(梁書)인데, 양서 54권 백제전에도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양서 다음은 남제서(南濟書)입니다. 당시 양자강 남쪽에는 제(濟)나라가 있었고, 북쪽에는 북위(北魏)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남제서에도 백제전이 있는데, 그 내용은 더 엄청납니다.

당시의 백제왕은 무령왕의 아버지인 동성왕이었습니다.

동성왕의 무덤이 산동반도에 있다고 25사에 기록되어있고요, 동성왕은 산동반도에 서경(西京)을 설치하여 직접 도읍하면서 대륙을 경영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의 군사·외교정책은 가까이에 있는 위나라와는 전쟁으로 상대하고,

양자강 남쪽의 남제와는 우호관계를 맺는 등의 정책을 폈습니다.



동성왕은 남제의 소도왕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실로 엄청납니다.

아마 간덩이가 작은 사람은 이 글만 보아도 깜짝 놀랄 것입니다.

요서나 진평이라고 했던 백제의 세력이 놀랍게도 남쪽으로 확장되어 북위의 군대와 싸워 이겼고,

또 한 때는 양자강 남쪽까지 점령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땅을 일곱구역으로 나누어서 백제장군 일곱을 각각 파견하여 통치하게 합니다.

쉽게 말하면 총독 일곱명을 두고 중국동해안을 싸그리 지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록을 중국인들은 다 없애 버렸습니다. 남제서 백제전의 머리부분을 다 뜯어버렸다는 말입니다.

현재 한국으로 오는 25사 중 남제서를 보면, 백제전의 앞부분이 뜯겨나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글씨가 없는 공백이 하얗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게 '똥되는 놈'(지나인)의 심뽀입니다. 오죽하면 똥되는 놈이라고 하겠습니까?

백제전이라는 제목은 있는데 그 다음이 빈칸이란 말이예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강시단야(降屍丹野: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붉게 물들였다)인데,

똥되는 놈을 시체로 만든 자는 백제 군대이겠죠. 그리고 그 빈칸은 그냥 남겨두었습니다.



중국본토에는 오리지날 25사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대만에는 물론이고요.

중국본토와 대만에 가공하지 아니한 원본 25사가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흔하지 않지만. 중국 가는 사람들은 오리지날 25사를 구해서 남제서 백제전을 펼쳤을 때,

공백이 아니라 글씨가 꽉 차 있다고 한다면 무조건 갖고와야 합니다.

요즘 중국에 많이 갔다왔다 하는 모양인데 다 소용없어요. 강아지 눈에 보이는 건 누런 똥밖에 없습니다.

근래 중국갔다 온 사람들의 눈에는 누런 황금덩어리만 보일 뿐입니다.

'백제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딱 꼬집어서 얘기할 때는 위와 같은 것이 적절한 예화가 될 겁니다.

백제가 이렇다는 것은 감히 생각을 못합니다. 그저 '낙화암 풍덩'만을 연상할 뿐입니다.



중국지도에 있어 동해안 지역은 사실상 중국땅의 전체나 다름없습니다. 깊은 오지에는 사람들이 살지를 못합니다.

중국사람들이 집결되어있고 중국문화가 한데 모여 있는 곳이 중국 동해안 지역입니다.

모택동도 여기에 사는 중국인구의 수를 8억이라고 했습니다.

전체 10억 중에서 8억의 인구가 이곳에 몰려 살고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지역을 몽땅 백제가 지배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요즘 남북사학자들이 한 테이블에 모여 토론하자고 하는데, 그건 위험천만한 얘기입니다.

우리 사학계는 아직도 식민사관에 푹 젖어있어서 노태우정권은 또 그런 사람을 뽑을테고,

그래서 '마피아단'을 남한대표로 보내면 북한사학자들한테 비웃음만 당할 것입니다.

북한 사학은 60년대 초에 한사군문제를 싹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낙랑현도진번임둔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마주 앉으면 남쪽이 망신당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 사학의 주류가 민족주의 정예학자로 되기 전에는 위험한 주장입니다.

얼마 전에 KBS에서 사학 관계서류를 모아서 연변대학에 기증을 했습니다. 약 몇 천권 보낸 모양입니다.

연변대학 총장이 그걸 받아서 읽어 보니까 식민사관이 그대로 남아있길래,

예를 들어 김철준씨가 쓴 문화사관이나 이기백씨가 쓴 한국사의 무엇 등등이었는데,

무슨 이런 책을 보냈느냐 하면서 모조리 폐기처분해 버렸다고 합니다.

남한에서 보내 온 사서는 모조리 식민사학에 젖어 있어서 폐기처분했다는 사실,

이것만큼 대한민국 망신시킨 적이 어디 있습니까?

해방 이후 40-50년동안 우리는 식민사학을 복창 복습했다는 것을 여기서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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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력

고려대 정치학과 졸업, 동 대학 문학박사(영문학) 경희대 교수(영문학), 숭실대 교수(영문
학) 역임 현 명지대 교수(한국사) 현 한국정사학회장 현 공군정신연수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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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만행과 친일사학계





일제 시대의 독립 운동가이자 민족 사학자인 박은식 선생은

"나라는 망해도 민족은 망하지 않아야 하며 민족이 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를 잃지 않아야 한다" 라고 말하였다.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는 한 순간의 쉼도 없이 지금도 돌고 있으며 우리는 그 한 부분을 채워 가고 있다.

역사는 단지 과거의 흘러간 것이 아니다. 역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속에서 우리의 현재를 존재하게 하며

우리들이 생활하고 느끼며 접하는 모든 것에 투영되어 숨쉬고 있는 것이다.

바로 민족의 역사에는 민족의 번영과 영광, 시련과 애환이 깃들여 있다.

그렇기에 올바른 역사 정신을 간직하고 보존한다는 것은 민족의 장래와 존망을 결정하는 중차대한 일이다.

그것은 민족의 주체성, 즉 민족의 자각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대주의와 외래사상은 일 만년 역사 속에 찬연했던 민족의 문화와 정신을 왜곡하면서

그 모습을 달리하며 오늘에까지 이르러 우리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있다.

또한 이 땅을 강제 점령한 일본 제국주의가 이 민족을 영원한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왜곡,

날조한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청산하지 못한 채 오히려 그러한 사실조차 모른 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해방 이후 범람하기 시작한 서구의 퇴폐적 물질문명과 외래 사상의 폐해는 민족 역사와 정신의 뿌리까지 흔들어 놓았다.





1.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과 민족 역사의 왜곡





'먼저 조선 사람들의 자신의 일.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 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추어내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들을 경시하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그러면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건인 것이다'



- 1922년 조선 총독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 시책







일제는 위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악랄한 정책을 이행했는데

대표적인 예로 전통 문화와 역사의 말살을 꼽을 수 있다.



일제는 식민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민속 조사를 실시하고 우리의 민속 신앙들을 미신으로 몰아세웠다.

특히 동제를 중점적으로 탄압했는데 촌산지순의 연구에 의하면 동제는 일본의 신도와 공통성을 지니며,

여러 가지 고대 문화를 보존하고, 현실적으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들이는 기능을 할 뿐 아니라,

민중 심성을 개발하는 가장 으뜸가는 향토 오락이며, 성씨별 분열을 막고 이를 통합하는 기능을 지니고,

마을 사람들의 심신을 정화시켜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들은 일제의 반일본화 작업에 있어 방해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다각적인 탄압을 진행하였다.

경찰국에서는 중추원 시정 연구회의 연구를 자문 받아 무녀 취체 법규를 제정하고

무당들을 경신 단체에 가입시키는 한편, 강력한 취체 행정으로 이를 금압하고,

학무국에서는 신사.신도 정책을 펴 나가 각급 학교 학생들에게 신사 참배를 의무화했으며,

사회과에서는 우리의 민속 신앙을 미신(迷信이라는 말은 이때부터 쓰이기 시작함)

으로 간주하는 사회 교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사서 20 여만 권 소각과 더불어 시작된 조선사의 편찬은 당시의 조선인들로 하여금

소위 '공명.정확'한 새로운 사서를 읽혀 조선인에 대한 동화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루어졌다.



즉 '공명.정확'한 사서의 편찬을 위해 사료가 필요하다는 구실로 중추원을 앞세워

전국적인 사료 수색을 감행하였는데 1차로 1910년 11월부터 다음해 12월까지 총 5차례에 걸쳐 37년까지 이루어 졌고

압수 대상 서적은 단군 관계 조선 고사서, 조선 지리, 애국 충정을 고취하는

위인 전기.열전류 및 미국의 독립사까지 포함되었다.

조선 세종때부터 단군관계 사서를 수집하여 장서각 및 규장각에 보관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이들 사서 가운데는 귀중한 단군 관계 고사서가 많았으리라 추측된다.





조선사 편찬시 상당수의 조선인이 참가하였는데 여기에는

이병도, 신석호, 최남선, 권중현, 박용구, 이완용, 박영효 등이 있다.

다음에 다시 서술하겠으나 우리는 이병도 씨가 이 작업에 참가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조선사의 성격과 구성 내용 등을 살펴보자.



일제의 식민 사관을 성립하는 데는 3대 요건이 필요하다.

그 첫째가 상고사와 국조의 부정이고

둘째가 동양사의 주체였던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만 압축해 버리는 것

마지막 셋째가 한국 민족은 오늘날까지 제대로 완전한 독립을 해 본 적이 없는

주인도 없고 뿌리도 없는 유랑민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 분열을 일삼는 망국 근성의 민족인 것처럼

자타가 공인하도록 하는 것이다.





조선사는 위의 요건을 충실히 따랐고 또 단군 조선의 말살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왔던

당시 일본의 가장 악질적인 어용 사학자 이마니시류 (금서룡) 같은 자를 중추 인물로 세움으로써

그 의도가 명백하다고 할 것이다.

시대 구분에서도 위와 같은 의도가 엿보이는데 1916년 1월의 회의때 결의한

상고 삼한. 삼국. 통일 신라 등이 1923년 1월 8일 제 1차 위원회 회의에서 삼국 이전. 삼국 시대. 신라 시대로,

1925년 10월 8일 제 1회 위원회 때는 신라 통일 이전. 신라 통일 시대로 압축되었다.



내용에 있어서 위와 같은 의도는 확연히 드러난다.

몇 가지 살펴보면 조선의 반도적 지리 요건으로 인해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점

(반도 북부--중국의 식민지, 반도 남부--임나 일본부) 조선 역사는 위만 조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

조선인은 자립, 자치 능력이 없다 (당쟁.반란의 의미 확대) 조선의 조정은 동학란 때문에

청나라를 불러 들여왔으나 일본이 처음 무찌르자 합방해 주기를 원하므로

합병하여 조선인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 잘 살게 되었다라는 등이 있다.







2. 오늘날 우리의 사학계



위와 같이 일본의 의도가 너무도 뻔한 조선사의 편찬은 오늘날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은 커진다.

광복 후 출판된 권위 있는 역사 사전마저 '<조선사>가 비록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

유화정책으로 된 것이기는 하나 색인이 없는 사료의 이용을 위해서는 많은 편리를 준다' 고

망발을 늘어놓고 있고 당시 조선사 편찬에 참가한 이병도씨 (어용 사학자 금서룡의 제자) 는 해방 후

사학계의 거두로 우뚝 서게 되어 수많은 제자 양성과 더불어 식민 사학의 전파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현 사학계의 주도권을 쥔 자들은 모두 식민사학 1세대인 이병도 씨의 제자들로서

(물론 고려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던 신석호씨도 있지만 일찍 타계하였음)

제 2세대라고 꼽으면 서울대학교파로 고병익, 천관우, 이기백 (한림대 한국사 교수), 차하순, 한우근,

김철준, 김원용씨 등이 있고 비서울대파로 김정배, 유원동, 변태섭씨 등이 있다.

제3세대로는 혜성같이 나타나 매스컴의 각광을 받고 있는 동국대학교 교수 이기동씨가 있다.

우선 이들이 저서나 강연회 등에서 한 발언들을 보면 민족사학에 조금이라도 눈이 뜬 사람이라면

분노가 먼저 치솟아 오를 것이다.





1976년 발표한 <한국고대사 연구> 라는 책에서 만리장성이 우리나라 황해도 수안에서 시작되었다는

궤변을 늘어 놓은 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 씨는 몇 해전 타계하였고

죽기 전 친구의 설득으로 조금이나마 뉘우치고 세상을 떠났다.

다음으로 유명한 자는 이기백 교수가 있다.

이기백 교수는 한국사 신론 서문을 <한국사는 아시아 대륙의 한 끝에 붙어 있는 조그마한 반도의 역사다>

라고 시작하면서 그의 학문적 본질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심각한 것은 한사군을 한반도 안에 끌어다 서술한 <한국사 신론> 같은 이 자의 책이 영어로 번역되어

외국인에게까지 한국사를 그릇 인식하게끔 만들고 있다. (필자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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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바로 세우자 >

썩어 퀘퀘한 냄새를 풍기는 것중 최고를 꼽는다면 식민사관에 찌든 사학계의 원로대신들이 아닐까?
한국의 사학계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지 경향신문 `99년 2월 4일자 - 14면을 요약한다.

영어권 국가의 첫 일본미술사 박사이자 16권의 관련저술로 일본문화훈장을 받은 존 코벨(1910~96)여사의

[한국문화의뿌리를 찾아]는 두 가지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일본문화의 뿌리는 한국이라는 것과 한국의 일부 고고·미술사학계가 부패된 시신처럼 썩은 냄새를 풍긴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일의 유물에 담긴 미적 성취와 연대기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한·일문화의 영향관계를 증명한다.
역사책은 때때로 왜곡·조작되지만 예술사는 인간이 어떤 생각과 감정을 지녔는지를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야토기는 보잘것없는 일본 하지키(土師器)토기를 밀어내고 그곳 궁중토기로 쓰였다.
가야 기마족이 369년 배를 타고 일본을 정벌한 사실을 알리는 유물이 널려있는 것이다.

또 70년대에 발굴된 나라(奈良) 다카마쓰 고분(高松塚)은 8세기에 사망한 일본 제42대
문무(文武)왕의 비빈 또는 후궁의 묘이지만 현무·청룡·백호가 그려진 「100% 고구려무덤」이다.
8세기 일본은 한국 세력을 흡수하고 당나라 영향권에 있었다』라고 주장한 일본의 견해를 뒤집은 셈이다.

시베리아 무속도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서 신토(神道)라는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고구려·신라 고분벽화에 나오는 신성한 백마 숭배사상이 대표적 사례다.
1945년 8월15일 일왕은 자신이 타고다니던 백마를 맥아더에게 넘기는 것으로 항복을 표현했다.

저자는 그러나 한국 학자들이 스승의 이론을 뒤집는 유물이 나오면 발표를 하지 않거나 재매장시키는 경우가 있다고 비판한다.

78~86년 한국에 머물며 한국미술사를 연구한 그는
『경북대박물관에 소장된 한 미공개 금관은 가야가 신라보다 앞선 문화를 지닌 사실을 나타낸 유물』이라면서
『신라가 모든 면에서 가야보다 앞선다고 주장하는 원로가 죽거나 은퇴해야 사실이 밝혀지리라』고 극언했다.

또 호암미술관 소장 가야금관(국보 제138호)은 방사성 탄소나 열형광에 의한 과학적
연대측정의 절차 없이 3~6세기 유물이라는 「안전한 꼬리표」를 단 채 전시된다.

가야금관이 신라금관보다 시대적으로 앞서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일부러 신라보다 뒤늦도록 연대매김을 한다는 설명이다.

역사는 진실을 전해서 후세에 교훈을 주어야 한다. 史5적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면....

자신들이 이뤄놓은 업적이 거짓으로 포장되었을지라도 그것을 비호하고 진실을 호도한다면
후손들에게 자신이 평가 받을 미래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독재자나 폭군과 다름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수가 옳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무조건 진실은 아닌 것이다.

불행하게 현재의 역사는 강단사학자들에 의한 독단적이고 철의 장벽보다 더 두터운 폐쇄성속에서 썩어가는 시체이다.(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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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의 맥을 찾아서



박 성수



여러분들 중 제 말씀을 들어보신 분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제가 돌아다니며 역사강의를 하면서 필요를 느껴 책을 하나 만들어 보았습니다. 여러 곳에서 강의를 한 내용을 녹음을 해 주신 분이 있어서, 그것을 교정해서 '한국사 비판(韓國史 批判)'이라고 이름을 붙여 보았습니다.

요즘 한국사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고 저도 그대로 썼습니다만, 국사(國史)라는 말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국사의 내용은 민족사여야 합니다.

왜냐 하면 국사가 일본사람들의 말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본시 우리는 국사라는 말을 썼습니다. 한국사라는 말은 요즘 일본에서 일본사라는 말을 쓰니까 이것을 본받아서 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국사라는 말이 옳은 것입니다.

이 국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먼저 지적하고 싶은데, 이유는 우리 민족에 있어서 오랜 역사신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역사신앙이 바탕이 되어서 우리 국사책이 만들어져야 할텐데, 거꾸로 고고학을 중심으로 고고학적 유물이 나와야 어떤 역사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고고학적 유물은 나중에 나오면 좋겠지만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제의 민족말살의 농간인 단군조선 부정과 우리 민족의 역사신앙 부정에서 아직까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군사실론 주장은 불건전한 사상인가 단군조선 논쟁은 상당히 오래된 논쟁입니다.

그 논쟁사를 여기서 말씀드린다면 책이 한 권이 될 정도로 단군논쟁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조상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많은 논쟁중 단군논쟁이야말로 죽기 아니면 살기의 대논쟁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 논쟁은 미해결의 상태에 있습니다.

『한국사 시민강좌』라는 것을 이기백 교수가 펴내고 있습니다. 이 책이 만부씩이나 팔린다는 얘기를 듣고 저는 통탄해 마지 않았습니다.한국사 시민강좌 제 2권은 완전히 단군을 신화로, 도깨비로 만드는 특집시리즈였습니다. 또 이기백 교수가 『단군신화론』이라는 책을 내면서 자기 할아버지를 귀신으로 만들고, 그것이 과학적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비록 표현을 완곡하게 쓰고는 있지만, 이것은 강력한 단군부정론입니다. 그 책에 '단군신화에 대한 얘기를 할 때면 한국인들은 저으기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는 것은 자기이지, 저는 조금도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더 살펴보면 '우선 그것이 한국민족의 건국신화라 믿어지고 있는만큼 민족과 더불어 고이 받들고 간직해야 할 성질의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괜한 소리입니다. '그러나 한편 오늘날의 상식에 비추어 볼 때 문자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이 신화는 부정되어질 수밖에 없을 무가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서의 상식은 자기 상식이지 남의 상식은 결코 아닙니다. 제가 일본교과서를 보고, 동경에서 "당신네 일본말은 왜 그렇게 모호해?"라고 했습니다. 일본문화를 도자기문화라고 합니다.

한마디 속에 여러가지를 집어 넣어서 어중이 떠중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예를 들어 '하이'라는 말을 영어로 예스(Yes)라고 번역해서는 안됩니다. 하이라는 말에는 예스도 들어가 있고 노(No)도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스 노가 분명치 않은 말이 너희말이 아니냐? 말부터 분명히 하라!"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기백 교수는 '단군신화의 문제점'이라는 글에서, '오늘날 한국인의 마음 속에는 단군을 신화라 생각하는 쪽과 반대로 단군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 쪽이 서로 대립되어있는데, 신화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의 상식이요 사실이라 믿는 쪽이 상식 밖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기 스스로 주장하는 것이겠지만, 이러한 주장은 책임회피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우기 그는 '그런 상식 밖의 믿음을 가지고 신문과 잡지에 단군을 우리 할아버지라고 떠드는 것은

불유쾌한 일이다'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 자체를 말살하려 했던 일본인들의 논리를 그대로 계승 발전시킨 주장인 것입니다.단군을 모호하게 만든 최초의 사람은 육당 최남선이라 생각합니다. 육당 최남선을 아주 숭배하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죠. 이름을 거명해서 죄송하지만, 고려대학의 홍 모교수가 그런 사람들의 일부입니다. 최남선은 단군을 무당이라고 했습니다. 두계 이병도 선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두계 선생은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생전에 저는 그 분과 대화도 같이 했습니다. 두계 선생을 비롯하여 그 일단의 사람들이 단군신화론을 주장한 글들을 모아서, 『단군신화론집』(1988년 세문사)을 펴냈습니다.

이 책 서문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단군사실론을 주장하는 것은 불건전한 사상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불건전한 사람이고 자기는 건전하다는 건데, 도대체 이런 적반하장도 있습니까?


북한의 사학과 정인보 선생

여러분들이 잘 아시듯이 북한의 사학은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고대사 부분, 적어도 상고사 부분에 대해서는 잘했다고 박수쳐 주고 싶습니다.그러면 왜 그렇게 되었는가, 애석하게도 6 25 동란 때에 납북되신 분들 가운데 위당 정인보 선생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북한의 상고사 부분이 잘 되어있는 것입니다.

위당 선생은 단재 신채호 선생과 가까운 사이었습니다. 단재 선생하면 조선상고사가 유명한데, 단재 선생의 조선상고사는 당시 조선일보에 연재되다가 일제에 의해 중단되었습니다. 단재는 여순감옥에서, "내 시체는 광복이 되기 이전에는 압록강 이남에 묻지 말고, 나를 태워서 그 재를 서해에 뿌려다오"라고 유언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신의주 건너 안동에서 위당과 단재가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위당은 상해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고 단재는 막 가는 길이었는데,단재는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모르지만 큰가방을 들고 가는 중이었습니다. 위당이 물었습니다. "자네 그것 뭔가?" "알 것 없어." 위당이 살짝 보니까 동국사략이었습니다. 복사기가 없는 때라 단재는 그것을 손으로 베껴서 잔뜩 짊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비가 없는 것 같았지만 돈을 주면 받지 않을 것 같아서, 위당은 단재가 화장실 갔다오는 사이에 몰래 이불 밑에다가 살짝 여비를 넣어 주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위당이, "자네 일어나면 이불이라도 개야 할 것 아닌가?"해서 단재가 이불을 개 보니까 그 밑에서 돈이 나오게 되었죠.

단재가 말하기를 "어! 아직 돈 남은 게 있네!" 그래서 그것으로 상해를 거쳐 북경으로 갔다는 그런 일화가 있습니다.박은식 외에 단재는 우리 민족사를 수호한 분인데, 그 분이 죽으면서 그 맥이 끊겨 버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위당은 한학자입니다.

위당이 단재의 뜻을 계승해서 동아일보인가 어디서 '5천년 조선의 얼'이라는 글을 연재했는데, 이것이 해방 후에 지금의 서울신문출판부에서 『조선사연구초』라는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이 책을 보면 단군조선을 사실로서 해석하는데 확실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단군조선을 증명해 나가야 합니다. 정인보 선생이 납북되면서 남한에는 두계가 우리 역사학계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애당초부터 불건전사상이고 어쩌고 하는 이런 사고방식이 퍼지게 된 것입니다.



역사를 보는 눈

제가 대학을 다닐 때는 역사를 과학으로 여겼고, 그 역사의 법칙성에 굉장한 매력을 느껴서 역사의 법칙성을 찾아 헤맸습니다. 자나 깨나 법칙성을 찾아 다녔습니다. 지금에 와서 말하는데 법칙성이라는 것은 거짓말입니다.역사를 과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미신입니다. 역사는 철학이고 교훈입니다.

이렇게 역사를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래서 역사신앙이라는 것을 중시해야 합니다. 역사신앙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역사를 보아야 해요.그것이 설혹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역사는 오늘날 해석을 얼마든지 달리 할 수 있습니다. 콜링우드가 역사적 상대주의를 얘기했듯이, 사실 역사라는 것은 인식이 중요한 것이지 역사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민중론자에 따르면 역사는 고통받는 민중의 역사가 됩니다. 용감한 민중의 투쟁사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통일론자입니다. 우리가 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통한 어떤 중심사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중심사상의 가장 예민한 부분이 단군조선입니다.이 단군조선을 일본인들의 식으로 해석하여 신화라고 본다면, 이것은 역사 밖으로 내던져지고 우리 역사는 2000년도 채 안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원시시대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고조선을 고대국가로서 정립하고, 그 역사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바와 같이 2000년이라는 역사가 있었다고 하면, 우리는 반만년 역사를 가지게 됩니다.이에 대해 우리 교과서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아십니까?

우선 고고학에서 말하는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三國時代初期)는 무엇입니까? 아니 그럼 가짜 삼국시대가 있고 진짜 삼국시대가 있다는 말입니까?5세기 이전은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일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김원룡씨가 우리 고고학계를 리드하고 있습니다. 저는 김원룡 선생에게 배웠습니다만 흑백은 분명히 가려 놓고서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대문제

우리 민족은 족보에 대단히 신경이 예민한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임진왜란을 당해서 족보가 전부 불타 없어졌는데, 아마도 일인들이 족보 많이 가지고 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후에 족보가 한 두개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뒤부터 우리 족보는 컨닝페이퍼같이 조그만하게 호주머니에 들어가게끔 만들어졌습니다. 다른 것은 모르지만 족보를 잃어버리면 큰일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불나면 이불부터 꺼내고 그러는데 당시에는 이불이 아닌 족보부터 꺼냈고, 전쟁이 나면 족보부터 가지고 달아난다 할 정도로 우리는 족보민족입니다. 세계 족보를 연구한 어느 학자가 마지막으로 한국에 와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진작에 여기 와서 공부할 걸 엉뚱한데 가서 공부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족보 중의 족보가 우리 민족사의 첫장인데 지금은 이 첫장이 찢기고 없습니다.

그래도 서울에 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거리를 다니는 걸 보면, 자기 시조가 도깨비나 귀신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마냥 즐겁게 웃으면서 거리를 거닐고 있다는 겁니다.이것은 참으로 한심스러운 얘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5천년 역사라는 연대를 확실히 그어 놓은 연후에 강역문제로 들어가야 합니다.



강역문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고조선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박지원이 중국에 갔다 오면서 기행문을 썼지요. 그런데 이게 불온문서라 해서 문제가 되었지만, 그 내용은 세세한 것까지 다 기록되어있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참으로 명작입니다.

일본 갔다온 이야기로는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기행문은 도저히 따를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외국인들도 일본을 많이 다녀갔는데, 신유한의 소위 일본문화비판인 이 기행문을 따를 것이 없다고 합니다. 열하일기의 박지원이 고조선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고 했는데, 지금의 이기백씨는 평안도 사람으로서 대부분의 평안도 사람들이 평양을 고조선의 평양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 자신도 그런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어느 정도 저는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고조선의 평양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서, 백두산에서 흐르는 물이 송화강이 되었고, 그 송화강가에 평양이 있었습니다.

단재에 따르면 지금의 하르빈(하얼빈)을 말합니다. 하르빈은 바로 완달산이 있는 곳이며, 완달의 '달'은 달구벌(達丘伐)할 때 달이며, 달성공원 할 때 '달'은 곧 산이란 뜻입니다.배달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배달할 때의 '달'은 여러 설이 있지만, 이것은 백산을 말합니다. 백두산이라는 얘기입니다. 가장 성스러운 하늘에 제사지내는 산이라는 것이며 바로 성산입니다.

성산에는 반드시 성림이 있습니다. 홀리우드(Holy Wood)가 있다는 겁니다. 영화관이 아니라 성스러운 수풀이 있습니다. 그 수풀에 신이 내려오는 단군신화가 있습니다.이 단군신화에는 남성위주사상이 있는데, 이것은 당시 사회가 농경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북한의 연구가 제대로 된 것입니다. 아까 얘기한 위당이 납북되는 바람에 그 제자인 리지린이란 사람이 제대로 고조선을 본 것입니다. 물론 2000년까지는 소급하지 못하고 서기전 10세기밖에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지만,

그래도 고조선의 실체를 연구하는데 정력을 기울였습니다.그러나 대한민국의 학자들, 특히 대학의 강단을 점령하고 있는 학자들은 단군을 신화로 강요하고 있습니다. 단군에 대한 얘기는 대종교에서 많이 하는데, 대종교가 창교되기 이전에 단재는 독사신론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불과 나이 20대에 쓴 글입니다. 그 나이에 그러한 글을 썼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천재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아까 얘기한 바와 같이 단재는 고조선의 평양은 송화강가의 하얼빈으로서 완달산이 보이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번에 제가 하얼빈을 가본 적이 있습니다.

하얼빈에 간 것은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쏜 플랫폼을 보기 위해서 였는데, 완달산은 멀어서 가질 못했습니다. 완달산에 갔었더라면 그 백산에서 확인해볼 것이 있었어요. 저는 완달산을 백산이라고 생각하는데, 백산의 정상에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는 마당이 있습니다.제단이 있으면 더욱 좋은데 제단이 없다고 하면 마당이라도 확인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거기에는 마당이 있는 산꼭대기가 많다고 합니다. 누가 그렇게 했을까요? 우리 민족이 그렇게 해놓은 겁니다. 중앙대학의 김 모교수가 저에게 "박선생! 거기 산꼭대기에 운동장 같은 것이 있는 데 그게 뭡니까?"하고 물었어요. 저는 "바로 그것이 천제지내던 곳입니다"하고 답했습니다만,

제가 89년도에 백두산에 올라갔을 때 바로 옆에 제단이 있는 것을 모르고 연길에 가서 연길박물관에서 전시한 사진을 보고서야 제단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단 외에 정자가 있는데 지금 그 흑백사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그 위치를 확인했습니다. 백두산 정상에 올라서면 천지가 보입니다. 천지를 보기 위해서는 언덕에 올라서야 합니다.

언덕에 올라서기 전 오른쪽에 평평한 데가 있는데, 거기에 정자가 있었습니다. 천제지내는 곳이었죠. 불교의 것은 아닙니다. 일설에는 여진족의 것이라고 합니다만 어쨌건 거기엔 제단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곳이 천제를 지냈던 장소라는 것은, 단군기행을 경향신문에 일년동안 연재하면서 이와 비슷한 장소들을 많이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삼랑성

당시 저는 일본의 대마도와 오끼나와를 돌아서 경도 옆의 대진의 신라의 숲이라는 곳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일본말로 하면 시락이라고 해야 하는데, 거기서는 신라라고 우리 발음을 그대로 하고 있었습니다. 왜 거기 신라의 숲이 있는가, 거기에 신라 삼랑의 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라의 삼랑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일본사람에게 "신라의 삼랑이라는 게 누구요?"하고 물어 보니까, 말하기를 그 당시 권력 다툼을 하다가 패한 패장이라고 했습니다. 이 내용은 아마 잃어버린 왕국이라는 소설 속에 나올텐데 저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단군, 환웅, 환인을 삼신이라고 하는데, 그 삼신의 세째가 단군이고 그 단군에게 세 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세 아들이 여러분이 잘 아시는 부루, 부소, 부여로서 부여는 만주 하르빈 지역에 위치한 나라의 지명으로 불리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지금의 충남쪽으로 내려와서 부여라 하고 산이름을 부소산이라고 했었습니다. 여기서 부소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실제 부소는 부싯돌이라고 해서 불을 발명한 사람이기도 합니다.삼천궁녀가 빠져 죽은 곳이 바로 부소산입니다. 부루는 부루단지라는 명칭에 남아 있습니다.

1년간 재배한 곡식을 가을에 추수하면 그 일부를 '부루님 고맙다'고 하면서 단지에 넣어서 1년 내내 그것을 신성하게 모셔 놓았는데, 바로 그 단지를 부루단지라고 합니다. 그 유습이 강화도 마리산 밑의 흥암리라는 곳에 남아 있습니다. 삼랑은 바로 이 부루, 부소, 부여를 일컬었습니다. 현재 삼랑성이라는 곳에 전등사가 있었는데, 예전에는 전등사가 아닌 천제단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불교신자가 있으면 죄송합니다만 중들이 와서 천제단을 헐어 버렸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보면 그런 얘기가 많습니다. 신단이라든가 당집을 뽑아 보았더니 그 안에 돈이 많이 들었더라, 그래서 그 돈 가지고 절을 지었다는 얘기가 많습니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와서 많은 민족종교를 훼손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백마총, 나라, 고려진

일본에 백마총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백마총은 오사까에 못미쳐 아까이시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것 같애요.백마총은 바닷가에서 보였다고 합니다. 경주에 있는 큰 왕릉처럼 이 백마총은 일본군이 신라군에게 패했다는 역사를 말해 주는 증거라고 합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때는 북진정책을 폈고 장수왕 때는 남진정책을 폈다고 하는데, 이 남진과 북진은 진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진출의 증거를 찾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북경의 바로 가까운 곳에 고려진이 있습니다. 그 고려진은 고구려군이 군사기지로서 설정했던 도시였습니다.백마총뿐만 아니라 일본의 나라도 신라인이 가서 세웠고, 그래서 야마토국가의 건국자는 바로 신라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부분을 일본서기는 전부 왜곡해 버렸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일본서기 안에 한국말로 동요 같은 것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한 재일교포에 의해서, 일본어 가운데에는 약 3,000단어가 우리 한국말이라는 책이 나와서 많이 읽히고 있다고 합니다. 박병식이라는 그 책의 저자는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박병식이라는 분은 트로이의 성을 발굴한 독일의 슐레이만과 같다고나 할까요?

슐레이만은 빈털털이에 고아였는데, 네덜란드에 가서 많은 돈을 벌어 무역회사 재벌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는 갑자기 모든 것을 다 팔아 치운 뒤 돈을 은행에 집어넣고, 마누라와도 이혼하고서 그리스에 갔습니다. 그리고는 발굴을 시작했습니다. 헤로도투스가 쓴 역사의 한 내용인 일리아드 오딧세이에 나오는 곳들을 발굴한 것입니다.

가장 큰 발굴은 터키에 있는 트로이의 성이었습니다. 삼층으로 된 그것을 발굴했는데, 그 모든 것을 터키정부에 넘겨주고 자기는 유물 하나 가지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그 때 슐레이만은 전문가가 아닌 재야고고학자였기 때문에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의 주장을 믿지 않았습니다. 전부 저놈 미친 놈이라고, 한국의 재야사학자들을 미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처럼 손가락질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고고학자들이 슐레이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박병식이라는 분이 일본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서 그 돈으로 역사연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온 책이 [일본어의 비극]이라는 책으로 상당히 읽혀졌다고 합니다. 지금은 한 세권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우리 한국인 가운데 있다는 것을 여기 강단에 서 있는 역사학자들한테 얘기하면, 그 사람을 정상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과연 어느 쪽이 정상이 아닐까요?


머리가 크고 키가 큰 민족

저는 고조선을 넓게 대륙국가로 보고 그 때 우리의 국민성은 미약하지 않고 무강했다는 가정을 세웁니다.중국측의 기록을 보면, 우리 한국사람들은 대단히 키가 큰 대인이고 머리가 크다고 합니다. 또 안면이 넓다고 합니다.

제가 중국의 연변에 가서 얼굴이 둥글둥글한 사람을 보고 조선족이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합니다. 달처럼 둥글둥글합니다. 이것은 북방민족의 특색이라고 합니다. 광대뼈가 나와서 안면이 넓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투할 때는 불리하다고들 합니다. 실제로 남방민족인 흑인이나 백인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들의 머리는 골프공만합니다. 조그만해요.

이에 비해 한국사람은 팔등신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축구공만한 대량컴퓨터를 장착하고 있기 때문에 머리가 좋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류학자들 사이에서 다 증명이 된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지금의 서울의과대학인 경성의과대학에서 이에 대해 일본교수가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머리가 크면 머리가 좋다'라는 것이 법칙인데, 조선인만은 예외로 '머리가 큰데 머리가 나쁘다'라고 강의를 하니까 김아무개라는 학생이 벌떡 일어나서 의자를 들고 강의하는 교수의 이마를 내리쳤다고 합니다. 유혈이 낭자할 정도로 쳐서 그 학생은 퇴학당했습니다. 그 학생은 퇴학당하자 사립 세브란스로 가 공부해서 의사가 되어 만주땅에 유배당하듯이 일하다가 8 15해방 때 서울에 왔는데, 아주 독립유공자처럼 오더라는 겁니다. 사실 큰일 한 것이죠. 이마를 내리쳤으니까요.

사실 옛 기록에 나온 것처럼 당시 우리 민족은 머리가 크고 키도 큰 그러한 장신민족, 거인민족으로서 인류학에서 말하는 쟈이언트(Giant)민족이었습니다.

지금은 평균신장이 170cm정도인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민족의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180cm는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평균신장이 되어야 합니다.그런데 왜 이렇게 줄어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옛날에 일본으로 갑자기 장신민족이 들어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라사람인데 그 이동 루트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일본의 동해안쪽에 가보면 한국의 어부들이 배에서 버린 라면봉지 같은 것이 흘러가서 쓰레기장이 되어있습니다. 일본에 가니 직접 그것을 보시겠느냐 하더군요. 그래서 아이구 그것 봐서 뭘하냐 했는데, 하여튼 옛날의 그 항로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미야따라고 있죠, 북송선이 떠났던 항구인데 거기 가면 여러가지 볼만한 것이 많다고 하더군요. 그 항구 옆에는 호수가 있는데 호수를 지나 경도를 거쳐 나라로 가는 코스입니다.

코스 주변에 쭈욱 산이 있는데 그 산의 이름들이 전부 한국계 즉, 백산계입니다. 백두산계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그러한 만리대국을 만들었던 우리 민족의 시대를 총각시대라고 합니다. 여자로 말하면 처녀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결혼이라는 것은 불교라는 외래종교가 들어오면서부터입니다. 그 후 도교도 들어오고 유교도 들어왔는데, 그 때부터 우리는 독신생활을 청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전 외래종교가 전혀 들어오지 않았을 때, 즉 우리 고유문화 속에서 살던 총각시대 때가 그리운 것은 그 때는 우리 민족이 무강했고 상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교가 들어온 이후 무를 멸시했던 것은 아닙니다.

고려 때까지 경당에서 글을 읽고 습사(習射)를 했다고 합니다. 습사라는 것은 활쏘기를 했다는 것인데, 요즘 말로 체육시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오면서 습사를 아주 경멸하게 됩니다. 하늘천 따지만 중요하게 여겼습니다.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은 자꾸 문약해지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침략을 여러차례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침략으로 대륙의 강역을 상실한 후에 압록강 이남으로 강역이 축소된 반도국가가 됨으로써 완전히 침략을 받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전에는 물론 침략을 하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사는 오히려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퇴보하고 오그라들고 늘 구질구질하게 되어 가는, 역사법칙에 역행하는 그런 과정을 밟았다는 것입니다.


선 비

옛날부터 우리 선비들은 딱딱한 면이 있었습니다. 알렌이라는 분이 박치영이라는 사제를 미국에 데리고 가서 이 선비를 놀래키려고 엘레베이터에 태웠습니다. 타니까 방이 막 움직이죠. 놀래기는 커녕 기차를 타도 조금도 놀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워싱톤에서 놀랬다고 합니다.

당시 대통령이 파티를 여는데 여자들이 앞가슴이 파인 옷을 입고서 악수를 할려고 하니까, 돌아서서 어디서 온 기생이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대통령 부인이라고 하니까 깜짝놀랬다고 합니다. 와! 과연 오랑캐족이구나 하고 생각했다는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알렌이 전한 내용이니까 사실입니다. 정말 단정하게 갓을 집 안에 들어와서도 쓰고 다녔고 파티에 초청되어서도 갓을 쓰고 다녔다고 합니다.대통령이 여는 파티장에서도, "여기는 대통령이 있는 곳이니까 갓 좀 벗어주시오"라고 해도, 한국에서는 방 안에서도 갓을 쓰게 되어있다고 하면서 벗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오만하고 무뚝뚝한 것 같은데, 지금도 한국인은 잘 웃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이에 반해 일본에 가보면 일본사람은 전부 잘 웃습니다. 특히 일본여자들은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국 바로 건너편의 구주의 여자들은 무뚝뚝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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