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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비난한 글을 읽고, 이승만과 국회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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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25 안병섭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 댓글 0건 조회 2,576회 작성일 2003-03-07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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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비난한 글을 읽고



그래도 조중동이 한국의 여론을 오도하고 역사를 왜곡한 것 보다는 훨씬 낫다. 광주 학살 살인마 전두환을 구국의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글을 써대며 정권에 아부하고 조선기자출신 허문도, 최병렬을 정계 핵심에 밀어넣고 급기야 판매부수 1위의 동아를 따돌리고(동아도 친일족보임에는 예외가 없지만) 성장한 것은, 이승만이 친일거두 인촌 김성수와 손잡아 정권을 나누고, 패망한 일제가 남기고 간 귀속재산을 끼리끼리 나누어 오늘날 정경유착(정경유착은 이승만이 시작)으로 친일 재벌을 만들게 하고, 조선이 이승만과 손잡아 그가 씌워준 반공주의로 친일의 딱지를 떼어냄과 동시에 그들 친일파들의 원죄를 자유언론 창달자로 (조중동)또는 명망있는 위선적 교육가로(모윤숙,김활란 이대,김성수 고려대 등) 변신하게 된 더러운 과거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 아니었는가.




조선은 틈만 있으면 이승만 추켜세우기 행사와 기사를 선보이고 있는데 이는 역사를 왜곡하는 아주 추악하고 더러운 행위이다. 이승만은 결코 애국자가 아니었다. 그는 정권획득을 위해 현재의 헌법에서도 국통으로 삼고 있는 상해 임정의 김구를 제거하고 친일파를 자신의 정치세력 홍위병으로 내세워 반민특위를 강제해산한 것은 물론 친일파를 청산하려던 반민특위 위원을 암살지령까지 내린 인물이다.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이승만부터 시작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현행헌법 전문을 다시보고 확인해 보라 또한 헌법 정신은 3.1운동 정신과 4.19정신인데 그것이 무어냐 바로 3.1 독립운동 정신과 이승만의 반부패, 반무능,반독재 아니냐. 그럼 한국의 헌법정신은 바로 한마디로 줄여 3.1 독립운동 정신과 반 이승만 정신이다.

오늘날 세종로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은 박정희때 그곳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을 철폐하고 세운 것인데(4.19 시위대가 현재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 자리에 세워져 있던 이승만(李承晩) 박사의 동상을 무너뜨린 뒤 새끼줄로 묶어 질질 끌고 다녔는데 현재의 4.19정신을 이어받았다 한 바로 그 헌법정신은 바로 부패, 무능,독재의 상징인 이승만을 쓰러뜨린 정신인데, 박통때 바로 그 자리에 지금의 충무공을 세웠다) 이러한 민족반역의 이승만 동상을 반 이승만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헌법정신으로 뽑아놓은 국회의원이 바로 그 헌법정신을 구현하는 국회에 동상을 세웠다. 헌정사상 가장 더러운 결의”Click here! , 국회에 이승만동상이라니-민족문제연구소Click here! 그게 누군가. 바로 한나라당의 목요상이 이승만 동상건립추진위 위원장이었다 ) 그 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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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자문위원회는 99년 4월28일 박준규 국회의장이 위촉한 고병익(전 서울대 총장) 채문식(전 국회의장) 김재순(전 국회의장) 이만섭(전 국회의장) 류근일(조선일보 논설위원) 송진혁(중앙일보 논설위원) 남중구(동아일보 통일연구소장) 등 7인으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5월14일 10명이 모여 상 건립을 결의했다. 운영위에서 결의한 ‘공청회 개최 등 폭넓은 의견수렴’과는 거리가 먼 과정이었다. 이 건은 99년 11월26일 국회 운영위원회의 ‘만장일치’ 결의를 거쳐 본회의에 회부됐다. 당일 출석 의원은 박상천 위원장을 비롯해 이윤수 박찬주 방용석 송훈석 이훈평 이긍규 김고성 이재선 이부영 이규택 권기술 남경필 박원홍 오양순 황우려 의원 등 총 16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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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불과 몇 년전 밝혀진 일이지만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참고) 6.25 당시 서울 후퇴시 전국에 수용된 보도연맹 포함 114만명을 살해했다. 그는 만주 관동군 사령부 일개 헌병 보조원 출신으로 독립운동가를 전문적으로 사냥하던 일제 주구 김창룡을 특무대장으로 삼아 당시 내무장관 조병옥도 허수아비로 따돌리고 이들 양민을 살해지령을 내려 수많은 사람들이 군경 합동으로 무참하게 살해했다.


조선이 이승만을 추켜세우는 이유는 무엇이냐? 조선 사주 방응모의 친일전력으로 보아 드골정부 같으면 신문사 폐쇄조치에 재산몰수, 공민권박탈, 종신형 내지 교수형의 신세가 되었을 조선일보가 이승만의 친일파 옹호로 정치 홍위병화의 전략에 서로 부응해 이승만의 반공주의에 의해 자유언론창달자로 변신하여 온존하게 되었으니 결초보은으로도 모자라는 각골난망의 은혜때문이다.




이승만은 이제부터 역사를 다시 써 다시 자리매김해야 한다. 그는 한마디로 살인마다. 조선일보는 그러한 그를 경복궁에서 이승만전을 개최하여 민족의 애국자로 치켜 세운다. 이승만이 누군가 임정때 있지도 않은 직제의 대통령직을 사칭하며 명함을 미국조야에 돌리고 다녀 임정에서 추인한 다음 임정에서 불러들여 탄핵해 제거한 자다. 신채호는 무어라 했는가.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 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도 팔아먹을 역적같은 놈이라 했다.



단재 신채호와 같이 무장항쟁운동을 벌인 독립투사로서 성대 초대 총장을 지낸 심산 김창숙은 이승만을 보고 무어라 했는가. 이승만이는 서양에 가서 무쟁항쟁을 방해하고 외국년 엉덩이만 만지다 온 놈이라고 까지 극언을 한 매국노였다. 현재 미국은 독일의 참회를 촉구하고 비난은 해도 일본이 한국에 참회하거나 과거청산에 대한 문제는 별로 언급조차 하려 하지 않고 있다. 왜냐고? 지금은 점쟎게 인권을 외치고 있는 과거의 미국은 카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한 대신 일본으로부터 필리핀에서의 지배권을 서로 보장 받은 더러운 인종사냥의 제국주의 경력이 있기때문이다.



이것이 원죄가 되어 일본에 대해서는 위안부 문제가 나와도 과거청산에 대한 프로그램 문제가 수없이 한국인 사이에서 터져도 본체 만체 한다. 이승만이 과거 미국이 제국주의 하던 시절 이미 카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대세가 넘어간 상황에 외교전을 전개하고 다니면서 정통파 임정 무장항쟁주의를 방해하고 다녔다. 김구가 거지 헐랭이 옷을 입고 보천교에서 받은 독립자금으로 폭탄을 사서 숨기고 다니던 시절 송재 서재필이 송재일기에서 고백하듯 이씨 왕실의 후손이라 해서 자기가 보아도 그 사치와 방종이 도를 더했다 표현했듯이 임정으로 가야 할 미국의 독립운동자금을 거두어 가로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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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을 제자로 둔 송재 서재필마저 자신의 송재일기에서 이왕가의 후손인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그 호사와 사치가 한계를 넘었다고 비판한다. 상해임정의 더러운 뒷골목을 거지헐랭이 옷을 입고 그 속에 윤봉길 의사의 거사에 쓰일 폭탄을 숨기고 다닌 김구(백범일지 참조)와는 천양지차로 미국에서 상해로 보내져야 할 독립운동자금을 가로채 물쓰듯 쓰며 당시로서는 미국 최고위층이나 최고 상류층 인사나 탈 수 있었던 최고가의 크라이슬러를 몰고다닌 이승만


이승만은 한 술 더 떠 임정과는 전혀 상의 하나없이 임정의 공채까지 발행해 개인적으로 유용해 쓴 위인이며 유명한 구미원원회 사건으로 당시 일본과 함께 한반도와 필리핀에서의 상호지배를 인정한 식민지 제국주의 치하의 미 국무부에 엉뚱하게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구걸한 사대주의자다.(박용만의 하와이 독립운동단체 재산을 통째로 먹으려고 사기치다 박용만과 멱살드잡이한 일도 있다)생각해 보라 베트콩이 무장항쟁주의를 하여 오늘날의 월남이 되었지 이승만처럼 외교를 해서 나라를 세웠나? 베트콩이 통일 베트남을 위해 싸운것은 지구촌 제1의 패권국가 미국과 귀신잡는 해병으로 유명한 따이한이었다. 그들은 국력으로는 1000년을 가도 따이한과 미국을 잡을 수 없었지만 정신력 하나로 베트남을 통일로 이끌어냈다. 이승만처럼 제국주의 치하에서 말도 안되는 외교로 승부를 본 것이 결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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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전문에 3.1정신과 반 이승만 정신인 4.19정신을 계승한다 했지 이승만 정신을 계승한다는 말은 없다. 이승만은 오히려 임정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무장항쟁주의 독립노선을 방해하여 외교노선으로 당시로서는 황금 자금줄인 미주의 독립자금원을 차단했고 해방이후 미군정의 시다바리로 김구마저 암살했다

그런데 막상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을 독립시켜주겠다는 선언을 명문화하게 만든 것은 누구였는가. 외교론을 주장한 이승만의 공로인가. 그의 공로로 우리 대한민국이 독립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나? 아니다. 바로 이봉창의거 윤봉길 홍코우 공원 의거를 보고 일본 제국주의가 간담이 서늘해 진 것을 본 장개석이 6억 중국인민도 못 이룬 쾌거를 2000만의 조선민중이 이룬 것을 보고 크게 감동받아 김구를 흠모하게 되어 김구주석에게 대한독립의 명문화를 약속한 것이고 장개석은 충칭(중경)으로 도망갔을때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같이 따라오게 배려하여 중경 임정시대가 열렸다.


조선일보는 때만 되면 친미 사대주의자 서재필을 이승만의 스승이라 하여 추켜 세우고친일 매판자본가 출신의 송진우 장덕수 등까지도 애국자로 왜곡하는 신문이다.서재필은 독립신문마저 팔아치우려 했던 자다. 단재 신채호는 그랬다. 독립운동이라는 것은 나라를 빼앗긴 무산자와 나라를 뺏은 일제 유산자와의 투쟁이라고 그런데 일제하에서 유산자로 해외로 나가 박사를 받았다면(장덕수:에딘버러대) 그건 일제에 붙어 협력한 친일 매판자본가라고 일축했다.



실제 인촌 김성수의 소위 한민당 떨거지들은 일제가 무조건 항복하기 바로 직전 오끼나와 미군기지에게 일제가 무사히 귀국하는 과정에서 일제를 지켜줄 친일 인사로 명단을 작성해 과도정부 행정내각의 명단의 장본인들이었다. 친일이라는 범주에 줄서있는 조중동보다야 한겨레가 훨씬 낫다. 친일 수구가 판치는 곳에 새로운 국민주 형태의 대안 언론 한겨레가 나온 것은 수구파들의 문제제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를 비판하는 자들은 겉으로는 정치적인 입장을 내세우지만 개인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친일의 가정적 뿌리를 가진 자라 아니할 수 없다.



조동중을 끼고돌며 한나라당과 한 패를 이루었던 친일 수구파들이 이제는 시민사회단체 속에 끼어들어가 시민운동을 가장하고 앤티조선을 반대하고 있다.바른사회 시민회의가 명계남 문성근의 인터넷 시민운동을 조폭운동이라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안원전 21세기 담론 중)


이승만 동상 국회 건립을 찬양미화한 골빈 박준규 사진클릭nar403_spedit2_2.jpghot.gif안원전 담론 Click here! '국민의 힘' vs 한나라당-조선일보Click here!
앤티조선의 이유Click here!
친일수구의 역사왜곡 실례Click here!
노무현의 과제는 조중동 언론개혁Click here!
수구파는 친일 강단사학과 한 몸Click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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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살아생전 자신의 우상화 일환으로 북한의 김일성 동상보다 더 큰 81척(8층빌딩높이) 세계제일의 동상을 세운 미친 늙은이 우남 이승만 기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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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주체탑과 그보다 더 큰 남산의 81척 높이의 이승만 동상.(사진이 안보여도 클릭하면 보입니다)4.19의거에 의해 남산에서 밧줄로 동여매어 끌어내려지는 아주 귀중한 사진(당시 파고다 공원과 남산의 이승만 동상이 밧줄로 끌어내려져 밧줄로 묶여져 질질 끌려 다녔다). 이 사진에는 <*33-2 무너지는 독재 권력 남산에 세워져 있던 거대한 이승만대통령 동상이 4.19 이후 철거되고 있다.>고 설명되어있다 (『김천길 사진집』에서) 김일성 주체탑은 56년에 이승만이 남산에 세운 자신의 81척(7,8층 높이) 동상보다도 낮은 동상이다 신경림은 "별"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부른다. -죽산(조봉암)이 목매달리던 날 나는 울면서 한 편의 시를 썼다. 남산의 이승만 동상이 밧줄에 묶여 거꾸러지던 날 나는 환호작약하며 대취했다- 이승만의 동상은 일본의 지배 아래에서는 신궁이 있었던 서울 남산 중턱에 당시 돈 3억 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총 높이 25m에, 상 높이만 7m가 되는 큰 규모로 세워졌다. 이것을 만든 사람은 조각가 윤효중(창씨명 伊東孝重)으로 그는 당시 '미술계의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4.19에 의해 이렇게 끌어내려진 부패, 무능, 독재의 상징이 4.19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헌법하의 국회에 목요상을 위시한 넋빠지고 혼빠진 국회의원들이 다시 시대역행적 이승만 동상을 만들어 안치했다. 반 헌법적 작태임은 말 할 것 없으니 박준규 당시 국회의장의 위촉과 축사는 역사를 두고두고 비난받아 마땅하다.(안원전)



일제 때의 남산 조선신궁 자리에는 1956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하여 이승만대통령(李承晩大統領)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이 동상은 1955년 이승만 81회 생일을 기념하여 기공 건립한 것으로 신장 23.5척과 축대의 높이를 합한 높이가 81척에 달하는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동상으로 알려졌다. 또 1959년 가을에는 남산 상봉에 시민들의 휴식소와 관광명소가 되는 건평 40평의 새 정자를 짓고 이름을 「우남정(雩南亭)」이라 하였다



권력유착의 극치, 이승만 동상-리가원 <김창숙의 이승만 동상가를 차운하여>

-하늘이 남산을 내실 제는 사사로운 소유가 아니었으니, 백성을 모두 바라볼 제 바위와 바위로 덮였어라. 화강암 덩어리를 붙여서, 이 가까운 곳에 세워 놓고 서울을 온통 위압케 하였는가? 구리로 부어 만든 스물세 척 커다란 몸, 큰 비용과 공병의 힘 휘둘러가며 이루었네.스스로 공명한 당의 대두령이라고 하는 사람이,개돼지를 충동질하여 높은 덕인 듯 찬양케 했네.이로부터 바람에 마비된 늙은 여우의 동상. 삼 억이나 되는 나랏돈 헛되이 써 버려 말리었네.(중략) 이는 곧 구리 몸이요 생살로 된 몸이 아니니,늙은 도적놈을 찾아내라고 우리들 허정에게 외쳤네. 찾아도 잡지 못하자 분한 마음 더욱 뜨거워 구리 몸을 끌어내려 마음대로 깨뜨렸네. (생략)-
송우(Columnist & Ghostwrit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때의 권세(權勢)와 영광(榮光)을 영원히 기리려고 만들어 놓았다가 망치를 맞아 망가지고 자빠지는 기념비와 비석과 동상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모란공원에 세워진 '김재규장군묘'가 그렇고, 강원도 홍천 팔봉산 아래에 세워진 '전두환대통령공적비'가 그렇고, 서울 남산 공원에 세워졌던 '이승만대통령'의 동상이 그랬다. 이승만의 동상은 이승만이 대통령에 재직 중일 때는 남산 위에 우뚝 서 있었으나, 4.19가 나자 시민 학생들이 '모가지를 동아줄에 묶어 종로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는 수모까지 겪었다. 권력이 무엇인지, 인심(人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사건들이다."



 

-앞의 시는 1957년 8월 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여든 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세워졌던 동상이 1960년 4ㆍ19혁명 직후 철거되고 독재자를 미워하는 사람들에 의해 깨뜨려져 끌려다니던 광경을 그린 것이다. 이승만의 동상은 일본의 지배 아래에서는 신궁이 있었던 서울 남산 중턱에 당시 돈 3억 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총 높이 25m에, 상 높이만 7m가 되는 큰 규모로 세워졌다. 이것을 만든 사람은 조각가 윤효중(창씨명 伊東孝重)으로 그는 당시 '미술계의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부산으로 수도를 임시로 옮긴 직후 진해에 설치하기로 한 충무공 이순신 동상 제작이 경쟁 끝에 그에게 맡겨졌고, 그는 이를 성공적으로 해냄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동상은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이순신 동상 제작 또한 전란에 처해 있던 때였던 점과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는 것 때문에 일반에게 동상의 위력을 인식시킨 첫 사례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그는 "미술계의 영웅"이 되었던 것이다.(최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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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중 1941, 42, 43, 44 조선미술전람회에 네 번 연속 특전 1954 국전 심사위원, 대한미술협회 부위원장 1955 예술원 회원 해방 이후 이순신 동상, 이승만 동상, 민영환 동상 등 다수의 동상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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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001.jpg002.jpg008.jpg이승만 기념사업회 임원진Click here!
중앙일보 회장 홍석현과 정희경 및 위원인 전 연대 총장 송자. 현재 (사)건국대통령 리승만박사 기념사업회 회장에는 중앙일보사 홍석현(洪 錫炫)이 맡고있고 부회장 전 현대고 교장 鄭喜卿이 맡고 있 다. 역시 조중동의 한계를 벗지 못함을 알 수 있고 한국의 수구집단이 얼마나 두터운지 알 수 있다. 홍석현과 정희경이 역사관이 정립되지 못한 것은 언급할 것도 없지만 송자는 필자와 같은 대전고 동문으로 교육부 장관에 올랐으나 이중국적 문제와 리프팅 시비로 물러난 양심이 비뚤어진 인물이며 역사관이 채 정립되지 못한 덜떨어진 인물이다. 더욱이 국회에서 이승만 동상 건립 문제가 통과하는데 찬성표를 던진 어준선, 김범명 의원이 대전고 동문이라는 사실에 대해 더욱 자괴감과 수치심을 느낀다.*홍석현의 이승만관과 그 인연Click here! *홍석현Click here!
*정희경1Click here!* 정희경2Click here! *정희경3Click here!*C lick here!*정희경 한겨레 비리보도맨아래 참고 자료 Click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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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이승만이 나라를 세웠다고?"




언젠가, 모 신문사에서 '이승만의 나라 세우기'라는 제목으로 특집 기사와 전시회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그 신문의 언급처럼 그는 정말(법정에 선 두 전임 대통령과는 구별되는) 위대한 대통령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 대답은 '아니오'일 것이다. 즉 해방 50년을 맞이해 최근 사회 일각에서 벌어지는 이승만 되살리기 운동은 결코 '역사를 바로 아는 행위'가 아닌, 4월 혁명 정신을 모독하고 역사를 거꾸로 되돌려 놓으려는 망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이승만의 독립 투쟁과 대통령으로서의 행적을 요약해 살펴보고, 그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내려보도록 하자.

1. 독립운동을 분열시킨 이승만(1908년∼1940년대)
1908년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재미동포 전명운, 장인환 의사에 의해 암살당한 사건이 있었다. 이 때 유학생 이승만은 그 재판의 통역을 요청받았지만, '살인재판'의 통역은 원치 않는다며 이를 거절했고,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거사마저 '살인행위'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1918년 말부터 1924년까지 독립운동에 관여한 것을 빼고는 1930년대 말까지 독립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리고 평소 상해 임시정부와도 자주 맞서고 했는데, 미국에 안주한 후에는 무력투쟁, 義烈투쟁은 반대하고 위임통치를 청원하는 등 열강의 호의에 의존하는 외교활동에만 주력했다.
또한 이승만은 가는곳 마다 독립운동을 분열시켜 '이승만 가는 곳에 민족분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분파싸움을 심하게 벌였으며, 상해임시정부에 보낼 자금을 가로챘다는 비난을 수없이 듣기도 했다. 결국 이승만은 그후 임시정부의 탄핵으로 물러나게 된다.

2. 해방정국과 친일·민족분열 노선
이승만은 해방된 지 두달이 지난 1945년 10월 16일 귀국하여 독립운동가들과 임시정부를 멀리하면서, 지주·친일파를 대변하는 한민당과 짜고 친일경찰을 앞세워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진다. 그 후 대통령이 된 후에도 친일파 제거를 계속 반대했으며 친일파 처단은 민심만 혼란시키고 오히려 '통일'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친일파 처단을 위해 설치된 반민특위가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던 악질적 친일 경찰 노덕술 등을 체포하자 이승만은 즉시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고, 급기야는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1949년 6월 26일, 친일파 제거와 자주통일을 외치던 민족의 지도자 김구선생이 이승만의 심복들의 조종을 받은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암살범 안두희는 전쟁때 곧 석방되어 진급을 거듭하고 부호가 되었다고 하니, 과연 누가 사주했는지 짐작이 가고 남음이 있다 하겠다.

3. 반민주적 독재·타락정치와 한국전쟁
1948년 국가보안법이 공포됨으로써 이승만은 자주적 통일운동에 쐐기를 박고 분단체제를 강화하면서 정적이나 비판자들 까지도 빨갱이로 몰아 처형하게 된다. 그 대표적 인물이 평화통일론을 주장하면서 두차례 대통령선거에서 차점자가 되었다가 처형당한 조봉암 진보당 위원장이었다.
1949년에는 국회가 농민위주의 농지개혁법을 통과시키자 이승만은 이를 되돌려 보내 토지 상환액을 상향조정하는 반농지개혁법을 마련한다. 이외에도 국민방위군 사건과 중석불 사건 등을 통해 빽과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되는 일 없는 위대한(?) '빽의 나라' "사바사바의 나라'를 건설하게 된다.
또한 1950년 평소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이승만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6월 27일 새벽, 혼자서만 몰래 대전으로 도망간 뒤 서울 시민에게는 '안심하고 있으라'는 녹음 방송을 거듭한 후, 6월 28일 새벽 한강 인도교를 폭파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거나 다치게 하는 등 무책임하고 반인간적인 행동을 저지른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4. 정권욕과 독재정치의 말로
국회의원들을 물리력으로 탄압한 52년 부산정치파동이 있고난 후, 이승만은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를 절충했다는 발췌개헌안을 내놓고 국회의원들을 국회에 감금한 후 그 해 7월 4일 기립투표로 통과시킨다. .
이어 이승만의 대통령 3선출마를 청원하는 牛義馬義까지 동원한 대규모 민의 조작운동 끝에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그러나 극심한 관권 타락선거였음에도 이승만은 생각만큼 많은 표를 얻지 못한다. 당시 서울에서는 이승만의 득표가 선거유세 중에 사망한 민주당 후보 신익희 보다 훨씬 적게 나왔다고 한다.

이처럼 부패 독재 정치를 거듭한 이승만 정권은 1960년 3·15일, 상상을 초월한 최악의 부정선거를 저지른 끝에 드디어 4월혁명으로 타도되어 역사의 단죄를 받게 된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결국 이승만은 반민족·반민주적 독재자의 전형이었을 뿐, 언론에서 떠들고 또 순회 전시회를 할만큼 존경스런 대통령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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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이승만이 김구를 꺽고 대통령이 대었다고 하네염.......비리가 있었나여???/김구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고.....이승만은 미국에서 놀고....이승만이 이길리가 없는데.. 어떻게 이겼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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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현실과 이상의 차이입니다. ojskim 문제제기


이승만의 과거 경력중에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승만이 영어를 잘한다고해서 임시정부 미국대사 비슷한걸로 임명을 했습니다. 그러자 명함에다가 임시정부 대통령이라고 새겨서 미국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그게 문제가 되자 임시정부 측에서는 대외 이미지를 고려하여 진짜로 대통령을 시켜 줬습니다. 그때 생각에는 광복만 된다면 누가 하든 무슨상관이냐는 논리였죠... 해방이후 김구는 남북이 함께 공동선거를 치르자면서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 했습니다.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구요. 그리고 국내에 지지기반이 약한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친일파들을 끌어들여 자기의 지지기반으로 삼았죠.그때까지 상해 임시정부 출신들은 미군정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그틈에 미군정의 비호아래 세력을 키운거죠...

우리나라의 초대대통령 이승만에 대해서 평가해주세요..

"서프라이즈"에서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나왔을때 이승만대통령의 따뜻함에 대해서 감동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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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이승만 평가 henry78 문제제기


우리가 아는 그의 이미지는 글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것 정도인데요..장점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의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는 모습이 자주 보인는데 어쩌면 그만큼 잘못된 점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일제시에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직을 맡을 당시 하와이 교포 등 재외교포 국내인들이 어렵사리 모은 독립 자금을 유용해 결국 대통령직에서 탄핵받습니다.미국에게 우리의 신탁통치를 부탁하기도 해서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비판을 받았습니다.외교독립론을 핑계로 다른 독립군들 보다 안전하고 편한 미국에서만 활동했다.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가 조선에게 유익하다는 말을 한 미 외교관 스티븐슨을 저격한 전명운, 장인환의 변호를 살인이라는 종교적 이유와 박사 논문준비라는 핑계를 들어 거부했습니다.해방 후 미국이 그에게 정권을 주려했지만 대중들에게 이승만은 지지를 받지못했습니다.6.25시에 국민들에게 거짓말하고 먼저 도망했습니다.잘못된 집권욕으로 3.15 부정선거를 저질렀습니다. 후에 3.15부정선거의 경우는 그의 잘못 보다는 측근들의 욕심이라 하며 그의 잘못을 옹호하려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정말로 대통령으로 그의 무능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 대통령의 권력을 악용해 권력을 휘두르는측근을 단속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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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국회운영위, '의회지도자상 건립안' 심의 의결

국회운영위, '의회지도자상 건립안' 심의 의결
국회 운영위원회는 26일 전체회의를 열어 제헌국회의 의장과 부의장을 각각 지낸 이승만 전 대통령과 신익희 박사의 동상을 국회에 건립하는 내용을 골자로한 "의회지도자상 건립안"을 심의 의결했다. 운영위는 우선적으로 사망후 20년이 경과한 의회지도자 가운데 이 전 대통령과 신 박사를 동상건립 대상자로 선정해 국회 경내에 입상 또는 좌상으로 동상을 세우기로 의결했다. 또 제헌국회 의원을 지낸 장면 전 총리,3.4대 민의원을 역임한 조병옥 박사, 4.5대 민의원이었던 박순천 여사도 동상건립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동상건립 자문위원들의 추천이 있을 경우에 적극 추진키로 했다. 정태웅 기자 redael@ked.co.kr


한국경제신문 1999-11-26 14:4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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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내가 일제시대를 살았고...망명해서 독립운동을 하고...아직 조국이 해방되지는 않았지만...조국이 해방되었을 때 감투 한자리 하거나 어떤 보상을 바란다면 잘못된 생각일까?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바꿔 말하면 독립운동을 한 이들에 대한 보상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워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승만의 일생의 3/4를 평하자면... 꾸준히 반일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임에는 틀림없다. 비록 그 행동이 그 자신만의 권력을 위한 발로였을지라도 말이다.사실 그가 임시정부에 몸담고 있었을 때도...그 호칭을 대통령으로 고집, 그 자리에 올랐었고...(;나중에 대통령이란 명칭은 없어진다.)임시정부는 그가 독단 전횡을 일삼자 쫓아낸다. 그래도 그는 그가 가진 배경(미국)을 기반으로 구미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구미위원회; 독립운동(;특히 임시정부)의 최고 자금원이다. 재미교포들 말이다.)
그가 일관되게 주장한 독립론의 한 방향인 외교론에 대한 비판은 접어두고라도...그가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으리라...그런 그가 다른 이의 힘으로 해방된 조국에 돌아오게 된다.이미 임시정부측 인사들에게는 배제된 인물이었고...당연히 다른 독립운동 세력들과도 어울릴 수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감투 한자리 쯤은 받아 쓸 만한 지명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 권력의 자리를 따내기 위해 엉뚱한 선택을 한다. 그가 파트너로 받아들인 세력은 우리 역사에서 치욕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친일파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탁통치안에 대한 독립운동 세력들의 알력의 틈바구니에서... 최대 정적이었던 김구를 암살하고 결과적으로 분단된 땅 한쪽에서 대통령이 된다.지금 우리나라가 이 모양이 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반민족주의자 이승만이라는 얘기다.

정권이 정통성을 가지기 위해서는...이전의 부패가 일소되어야 한다. 이건 애들도 설명하면 알아들을꺼다. 대한민국 정권이 들어선 이후 숙청된 친일파가 몇명인 줄 아는 사람 있냐? 놀랄만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0 명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정통을 이어받아... 그거 거짓말이다.임정의 대표라 할 만한 김구를 죽인자가 잡은 정권이...어떻게 임정의 정통이 될 수 있겠냐? 대한민국 군인도 마찬가지...그 모태는 친일파다.만주 독립군의 전통은 눈꼽만치도 이어받지 않았다. 되려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이들의 대부분은 북한군의 주력이 되었고...6.25 초기는 독립군:친일파 의 구도가 된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이승만 동상 국회 건립에 찬성한 대부분의 미친 국회의원들...이승만은 국회를 멋대로 해산하고 독재를 행한 장본인이다.굳이 그런 식으로 자신들이 친일파의 후예임(;세보진 않았지만... 절반 이상일꺼다.)을 내세울 필요가 있는지 머르겠다. 하튼 이승만은 그가 3대 대통령 쯤이었을 때...자기 자신을 호칭할 때 ’짐’ 이라는 표현을 쓴다.너것이 전제국가의 왕이었냐?
필자가 가끔가다가 ’본좌’ 라는 호칭을 쓰는 것 보다 더욱 가소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저 정도면 정신병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머 정치하는 넘덜 대부분이 미친 넘이긴 하다만...결국 4.19로 하야하고...죽는 것두 외국에 나가서 죽는다. 그리고 쪽팔리게도 국립묘지에 묻힌다. - 그럴리야 없겠지만...내가 혹시 국가를 위해 큰 공을 세우고 죽더라도...국립묘지에는 절대 묻히지 않겠다. - ’대통령의 자리에 있던 십여년... 고작 일생의 1/8 에 해당하는 기간을 위해...반민족주의자라는 오욕을 뒤집어 쓰고,이 나라를 망친 장본인’이라는 평으로 이승만에 대한 이야기를 마칠까한다. ------------------------------------------------------
추가로 신탁통치에 대해 잠깐 얘기하면...신탁통치 반대=민족주의 신탁통치 찬성=빨갱이 라는 공식으로 배운거 있지?그거 거짓말이다.딱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위의 도식대로 설명하자면...신탁통치 반대=반민족주의 신탁통치 찬성=민족주의 가 더 맞는 얘기다.혹시라도 궁금한 것 있으면...멜 쎄리던가...내가 쓴 글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도...멜 쎄리시고... 2002년 1월 23일 조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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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년은 김수영이 죽은 해다. 이에 대해 이어령은 말한다. '아무리 추워도 가야금으로 불을 때선 안된다', 멋진 말이다. 더 멋진 말도 있다. '화가가 붉은 꽃을 그렸다고 하자. 공안원은 왜 하필 붉은 꽃이냐고 심문할 것이다. 이게 잘못된 것이라면, 이른바 좌파적 평론가가 붉은 꽃이기 때문에 예술적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못지 않게 잘못된 것이다' , '4.19가 끝나고 이승만 사진으로 밑씻개를 하자는 시까지 나왔다. 정치적으로 탄압받는 시대의 예술가는 얼마나 살기 좋은가! 정부 욕만 하면 예술이 되니 말이다.' 그 이승만 사진을 떼서 밑씻개를 하자던 시인은 김수영이었다. 그는 또 전위문학은 본래 불온하다고, 살아있는 문화는 모두 불온하다고 했다. 시더러 침을 뱉으라고 하고, 미국인과 소련인은 이유도 묻지 말고 나가달라고 했다.
논쟁은 네 차례 오고 가다가 김수영이 그 '불온성'은 예술의 본질이니 뭐니 하면서 감 잡기 힘든 말을 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본질 얘기 시작하면 논쟁은 시들해지거나 주먹이 오가게 된다. 사실 문학 논쟁이 아니라면, 그래서 굳이 말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면 김수영은 좀더 솔직히 말했을 것 같다. '그래, 씨발, 나 이렇게밖에 못 쓴다. 나 무척 불온하고, 세상에 불만 무지 많다.', 이승만이 도망 안 간다고 했다가 대구로 가버리고 나서, 인민군에 끌려갔다가 포로수용소에서 갇혔던 김수영이 그 사진으로 그럼, 밑씻개를 하지, 달리 뭘 한단 말인가! 가끔 '가야금으로 왜 불을 때나? 난 그걸로 어느 놈 하나 패죽일란다'고 하는 시인들이 있었지만, 김수영이 그랬던 건 아니고, 나중 나중의 얘기이다.(뱅의 독서일기.39. 김수영 평전과 이어령 퇴임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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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경은 누구?


제보자에게 재갈을 물리다

<한겨레21> ‘비리사학재단’관련기사에 반론보도 청구소송 낸 청강학원의 몰상식한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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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청강학원의 학교 경영비리를 다룬 <한겨레21> 359호 기사.


<한겨레21>은 359호 특집 “학교가 니꺼니? 비리사학재단과의 전쟁” 중 “돈 벌려면 학교를 세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수도권에 있는 한 사학의 족벌경영 실태를 상세히 소개했다. 문제의 사학은 익명으로 처리했다. 족벌경영의 문제와 재산유용은 특정 사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상당수 사학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제보자 신뢰 않겠다” 각서를 쓰라고?


<한겨레21>에 나온 ‘수도권에 소재한 한 사학’은 학교법인 청강학원이다. ‘재단 이사장이었던 15대 국회의원’은 정희경 전 의원이고, 지금은 그의 아들인 이병훈 남양알로에 사장이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청강학원이 지난 7월 서울지법 서부지원에 이 기사에 대한 반론보도 청구소송을 제기해 <한겨레21>로서는 더이상 익명으로 처리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판단한다.

기사는 족벌경영의 폐단과 함께 사학이 정치권에 줄을 대는 까닭을, 생생한 사례로 제기했다. 15대 국회 교육위원이었던 정희경씨가 교육부 실무과장에게 전화해 전문대 평가결과를 문제삼아 호통쳤던 것을 제보자의 목격담으로 소개한 것이다. 당시 교육부 실무과장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정희경 의원이 전화뿐만 아니라 직접 교육부로 찾아오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청강학원쪽은 “당시 정희경 의원은 야당 소속일 뿐 아니라 전국구 출신이어서 교육부 관계자에게 호통치거나 그 밖에 위세를 과시한 적이 없다”는 정황해석으로 사실을 비껴간 반론을 청구했다.

더구나 청강학원쪽은 애초 <한겨레21>에 정식으로 반론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요구를 했을 뿐이다. “앞으로 제보자의 의견을 신뢰하지 않겠다는 부장의 친필사인이 담긴 서신을 보내달라”는 것. 이와 함께 두달 전 문화방송 팀에 보냈던 장문의 의견서를 참고하라고 보내왔다. 의견서 중 제보자에 해당하는 대목은 이렇다. “제보자는 학교에서 징계해임된 뒤 청강학원과 정 의원 일가에 깊은 사감을 품고… 각종 고소고발과 제보를 일삼다가… 그 주장이 모두 허위인 것으로 밝혀져 명예훼손죄로 구속되기도 한 지극히 부도덕한 인물입니다.”

정식 반론요청이 아닌, ‘각서’를 요구한 것은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 또한 사실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특정 제보자의 도덕성을 문제삼은 것은 상식을 벗어난 행위이다. 청강학원쪽은 <한겨레21>이 각서 쓰기를 거부하자 언론중재위에 반론보도 청구 중재신청을 했다. 기사에 언급된 거의 모든 사실에 대해 양쪽의 주장이 달라 중재는 불성립됐고, 반론여부는 법원에서 다투게 됐다.

언론을 상대로 반론보도 청구소송을 내면 거의 대부분 신청인이 이긴다. 법원은 설사 원문보도가 진실에 부합한다 해도 반론을 청구할 수 있고, 그 반론이 진실이라는 것을 반드시 증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반론권을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헌법에 보장된 인격권을 지키기 위한 조처이다. 그러나 이런 조처가 특정 이해당사자와 집단의 이익에 휘둘릴 때 법취지는 실종되고 만다. 이런 한계를 알고 있기에 법원도 ‘명백히 사실에 반하는 경우’에는 반론보도의 게재를 허용하지 않는다.


명백한 허위사실 주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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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청강학원의 재단 이사장이자 15대 국회의원이었던 정희경씨.(이용호 기자)


<한겨레21> 기사의 일부 내용을 비슷한 시기에 보도했던 한 매체는 언론중재위에 올라온 반론을 받아들였다. 쉽고 편한 길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반론의 근거가 사실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의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한 수단이라면 <한겨레21>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제보자였던 이상철씨는 청강학원쪽의 주장과는 달리 “명예훼손죄로 구속된 적이 없다”고 밝혔다. 1998년 청강학원쪽이 이씨를 고소한 것은 이씨와 참여연대가 상속세 탈세 및 공금유용 혐의로 청강학원을 검찰에 수사의뢰하자 곧바로 이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사실을 거론한 것이다. 그러나 청강학원은 이듬해 스스로 이 고소를 취하했다. 결국 명백히 허위사실을 <한겨레21>에 주장한 셈이다.

<한겨레21>이 이런 사실을 뒤늦게 지면을 통해 밝히는 것은 청강학원이 <한겨레21>에 대한 반론보도 청구소송과 별도로, 제보자였던 이씨를 최근 명예훼손죄로 고소했기 때문이다. <한겨레21>은 이씨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명백한 증거들을 확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씨에 대한 청강학원의 고소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언론에 제보한 사람에게 재갈을 물리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한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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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은 답하라
한나라당은 중앙일보 사주 홍석현씨가 탈세 혐의로 구속되자 ‘언론탄압’이라고 강변하더니, 국세청의 정당한 세무조사를 통한 한진그룹에 대한 세금 추징을 ‘표적사찰’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에 묻는다.
첫째, 사기업을 가진 언론사 사주가 언론을 방패삼아 사기업 탈세를 자행한 것은 악질적인 범죄행위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국민 대다수는 이에 대해 엄정한 법 집행을 요구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 탈세 비호와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조세정의는 배치된다고 보지 않는가?
둘째, 과거 어느 정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민의 정부 하에서 언론의 자유는 신징되었으며, 현재 언론은‘거의완벽한 수준의 언론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 국민적 합의이자 국제적 평가이다.
중앙일보 사태와 관련해 한나라당이 언론탄압이라고 주장하는데 대해 다른 언론사들이 일방적 억지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셋째, 지난 97년 대선때 중앙일보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위해 편파보도를 했다는데 대해 언론 관계자들은 물론 국민 대다수가 공감하고 있다. 더욱이 중앙일보는 IPI에 보낸 편지를 통해 ‘편파보도’했음을 자인하고 있다.
이회창 총재가 중앙일보의 입장을 온 몸으로 옹호하고 나선 것은 대선때 중앙일보의 지지에 해나 보은이 아닌가?
넷째, 중앙일보가 ‘삼성재벌 신문’이라는 일반인의 인식에 대해, 이회창 총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다섯째, 당명을 바꾸었다고 속성이 바뀌지는 않는다. 구집권 세력인 한나라당은 여론조작과 정권 안보를 위해 언론을 조정, 간섭하고 탄압까지 해온 ‘정언유착정당’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한나라당은 여당이었던 김영삼 정권시 날마다 보도지침을 내려 언론을 통제했고, 김현철씨 비리에 대해서는 기사 한줄도 나가지 못하도록 언론을 탄압했다. 한나라당은 과거 언론탄압 행위를 불인정 할 것인가?
여섯째, 보광그룹 대주주인 홍석현씨의 탈세를 비호했던 한나라당은 한진그룹의 탈루 소득에 대한 세금추징을 ‘표적수사’라고 강변하고 있다. 대선때 국세청을 이용한 세금 도둑질에 대한 수사에 대해서는 ‘야당탄압’으로 몬 바 있다. 이는 한나라당이 재벌의 탈세비리로 인한 검은 돈을 정치자금으로 사용해온, 정경유착에 뿌리를 둔 정당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한때 ‘세풍당’으로 불렸던 한나라당을 이제 ‘탈비당(탈세비호당)’으로 부를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곱째, 국정감사는 헌법이 부여한 국회의 최대 기능이자 국회의원의 의무이다. 한나라당은 중앙일보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면서 이틀에 걸쳐 국정감사를 파행시켰다. 국민이 부여한 국회의 권한 포기이자, 국회의원 직무유기다. 집권 경험이 있는, 책임이 있는 공당으로서 과연 올바른 처사라고 보는가?
1999년 10월 6일
새정치국민회의 대변인 이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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