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대륙사의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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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25 안병섭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댓글 0건 조회 2,732회 작성일 2002-11-13 09:21본문
안녕하십니까? 독자 및 인터넷 애호가 여러분 반갑습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요즈음은 정보의 홍수 시대라 부를 만큼 다원화된 매체정보에 접근이 용이하고, 양적, 질적인 면으로도 각계각층의 정보 습득이 더욱 다원화되고 세분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그 어느 때 보다도 가치관의 정립이 필요한 때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올바로 바라보는 가치관은 올곧은 민족사관과 철학, 그리고 올바른 신관이 구축되어야 가능합니다.
인류의 기원과 문명에 관한 의문들은 동양의 지혜와 함께, 증산도의 진리체계로 해석하면 근본적으로 일목요연하게 풀리게 됩니다. 이는 증산도의 진리세계가 일만 년 대륙사와 환인천제, 환웅천왕, 단군성조 등 3위 성조 시대를 아우르는 일만 년 *신교사혼의 3단계 내림과정(신교-동학-증산도)의 마지막 열매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우리의 신원(정체성)을 알 수 있는 우리 고유의 영적 체계를 단순히 종파적 차원으로 대하여 멀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증산도는 결코 선천의 교화사명을 맡은 유,불,선,기독과 같은 단순한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 대륙사의 신비를 포함해 인류의 기원과 미래를 알려주는 궁극의 무상의 도-수운 최제우가 용담유사를 통해 한민족 속에서 태동하게 되리라 수없이 외친 바 있는 민족문제와 세계문제를 동시에 풀어주는 무극대도입니다.
-단군을 신앙하는 것은 3위성조 중 중시조를 신앙하는 것으로, 민족정기가 고갈된 때에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근본 처방은 될 수 없습니다. 단군성조는 국조 조상은 될 수 있어도 본래 신앙의 대상은 아닙니다. 증산도의 영적체계의 근본은 바로 3위성조시대에 3위성조가 직접 나서서 민족적, 거국적 차원에서 신앙했던 3신상제의 제천보본 뿌리신앙 신교입니다. 단군성조도 강화도 마리산(머리산이자 마니산)에 제천단을 쌓고 하늘의 3신상제님께 천제를 지낸 바로 그 수두(소도) 신앙이 바로 열국시대까지 이어진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삼한의 불구내, 백제의 교천이고 역사혼이 희미해지면서 신라는 화랑도로, 백제의 싸움아비, 고구려의 조의선인 등등으로 변질되어간 것입니다.
단재 신채호는 이 풍류배달혼인 신교혼의 역사를 알아야 비로소 한민족 정사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다 했으니 결국 프로토타입(원형)의 신교와 동학, 증산도의 씨, 나무, 열매의 3단계의 전체 신교 모습의 우주관과 세계관, 신관, 구원관 등을 알아야 한민족 대륙사와 반도사에 비장된 후천개벽의 한민족 사명과 불굴의 민족혼의 섭리사적 우주원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번 후천개벽에 한민족 속에서 절대자 한울님이자 천주님이신 상제님이 강림한다는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 동학의 주요 교의라면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예고한대로 한민족 속에 강림한 절대자의 인류구원 법방을 통해 후천개벽 속의 진멸지경에 처한 인류를 3년간 구원하고 후천의 열매기 황금문명시대인 후천선경 시대의 도래와 함께 1만 2천 도통군자가 출세한다는 것이 증산도의 복음입니다.
바이칼로부터 시작한 환국의 후예들인 우리 민족은 천산으로 밀고 들어가 배달국을 개국한 이래, 태호복희(6대 다의발웅 때)에 이르러서는 지금의 감숙성, 사천성, 호남성까지 석권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소전의 후예 신농씨는 호북 수현에서 태어나 하남 회양에서 도읍하고, 산동반도 곡부로 천도해서 호남 차릉(다릉)에서 죽었다고 했으니, 대략 신농씨의 안마당이 최소한 호북성, 산동성, 호남성에 이름을 알 수 있고, 태호 복희는 감숙성 천수시 진성구(성기)에서 태어나 오나라 서북 사천성에 있었으니 최소한으로 추정해 보아도 감숙성, 청해, 사천성까지 아우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양자강 유역의 9이족과, 북방 훈죽, 험윤, 읍루, 흉노, 선비, 물길, 말갈, 요, 만주, 연, 강방, 귀방의 동이족을 제외하고 배달국으로부터 단군조선을 제외한다 하더라도 한민족의 텃밭이 중원천지 대륙을 새까맣게 뒤덮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산동성은 동이족의 근거지 중의 하나로, 동이족 은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동이 제족 및 묘족들이 하북, 하남, 산서성, 산동성, 강소성 및 양자강 하류까지 석권하고 있었던 곳이며, 가히 동이족 상고대륙사의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전국 7웅이 동이족임은 그 뿌리를 보면 나오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동이족 노른자였던 한(韓), 위(魏), 조(趙) 3국은 소위 3진(晋)의 시대의 주역으로 이 중 산서성의 한(韓)나라는 같은 동이족 진시황 정(政)에게 멸망되고 말았지만, 망국 후 장량과 한신 같은 인물을 배출하기도 한 동이족 국가 중의 하나였습니다.
*"한나라의 漢이라는 국호 자체도 옛날 3한 조선의 韓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빌려 간 것에 불과하다"<일본 학자 오향청언 (吾鄕淸彦)>
굴원이 쓴 초사를 보면 굴원의 족보가 전욱의 후예인 동이족으로 나오고, 초나라가 같은 동이족인 거란, 만주족과 같이 동황태일(단군)을 모시는 국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석학 임혜상이나 서량지 같은 이는 오나라와 월나라마저 동이족 국가임을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사마천에 의해 불과 유방의 한(漢) 나라에서 비롯한 지나의 정체성이 동이족인 황제헌원을 지나의 시조로 바꿔치기 당하니 이는 마치 백제 의자왕 시절에 시작된 일본 역사가 가공의 신무천왕을 머리로 하여 2600년으로 두배 가량 뻥튀겨진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황제헌원은 동이족의 터전인 산동성 출신으로 동이족 전욱의 후예입니다.
전욱고양은 말할 것도 없이 동이족이지만 사마천이 화하의 시조로 내세운 황제마저 산동성의 수구에서 백의 민족(백민)으로 태어났음을 밝히고 있는 바입니다. 수세기에 걸친 부권에서 모권사회의 대립을 통해 지나족의 시조로 일컬어지고 있는 동방족의 후예 황제헌원이 서방족의 모권사회 속에 데릴사위의 형태로 흡수되어 들어감을 증명하는 기록이 「사기 5제 본기」의 '황제는 소전의 아들(黃帝者 少典之子)이라는 대목과 동기록 '황보익이 말하되 황제는 수구에서 태어나서 희수(姬水)에서 성장하였으며 헌원에서 거주했다'라는 대목, 그리고 「제계사기」의 '황제는 백민(白民)으로 태어나서 스스로 동이에 속했다(自屬東夷)'는 대목, 황제는 백민 출신으로 동이에 속한다는(黃帝生於白民...自屬東夷:『楚史』) 대목입니다.초사는 동이족 역사가 아닌었던가?
사마천의 「사기」『5제본기』에 3 황 5 제시대가 5 백 년인데, 황제는 100여 년 재위했으며 황제는 유웅국(有熊國) 소전(少田)의 아들로 소전은 인명이 아니라 (환웅국의) "제후국 이름"이라 하였습니다.마찬가지로 지나족의 전설적 이상으로 치부되는 요순은 결코 지나족의 핏줄이 아닙니다. 요는 동이족 염제 신농씨의 7세손녀 경도의 아들이자 동이족 전욱의 손자니 당연히 동이족 핏줄이고, 순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이 동이족입니다.
지나 핏줄의 석학 서량지는 우순은 맥족( 族)이며 맥족은 곧 동이부족을 이루고 있는 한 종족이라 잘라 말합니다.( 族乃東夷部族組成之一 子) 「맹자(孟子)」<이루하(離婁下)>에 '순은 동이의 사람이다(舜是東夷之人)' "순(舜)은 제풍(諸風)사람이니 동이인"이라 하였고 또 맹자집주(孟子集註)8권에 순은 제풍에서 태어나 산동성 곡부아래의 연주 부하로 가서 살다가 명조에서 죽으니 동이족 사람이다(舜生於諸風 遷於負夏卒於鳴條 東夷之人也 )라고 했습니다.
동이족은 진(秦) 이전, 중국 동부 즉, 지금의 산동, 강소, 안휘 근해 및 회(淮)에 살고 있었는데, 그 지파로는 우이( 夷), 회이(淮夷), 서이(徐夷), 도이(島夷), 래이(萊夷),, 개이(介夷), 근모이(根牟夷) 등이 있으며, 하· 은· 주 3 대로부터 춘추시대에 이르기까지 화하계와 더불어 접촉이 매우 많아 또한 일찍이 동화되었습니다.
고서에 말하기를 순(舜)은 동이족이 된다고 했으며, ....제환공을 도와 이적(夷狄)의 사람인 관중을 물리쳤다 했으니 관중은 곧 래이(萊夷)인이 된다고 했고, 임 혜상은 "금인(今人)이 고증하기를 은상(殷商)은 동이계에 속하며(今人考證 殷商屬夷系)", 또 진(秦) 통일 후로부터 동이는 모두 흩어져 민호(民戶)가 되었으며, 이때로부터 화하족과 더불어 완전히 동화되어 한(漢)족을 이루는 제 2의 지엽민족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동화된 가운데도 옥과 흙을 구분할 수 있는 다음의 기록도 대륙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니 우리는 무엇이 뿌리고 무엇이 지엽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193권 당기(唐紀) 9권에 "중국여근본사이(中國如根本四夷)-중국의 근본은 사이(四夷)"라는 기록과 또한 자치통감 195권 당기(唐紀) 11권에 기록된 "중국근간야사이지엽야(中國根幹也四夷枝葉也)-중국사람들의 뿌리는 사이(四夷)의 가지와 잎에 해당한다"
-이러한 호호탕탕한 대륙사를 잃어버리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첫째 이유는 존중화 사대주의입니다. 공자는 노나라를 중심으로 해서 주나라를 섬기기 위한 춘추필법으로 자신의 뿌리국인 동이족의 상고사를 왜곡했습니다. 또한 사마천은 중화사관의 뼈대를 세우기 위해 역사를 왜곡했고, 유교는 잘못된 역사를 가르쳐 우리를 마취시켰습니다.
이러한 중화독과 함께 일제 식민사관의 폐해를 그 두 번째로 들고 있으며 세 번째로는 서양독 곧 기독교 사관의 폐해로 들고 있습니다.
본래 동이족의 영적문서였던 유교문서(소위 사서삼경)는 공자에 의해 중화족의 것으로 편집, 개찬된 것으로, 그나마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없어질 뻔 하다가 후일 공자의 고택(古宅) 담벼락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대로 전해지는 것은 없고, 현존하는 것은 복생이라는 이가 마치 일본의 고사기(古史記)를 히에다노아례라는 무녀가 암송해 적었듯이, 개인적으로 암송한 것을 기록해 놓은 위서입니다(고문상서).
기독교의 성서라는 것 또한 그 편찬과정을 보면 <탈무드 임마누엘>이라든가 <보병궁의 성약(Aquarian Gospel)>에서 보이는 것처럼 바울에 의해 바울교로 철저히 왜곡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 편찬자에 의해 밀라노 칙령 반포 당시 3위일체설과 이견을 가진 아리우스파나 아타나시우스파를 철저히 이단정죄해 배제왜곡했음 역시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정작 유대인 카발리스트들이 더 잘 알고 있어서 예수를 일개 예언자 이상으로밖에는 보지 않습니다.
석가 이전에도 또 다른 부처님 시대(전불시대)가 한반도에 있었습니다. 삼국유사와 화엄경이 고증하고 있는 바이지만, 우리 동이민족의 주류가 대륙을 석권하고 있을 상고시절, 부처님의 성지는 인도가 아니라 바로 금강산이었음은 역사를 바로 보면 새삼 신기할 것도 없습니다.
강화도 마리산(마니산)에 천단을 쌓고 천제를 지낸 단군왕검처럼 배달 환웅국은 고구려에 이르기까지 천제지자(天帝之子)의 나라로 이미 천자의 지위로 천제를 지낸 바 있는데, 후일 역사를 왜곡한 사마천이 중화족의 역대 왕들이 태산에서 봉선제를 전통적으로 지낸 것처럼 거짓말로 역사를 견강부회했습니다(산동성의 태산은 14대 환웅이신 치우천자의 안방으로 지금의 중화족은 유방이후에 역사에 등장).
천자가 하늘의 3신상제에게 천제를 지냈던 영적 세계를 3신신앙이라 하고 우리는 그것을 소도신앙 혹은 수두신앙이라 해 왔습니다. 이 수두신앙의 내림역사가 최수운의 동학을 거쳐, 귀공자 진리로 완성되어 화려하게 성장한 한민족의 마지막 영적세계가 바로 증산도입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한민족의 역사에 대해 거두절미하고 한민족의 신교정신을 모르면 민족사의 핵심을 결코 알 수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외세에 의해 수없이 구타당한 한민족에게, -그나마 정신세계까지 마취된 지금의 세태로 보면- 인류역사의 시원이 한민족에게서 시작되었고 이제 후천 5만년의 개벽시대를 한민족이 주체가 되어 이룬다는 것은 너무나 가슴 벅차고 감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안원전 대원출판 홈피 중)
지나족의 상고 조상이라 칭하는 화하족의 밑뿌리를 그들 자신이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한번 볼까요? 다음 글은 아직 홈피에 개재하지 않은 담론 본론 중의 내용중 일부입니다만 중요한 귀절인 것 같아 이곳에 먼저 소개합니다.
*필자가 산동성 치박시 제국(齊國) 박물산에서 구입한 산동성 임치구(臨淄區) 문화 여유국(旅遊局) 소속 유빈(劉斌)이 발행한 향토사료 「제(齊)문화 100제(題) 지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제나라는 산동성 북쪽에 있었다)
-제지(齊地:산동성)의 동쪽에 대해가 있고 서쪽 경계에는 황하, 치수(淄水), 유수( 水:산동성 발원 동북으로 흘러 황해로 유입), 제수(濟水), 술수( 水:산동성에서 강소성으로 흐름),기수(沂水), 사수(泗水)가 그 가운데를 관통해 흘러간다. 수초는 풍미( 美)하고 토지는 비옥해 완포(莞蒲:왕골) 어염(魚鹽)의 이로움이 부요(富饒)하니, 이는 인류 경제문화 개발을 솔선하고 발상한 지방이다. (감숙성 천수시 부근 뇌택에서 태어난) 태호 복희씨가 가장 일찍이 이 지방에 머물러 살았다. 천상을 관하고 지리를 살피며 8괘를 긋고 문자를 새기고 새끼줄을 꼬아 그물을 만들어 물고기를 잡고 수렵을 했으니, 인류사회의 어렵시대는 이곳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복희씨의 성은 풍(風)이다.
동족녀 여와씨가 복희의 뒤를 계승해 동이(東夷) 제지(齊地:산동성)에서 흥기했다. 복희의 후예는 임(任), 수구(須句), 숙(宿), 전유( 臾) 등 4 개국인데, 춘추시기에 다시 존재해, 모두 해대(海垈)의 사이에 있어 부용(附庸:대국에 의존해 사는 나라)국이 되었다.(필자가 보기에 본래의 임, 숙, 수구, 전유국은 복희의 마당인 호북성, 호남성 사천성, 감숙성, 섬서성 등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춘추 시대 때에는 산동성 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호복희는 용으로 도등(부족깃발무늬)을 삼아, 해빈(海濱) 선주민의 특색 휘지(徽志)를 수립했으니, 용 문화 곧 복희문화의 창시인이다.
염제(炎帝) 신농씨는 복희족을 계승해 동이 제지(齊地:산동성)에서 흥기했다. 신농씨는 복희씨 문화를 계승해 발전했다. 나무를 베어 보습을 만들고, 나무를 휘어 쟁기를 만들어, 백성을 가르쳐 쟁기와 보습의 이로움을 구해 농업이 이로부터 흥기했다. 신농씨는 또 저자(시장)를 열어 사방의 백성을 불러모으고 천하의 재화를 거두어 모아 사람들로 하여금 교역하게 하여 각기 구하고 싶은 것을 구하게 하여 상업무역이 이로부터 흥기했다.
이와 동시에 신농씨는 다시 백초를 맛보아 의약을 베풀고 사람을 가르쳐 병을 고치니 의약이 이로부터 흥기했다. 염제 신농씨는 강(姜)씨 성이다. 공공(共工),치우(蚩尤),백이(伯夷), 봉백릉(逢伯陵)과 강태공은 모두 염제(炎帝)의 후예다. 그 중에서 공공은 가장 일찍 홍수와 더불어 항쟁한 사람이니, 그는 배(舟船)의 발명자이다. 치우(蚩尤)는 고대 역사상 병주(兵主) 혹 무조(武祖)로 전해져 칭해졌으니 무용(武勇)으로 천하에 위엄을 떨쳤다.
백이(伯夷)는 요, 순 시기의 사악(四岳)으로, 곧 사방 제후를 통괄하는 우두머리였으니, 그는 아국의 고대 형법과 "삼례(三禮)"의 창립자였다. 봉백릉(逢伯陵)은 상(商)나라 시대 제(齊) 나라 땅의 제후였다. 그들은 모두 강태공의 선조로 동이 제지(齊地)의 토착민으로 동이(東夷)문화 혹 제(齊)문화의 창조자였다. 곧바로 춘추시기로 넘어가 강(姜)씨 성 제국을 제외한 이외에도 래국(萊國), 순우국(淳于國), 향국(向國), 기국(己+其國), 기국(紀國) 등 강(姜) 씨 성 나라는 모두는 염제의 후예이니, 이는 거듭 동이 제지(齊地)의 주요 거주민이다.
태호복희씨와 염제 신농씨는 동이 제지(齊地)를 서로 계승해 일어났는데, 그들은 세세 대대 문화를 창조 발전했다. 고사(古史)에 "희농문화(羲農文化)" 혹 "희염문화(羲炎文化)"라 글을 써 칭하니 이는 제문화(齊文化) 혹 동이문화를 칭해 적은 것으로 이를 다시 "사령문화(四靈文化)"라고 적어 칭했다.
「한서」에 "희농(羲農)에서 융성한 기초가 닦이고, 황제와 당요(唐堯) 에서 규모가 광대해졌다"는 뜻은 복희와 신농이 화하문화의 넓은 기틀을 정했으며, 황제와 당요(唐堯)가 복희 신농의 기업(基業)을 계승발전한 것을 의미한다.
<온국(溫國)문정공집(文正公集) 직하부(稷河賦)>에 "아래로는 공자 묵자를 논하고 위로는 희염(羲炎)을 술(述)한다(下論孔墨 上述羲炎)"는 의미는, 아래로는 공자와 묵자의 학설을 토론하고, 위로는 복희, 염제가 개기창업(開基創業)한 본원을 추구해 글로 짓는다는 뜻이다. 이곳에서는 모두 한가지로 희염(羲炎)의 문화와 공묵의 학이 그 원류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확실히 하고 있으며, 제(齊) 나라 문화와 화하(華夏) 문화의 원류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확실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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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절강성의 전단강을 배를 타고 지나며 고려의 풍광이 아름답다며 회상에 잠겨 고려의 땅을 지난다고 하는 기록을 본다. 이 곳은 남송의 임안 곧 동방견문록에서 동양의 베네치아라고 일컫는 호반의 도시 지금의 항쪼우(항주)가 있는 곳이다. 참고로 서긍은 북송 휘종의 신하로 절강성은 북송의 영토가 결코 아니었다.
이곳은 소동파가 절도사로 있어 서호의 둑을 막아 지금의 아름다운 서호를 만든 용정차로도 유명한 곳이다. 중국최고의 차는 단연 용정차로 강희제가 수양제가 판 대운하를 이곳까지 연결해 용정차를 대 먹은 곳이다.
월나라 서시가 놀던 곳이자 오월동주의 고사가 서린 곳이고 이태백이 술을 따르던 서시호다. 그런데 이 곳이 바로 서전(서경)에 삼묘족이 살던 곳이라 한 바로 묘요계의 동이9족의 근거지임을 아는 사람은 없다. 이는 썩은 부유들이 존주사대주의에 입각 주 왕실은 높일 줄 알고 정작 자신들의 단군 조선은 정작 잃었기때문이다.
경덕진이라면 고려청자의 효시인 월도요가 있는 곳으로 지나혈통의 후예 석학 임혜상은 백월족이 동이족의 중심민족중의 하나임을 밝히고 있다. 백월과 형오계가 동이민족이니 양자강은 상고시절부터 사서삼경에 등장하는 삼묘족과 동이 9족 및 왜(대륙내 왜는 동이족의 한 멤버로 훈죽-선비-읍루-요,말갈,만주족)의 계통을 이은 우리 핏줄 요의 한 가신그룹이기도 했고(북왜) 양자강유역에서 동이9족에 의탁해 살다 대만으로 들어가 독립했다가 일본열도의 왜와 합쳐 남왜를 이루기도 했다)가 차지한 우리의 보금자리였다. 간단히 말하면 항우가 우리 핏줄이고 범려와 중국 4대미인 중 하나인 서시 그리고 월왕 구천과 오왕 부차가 우리 혈통이란 얘기다.
이건 끌어부치는 소리가 아니라 바로 지나의 석학들이 명명백백하게 하는 소리다. 그것도 수없이. 중국(대만)의 최고 석학은 고고학의 서량지요, 문화인류학의 임혜상이다. 한국의 골빈 실증사학자들은 그들이 중국학계의 주류에 서지 않는다 반박한다. 그러나 그들의 뿌리가 동이 한겨레라 보는 그들인지라 그들이 주류에 설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들은 양심적인 학자다.
이들의 사관은 중국 한족의 뿌리가 동이로부터 서이로, 다시 서이로부터 서하로, 서하에서 화하로, 마지막으로 화하족에서 오늘날의 한족으로 피갈음의 역사를 거쳐왔는데 중국본토의 중심을 지킨 것이 바로 양자강 유역의 묘요계, 백월계(월나라), 형오계(오), 초나라, 서나라 등 동이9족의 역사와 태호복희 신농씨의 후예들의 9려국이라 한 바 있다.
임혜상은 진시황때 만리장성의 노역을 배경으로 하여 동이족을 모두 해산시켜 일반 백성으로 삼아 개산위민이라 했다. 이는 진시황때 비로소 주객이 바뀌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말로 대륙내의 주도민족 구려,동이 9족의 백성들이 서하족내지 화하족해 나아갔음을 의미한다.
주원장이 명을 건설하자 여진족인 자신의 혈통을 숨겼다. 조선의 이성계가 여진족인데(일급참모 퉁두란도 여진족였다) 자신의 혈통을 부정하기 위해 고려사를 왜곡하고 대대적인 사료수탈을 했다. 일왕 아키히토가 일본왕실이 백제 혈통이라고 고백했지만 왜는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고사기 일본서기를 왜곡해 1300년 역사를 2600년으로 늘여놓았다.
공자가 동이족 문서를 화하족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춘추사관을 만든 이래 사마천이 그 뒤를 이어 역사의 본 물줄기를 바꾸어 놓더니만 전국시대 진소왕의 증손자이자 조나라 한단의 대상인 여불의의 혈통인 태자 정(진시황)이 임금이 되자 자신의 동이족 혈통을 숨기기 위해 온갖 명분을 내걸고 분서갱유를 저질렀다.
오늘날의 지나족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진시황부터 씨눈을 내기 시작해 한고조 유방에 이르러 비로소 한족이 된 것이다. 그럼 그 이전의 역사는 뭔가. 바로 공자가 중추를 꺾은 화하족의 역사인데 이건 결코 한족의 역사가 아니다. 중국민족사를 보면 굽이굽이 마디가 있다.
화하족 이전에는 하이브리드(잡종)화적인 측면에서 전혀 다른- 즉 변태의 정도, 잡종화의 정도가 다른 서하족의 역사다. 이 서하족의 역사가 바로 우임금의 역사다. 그 이전의 역사는 서이족이라 해서 바로 동이족의 조상인 소전씨의 혈통 신농씨의 배다른 형제 황제헌원의 역사다.
그러다 보니 중국역사자체가 통시적으로는 동이족으로부터 수많은 변태에 변태를 거듭하는 하이브리드 잡종화 과정을 거쳤기때문에 한족의 구성요소중 우리 동이족이 제2의 구성요소가 된 것이며(임혜상 저 중국민족사 참조) 공시적으로는 혼혈족의 특성상 동이족도 자기들 민족의 하나라 하고 있는 것이다. 동북3성의 조선족 자치주만 보아도 조선족은 자기들 한 족의 한 멤버일 뿐이다.
생각해보라 고구려를 이은 고려는 발해사 하나를 쓰지 못했고 발해역사를 전혀 갖질 못했으며 고려의 뿌리 궁예가 신라인이고 정인지 고려사를 보면 막상 왕건은 작제건의 신화를 내세워 당 숙종의 혈통으로 나온다. 그런데 막상 발해를 접수한 요는 동단국이라 국명을 바꾸고 발해사를 써 자신들이 고구려의 옛 강토를 차지한 고구려의 후예라 주장한다.(요사)
뿐만 아니라 문화인류학적으로도 요는 험윤,이적,예,맥,흉노,숙신,읍루,말갈 등의 북방 동이족 계보를 이어받은 정통 흉노, 숙신(조선)의 후예라 하여 신앙도 동황태일(단군을 동황태일로 신앙함은 굴원의 초사에 보이니 초나라의 단군숭배를 알 수 있거니와 만주족이 단군 홍성제묘를 모시듯이 요가 정통적 신앙을 계승했음을 알 수 있다.
환단고기에도 보인다)을 신앙했으니 종교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고려와의 정통성 주장에는 나름대로의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나족이 고구려의 정통맥을 요가 이은 것으로 보고 다시 요는 한족역사의 일부로 본다한들 이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유득공이 저서 발해고 서문에서 한탄한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이것은 왜그런가?
반도사와 대륙사의 구분으로 인한 획일적인 피아구분이 가져온 역사의 한계때문이다. 가령 정통성 빈곤의 이 성계 조선이 막상 형제국을 야만시하고 지나족 명을 천자국으로 모셨으니 그 인과응보는 정통성확보의 반대급부로 들여온 유교에 의해 문약해진 조선으로 하여금 오히려 옛 고구려 강토를 차지한 동족 요에게 당한 선례를 뒤이어 임진왜란으로 얻어맞고 청에게 정묘, 병자호란으로 쌍코피 터지도록 만든 것이다.
우선 단군을 볼 것 같으면, 단군은 천자로서 동순망질 사근동후한다 하여 일년에 4번 조근하여 배알을 받았음을 서전 요, 순전에 보이고 있다. 그런데 서량지, 임혜상의 역사를 보면 소수 실증주의의 눈먼 노예 식민사학자 나부랭이들이 중국의 고문서 한번 보지 않고 우리의 도가사서인 환단고기를 위서라 하고 있으나 사마천의 사기라든가 죽서기년 산해경, 회남자 등 각종 문서들과 규원사화 단기고사 환단고기 등이 서로 부합되고 있음을 본다.
단군조선은 그만두고라도 양자강 유역의 서나라만 해도 36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은 천자국으로 강역이 당시의 주나라보다 수십 배 큰 강대국이었으며 주나라가 수도까지 점령당한 적이 있음을 춘추는 고증하고 있다.
또 서경을 보면 황기천리라 하여 주나라 천자의 강역이 천리에 불과하고 요전을 보면 모옥이라 해서 궁전이란 것이 고작 띠풀로 얹은 초가지붕이다. 그 뿐인가 천자라는 요가 정사를 보는 궁실의 계단이 겨우 3개이니 오죽 초라한가. 요 또한 순을 내세운 단군의 명령에 의해 강제로 내쫓겨 감금되었고 단주는 도망갔는데 선양을 했다고 거짓 왜곡한 것이 바로 지금의 서전이다.
그나마 이 책은 공자가 쓴 책도 아니고 금문상서라 해서 후일 복생이라는 자가 쓴 위서이다. 요가 순에게 선양한 것이 아니라 단군의 명을 받은 순에 의해 감금되고 투옥된 내용은 죽서기년과 환단고기에 나온다.
중국역사의 핵은 동이족인 우리 한겨레의 역사다. 공자가 중추를 부러뜨리고 사마천의 사기에 의해 허리가 잘려나간 이후 수많은 사서들이 서로 베끼고 인용해 레미콘사관으로 변한 것이 중국의 역사고 또 이를 베껴 존주사대주의로 필사한 것이 바로 왜곡된 한민족의 역사다.
해방이후 어뱅이같은 식민지 사관의 노예인 실증사학자들이 삼국유사가 인용한 고사가 이미 이러한 레미콘사관의 와중에 휩쓸린 줄 모르고 희미한 족적만 가지고 단군이 실재네, 허구네 하고 있지만 삼국유사보다 훨씬 명확하고 출처가 확실한 수많은 자료들이 바로 단군조선의 실재를 기록하고 있다. 단군조선의 실재를 기록한 사료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글귀로 널려 있으니 두 눈가진 정상인이면 직접 확인해 보라.
우리민족은 김춘추에 의해 대륙을 포기하고 반도에 들어앉아 불교국가가 되었고 공자에 의해 우리의 단군조선을 내팽개치고 존주사대를 하는 썩은 유교국이 되었다.
김춘추에 이어 북벌파를 거꾸러뜨린 친명사대주의자 태조 이성계와 이방원 충녕 세종이 고려사를 왜곡한 이래 이방원과 세종은 수많은 민족사서를 수탈 소각했다. 세종은 3대 가륵단군이 창제한 가림토문을 해제만 쓰고 그 공을 가로채 왜곡했다.
해방이후 서재필, 이승만에 의해 양키를 좇아 기독교를 확산해 기독교의 준 종주국이 되었으니 이로부터 우리의 단군역사는 더욱 숨이 졸리게 되었다. 단군을 우상이라 하고 신화라 하는 것은 역사에 무지한 반민족적 패역무도한 자들의 짓이다.
단재는 오죽하면 우리민족은 매양 석가가 들어오면 한국의 석가가 안되고 석가의 한국이 되고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의 공자가 안되고 공자의 한국이 된다고 했을까. 예수가 들어와도 한국의 예수가 아니되고 예수의 한국이 되고 마니 가히 무정신의 역사가 무정신 국가를 만들고 무정신의 국가가 무정신의 민족을 만드니 가히 두렵고 두렵지 아니한가.
소위 정치를 한다는 알만한 자까지 우리의 역사를 모르고 해방이후 목졸리고 뒤틀린 거짓 역사를 배워서 제 민족의 뿌리를 부인 할 줄 알았지 정작 삼국유사가 인용한 고서의 원 뿌리되는 책 한번 볼 줄 몰랐다. 그리하여 민족의 역사를 가다듬을 새 시대의 역사관을 제시할 책을 여기에 연재하게 되었으니 시대정신에 눈 먼자 보고 느끼라.
한국의 실증사학자는 매양 제 것은 업수이 여기고 시비를 걸 줄 알았지 지나의 사서삼경이 위서고 사마천의 사서가 위서인 줄 알면서도 이의를 달지 않았고 일본서기가 수많은 개찬과정을 거친 위서이고 고사기가 일개 무녀인 히에다노아례가 구술한 것임을 알아도 토 한번 달지 않는 썩은 것들이다. 실증사학의 족보 자체가 식민지 제국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해 독일에서 고안 한 것을 일본이 수탈사관으로 도입하기 위해 이등박문이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참고로 송호수 교수는 한민족사의 왜곡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필자는 외래 사상과 귀신에 씌워 썩고 문드러진 민족혼을 개혁하는데 평생을 바치고 있는 민족사학자 송호수 교수의 다음 촌철살인의 지적이 네티즌들과 독자들을 대오확철해줄 것으로 기대하며 "안원전의 21세기 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의 연재의 변을 마치고자 한다. 대전고 동문들께서도 위에 걸어놓은 홈페이지 내용인 본 담론을 계속 애독해 주기를 바라며....
-송호수(宋鎬洙) 교수
최근 일본 학자 오향청언 (吾鄕淸彦) 씨가 쓴 책을 보면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25권은 단군 조선이 중원 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 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한나라의 漢이라는 국호 자체도 옛날 3한 조선의 韓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빌려 간 것에 불과하다" 고 말입니다. 우리의 역사가 대충 어느 정도 변조가 되었는가를 피부로 실감할 수 있을 겁니다.
한사군(漢四郡) 문제만 보더라도 있지도 않았던 한사군을 평양에, 그것도 세 군데나 되는 평양 중에서 대동강의 평양만 있었다 하고 또 위만 (衛滿) 이 조선을 지배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일본 사람들이 "보아라. 너희 조선족은 역사의 시초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지 않았느냐. 너희는 항상 피지배 민족이었지 언제 독립 국가였느냐" 고 하면서 우리나라를 영원히 자기네 속국으로 만들기 위한 당위론을 제시하는 전략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단군 이전에 환웅천황 (桓雄天皇) 의 역사 시대가 18대 1565 년 동안 있었고 또 그 이전에 환인천제 (桓因天帝) 시대가 7대 3301 년이 있어서, 금년까지 9183 년이라는 사실이 '삼성기'(三聖紀) 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삼성기' 의 문헌사적 고증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이 책을 쓴 안함로 (安含老)는 서기 600 년경 신라 시대 사람인데 삼국유사가 나온 것이 1200~1400 년경이니까, 그보다 훨씬 더 먼저 기록된 것이고 이러한 '삼성기'의 기록을 그대로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나라 역사의 연조는 9 천 년이 넘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럼 9 천 년이란 역사를 어떻게 입증하느냐, 그러한 문헌 하나만 가지고 이것을 어떻게 외국학자들이 수긍할 수 있도록 하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이것이 합리화될 수 있는 외국 학자들의 논문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몇년 전에 일본에 와서 발표한 소련의 여류 민족학자 R.S.M 자리가시노바 씨는 "한동〈구석기 시대에 인류가 살았고 신석기 시대 초에 이미 독자적인 고도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고 했습니다. 신석기 시대 초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 ~ 1만 2천 년 전입니다.
그러므로 이 때 이미 우리 동이족들은 주변 국가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수준 높은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와 적대 관계에 있는 공산국가의 학자가 발표했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있죠. 역시 공산국가인 중공의 유명한 고고학자 당란이, 1977.7. 14 자 중공 '광명일보' 를 통해 발표한 내용을 보면 "산동 반도 지역에서 남한 넓이 만한 광대한 지역에 이르는 대문구 문명권 (大汶口文明圈) 을 발견했는데, 이곳을 발굴하니까 문자가 나오고 그 곳을 통치한 소호씨 (少昊氏) 란 통치자 이름까지 나왔으며, 이것을 방사선 탄소 측정을 해 보니까 지금으로부터 5785 년 전 것" 이라고 합니다. 5785 년 전이라고 하면 단군 건국보다 약 1500 년 전의 일입니다. 그 당시 이미 산동 반도에는 문자를 사용한 고도의 문명 국가가 있었는데, 그 통치자인 소호금천씨 (少昊金天氏) 가 동이족이라는 사실이 중국 고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사변'(古史辯)만 보더라도, 이 책은 우리가 쓴 책이 아니고 중국에서 나온 책입니다. 백화문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면 "소호씨는 동이계야 (東夷系也), 동이지인 (東夷之人) 이라" 고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태호 복희씨 (太호伏犧氏), 여와씨 (女蝸氏), 소호금천씨가 전부 동이족이라는 것을, 중국 사람 자기네 손에 의해 밝힌 겁니다. 또 며칠 전에 조선일보에 한번 나온 적이 있죠. 요령성에서 5 천년 전의 여신묘가 발굴됐는데 이 묘는 무덤이 아니라 사당입니다. 그리고 궁터도 발굴했다는데 이것들은 앞서 말한 당란이 발표한 유적보다 700 년이나 더 이후의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러 가지 사실을 놓고 볼 때, '삼성기'의 기록이 객관성이 있고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다면, 더 이상 무슨 반증이 필요하겠습니까?
소호가 다스린 나라의 서울은 요동 반도에 있고, 산동 반도까지 다시 말해서 발해만 안쪽의 그 광활한 지역을 단군 이전에 벌써 통치하였다는 기록도 있는데, 5 천년 전의 거대한 궁터가 발굴되었다면 이는 부족 시대 미개 사회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죠. 강력한 정치 세력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중국 역사를 말하는 사람들이 주(周)나라 이전은 다 신화 시대로 몰아붙였지만 은허에서 갑골문이 발굴된 이래, 또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볼 때 요(堯), 순(舜), 하(夏), 은(殷) 등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신농씨(神農氏), 황제(黃帝)를 신화적 인물에서 역사적 인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실들은 이미 '시전'(詩傳)' 서전'(書傳) '맹자'(孟子)를 보면 다 나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정문으로 적혀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문헌을 볼 때에는 상당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식자우환이라고, 조금 안다는 학자들이 그 시대의 변천과 상황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을 신화니 비과학적이니 하면서 호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로 청동기 시대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고고학자들이 역사를 보는 시야는 걸핏하면 청동기를 가지고 자(尺)질을 하는데, 즉 청동기 개시 년도에 따라 한 국가의 역사 시대가 결정된다는 얘기인데, 현재 사학계에서는 우리 나라 청동기 시대의 상한을 3 천년밖에 안보고 있죠. 그러니까 3 천년 이전에는 국가라는 게 있을 수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한강 이남에서 우리 학자들이 발굴해 낸 유물들이 3 천년 이상 소급을 못하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단군 조선의 근거지는 도대체 어딥니까? 백두산 아래 아사달입니다. 아사달은 그럼 어디냐? 바로 지금의 하얼빈인데, 그 지역을 발굴하고 있는 북한의 학자나 소련 학자들이 발표하는 내용을 한번 들어봅시다.
지난 78 년 8.14 자 북한 '중앙통신'이 밝힌 바에 따르면 "우리 조선족이 청동기를 사용한 것은 서기전 2 천 년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 천 년 전이다. 그때 농가의 유적도 발굴했고 농기구와 오곡 씨앗까지 발굴했다." 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소련 학계는, 세계에서 가장 활발히 한국학을 연구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발간한 유 엠 푸진이 쓴 '고조선' 이란 책을 보면 "조선족은 4 천년 전부터 청동기를 사용했다. 단군왕검이 있던 유적지도 발굴했고 단군 조선 시대 중앙 행정기관의 유적지도 발굴했다" 고 했습니다.
이렇듯 국내의 여러 문헌뿐만 아니라 국외의 학자들이 연구하고 발굴해서 우리의 역사 상한을, 그리고 단군 조선의 건국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해 주는데도, 우리가 여기 앉아서 휴전선 이북을 못 가본다고 해서, 가서 발굴을 못해 보았다고 해서, 우리의 청동기가 3 천년 이상 소급할 수 없다고 우기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민족사상의 원형 홍익인간(弘益人間) - 우리가 일찍이 남북 5 만리 동서 2 만리라고 하는 광활한 지역을, 한웅천황 시대가 1565 년 동안 단군 조선 시대가 2096 년 동안 지속되면서 통치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은 예사로이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한웅천황 시대까지는 그만두고라도, 단군조선 시대만 해도 2096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하는 것은 동서양 역사를 통틀어서, 아니 인류 역사가 생긴 이래 한 개의 왕조가 2 천년간 지속된 그러한 역사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국경을 같이하고 있는 중국의 역사를 살펴봅시다. 하 은 주는 동이족이니까 말할 필요도 없고, 그 이후로 300 년 이상 지속한 왕조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같은 시대의 중국 역대 왕조는 300 년도 채 못 가 전부 망해 버렸는데, 같은 시대의 우리나라는 2 천년이라는 긴 역사를 간직한 채 그 넓은 지역을 어떻게 통치할 수 있었느냐. 해답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위대한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위대한 철학, 그 철학은 바로 홍익인간 (弘益人間) 입니다.
우리나라 교육법 제 1조에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교육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난번 고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한 지방 강연에서, 대한민국 교육법 제 1조가 뭐냐 고 하니까 대답하는 사람이 없어요. 서글픈 일입니다. 3~40 년간 교직에 있으면서 교육 이념이 무엇인지, 홍익인간이란 용어가 어디서 나왔으며 그 내용이 무엇인지 하는 것쯤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홍익인간이라는 용어는 삼국유사에 최초로 등장합니다. 환인이 환웅을 불러 놓고 삼위산과 태백산 그 일대가 홍익인간할 수 있는 곳이니 너희가 가서 다스리라 하면서, 무리 3 천명과 통치자의 신표로 천부삼인 (天符三印)을 주어서 보냈다고 '삼국유사' 첫머리에 나옵니다. 이렇듯 홍익인간이란 용어의 출처는 환인으로부터 나온 겁니다.
그런데 요사이 툭하면 단군을 팔고 다니는 사람들이 단군의 홍익인간을 떠들어대지만, 실은 환인으로부터 홍익인간이 나와서 환웅 이후 단군이 계승하고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를 그대로 계승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법 제 1조가 홍익인간입니다. 법 얘기가 나왔으니 우리나라 헌법 전문을 살펴볼까요? 제일 먼저 "유구한 민족사 빛나는 문화 그리고..." 로 시작은 잘했는데 맨 끝이 좋지 않아요. 1980 년이 뭡니까? 이건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가 1980 년밖에 안되었다는 얘깁니다. 자유중국 헌법에도 서기를 쓰지 않고 중화민국 75 년이라고 쓰며 기독교 목사인 유태인도 연하장을 보내는데 서기를 쓰지 않고 이스라엘 년도 5700 년 이렇게 쓰는데 우리 나라는 왜, 국통이 없습니까? 1980 년이 왜 들어갑니까?
또 한가지, "3 1 운동의 숭고한 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해 놓았는데 기미년의 선언서를 보면 년도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조선건국 4252 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조선은 바로 단군조선이지 딴 조선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헌법 전문 맨 끝에는 1980 년이니, 앞뒤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는 얘기죠.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사람을 크게 이롭게 할 내용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조화경 (造化經), 교화경 (敎化經), 치화경 (治化經), 이 삼화개천경 (三化思想開天經) 이 바로 홍익인간의 구체적인 내용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조화경을 '천부경'(天符經), 교화경을 '삼일신고' (三一神誥) 라 하며 치화경을 '참전계경' (參佺戒經) 이라고 하는데 이 3대 경서가 그 기본입니다. 우리나라 1 만년 역사의 뿌리가 곧 이 3 대 경전이지 그 밖에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중국에서 말하는 소위 유교 사상 도교 사상이 파생되어 나갔습니다. 구체적으로 반증을 제시할까요?
'맹자'에 나오는 유교의 5륜은 아무리 유교에서 썼다고 해도, 미국에서 국어로 쓰는 영어가 미어가 아닌 영어이듯, 그 출처는 동이족입니다. 말씀드리죠. 순(舜)임금이 글(契)을 불러 가지고 사도 (司徒:문교장관) 를 명하고 인간에게 윤리를 가르치라고 해서 글이 만든 게 바로 5륜입니다. 글은 동이족이입니다. 그리고 순임금도 '맹자' 에 보면 "저풍 (諸馮) 에서 태어나 부하 (負夏) 땅에 옮겨 살다가 명조에서 죽었는데 그는 동이족이다" 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륜을 선포한 글(契) 이나 오륜을 선포케 명령한 임금 순 역시 동이족입니다. 따라서 말할 것도 없이 삼강오륜의 출처는 동이 문화입니다.
공자는 어떤가요. 공자는 동이족의 혈통으로 은나라 왕족인 송미자 (宋微子)의 후손인데, 현재 홍콩 대학의 임혜상 교수나 대만 대학의 서량지 교수도 "은나라는 동이족이다" 하였고 '고사변' 에도 같은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 또 공자 자신도 '논어' 에서 말하기를 "술이부작" (術而不作) 이라 하여 "나는 요와 순의 사상을 계승해서 서술했을 뿐이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고 밝혔고 중국의 고전 '초사' 를 보면 "황제 (黃帝)는 백민 (白民) 에서 태어나고... 그는 동이족에 속한 사람이다" 라고 하였으니 황제의 5세손인 요임금이 동이족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동이족인 요와 순임금의 사상은 동이 사상이고, 이를 계승한 역시 동이계인 공자의 유교가, 우리의 홍익인간 사상에서 파생되지 않았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도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노자 (老子)가 황제의 사상을 이어 받았다고 해서 황노지교 (黃老之敎) 라고 하는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동이족인 황제의 사상, 즉 동이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 노자의 도교이고 보면, 비록 중국 대륙에 오래 머물러 있는 동안 다소 변질되어 고구려 시대 때 역수입되어 들어왔다고 해도 역시 그 뿌리는 우리의 홍익인간 사상입니다.
그렇다면 불교 사상은 또 어떤가 살펴보기로 하죠. 석가 이전에 우리나라의 전불시대 (前佛時代)에 대해서는 아도화상의 비문과 '삼국유사' 그리고 지공선사 (指空禪師) 의 천보산 희암사 중수문에 다 나와 있습니다. 석가 자신도 '대방광 불화엄경' 보살 주척품에서 말하기를, "해동 금강산에 법기 (法起) 라는 보살이 있어서 1200 대중을 거느리고 법을 설하고 있는데 그 불법이 거기에 예로부터 있었다 (從昔己來)" 고 증언하고 있으니, 이는 석가 출현 이전에 우리 나라에 이미 전불시대 즉 가섭불 (迦舌佛)시대가 있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가섭불이 앉아 법을 설한 연좌석 (宴坐石) 이 신라의 월성 동편 용궁 남쪽에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옥룡집' (玉龍集) 과 '자장전' (慈藏傳) 에 있습니다.
기독교 사상에 대해서는, 먼저 이 말씀부터 드려야 되겠습니다. 4700 년전에 나온 '황제내경소문' (黃帝內經素問) 편을 보면 동이족이 살고 있는 이 지역 즉 "동방은 이 지구가 형성될 때 최초로 문화가 발생한 곳 (東方之域天地之所始生也)" 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구상 문화의 최초 원산지는 동이족이 살고 있는 동방지역이라는 거죠.
기독교의 한 단면만 말씀드리자면 법률학자인 동경 대학의 나까다 (中田薰) 교수가 '고전법에 근거한 문화동원론고 (文化東源論考)' 에서 말하기를, 모세의 5경의 출처를 조사해보니까 함무라비 법전 속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나까다 교수는, 모세하고 함무라비 사이에 500 년의 연조가 있지만 모세의 5경은 함무라비 법전을 계승한 것이고, 이는 또 수메르법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수메르의 역사 시초가 지금으로부터 5500 년 전인데, 남은 과제는 수메르족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영국학자 크래머 (Kraemer, 1897-) 와 일본의 우에노 (上野景福) 교수가 발표한 것을 종합해 보면, "수메르족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자생한 민족이 절대 아니고 동방에서 이동해 왔다. 그것도 문자를 가지고 왔는데 바로 태호복희가 쓰던 팔괘부호 (八卦符號) 와 흡사한 문자를 가지고 5500 년 전에 서쪽으로 옮겨 왔다" 는 것입니다. 복희와, 수메르에서 최초로 우르(Ur)국을 건설한 왕조나 최초의 수메르 메소포타미아에 문화국을 건설한 엔릴 (Enril) 영웅이나 거의 같은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5500 년 전에 복희문화를 가지고 동이족이 서쪽으로 갔다는 얘기가 됩니다. 무엇이 그것을 입증하는가? 수메르 말이 우리말하고 같은 것이 많이 있다는 게 최근 미국에서 연구가 돼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메르라는 말 자체가, 곧 '소머리' 에서 나온 것입니다. 비슷한 사례로 송화강을 우수하, 음만 그대로 따면 속말수라고 부릅니다. 소머리강이다 이거죠.
뿐만 아니라 '삼일신고' 신훈 (神訓)에 나오는 "신(神)은 재무상일위 (在無上一位) 하사 유대덕대혜대력 (有大德大慧大力) 하사 생천(生天) 하시며 주무수세계 (主無數世界) 하시고..." 하는 것이 바로 완벽한 기독교의 일신사상 그대로입니다. 또 '참전계경' 총론에 보면 "여화신이 흙으로 사람 형상을 만들고 혼을 불어 넣어 7일 만에 이루어 마쳤다. (女禍鍊造成而注之魂七日而成)" 하는 것은 기독교 창세기 2장 7절하고 꼭 같습니다.
여호와와 여와, 야희와 여희등은 음도 같고 행적도 같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이나 수두 제단에 치외법권 지대가 있다는 내용, 그리고 동지에 양을 잡아 붉은 피를 문설주에 바른다는 구약의 기록은 우리나라에서 동지에 붉은 팥죽을 끓여 문설주에 바르고 하는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한 풍속들이 여기서 건너가 전해 내려온 거죠.
서양 사상을 종합하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즉 인본주의와 신본주의 둘인데 소급해 올라가면 이 두 가지 사상이, 수메르 문화에서 나왔다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이러한 신본과 인본사상은 우리의 신인사상이 둘로 나뉘어진 것이지요. 이렇듯 지구상 모든 사상의 뿌리가 동방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빛은 동방에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세계적으로 보아서 9 천년이 되는 역사 민족이 어디 있습니까. 서양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수메르족이 5500 년밖에 안됐는데... 이런 역사가 없죠.
제 4빙하기 이전의 역사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몇억년 전의. 유물이 지금 발굴된다고 해도 그건 지금 우리 인류하고는 관련지을 수 없습니다. 제 4빙하기가 이 지구를 휩쓸고 간 뒤에 살아 남았던 우리의 아담과 이브 설화는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이 최초에 천하(天河)의 동서에 있다가 칠월 칠석날 만나 가지고 오색 인종을 낳았다" 는 것이고, 이것이 '신사기'의 기록을 보면 366 갑자에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한 갑자가 60 년이니까 즉 21960 년 전에 제 4빙하기가 물러가고 제일 생명력이 강한 한 남성과 여인, 나반이와 아만이 즉 나반이와 아만이가 인류의 시초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럼 이러한 판도에서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동방 지역은 천지지 소시생야라" 우리동방 동이족이 살고 있는 땅은 이 지구가 형성될 때 최초의 문화가 발생 된 곳이다. 하는 점이 여실히 실증이 된다 하겠습니다. 또 '황제내경' 소문편에 보면 "침술도 역시 동방으로부터 전해 왔다 (폄石亦從東方 來)" 라고 했듯이 한의학이라는 것도 우리나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새 한의학의 한자를 "漢"에서 " 韓"으로 바꿨다고 하는데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진작 바꿨어야 했어요. 한문이라는 글자도 마찬가지에요.
자꾸 이렇게 한문(漢文)이라고 쓰니까 중국 글이라고 생각하는데, 중국이 漢나라 라는 국호를 정할 때 이 한문이 있었기 때문에 정한 것이지, 없었다면 어떻게 漢나라 라는 국호가 생깁니까? 그러니까 한나라가 있기 전에, 이미 이 글자 한문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럼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아까 말씀드린 글이라는 사람하고 창힐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는데 둘 다 동이족이지 않습니까?. 동이족이 만들었으면 동이족 글이지 왜 중국글이라고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지구상 모든 사상의 원천은 홍익인간 사상입니다. 그 홍익인간 사상의 내용은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 입니다. 다시 말하면 조화경, 교화경, 치화경이 이 원리 속에서 나오는 거죠. 그래서 루마니아 사람 게오르규(Gheorghiu 1916~) 가 "홍익인간이란 단군의 통치 이념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법률이며 가장 완전한 법률" 이라고 지난 1986 년 4월 18 일자 프랑스의 유력한 주간지 '라프레스 프랑세스' 지를 통해 발표한 겁니다. 신부 옷을 입고 성당에서 밥을 먹는 사람이 왜 모세의 10 계가 최고라고 말하지 않고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또 그는 우리나라에 왔다 가면서 "한국 민족이 낳은 홍익 인간 사상은 미래 21 세기의 태평양 시대를 주도할 세계의 지도 사상이다" 고 역설했습니다. 그 이상 얼마나 평가를 내리겠습니까?
우리는 등하불명이라고, 지금 주걱 들고 주걱을 찾고 있습니다. 칸트, 헤겔을 찾고 독일철학 어쩌니 하고 아까운 시간만 다 허비하고 있으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보배는 왜 하나도 개발 못하고 있느냐 이겁니다. 서양 사람들이 먼저 눈을 뜨고 "미래의 세계를 지배할 보배, 최고의 이념이 여기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홍익인간 사상이다" 고 하는데 우리 자신은 그걸 모르고 외국 사상 속에 무엇이 있는 줄 알고 방황하고 앉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을 불러다가 자문이나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입니까!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상들. -은 실로 홍익인간 사상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지, 결코 홍익인간 사상하고 대립된 사상이 아니다. 가령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유교나 불교 기독교라는 것은 홍익 인간 사상과 대립적인 존재가 아니고, 홍익 인간 사상의 내재적인 사상이다" 하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는,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상황이 대단히 여의지 않고 또 다른 나라와 달리 적어도 2 천년 동안 외래 세력에 밀려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아볼 수 없게 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기록에 담겨져 있는 우리 민족 사상사적인 내용이 너무나 엄청나게 오도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이야기하자면, 중국적인 사대주의 사관 (事大主義史觀) 에 의해서 우리의 역사가 많이 바뀌었고, 그 이후에는 일본 사람들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의해 우리의 역사가 엄청나게 변조되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서구 문화의 홍수에 밀려서 바른 사관을 잡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습니다만, 분통스러운 것은 이 문제가 언제 바로 잡혀질지 기약이 없다는 점입니다.
왜 이렇게 비관적일 수밖에 없느냐 하면, 현재 우리나라 각 대학의 강단에 서있는 사학과 교수들의 대다수가 일제 하에 만들어졌던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또 그 밑에서 배운 사람들의 절대 다수가 각 중고등학교에서 그러한 사관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인데, 이렇게 우리의 역사적인 상황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라도 알고 계신 분들이, 과연 우리 국민들 가운데 얼마나 될까 하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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