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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기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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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41 진만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927회 작성일 2007-12-14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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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대기 蹴球

 어제 金基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기성은 昨年에 태국으로 宣敎 奉仕團 一員으로 派遣되어 11월에 歸國하기로 되어 있었다. 仁川 空港을 사위가 운전하는 차로 지금 막 벗어나 大田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기성은 몇 년 전 喪妻하여 외롭게 지냈다. 여러 가지 迂餘曲折을 겪으며 교회에서 만난 여자와 합쳐 살았었다. 그나마도 둘 다 같은 교회의 信者였지만 서로 맞지 않아 헤어지고 딸네 집 부근에 방을 얻어 살았었다. 그러다 하나님 말씀을 傳播하기 위해 高齡? 임에도 불구하고 태국으로 宣敎 차 나가있었던 것이었다.


 우리(陽谷 徐弘圭와 나)가 김기성과 因緣을 맺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다. 당시 城南 다리를 건너 우리 학교를 다니는 사람은 열 손가락 안팎이었다. 趙恒九도 그 중 한명이지만 그는 중학 때부터 축구선수였고, 덩치가 우리들보다 컸기 때문에 서로 닭 보듯 하며 지나쳤다.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어느 봄날 김기성과 우리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다 말을 붙이게 되었다. 김기성은 한밭을 다녔고 우리는 大中을 다녔기 때문에 서로 만나지 못하다 그제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나와 陽谷徐 徐弘圭와의 緣은 여러 차례 밝힌 바와 같이 초등학교 때부터다. 6학년 때 학교 공부기 끝난 후 당시 우리 집에 寄居하고 계셨던 선생님께 課外? 를 받았다. 어느 날 밤 시험지 채점을 하시던 선생님은 내 시험지를 꺼내 보이며 나에게 심한 叱責을 하셨다. 그따위로 글씨를 썼다가는 채점하는 중학교 선생님이 빵점을 준다며 홍규처럼 써야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거였다. 홍규는 어렸을 적부터 筆體가 있었다.


 나와 고등학교 때 매우 가깝게 지냈던 또 한 명의 친구는 당시 貴族學校로 불리던 大田 師範 附屬學校 출신 閔龍植이다. 민용식과는 처음에 어째서 가깝게 지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敎大까지 같이 갔고, 下宿도 卒業할 할 때까지 2년을 함께 했었다.

 

 우리 넷은 꼬마 4人帮이었다. 당시 4.19革命의 餘波로 校內 분위기가 弛緩되어 授業을 땡땡이치는 것도 함께였다. 땡땡이쳐 봐야 겨우 氣合산에 올라 가 씨잘떼기 없는 일을 했지만............


 2학년 때는 내가 2반 채범석 선생님 반 이었으나, 그들만 모두 5반이었던 박병국 선생님 반으로 옮겼기 때문에  더더욱 뭉쳐 다니게 되었다.

 

 우리가 노는 것은 단순했다.

 농구 코트에서 ‘막대기 축구’를 하는 것이다. 반질반질한 籠球場에 조그만 막대기를 공삼아 축구를 하는 것이다. 신발 밑에 막대기를 끌고 가다 자기  편에 패스하여 籠球臺를 지지하고 있는 鐵製 파이프사이의 골에 막대기를 밀어 넣는 것이다. 막대기를 차서 멀리 패스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인터셉 당하기 쉽기 때문에 주로 발밑에 깔고 가다 가까이에 자기편이 있을 때 패스하며 前進하는 것이 유리 했다. 그러므로 자연히 몸싸움을 하게 되었다.

 편은 ‘자라’인 나와 ‘두딜기’ 민용식이 먹고, ‘생쥐’ 서홍규와 ‘고구마’ 김기성이 먹었다. 勝負는 莫上莫下였다. 편을 바꾸는 일은 없었다. 막대기 축구를 했다면 편은 고정이었다.

 反則을 했다고 다투는 일도 자주 있었다. 그러면 넷이서 딱 두 패로 나뉘어 서로 攻擊을 했다. 우직스런 기성이도 그 때만은 만만치 않았다.


 3학년 때는 김기성만 理科라서 6반이 되었지만 나머지 셋은 같은 3반이었을 것이다.

 서홍규는 再修를 하여 서울 중앙대로 갔고, 민용식과 나는 처음부터 公州敎大로 갔다. 김기성은 서울대 電子工學科 시험에 失敗한 뒤 2차로 敎大로 왔다.

 

 45년이 지난 지금 김기성의 歸國을 기회 삼아, 다시 한 번 옛날의 아련한 追憶에 빠지고 싶다. 金基成이의 교회 參與 때문에 7월 17일 制憲節에만 野外로 놀러나갈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모든 날이 ‘굉일’ 날이니 만나기도 쉽지 않겠는가? 서울 徐弘圭에게 基成이의 歸國 사실을 알렸더니, 날짜를 잡으면 자기가 내려오겠다는 대답을 받아 두었다. 어느 날이  복 받는 좋은 날일까? 苦悶된다. ‘괭이’ 田壽炳도 같이 만나자고 弘圭가 말했는데...........

                                        2007.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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