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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vs.누르하치]-조선의 無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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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330회 작성일 2015-04-17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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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한 서자·무능한 폭군·개혁적 군주 광해
 
 
드라마 ‘화정’ ‘징비록’
 
 
 
‘왕의 얼굴’ 속 서로 다른 광해군
 
 
무능한 폭군과 개혁적 군주, 광해군의 평가는 엇갈린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에 이어 중국이 명에서 청으로 교체되던 시기에 왕좌에 올랐다. 또 그의 세자 시절부터 조선 조정엔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으로 갈린 정파 다툼이 계속됐다. 당대의 이러한 혼란상은 광해군을 두고 다양한 해석과 허구적 상상력을 낳게 하는 요인이 된다. TV 사극과 영화에서 그를 끊임없이 다루는 이유다. 최근에도 지난 2월 종영한 KBS2 <왕의 얼굴>과 현재 방영 중인 KBS1 <징비록>, MBC <화정> 등 드라마 속 광해군 묘사 역시 다양하다.


경향신문
MBC 에서 광해군 역을 맡은 차승원.

 
 
■ ‘서자’의 운명… 불운의 왕세자 광해군

서자이자 차남인 광해군에겐 항상 ‘정통성’ 논란이 따랐다. 주변으로부터 끊임없이 세자 자리를 견제받았다. 선조의 후사로 광해군을 책봉할지를 두고 대신들이 정파를 갈라 싸웠을 정도다. 또 당시 조선의 상국인 명나라는 이미 광해군이 세자에 오른 뒤에도 오랫동안 이를 공인하지 않았다. 광해군의 이러한 세자 시기를 세 드라마 모두 동정적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맞은 조선 조정이 선조의 불투명한 안위에 대비하고 왕실의 굳건함을 백성들에게 선전한다는 목적으로 광해군(노영학)을 세자로 세우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그렸다. 선조(김태우)도 이를 ‘임시방편’이라고 못박는다. 하지만 광해군은 이를 묵묵히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세자가 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한다. <왕의 얼굴>과 <화정>에서도 광해군이 대신들의 노골적인 냉대를 받지만, 결코 평정심을 잃지 않고 속으로 삭이는 모습을 보인다.

경향신문
KBS1 (왼쪽)과 KBS2 속 광해군.

■ 왜란 속 군주로서 면모 보이는 광해군

세 드라마 모두 임진왜란을 세자 광해군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배경으로 사용한다. 실제 광해군은 선조와 함께 피란을 떠난 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국사에 개입할 권한을 얻었다. 이후 강원도와 함경도에서 의병 모집 활동을 했다. 또 1597년 정유재란 당시 광해군은 전라도에서 모병과 군량 조달에 힘썼다.

<왕의 얼굴>에선 광해군(서인국)의 이러한 활약을 적극 부각시킨다. 직접 칼을 들고 왜적과 싸워 공을 세우는 장면이 곧잘 나온다. <화정> 속 광해군(차승원)도 마찬가지다. 이로써 선조와 조정, 명나라로부턴 인정받지 못했지만, 백성들에게만큼은 두터운 인망을 쌓은 ‘노블레스 오블리주’형 세자였음이 강조된다. <화정>의 김상호 PD는 “광해군은 16년 동안 세자 생활을 하면서도 어떤 비리도 저지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특히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을 이끌면서 ‘새로운 왕’에 대한 생각을 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실리주의와 권력욕 사이… 임금으로서 광해군

드라마 속 광해군에 대한 묘사가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은 군주로서의 그를 다룰 때다. <화정>은 아예 평소 온화한 광해군이 죽음의 문턱 앞에 있는 선조의 죽음을 방치하는 것으로 그린다. 왕좌를 향한 강한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또 학계에선 광해군이 명·청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친 점을 두고 그를 ‘실용적 군주’로 평가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왕의 얼굴>은 광해군이 자신과 측근들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중립 외교를 택한다는 전략적 과정으로 묘사했다.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궁궐을 재건하는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인 것도 쟁점이다. <화정>의 광해군은 창덕궁 재건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어렵다는 대신의 지적을 “왕실을 바로 세우기 위한 일”이라며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광해군 이야기는 그가 온갖 고난과 견제를 딛고 왕좌에 오른다는 점에서 매력을 준다”며 “최근 드라마 속 광해군은 훗날 그가 왕위를 위해 친족들을 제거하는 등 ‘폭군’의 면모를 그리면서도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을 담아 시청자들을 설득시키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했다.

<
@+경향신문사측 및 **허남설 기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
@+^淸 太祖 評傳
 
 
‘누르하치’ 통해 본 조선의 무능
 
 
‘대명의리’만 찾다 정세오판
 
 
정묘호란·병자호란 비극 초래
 
 
 
20150205003847_0.jpg
1592년 2월 (임진왜란 2달前쯤)
 
 
여진의 누르하치는
 
 
“조선에 대해 말썽을 일으키지 말라”고 요구를 받자
머리를 한껏 조아린다.
“감히 그럴 수 있겠는가.
조선과 우호를 위한 동맹을 맺고 싶다.”
 
당시 (임진왜란 직전까지만 해도)조선은
 
여진쪽에서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상대였다.

 
 
1621년 9월,
 (위의 일 이후 거의 30년 지나서-즉,임진왜란후 23년지나서)
조선 정부는
여진의 사신을 달래
침입을 막을 방법을 의논하고 있었다.
신하들의 논의가 답답했던지
 
 
광해군
“이 敵들의 세력은 어떠한가.
우리나라의 병력으로 능히 막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탄했다.
 
광해군의 말에서
 
 
조선과 여진의 역학 관계가 역전되었음이 드러난다.

 
 
 

 
20150205003848_0.jpg
누르하치의 여진이 동북아의 강자로 급부상할 때
조선은 대명의리에 매달리며 국제정세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고,
결국 병자호란을 초래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겪었던 조선의 치욕을 증언하는 유적이다.
조선왕조실록이 전하는
조선과 여진의 관계 변화는 극적이다.
조선과의 갈등을 극도로 꺼렸던 여진은
30년이 지나고
조선이 감당하기 힘든 세력으로 성장했다.
다시 20년이 지나자
최강국 명나라까지 숨통을 죄고 있었다.
 
 
누르하치란 걸출한 인물을 만난 여진은
 
 
당시 동북아시아를 거센 변화의 소용돌이로 몰아가고 있었다.

 
책 ‘누르하치’
 
(천제셴 지음, 홍순도 옮김, 돌베개·사진)는
 
여진을 이끌었던 누르하치 평전이다.
 
누르하치는?
 
요동 지역 곳곳에 흩어져 부족 단위로 살아가던 여진을 규합하고
마침내 청 태조로 등극한 인물.
드라마틱한 삶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크지만
눈길을 끄는 건
조선과 여진의 관계 변화다.
‘대명의리’에 집착해
동북아 세계 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당시 조선의 無能은
 
 
미국,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지금의 한국에 반면교사가 된다.

 
여진에게
 
 
조선과 명은 ‘슈퍼 갑’이었다.
 
 
각 부족의 수령은
조선, 명의 벼슬을 구했고,
양국과의 교역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처지였다.
때로 변방을 약탈하기도 했지만
응징을 두려워해야 했다.
1592년 누르하치의 말에서 이런 관계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분열된 여진 부족을 규합해 갔고,
그 와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선, 명, 일본이 얽혀
 
7년간 이어진 ‘대전’(大戰)을 틈타
 
누르하치는 눈부신 성장을 보였다.
 
(여진족의 급성장은?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명나라는 여진족에 대한 적극적 간섭할
힘과 기회를 잃었고,
 
조선은 거의 망해가는 형국이엇으니
여진족에게 뛰어난 인물의 급부상과 리더십은 결국 조선에
나중에 엄청난 재앙을 안겨주게 된다-옮긴이 주)

20150205003849_0.jpg
팔기제는 누르하치가 이끈 여진의 성장을 뒷받침한 군사·행정 제도였다. 각 단위를 상징하는 깃발로 구분지어졌고, 청나라의 정예군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돌베개 제공
전세의 역전이 확실해진 것은 1600년대였다.
 
(임진왜란 또는 조일전쟁이 끝나고
명나라도 기진맥진,조선은 더욱 무력해 지고,
임란전쟁후 누르하치 체제는 승승장구
하던 시기였다)
국가 규모와 체제를 갖추면서 누르하치는
‘국왕’을 자처했고,
 
 
1616년 나라를 ‘금’으로 칭했다. (後금)
 
 
1618년에는 드디어 명나라 정벌을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명나라와 처음 치른 ^^무순 전투에서는 큰 승리를 거뒀다.
무순 전투 직후
눈에 띄는 점은
여진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던
조선의 오판이다.
 
무순 전투의 전리품을 분배하고
 
휴식을 갖기 위해
4개월 정도 공격을 멈춘 것을 두고
 
“누르하치가 확실히 죄를 뉘우치고 자책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1619년
‘살이호산 대전’(사르후 전투)에서
광해군은 중립외교 정책을 펼치며
정세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明의 원군 요구에 응해 파병한
 
강홍립 부대를 누르하치 군대에
 
투항하게 한 것.

하지만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한 조선은
누르하치를 아직도 여전히 ‘여진족의 수령’쯤으로 여겼고,
 
명나라에 등을 돌리고 후금과 동맹을 맺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명나라의 숨줄을 끊어놓기 위해
배후를 안정시키고 싶었던
누르하치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 우호 관계를 형성하기를 오랫동안 희망했지만”,
조선은
“명나라를 상국으로 여기는” 고집을 결코 꺾지 않았다.
 
투항한 강홍립 부대의 병사 수백명을 죽이며
 
압박했지만
 
 
조선은 요지부동이었다.
“누르하치가 조선을 몹시 미워한 데에는
이런 원천적인 이유”가 있었다.
 
결국
조선 본토에 대한 정벌 주장이 대두됐다.
명나라와의 전쟁이 더 시급하다는 판단에 따라
누르하치의 조선 정벌은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뒤를 이은 황태극은 즉위하자마자
조선 출병을 단행했다.
인조가 황태극의 면전에서
항복의 의미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청나라 시대 황제를 만났을 때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조아리며 행하던 예법)를 하는 것으로 끝난 병자호란의 치욕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수많은 백성이 죽거나 사라지는 등 적어도 30만에서 많게는 50만명이
최종병기 활 이란 영화에서도 보여주듯 --청나라에 끌려가 수많은 수모를 당하고
각 가정은 풍비박산으로 치닫게 되는 비극이 이어진다.


@+^^위의 보도를 해주신
***세계일보사측 및 ^^강구열 기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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