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의 抗日활동 및 한계 및 [자격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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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3,391회 작성일 2015-04-14 04:17본문
[씨줄날줄]
자격루/김성수 논설위원 l 2015-04-14 자격루(自擊漏)는 조선 세종 때 만들어진 물시계다. ‘스스로 종을 울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세종 16년인 1434년
장영실이 왕의 지시로 김조, 이천 등과 2년여의 연구 끝에 만들었다. 물을 흘러내리게 하는 그릇과 물받이 그릇, 톱니바퀴, 자동 시보(時報)
장치들로 이뤄져 있다. 흘러든 물의 양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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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항일 스파이’…
동아일보 > 사회 | 김상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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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정치력 ‘태생적 한계’ 있었다
19세기 문명 전환기 ‘외교 실패’
대원군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에
왕권 견제 유교적 정치지형의 폐해
‘개혁 군주’ vs ‘유약한 왕’ 평가
단순한 프레임서 벗어나야
강상규 지음/창비/4만8000원조선정치사의 발견 -조선의 유교정치와 문명전환의 위기/강상규 지음/창비/4만8000원조선의 제26대 임금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이 1880년 4월30일 주재한 조정회의. 고종은 중국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유학생을 파견해 그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자문(咨文·외교문서)을 발송하려고 한다며 신하들의 의견을 묻는다. 이에 발언한 모든 대신이 반대의사를 표명한다. 고종은 그 후 공식회의에서 이 문제를 다시 꺼내야 했고, 결국 두 달이 지나서야 베이징의 예부에 공식자문을 보내게 된다.
‘효(孝)의 국가’에서 아버지 대원군의 존재도 고종이 정치력을 발휘하는 데 심각한 제약요소로 작용했다. 고종이 ‘국왕을 모욕하는 행위’라며 분명한 불용의사를 밝혔으나, 지방에 은거 중인 대원군을 운현궁으로 돌아오게 하라는 유생들의 상소는 끊이지 않는다. 이에 분개한 고종이 “유생들을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대신들은 이에 반대하는 연합 상소를 잇달아 올린다. 고종은 결국 “신하들의 계속되는 항명에 대해 탄식한다”고 말하고는 자신의 지시를 철회한다.
강상규 한국방송통신대 일본학과 교수가 신간 ‘조선정치사의 발견’에서 당시 고종의 정치력에 원초적 한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사례다. 고종은 한반도 역사의 가장 극적인 전환기라고 할 수 있는 19세기 국정 최고책임자였다. 그러나 그에 대한 구체적이고 심도 있는 연구는 극히 부진하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구에서 전환기 조선정치사는 수구세력과 개화세력, 대원군 세력과 민씨 세력의 각축으로 이해돼 왔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전환기 조선을 전통국가 질서의 상징인 국왕, 고종을 중심에 놓고 분석한다.
고종에 대한 기존 평가는 대개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유약한 인물’, 또 하나는 ‘개혁군주’다. 그러나 이 같은 논의들은 수백년 동안 형성된 조선정치의 독특한 구조와 작동원리에 대한 논의 없이 몇몇 인물을 중심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조선 정치구조에 대한 역사적 시각’이 결여돼 있다는 것이다.
19세기 서세동점의 문명사적 전환기에 조선의 실패는 조선 정치가 수백년간 누적해온 폐해에서 그 근본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게 저자 강상규 교수의 인식이다. 고종에 대한 평가도 ‘개혁 군주 대 유약한 왕’이라는 단순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
저자는 이를 위해 조선 유교적 정치지형의 형성 과정과 군신 권력관계의 변모 등을 살펴보고, 고종을 중심으로 당시 조선의 정치체제가 어떻게 작동하고 어떤 난맥상이 있었는지 분석한다. 저자는 “대원군 세력의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 조야에 팽배한 뿌리 깊은 화이(華夷) 관념, 조선의 유교적인 정치지형에서 발생하는 왕권에 대한 전통적인 견제 구조 등으로 고종은 문명사적 전환기의 위기상황임에도 대내외적으로 별다른 정치적 선택지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고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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