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먹기]--[뱃살빼기] 및 醫學 사기(?)--2011년-[김일]성 사망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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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031회 작성일 2015-03-20 22:26본문
다이어트에 관한 잘못된 속설 바로잡기
베이비뉴스칼럼니스트 박창희입력2015.03.28 19:36
[연재] 다이어트 명강사 박창희의 살과 사랑 이야기
"어떤 음식을 먹으면 살이 빠지나요?" 다이어트 프로그래머인 내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이다. 살을 빼고 싶은 욕망은 이해 하지만 이처럼 어리석은 질문도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생존하기 위해 인간이 먹는 음식은 반드시 열량, 즉 칼로리를 보태어 영양을 충족시킨다는 의미이지, 인체의 주 구성 성분인 지방이나 근육을 없앤다는 의미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먹는다는 것은 추가하거나 보태는 것이므로 무엇인가 먹어서 살이 빠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무엇을 먹던 피가 되어 흐르고 살이 되어 쌓일 것이다.
살 빠지는 음식을 기대하던 청강자들의 표정에 일순 먹구름이 드리운다. 먹어서 살이 빠지는 음식이 없다면 열량이 없는 순수한 물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다이어트에 효과적이라 하여 2리터 짜리 물통을 입에 달고 사는가 하면 물만 먹으면 살이 찐다는 소리도 주위에 흔하니 말이다. 감량에 목숨을 거는 다이어터에게 무엇을 먹는가의 문제는 그 중요성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렇다면 식사를 제한하여 몸무게를 줄이는 것은 어떨까?음식을 먹는 것이 플러스적 요인이라면 금식이나 기초대사량 이하의 절식은 분명히 마이너스적 요인이므로 당연히 체중은 줄게 된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가장 손쉽게 생각할 수 있는 식사 제한 위주의 다이어트는 결국 "살이 잘 빠지지 않거나 쉽게 살찌는 체질"을 만들 뿐이다.
다시 물 이야기로 돌아가기 전에 기초대사량에 대하여 알아보자. 건강한 몸을 위해 체중을 줄이려는 사람들에게 기초대사량의 개념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간이 소모하는 에너지 중, 총 소비열량의 60~75%에 달하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기초대사량이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살아 있으면 누구나 소비하는 에너지이다. 시동을 끄면 더 이상 연료를 쓰지 않는 자동차와 달리 인간의 몸은 잠들어도 시동이 꺼지지 않는다. 섭취 열량의70%가 숨을 쉬거나 심장 박동, 위와 장의 연동 운동 등,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쓰인다.나머지 30% 중 20%는 운동 등의 활동에너지, 남은 10%의 에너지는 음식을 먹고 소화시킬 때 쓰인다. 운동이나 산책 등을 통하여 인위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에너지가 20%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달거나 기름진 식사를 입에 넘치게 하면서 "오늘 저녁 에어로빅이나 낼 아침 수영"을 통하여 에너지 제로나 마이너스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다.
에너지의 수급 차원에서 보면 물을 먹고 살을 뺐다는 소리는 일견 맞는 듯이 보인다. 극소량의 미네랄만 있을 뿐, 열량이 없는 물이 대견(?)하게도 우리 몸에서 대사되는 과정에서 소화 에너지의 일부를 사용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소화 에너지를 체중감량의 수단으로 사용하려면 얼마나 많은 양의 물을 마셔야 할까? 몸 밖으로 배출될 때 신장에 줄 부담등을 고려하면 이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식사 전 다량의 물 섭취는 포만감, 즉 물배를 채워줌으로 본 식사의 양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위액이 희석되므로 소화력이 떨어질 수 있다. 칼로리 제로인 물의 특성상 물만 먹고도 살이 찐다는 의견 또한 설득력이 떨어진다. 신장 기능의 저하로 수분 배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염분의 과다섭취로 인한 일시적 부종 현상을 체중 증가로 오인 하기도 한다. 짠 음식이 혈액 속의 나트륨 농도를 높이면 우리 몸은 항상성의 유지를 위해 수분을 끌어들여 혈중 염분의 농도를 낮추기 때문이다. 부종으로 인한 비만은 저염식사를 함으로써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므로 음식을 싱겁게 먹어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 물은 우리 몸을 필요 이상으로 살찌우거나 마르게 하는 물질이 아니다. 잘못된 상식으로 물을 마시지 않는다면 변이 딱딱해져 배설이 어렵게 되고 체내에 독소가 쌓여 결국은 신진대사를 저해하는 원인이 된다. 혈액의 80% 이상이 물이며 인체의 생리작용을 유지하는 체내효소 또한 물의 도움으로 작용한다. 인간은 좋은 물을 적당히 음용하여 생명을 유지한다 하여도 과장이 아니다. 물은 의도적으로 양을 줄이거나 늘려서 우리의 체중을 가감하는 수단이 아닌 것이다.
*칼럼니스트 박창희는 전산과 체육학을 전공한 다이어트 전문가로서 다이어트의 필요성과 방법을 알리는 강사와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비만사회운동가로서 비만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바라보고 비만을 야기하는 사회 구조적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그는 현재 광고대행사와 방송스튜디오의 대표이기도 하다.
"어떤 음식을 먹으면 살이 빠지나요?" 다이어트 프로그래머인 내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이다. 살을 빼고 싶은 욕망은 이해 하지만 이처럼 어리석은 질문도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생존하기 위해 인간이 먹는 음식은 반드시 열량, 즉 칼로리를 보태어 영양을 충족시킨다는 의미이지, 인체의 주 구성 성분인 지방이나 근육을 없앤다는 의미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먹는다는 것은 추가하거나 보태는 것이므로 무엇인가 먹어서 살이 빠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무엇을 먹던 피가 되어 흐르고 살이 되어 쌓일 것이다.
살 빠지는 음식을 기대하던 청강자들의 표정에 일순 먹구름이 드리운다. 먹어서 살이 빠지는 음식이 없다면 열량이 없는 순수한 물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다이어트에 효과적이라 하여 2리터 짜리 물통을 입에 달고 사는가 하면 물만 먹으면 살이 찐다는 소리도 주위에 흔하니 말이다. 감량에 목숨을 거는 다이어터에게 무엇을 먹는가의 문제는 그 중요성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렇다면 식사를 제한하여 몸무게를 줄이는 것은 어떨까?음식을 먹는 것이 플러스적 요인이라면 금식이나 기초대사량 이하의 절식은 분명히 마이너스적 요인이므로 당연히 체중은 줄게 된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가장 손쉽게 생각할 수 있는 식사 제한 위주의 다이어트는 결국 "살이 잘 빠지지 않거나 쉽게 살찌는 체질"을 만들 뿐이다.
다시 물 이야기로 돌아가기 전에 기초대사량에 대하여 알아보자. 건강한 몸을 위해 체중을 줄이려는 사람들에게 기초대사량의 개념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간이 소모하는 에너지 중, 총 소비열량의 60~75%에 달하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기초대사량이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살아 있으면 누구나 소비하는 에너지이다. 시동을 끄면 더 이상 연료를 쓰지 않는 자동차와 달리 인간의 몸은 잠들어도 시동이 꺼지지 않는다. 섭취 열량의70%가 숨을 쉬거나 심장 박동, 위와 장의 연동 운동 등,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쓰인다.나머지 30% 중 20%는 운동 등의 활동에너지, 남은 10%의 에너지는 음식을 먹고 소화시킬 때 쓰인다. 운동이나 산책 등을 통하여 인위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에너지가 20%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달거나 기름진 식사를 입에 넘치게 하면서 "오늘 저녁 에어로빅이나 낼 아침 수영"을 통하여 에너지 제로나 마이너스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다.
에너지의 수급 차원에서 보면 물을 먹고 살을 뺐다는 소리는 일견 맞는 듯이 보인다. 극소량의 미네랄만 있을 뿐, 열량이 없는 물이 대견(?)하게도 우리 몸에서 대사되는 과정에서 소화 에너지의 일부를 사용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소화 에너지를 체중감량의 수단으로 사용하려면 얼마나 많은 양의 물을 마셔야 할까? 몸 밖으로 배출될 때 신장에 줄 부담등을 고려하면 이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식사 전 다량의 물 섭취는 포만감, 즉 물배를 채워줌으로 본 식사의 양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위액이 희석되므로 소화력이 떨어질 수 있다. 칼로리 제로인 물의 특성상 물만 먹고도 살이 찐다는 의견 또한 설득력이 떨어진다. 신장 기능의 저하로 수분 배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염분의 과다섭취로 인한 일시적 부종 현상을 체중 증가로 오인 하기도 한다. 짠 음식이 혈액 속의 나트륨 농도를 높이면 우리 몸은 항상성의 유지를 위해 수분을 끌어들여 혈중 염분의 농도를 낮추기 때문이다. 부종으로 인한 비만은 저염식사를 함으로써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므로 음식을 싱겁게 먹어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 물은 우리 몸을 필요 이상으로 살찌우거나 마르게 하는 물질이 아니다. 잘못된 상식으로 물을 마시지 않는다면 변이 딱딱해져 배설이 어렵게 되고 체내에 독소가 쌓여 결국은 신진대사를 저해하는 원인이 된다. 혈액의 80% 이상이 물이며 인체의 생리작용을 유지하는 체내효소 또한 물의 도움으로 작용한다. 인간은 좋은 물을 적당히 음용하여 생명을 유지한다 하여도 과장이 아니다. 물은 의도적으로 양을 줄이거나 늘려서 우리의 체중을 가감하는 수단이 아닌 것이다.
*칼럼니스트 박창희는 전산과 체육학을 전공한 다이어트 전문가로서 다이어트의 필요성과 방법을 알리는 강사와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비만사회운동가로서 비만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바라보고 비만을 야기하는 사회 구조적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그는 현재 광고대행사와 방송스튜디오의 대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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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메디닷컴문세영입력2015.03.21 14:13
◆ 잠이 부족하다= 수면은 정신적 혹은 신체적으로 소진된 에너지를 회복시키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식욕을 조절하는 호르몬의 수치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도 충분한 수면 덕분이다. 잠이 부족해지면 이 호르몬의 분비가 줄어들면서 식욕을 참기 어려워진다.
공복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그렐린'은 오히려 더 많이 분비된다. 이 호르몬이 분비되면 배고픔을 느끼게 돼 식욕이 당긴다. 포만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호르몬인 렙틴의 수치는 반대로 떨어진다. 식욕을 조절하기 힘들다면 평소 7~8시간 정도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 중심부 운동을 소홀히 한다= 복부, 허리, 등과 같은 코어(중심부) 기르기 운동을 생략해도 살이 잘 안 빠진다. 유산소운동만 하면 수분과 근육 손실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코어운동인 플랭크, 자전거 크런치, 할로우 락, V자 윗몸일으키기 등을 매일 몇 세트씩 반복하는 것이 좋다.
뱃살빼기의 효과를 더욱 높이려면 코어뿐 아니라 전반적인 웨이트 트레이닝도 해야 한다. 지난해 하버드대학교에서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유산소운동과 더불어 하루 20분씩 근력운동을 한 사람들은 유산소운동만 한 사람들보다 뱃살이 잘 찌지 않는다. 근육량이 늘어날수록 신진대사가 활발해져 더 많은 지방을 연소하기 때문이다.
◆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스트레스도 뱃살이 늘어나는 원인이다. 만성적인 불안감이나 염려증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의 분비를 유도한다. 이 호르몬이 분비되면 우리 몸은 지방이나 설탕처럼 칼로리가 높은 음식을 보상으로 찾게 된다. 또 코르티솔은 새로운 지방세포를 만들도록 유도해 내장지방이 쌓이도록 만든다. 내장지방은 다양한 만성질환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평소 스트레스 조절을 잘 해야 한다.
◆ 노화와 함께 신진대사가 떨어졌다= 모든 신체 기능은 노화와 더불어 날이 갈수록 떨어진다. 칼로리를 소진하는 능력 역시 마찬가지다. 메이요클리닉에 따르면 일반적이 남성들은 매년 하루 칼로리 소비량이 10칼로리씩 줄어든다. 하루 10칼로리면 적은 양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1년이면 0.5㎏이 찌게 되는 셈이다. 따라서 하루 칼로리 섭취량은 나이도 고려해야 한다. 현재보다 하루 100~200칼로리만 덜 먹어도 살은 덜 찌거나 빠진다. 만약 5㎏이상 살을 뺄 생각이라면 평소보다 400~500칼로리 정도는 덜 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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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11년 7월8일--김일성 사망 17년에 즈음하여 올린 글이었음을 참조 바랍니다.
@제목: 김일성 사망 17년--94년7월8일-
2011년 7월8일에는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아도 김일성 급사 17년이란 신문 보도가 전혀 없다-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 성공에 모두들 들떠서 그런 때문인가?
김일성 사망에 대한 소직의 견해를 여러가지를 모아 종합적으로 정리를 다음과 같이 해보았습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펜가는 대로 적어본 것이니 다른 견해가 있다면 댓글 요망합니다.
*** 김일성 82세 사망 원인 및 간접 살인 의혹에 대해!
1.80세가 넘었으니 언제 죽을 지는 하늘만 아는 상황였다.
2.북한및 해외에서 몸에 좋은 것이라면 물,불 안가리고 사올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어쩌면 90세도 넘길 수도 있을 가능성은 있었으리라!
3.그 누구에게라도 천수(天壽)라는 것이 있는 데
김일성 사망 몇개월전 그 천수(天壽)에 대한 진단 결과가 두가지가 나왔었는 데 그것은?
4. 우선 하나 기억나는 것은?
전라도 전주 인근의 모악산에는 김일성의 중시조(대대손손 내려오다가 중간에 집안을 크게 일으켜 세운 집안 어른)묘를 살펴본 지관 손석우 翁이 어느 주간지 신문에 인터뷰하길 "김일성이 북한정권 장기집권을 채 50년은 못채우고
이번 1994년 추석前에 아마도 뭔가 변고 또는 유고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지관으로서 예언한 기억이 나고
저도 그 신문을 보고 주변에 아는 사람에게 "김일성이 추석 전에 죽나 안죽나 우리 내기합시다!"라고 얘기나눈 기억이 새록새록 나고
5.두번째 기억으로는?
위의 지관 손석우옹의 얘기가 일부 사람들에게 그냥 돌아다니다 94년7월8일 김일성 급사-사망-약 10일전인가 일주일전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하다 몸이 아파 내림굿을 하고 무당이 된 美女 무속인 심진송이 말하길
"묘향산에 계신 사명당 어르신이 나에게 김일성이 죽을 거라고 말씀을 전해주셨다."라고 하는 것을 언론에 퍼뜨린 적이 있는 데 마침 묘하게(?) 적중하여 그녀는 일약 한국 메스컴의 주목을 받은 바 있습니다.
6.남북정상회담을 김영삼대통령과 하기로 이미 상호 결정한 것 때문에 김일성은 그 정상회담 준비때문에 엄청 바빴는 데 이게 그 어느 노인에게 적용되는 가장 안좋은 스트레스로 인한 過勞死(과로사) 원인이 되었음에 틀림없었던 정황이 되었다.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로 심근경색 유발했으리라는 추정은 유효적이라고 저는 봅니다.
7.일부 전문가에 의하면?
1974년에 후계자로 아들 김정일을 공식 지명한 이후 김정일은 차근차근 북한 권력의 핵심 요직에 자기 사람 앉히기를 시작하여 1990년경에 이르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고
1994년 죽기 얼마전 부터는 오히려 김정일 생일날 김일성이 축하 헌시를 올렸다는 뜬소문이 날 지경으로 모든 권력은 김정일에게 안겨졌고 속된 말로 1990년경부터는 김일성은 김정일의 집요한 아버지 우상화 업그레이드로 정신을 못차릴 정도였다는 후문입니다.
8.그리하여, 김정일의 주도로 북한경제의 발전이 좌우되다가 죽기 얼마전 김일성은 북한 경제의 실상을 알고 부터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북한경제가 후퇴하고 있음을 알고 부터는 아들 김정일에 대한 질책이 공공연히 벌어졌다는 후문이며 특히 북한 거물 탈북자 황장엽의 증언으로도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 듯하다.
9.즉, 죽기 얼마전 김일성이 모든 실권자 김정일의 면전에서
경제후퇴에 대한 강한 질책을 하였다는 것이며 이 질책만으로도 김일성에게는 심장에 적지않은 악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10.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죽기 얼마전 공교롭게도 아주 친한 그들 표현에 의하면 혁명 동지 2명이 연달아 사망하여 노년의 김일성에게 적지않은 충격을 주었으리라 보입니다.
11.일부 好事家들의 표현에 의하면?
독수리 관상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호랑이 관상의 김일성을 氣싸움에서 이겼는 데--사실상 남북간의 전쟁 위기 일발을 일부 학자에 의하면 남북 모두 초토화 전쟁 상황이 카터 전임 대통령의 중재로 일촉 즉발의 위기에서 1시간 전에
남북을 구해냈다는 발언을 서슴치 않는 한국 학자의 얘기도 저는 2번이나 들었을 정도입니다.
12.실제로 물론 결과론이지만
妙(?)하게시리 지미카터와 70년대 후반에 정상회담을 하였던 박정희도 그 얼마후 급서하고 94년에 김일성도 카터와 면담후 급서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 이후 김정일은 절대로 지미 카터는 절대 면담하지 않게 됩니다. 2011년 얼마전 카터는 방북하였으나 김정일이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13.김일성이 묘향산 별장에 있지않고 그냥 평양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 운명의 비바람 몰아치는 날 묘향산 별장에서 허무하게 죽지는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그게 운명인듯하고 그게 천수인지도 모르지 않겠어요?
14.아래 어느 칼럼니스트의 시의적절한 김일성 사망 관련 글을 올리게 되는 데 시간걸리더라도 찬찬히 읽어보시길 강추해 봅니다.실로 김영명님은 정말 대단한 용기를 가진 분이십니다. 공개 언론에서 그런 뜨거운 감자를 논하다니-김정일에 의한 김일성 간접 殺人說-정말 대단한 분임에 틀림없다고 저는 봅니다.
15.남북간의 국제전 성격의 전쟁 유발을 감행한 김일성의 죄목은 너무나 많습니다. 크메르 정권의 킬링필드 주범들에 비견되고 세르비아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와도 비견된다고 저는 봅니다.
16.김일성 사망전 경제 엉망인 상황을 눈치챈 이후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다시 그는 북한 권력의 일부를 회수하여 다시 직접 통치를 할 지렛대로 김영삼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비교적 흔쾌히 승낙했으리라는 추론도 가능합니다.
17.그리하여, 이런 저런 이유로 본인의 세습 자리에 위험을 느낀 김정일이 아래 글에서 나오는 김영명님이 과감하게 주장하는 간접 살인설도 그 신빙성에 무게를 더해 주지 않나 봅니다.
*****위에서 언급한 쪽집게 예언을 하여 유명세(?)를 크게 탄 바있던 美女무속인 심진송에게
어느 유명 월간 잡지기자가 다음과 같이 질문했답니다.
"김정일은 언제 죽을 것 같습니까?"
그녀는 답하길: " 묘향산에 계신 사명당 큰 스님이 아직까지는 연락을 안해 줍니다." 이것은 아마도 2년여전 쯤으로 필자는 기억하고 있는 데
다수의 한국의 유력 점장이들이나 미국의 일부 학자들도 이구동성으로 김일성 100살되는 2012년에서 14년까지를 그 시점으로 잡고 있는 듯합니다.
그 기간중에 아니면 그 기간을 조금 넘겨 다시 언젠가 심진송님에게 사명당 큰 스님이 무슨 말은 어느 시점에 다시 언질을 주실 것인지 저 필자는 공연히(?) 자못 궁금합니다.
***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각 집안에 대를 끊기거나 몇 명씩의 사망자를 낸 동족 상잔의 비극의 6.25전쟁을 생각하면지금도 부회가 치밀어 오릅니다. 부관참시를 백번해도 시원찮을 民族 반역자 김일성!
*** 언제 시간나면 그가 일으킨 무모한 전쟁때문에 남북한 각 집안에 그 얼마만한 피해를 가져다 주었는 데 미시사적으로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 아무튼 아래 글도 시간내어 찬찬히 읽어보시면서 전쟁중에 그리고 북한의 국지전 도발로 그리고 적지않은 남한 사람들이 연좌제로 빨갱이로 간첩으로 몰려 인생을 망친 분들에게 그 고통을 반분하고자 하오며 정말 억울하게 돌아가신 수백만명의 피해자들의 명복을 다시금 빌면서 이만 짧게 줄입니다.
후일을 도모합니다 좀더 자세한 김일성및 김정일 만행에 대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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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김정일에 의한 김일성 간접 살인설에 대한
글입니다. 시간내어 찬찬히 읽어보시길 강추해 봅니다.
17년전 오늘 희대의 독재자 김일성은 살해됐다
<칼럼>´급사´ 직전 아들 김정일과 부자갈등 심각 ´친정체제 복귀´
김일성 ´조기 후계자 선정´ 두고 후회…묘향산서 김정일에 총 겨눠
김일성 ´조기 후계자 선정´ 두고 후회…묘향산서 김정일에 총 겨눠
김영명 칼럼니스트 (2011.07.08 15:39:36)
구약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카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범으로 기록된다. 아담과 이브의 맏아들로 태어난 카인은 여호와가 동생 아벨만을 총애하자 질투심에서 아벨을 죽인다. 훗날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 보드왱은 인류 최초의 이 살인사건에서 형제자매 간 적대감 등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 ‘카인콤플렉스’를 창조해냈다.
‘근친증오’로 번역되는 카인콤플렉스는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왕권 찬탈을 위한 형제 간, 숙질 간, 지어는 부자 간 피로써 피를 부르는 권력암투로 반복돼 왔다. 권력은 그토록 비정하고 몰인정하다. 권력 앞에선 인륜도 천륜도 저버린다.
올해로 김일성이 사망한 지 17년째다. 94년 7월 8일 새벽 2시. 반세기도 훨씬 넘게 북한을 통치해온 김일성이 급사했다. 한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가 고종명(考終命)도 아니고 급사하게 되면 여러 의혹들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김일성의 사망을 두고도 각종 의혹이 제기됐다.
그리고 그 중심에 김정일이 세워졌다. 북한 당국의 발표대로라면 김일성의 사인은 과로에 의한 심근경색-자연사였다. 그러나 사망 원인과 사망 전후 김정일이 취한 일련의 미심쩍은 행동들을 보면 그것은 자연사가 아니었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간접 살해였다.
당시 김일성에겐 두 가지 큰 과제가 주어졌다. 하나는 7월 25일로 예정된 김영삼 대통령과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이었고, 다른 하나는 북미간 일촉즉발의 위기를 몰고 왔던 북핵문제였다. 이 문제는 그해 6월 16일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김일성과 대좌함으로써 가까스로 고비를 넘겼다. 김일성은 남은 과제인 남북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회담장을 직접 챙기겠다며 ‘7월 경제관계 일꾼회의’를 묘향산별장에서 가졌다. 그 과정에서 생긴 충격적인 사건들로 김일성은 심장발작을 일으켜 급사한 것으로 돼있다.
김일성의 급사를 두고 항간의 의견은 ‘자연사’와 ‘음모에 의한 간접 살해’ 두 갈래로 나뉘었다. 자연사 쪽 의견은 “자식이 아비를 죽일 순 없다”며 김정일의 연루를 부인했다. 천륜과 인륜이 그 이유로 내세워졌다. 간접 살해 쪽 의견은 ”김정일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김정일을 연관시켰다. 그의 패악질과 권력의 속성이 이유로 내세워졌다.
김정일은 권력과 혈육 중 하나를 택하라면 서슴지 않고 권력을 끌어안을 사람이라며 잔인무도한 포악성이 지적됐다. 그리고 권력의 속성으로 조선시대의 수많은 임금 독살설이 예시됐다. 조선조시대에는 임금 4명 중 1명이 독살설에 휘말렸는데 500여 년 기나긴 왕조 통치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왕들의 죽음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반대 세력과의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됐을 때 왕들이 급서했다고 지적됐다.
김일성 급사를 조선조 왕들의 독살 음모에 대입시키면 그럴 듯한 답이 나온다. 우선 김일성은 1인 장기 집권으로 천명을 다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가 하면 권력 일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던 김일성이 다시 등장함으로써 싹튼 부자 갈등이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극대화되면서 그의 급사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김일성의 사망은 자연사가 아니고 죽임을 당한 것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때만 되면 음모에 의한 살해로 논쟁의 불길이 댕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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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김일성 사망은 자연사가 아니고 음모에 의한 살해임을 증명할 상황증거(circumstantial evidence)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부자 갈등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는 김정일 실정(失政)에 따른 김일성의 불신에서 비롯됐다. 김일성은 일찍부터 김정일의 국정운영 실패에 대해 몹시 못마땅해 해왔다. 그러다가 93년 후반 들어 김정일의 통치능력 한계와 문제점을 인식하고 친정체제로 복귀하는 조치를 신속히 취하면서 깊어진 부자 갈등은 차츰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94년 6월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회담을 갖고 남북정상회담 주선을 부탁하면서 “회담이 잘 되면 내가 앞으로 10년 더 통치하겠다”고 말함으로써 김정일에 대한 불신과 부자 갈등의 속내를 드러냈다. 이전에도 김일성은 혁명원로들과의 면담자리에서 후계자 조기 선정을 자책하곤 했다. 어떤 때는 “평일(김정일 이복동생)이가 큰일 할 놈이었는데 미안하게 됐다”며 눈물까지 글썽였다고 전해진다.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마다 김정일이 심한 카인콤플렉스를 느꼈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지 않아도
‘근친증오’로 번역되는 카인콤플렉스는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왕권 찬탈을 위한 형제 간, 숙질 간, 지어는 부자 간 피로써 피를 부르는 권력암투로 반복돼 왔다. 권력은 그토록 비정하고 몰인정하다. 권력 앞에선 인륜도 천륜도 저버린다.
올해로 김일성이 사망한 지 17년째다. 94년 7월 8일 새벽 2시. 반세기도 훨씬 넘게 북한을 통치해온 김일성이 급사했다. 한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가 고종명(考終命)도 아니고 급사하게 되면 여러 의혹들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김일성의 사망을 두고도 각종 의혹이 제기됐다.
그리고 그 중심에 김정일이 세워졌다. 북한 당국의 발표대로라면 김일성의 사인은 과로에 의한 심근경색-자연사였다. 그러나 사망 원인과 사망 전후 김정일이 취한 일련의 미심쩍은 행동들을 보면 그것은 자연사가 아니었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간접 살해였다.
당시 김일성에겐 두 가지 큰 과제가 주어졌다. 하나는 7월 25일로 예정된 김영삼 대통령과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이었고, 다른 하나는 북미간 일촉즉발의 위기를 몰고 왔던 북핵문제였다. 이 문제는 그해 6월 16일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김일성과 대좌함으로써 가까스로 고비를 넘겼다. 김일성은 남은 과제인 남북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회담장을 직접 챙기겠다며 ‘7월 경제관계 일꾼회의’를 묘향산별장에서 가졌다. 그 과정에서 생긴 충격적인 사건들로 김일성은 심장발작을 일으켜 급사한 것으로 돼있다.
김일성의 급사를 두고 항간의 의견은 ‘자연사’와 ‘음모에 의한 간접 살해’ 두 갈래로 나뉘었다. 자연사 쪽 의견은 “자식이 아비를 죽일 순 없다”며 김정일의 연루를 부인했다. 천륜과 인륜이 그 이유로 내세워졌다. 간접 살해 쪽 의견은 ”김정일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김정일을 연관시켰다. 그의 패악질과 권력의 속성이 이유로 내세워졌다.
김정일은 권력과 혈육 중 하나를 택하라면 서슴지 않고 권력을 끌어안을 사람이라며 잔인무도한 포악성이 지적됐다. 그리고 권력의 속성으로 조선시대의 수많은 임금 독살설이 예시됐다. 조선조시대에는 임금 4명 중 1명이 독살설에 휘말렸는데 500여 년 기나긴 왕조 통치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왕들의 죽음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반대 세력과의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됐을 때 왕들이 급서했다고 지적됐다.
김일성 급사를 조선조 왕들의 독살 음모에 대입시키면 그럴 듯한 답이 나온다. 우선 김일성은 1인 장기 집권으로 천명을 다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가 하면 권력 일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던 김일성이 다시 등장함으로써 싹튼 부자 갈등이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극대화되면서 그의 급사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김일성의 사망은 자연사가 아니고 죽임을 당한 것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때만 되면 음모에 의한 살해로 논쟁의 불길이 댕겨진다.
◇ 지난 4월 15일 김일성 주석 탄생일을 맞아 평양시민들이 만수대동상에 헌화하고 있다. 2011.4.16 ⓒ연합뉴스 |
실제로 김일성 사망은 자연사가 아니고 음모에 의한 살해임을 증명할 상황증거(circumstantial evidence)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부자 갈등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는 김정일 실정(失政)에 따른 김일성의 불신에서 비롯됐다. 김일성은 일찍부터 김정일의 국정운영 실패에 대해 몹시 못마땅해 해왔다. 그러다가 93년 후반 들어 김정일의 통치능력 한계와 문제점을 인식하고 친정체제로 복귀하는 조치를 신속히 취하면서 깊어진 부자 갈등은 차츰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94년 6월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회담을 갖고 남북정상회담 주선을 부탁하면서 “회담이 잘 되면 내가 앞으로 10년 더 통치하겠다”고 말함으로써 김정일에 대한 불신과 부자 갈등의 속내를 드러냈다. 이전에도 김일성은 혁명원로들과의 면담자리에서 후계자 조기 선정을 자책하곤 했다. 어떤 때는 “평일(김정일 이복동생)이가 큰일 할 놈이었는데 미안하게 됐다”며 눈물까지 글썽였다고 전해진다.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마다 김정일이 심한 카인콤플렉스를 느꼈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지 않아도
김정일은 그 동안 김일성의 질책이 두려워 궁핍해진 인민생활에 대해 허위보고를 해왔다.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김일성은 94년 7월 6일 묘향산에서 경제일꾼들과 협의회를 진행하던 중 3개월 전부터 주민들이 배급을 못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김정일을 세차게 몰아붙였다고 한다. 그 때도 김정일은 카인콤플렉스를 느꼈을 것이다.
김일성이 통일문제를 서두른 이유도 모든 권력이 김정일에게 집중됨에 따라 빈껍데기로 남은 주석직과 총비서직의 권위를 통일 분위기 조성으로 되찾으려는데 있었다고 한다. 이를 눈치 챈 김정일이 남북정상회담을 반대하면서 부자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고, 이는 끝내 김일성의 급사를 불러왔다.
남북정상회담을 둘러싼 부자 갈등은 묘향산에서 폭발했다. 당시 김일성은 별장에서 김정일에게 “회담준비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는데도 시큰둥하자 격노했다고 한다. 이때 1호 호위총국(김일성 경호 담당) 경호원이 김정일을 향해 권총을 뽑아 들었고 김정일 경호원들도 이에 응사하고 나왔다. 이에 충격을 받은 김일성이 1차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이것이 사망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미필적 고의에 의한 김정일의 김일성 간접 살해 상황증거가 잡힌다.
김일성 사망과 관련된 음모는 그가 묘향산별장으로 향하기 전 경호계획 단계에서부터 드러난다. 통상 김일성이 한 번 떴다 하면 8명의 의사가 따라붙는 것으로 돼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묘향산으로 떠나던 그날 동행 의사는 단 2명뿐이었고, 심장담당 주치의는 아예 제외됐다. 김일성 동선에 따른 단계별 호위계획을 직접 점검한 사람은 김정일이었다. 그런데도 김정일은 김일성의 심장전문 주치의를 묘향산행 명단에서 제외시켰다.
김일성은 산수(傘壽)와 망구(望九)를 넘긴 82세의 노인이었다. 거기에다 평소 협심증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도 심장담당 주치의를 동행시키지 않았다. 심장전문 주치의가 제외된 것도 이상하지만 더 의심스러운 것은 김일성이 한번 떴다 하면 혈압과 맥박, 체온 상태 등을 실시간으로 체크할 수 있어 일명 ‘움직이는 병원’이라고 부르던 독일산 최첨단 의료장비들마저 동원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누가, 왜 그랬을까?
김일성 사망 직후 정황에서도 음모의 그림자가 보인다. 김일성 사망 뒤처리를 보면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어이없는, 그래서 필연이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의혹들이 많다. 우선 김일성이 묘향산에서 쓰러진 순간 김정일에게 sos가 보내졌으나 한 시간이 넘어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의사와 간호사, 응급 의료장비를 실은 헬기가 떴으나 호우로 착륙을 포기하고 되돌아갔다. 이번엔 의료진이 자동차로 내달렸으나 계곡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공교롭지 않은가?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도 김정일이 판 함정이라고 입을 모은다.
김일성 사망 공식 발표 지연도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 김일성 사망 시각은 94년 7월 8일 오전 2시였다. 그러나 공식 발표 시각은 7월 9일 낮 12였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최고 지도자의 사망 사실이 늦게 발표되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후계자 선출 시간 벌기이고, 다른 하나는 적의 공격 대비이다. 그러나 북한은 74년에 이미 후계자 선출이 끝났고 김일성 사망 당시 휴전선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대지 않았다. 그런데도 김일성 사망 공식 발표시각이 무려 32시간이나 지연됐다. 반발하는 군부 설득이 그 이유였다. 군부의 반발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김일성 사망이 자연사가 아니라는 방증이다.
김정일은 김일성 사망 연루를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이 그 같은 혐의를 벗으려면 일련의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책임 추궁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어느 것 하나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 또한 피할 수 없는 김일성 간접 살해 증거로 꼽힌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인 94년 6월 15일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평양에 갔다. 그리고 김일성으로부터 대한민국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 주선을 부탁받아 그 물꼬를 텄다. 그러나 김일성의 급사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17년 후인 지난 4월 28일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평양을 다시 찾았다. 이번엔 김정일로부터 남북정상회담 주선을 부탁받았다. 그러나 이 또한 천안함과 연평도 포격사건 등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토인비의 말이 실감난다.
토인비의 말이 사실이라면 부자 갈등에 의한 권력암투로 죽임을 당한 김일성처럼 김정일의 앞날도 순탄치만 않을 것 같다. 우선 김정은 3대 세습 안착 여부가 아직은 미지수다. 후계구도를 놓고 어떤 권력암투가 벌어질지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무릇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는 천명을 다하고 죽는 예가 드물고, 권력 후계 경쟁자는 목숨 부지하기가 어렵다. 포악무도한 독재자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다.
그렇다고 김정일에게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김정일이 비참한 최후를 모면하고 그 후계자가 목숨을 제대로 부지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김정일이 독점하고 있는 권력을 세습이 아니라 제도에 넘기는 정치개혁을 단행하고 경제를 개방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김정일이 자신과 일가족을 구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김일성이 통일문제를 서두른 이유도 모든 권력이 김정일에게 집중됨에 따라 빈껍데기로 남은 주석직과 총비서직의 권위를 통일 분위기 조성으로 되찾으려는데 있었다고 한다. 이를 눈치 챈 김정일이 남북정상회담을 반대하면서 부자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고, 이는 끝내 김일성의 급사를 불러왔다.
남북정상회담을 둘러싼 부자 갈등은 묘향산에서 폭발했다. 당시 김일성은 별장에서 김정일에게 “회담준비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는데도 시큰둥하자 격노했다고 한다. 이때 1호 호위총국(김일성 경호 담당) 경호원이 김정일을 향해 권총을 뽑아 들었고 김정일 경호원들도 이에 응사하고 나왔다. 이에 충격을 받은 김일성이 1차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이것이 사망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미필적 고의에 의한 김정일의 김일성 간접 살해 상황증거가 잡힌다.
김일성 사망과 관련된 음모는 그가 묘향산별장으로 향하기 전 경호계획 단계에서부터 드러난다. 통상 김일성이 한 번 떴다 하면 8명의 의사가 따라붙는 것으로 돼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묘향산으로 떠나던 그날 동행 의사는 단 2명뿐이었고, 심장담당 주치의는 아예 제외됐다. 김일성 동선에 따른 단계별 호위계획을 직접 점검한 사람은 김정일이었다. 그런데도 김정일은 김일성의 심장전문 주치의를 묘향산행 명단에서 제외시켰다.
김일성은 산수(傘壽)와 망구(望九)를 넘긴 82세의 노인이었다. 거기에다 평소 협심증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도 심장담당 주치의를 동행시키지 않았다. 심장전문 주치의가 제외된 것도 이상하지만 더 의심스러운 것은 김일성이 한번 떴다 하면 혈압과 맥박, 체온 상태 등을 실시간으로 체크할 수 있어 일명 ‘움직이는 병원’이라고 부르던 독일산 최첨단 의료장비들마저 동원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누가, 왜 그랬을까?
김일성 사망 직후 정황에서도 음모의 그림자가 보인다. 김일성 사망 뒤처리를 보면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어이없는, 그래서 필연이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의혹들이 많다. 우선 김일성이 묘향산에서 쓰러진 순간 김정일에게 sos가 보내졌으나 한 시간이 넘어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의사와 간호사, 응급 의료장비를 실은 헬기가 떴으나 호우로 착륙을 포기하고 되돌아갔다. 이번엔 의료진이 자동차로 내달렸으나 계곡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공교롭지 않은가?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도 김정일이 판 함정이라고 입을 모은다.
김일성 사망 공식 발표 지연도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 김일성 사망 시각은 94년 7월 8일 오전 2시였다. 그러나 공식 발표 시각은 7월 9일 낮 12였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최고 지도자의 사망 사실이 늦게 발표되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후계자 선출 시간 벌기이고, 다른 하나는 적의 공격 대비이다. 그러나 북한은 74년에 이미 후계자 선출이 끝났고 김일성 사망 당시 휴전선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대지 않았다. 그런데도 김일성 사망 공식 발표시각이 무려 32시간이나 지연됐다. 반발하는 군부 설득이 그 이유였다. 군부의 반발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김일성 사망이 자연사가 아니라는 방증이다.
김정일은 김일성 사망 연루를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이 그 같은 혐의를 벗으려면 일련의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책임 추궁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어느 것 하나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 또한 피할 수 없는 김일성 간접 살해 증거로 꼽힌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인 94년 6월 15일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평양에 갔다. 그리고 김일성으로부터 대한민국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 주선을 부탁받아 그 물꼬를 텄다. 그러나 김일성의 급사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17년 후인 지난 4월 28일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평양을 다시 찾았다. 이번엔 김정일로부터 남북정상회담 주선을 부탁받았다. 그러나 이 또한 천안함과 연평도 포격사건 등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토인비의 말이 실감난다.
토인비의 말이 사실이라면 부자 갈등에 의한 권력암투로 죽임을 당한 김일성처럼 김정일의 앞날도 순탄치만 않을 것 같다. 우선 김정은 3대 세습 안착 여부가 아직은 미지수다. 후계구도를 놓고 어떤 권력암투가 벌어질지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무릇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는 천명을 다하고 죽는 예가 드물고, 권력 후계 경쟁자는 목숨 부지하기가 어렵다. 포악무도한 독재자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다.
그렇다고 김정일에게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김정일이 비참한 최후를 모면하고 그 후계자가 목숨을 제대로 부지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김정일이 독점하고 있는 권력을 세습이 아니라 제도에 넘기는 정치개혁을 단행하고 경제를 개방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김정일이 자신과 일가족을 구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김정일에 의한 김일성 간접 살인설에 대해 용기내어 글을 올려주신
김영명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 6.25전쟁중에 그리고 그 이후 남,북 대치상황하에서 국지전 및 연좌제로, 납북으로, 간첩죄 등등으로 정말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에게 다시금 그분들의 명복을 충심으로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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