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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선화공주]-[400의병]-신라-금관-황남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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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3,056회 작성일 2015-04-01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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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신라시대의 性풍속도의 일부를 알려주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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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신국의 도’와 남성 순장자 “신라의 경우 같은 성씨는 물론 형제의 자식이나 고종·이종 자매까지 아내로 삼았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중국의 예속을 따진다면 도리에 크게 어긋난다”면서 신라의 풍습을 평했다.···경향신문이기환 논설위원2015. 04. 10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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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무령왕릉 발굴 관련 글은
 
2011년에 올린 글을 다시 가져온 것입니다
 
참조 바랍니다.
 
 
@@백제 무령왕릉 발굴 40주년 특집!
**우선 무령왕릉 특집 보도 소식에 즈음하여 생각나는 대로 검색없이 그동안의 소회를 피력해 봅니다
1.일본제국주의 강제병탄 30여년 기간동안 일본은 우리 땅을 발굴이나 도굴하면서 수많은 문화재를 밀반출하여 지금도 각 개인의 소장품으로 애지중지 자기것으로 보관하고 있다고 봅니다.
2.임진왜란등의 시대를 통틀어서는 수만점의 우리문화재가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그 문화재를 만든 우리 조상이 지금도 슬픈 모습으로 우리를 측은하게 지하에서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리라!
3.일제 강점기에 천우신조로 우리의 공주의 송산리 고분군에서 이런 무령왕릉이 온전히 보존된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일본놈들이 강제병탄 식민 지배 당시 조금이라도 그 도굴 여부의 낌새를 알아차렸다면? 우리 백제의 찬란한 문화재가 어떻게 되었을 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5.지금부터 40년전 발굴 조사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無知한 조속 발굴 지시에 맞추느라
몇달 걸려 찬찬히 발굴해야할 상황을 17시간여 만에 졸속 발굴하여 이 발굴에 참여한 다수의 고고학자들이 수십년간 가슴을 치고 크게 후회했던-특히 김원룡 박사등등을 위시하여-후일담이 지금도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김원룡박사는 졸속 발굴이후 수십년 동안 후회막급한 심정을 토로한 바고 있으며 아마도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그런 마음이었다고 저는 봅니다.
6.그건 후회한들 소용없을 것이고 아뭏든
우리의 백제 무령왕 당시 백제의 국제 개방성과 동아시아 문화 수용의 코스모폴리탄적 유연성에 4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가 좋은 성과를 거두면서 결실을 맺길 기원합니다.
7.백제의 계백 장군 동상을 한동안 문화재 담당 공무원들의 소홀함으로 인해 아무곳에나 쳐박아 놓았다는 몇 년전 보도를 보고 저는 개인적으로 심히 분개했었고
서울의 숭례문 방화사건으로 온 국민의 마음에 응어리를 한 동안 안겨주는 사건도 관련 지역의 문화재 담당 공무원들의 무지의 소치 내지는 수준낮은 관리 허점에서 비롯된 것임을 명심하고 우리 국민들도 먹고살기 바쁜 세상에 그런 것까지 관심둘 여유가 어디있느냐 식의 방기하는 태도는 이번 기회에 우리 국민 모두 반성하길 바랍니다.
8.어느 문화재 관련 학자는?
숭례문도 종로구 측에서 담당하였더라면?
"그런 방화 소실 사건은 어쩌면 벌어지지 않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의 토로도 저는 직접 면전에서 들은 바 있습니다.
부디 전국 원근 각처에 산재한 우리 문화재가 추후 그런 야만적 행위로 소실되는 일이 없도록 --부산 범어사 일부 소실 사건 포함하여-두손 모아 기원해 봅니다.
무령왕릉 내부의 3d 스캔 영상. 앞쪽 낮은 아치형 터널이 연도, 뒤쪽 높은 터널이 왕과 왕비의 목관을 안치한 묘실이다. 백제문화제추진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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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내부의 3d 스캔 영상. 앞쪽 낮은 아치형 터널이 연도, 뒤쪽 높은 터널이 왕과 왕비의 목관을 안치한 묘실이다. 백제문화제추진위원회 제공
무령왕릉의 구조. 크고 작은 두 개의 터널이 이어진 형태로, 당시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던 벽돌무덤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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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의 구조. 크고 작은 두 개의 터널이 이어진 형태로, 당시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던 벽돌무덤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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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의 진묘수(무덤을 지키는 동물) 석상. 국보 162호.(위) 무령 왕릉 출토 왕비의 금제 관 장식. 국보 155호.(아래)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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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의 진묘수(무덤을 지키는 동물) 석상. 국보 162호.(위) 무령 왕릉 출토 왕비의 금제 관 장식. 국보 155호.(아래)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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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1971년 7월 5일,
장마철을 앞두고 배수로 공사가 한창이던 충남 공주의 송산리 고분군에서 땅을 파던 인부의 삽날에 뭔가 딱딱한 게 닿았다.
ㄴ.조심스레 파내려 가던 중 6호분과 비슷하게 가지런히 쌓은 벽돌들이 나타나자 공사는 중단됐다.
ㄷ.급히 발굴조사단이 꾸려졌다. 발굴 착수 이틀째인 7월 8일 오후 드디어 무덤 입구가 드러났고 조사단이 안으로 들어갔다.
ㄹ.조사단은 바닥에 놓인 두 장의 돌판 중 하나에서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
이라는 명문을 읽었다.
ㅁ.'사마왕', 바로 백제 무령왕이다. 무령왕(재위 501~523)과 왕비의 합장 무덤인 무령왕릉은 그렇게 우연히 발견됐다.

ㅂ.무령왕릉 발굴은 20세기 한국 고고학 발굴의 최대 성과로 꼽힌다.
ㅅ.삼국시대 왕릉 중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확인된 유일한 예다.
ㅇ.도굴당하지 않은 온전한 모습이라 학계는 더욱 흥분했다.
왕과 왕비의 금동신발, 머리에 쓰는 금제 관 장식, 중국 도자기 등 108종 4,687점(국보 12종 17점 포함)의 유물이 출토됐다.
ㅈ.특히 무덤 구조가 백제식이 아니라 당시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던 벽돌무덤(전축분ㆍ塡築墳) 양식인 점은 백제의 국제성을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ㅊ.무령왕릉 발굴은 사상 最惡의 졸속 발굴이기도 하다.
여러 달을 해도 모자랄 발굴을 무덤 개봉에서 유물 수습까지 겨우 17시간만에 해치웠다.
ㅋ.발굴 현장에 몰려든 취재진과 구경꾼 등쌀에 조사단은 철야 작업을 강행, 큰 유물만 대충 챙기고 나머지는 자루에 쓸어 담아 나왔다. 졸속 발굴의 후유증은 두고두고 연구의 발목을 잡고 있다.
예컨대 무령왕릉에서 나온 3,000여개의 구슬은 마구 섞인 채 수습되어 본래 형태나 용도를 알 길이 없다.

ㅌ.교양서 <고대 동아시아 문명교류사의 빛, 무령왕릉>을 쓴 고고학자
권오영 한신대 교수는?
"유물도 팔자가 있다"고 말한다.
무령왕릉도 마찬가지여서 시대에 따라 그 가치에 대한 평가나 이미지가 변해왔다고 설명한다.
ㅍ.무령왕릉의 국제성만 해도 그렇다.
민족주의를 강조하던 1970, 80년대는 무령왕릉의 구조가 중국식이고,
출토 유물에 중국제 도자기, 왕과 왕비의 목관 재료인 일본산 금송 등 수입품이 많은 것을 껄끄럽게 여기는 분위기였지만,
최근 학자들은 외국 문물을 적극 수용해 자기 것을 만들어낸
백제의 개방성과 '코스모폴리탄' 무령왕에 주목하고 있다.
ㅎ.또 무령왕릉에서 6세기 한중일 삼국의 문화 교류를 주로 읽던 데서 더 나아가 백제가 멀리 페르시아 등 서역과도 직접 동서 교류를 했던 흔적을 찾아내고 있다.
@@ 무령왕릉 발굴 40주년 관련 주요 행사는?
1.무령왕릉 발굴 4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 행사가 열린다. 무령왕릉 출토 유물을 소장하고 상설 전시 중인 국립공주박물관이 앞장서서
특별전시회와 학술회의,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원로 학자 초청 좌담회 등을 준비하고 있다.
2.특별전 '무령왕릉 신발견'(가제)은?
2011.10월 7일부터 내년 1월 29일까지 한다.
무령왕릉 출토품 중 미공개ㆍ미보고 유물을 중심으로, 자연과학적 분석을 통해 밝혀진 새로운 성과들로 꾸밀 예정이다.
3.2011.10월 28, 29일 열리는 국제학술대회는?
한중일 학자들이 참여해 무령왕릉을 재조명한다.
4.좌담회는? 8월 초로 예정돼 있다.
10월과 11월, 일반인을 대상으로 여섯 번에 걸쳐 특별 연속강좌도 연다.
5.국립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의 모든 것을 담을 10권짜리 <무령왕릉 신보고서>도 펴낸다. 2009권 제 1권을 냈다. 1973년 나온 발굴보고서는 워낙 졸속 발굴을 한 탓에 실측 정보가 부정확하고 핵심 유물만 정리해 상당수 유물이 누락돼 있다.

6.무령왕릉은 발굴 후 일반에 개방됐으나 관람객 발길에 바닥 벽돌이 깨지는 등 보존에 문제가 생기자 1997년 폐쇄됐다.
7.대신 무령왕릉이 속한 송산리 고분군 바로 옆에 자리잡은 전시관에서 모형을 구경할 수 있다.

8.
공주시 문화재관리소 ?
현재 무령왕릉과 송산리 고분군의 내부 환경 변화에 대한 정밀 조사를 진행 중이다. 내년까지 2년 간 하는 이 작업은 무덤 내부 온도와 습도를 사람이 들어가지 않고 외부에서 측정ㆍ제어하는 시설을 만들고, 이를 토대로 고분 보존에 가장 적합한 환경을 파악하는 것이 목표다.
무덤 구조의 안전 진단과 내부 미생물 조사도 포함하고 있다.
고분 내부 환경 변화에 대한 최초의 정밀 조사인 이 작업의 결과는 다른 고분들에도 적용될 예정이다.
***한국일보의 오미환 선임기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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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2015.04.02 (목) 왜군의 선단이 부산포 앞바다에 모습을 보인 것은 1592년 어스름 녘이었다. 한밤이 되자,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가 이끄는 1만 8700명의 왜군을 태운 배가 바다를 가득 메웠다. 이튿날 아침 안개가 걷히자 왜군은 깃발을 앞세우고 상륙해 부산진성을 3면에서 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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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금관총 왜 다시 발굴하나 2015-03-23 03:00
동아일보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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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라 금관, 아프간
 
신라 금관, 아프간에서 왔다고?
한겨레 1일전 네이버뉴스
[한겨레] 4~6세기 신라 금관의 뿌리가 아프가니스탄이라면? 4~6세기 신라 금관의 뿌리가 아프가니스탄이라면?... ‘그리핀’이 신라 예술의 유력한 도상이 됐다는 해석도 내놓는다. 한반도 고대문화는 범 유라시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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