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고 53회--대전 시장^^권선택 다시보기-서대전역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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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316회 작성일 2015-02-08 06:45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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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택 대전시장 당선인, 그는 누구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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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약력 권선택 대전시장 예비후보는 1955년 대전시 중구 목달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목달동은 당시에는 겨우 몇 가구만이 모여서 농사를 짓고 사는 한촌이었습니다. 1967년 대전 산서초등학교, 1971년 충남중학교, 1974년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이어 1978년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승승장구의 엘리트코스를 밟은 것은 아닙니다. 사춘기 시절 대전중학교 낙방과 서울대 불합격이라는 고배를 마셨습니다. 하지만 앞길을 스스로 개척하는 등 굳은 의지로 패자부활전에서 달콤한 결실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 재학중이던 만 21살의 나이에 행정고시에 수석으로 합격을 하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내무부 공무원을 선택해 지방 행정기관 근무를 지원했습니다. 당시 경제기획원이 인기순위 1위였고 행시 수석은 이곳으로 가는 것이 당연했지만 충남도청이 첫 근무지가 됐습니다. 1978년 만 22살에 풋내기 지방 공무원을 시작해 내무부 기획관리실에서 근무를 하고 대통령 인사비서관을 지냈습니다. 이어 내무부 근무를 거쳐 1995년에 대전시 기획실장으로 발령을 받으며 대전으로 돌아왔습니다. 1999년에는 정부부시장과 행정부시장을 지냈고 2002년 행정자치부 자치행정국장, 2003년 청와대 인사비서관을 끝으로 공직을 마쳤습니다. 2004년에 열린우리당으로 17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고향 중구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18대 국회의원을 마친 뒤엔 대전시 구석구석을 발로 누비며 서민들의 삶을 몸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보듬어 안는 일을 해왔습니다. 2. 어릴 때 이야기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때는 키가 작아서 늘 교실에서 제일 앞자리가 내 차지였어요. 하지만 오히려 작은 키가 남을 더 우러러 보고 더 열심히 봉사하라는 운명인가 싶을 때도 있었지요. ‘키는 작아도 남의 앞에 서는 아이’였던 나는 (특히) 손재주가 좋은 편이었어요. 덕분에 아이들을 위해 썰매를 만든다거나 나무를 깎아 기타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또래 친구들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해결사, 마을에선 A/S기사 등 주변의 어려운 일을 풀어주는 것을 많이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요. 한마디로 ‘목달동 맥가이버’쯤 됐었죠 지금 되돌아보면, 이때부터 고향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아요. 3. 부모님 이야기 우리 집안은 보문산 뒤쪽 안동 권 씨 집성촌인 중구 목달동에서 400여년을 살아왔습니다. 3남4녀의 장남인데요. 부모님에 앞서 할머니 말씀을 먼저 해야 될 것 같아요. 할머니는 나에게 학자이고, 농사꾼이었고 의사였습니다. 지금도 할머니의 글 읽던 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습니다. 할머니는 15살에 시집와서 서른 후반에 혼자 몸이 되셨어요. 이때부터 혼자 농사지으시고 밤에는 길쌈과 바느질을 하시면서 생계를 이어가셨답니다. 밤에 바느질을 한 뒤엔 꼭 책을 읽으셨어요. 내가 태어날 때 할머니는 61세 나이셨는데 어머니께서 젖이 잘 나오지 않으니까 나를 업고 온 동네로 젖동냥을 다니셨어요. 전쟁 때 아버님이 군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할머니는 온 마을은 물론이고 가까운 마을, 심지어 논산까지 다니면서 1000명의 사람에게 1000개의 바느질 땀을 받아 ‘무운장구(武運長久)’라는 글을 만들기도 했어요. 그렇게 하면 무사히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 고생하며 사셨어도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항상 도움을 주셨고 아버님도 마찬가지셨죠. 자식들에겐 근검절약을 실천하시면서도 이웃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발 벗고 나서셨어요. 아버지는 도무지 이웃이 어려운 것을 그냥보고 넘기지를 못했어요. 보릿고개땐 조건 없이 곡식을 내주기도 했죠. 인근 마을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아버지로부터 크고 작은 도움을 받았고 우리 집은 자연스럽게 마을 사람들의 고민거리를 해결하는 장소가 됐어요. 여기에 우리 집은 항상 오가는 이들이 주린 배를 채우는 열린 식당이기도 했어요. 어머니도 먹을 것을 줄이면서도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항상 밥을 넉넉하게 하셨던 분이지요. 4. 혼란했던 대학시절 행정고시 수석, 어쩌면 아주 우연이었습니다. 70년대 대학가는 독재정권에 맞서 조용한 날이 없었죠. 제가 대학에 진학한 1974년에는 민청학련사건이 발생, 학교는 하루가 멀다 하고 휴교를 하는 등 지금과는 다른 암울한 시기였죠. 시위가 있으며 맨 앞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돌을 깨 나르는 일을 열심히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시위가 없는 날은 시대의 아픔과 좌절을 달래기 위해 폐쇄된 강의실 대신 학교 술집으로 출석하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그렇게 무기력과 혼돈 속에 1학년을 보내고 2학년이 되면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깡촌에서 어렵게 서울로 유학을 보낸 부모님 생각에 이렇게 대학생활을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때 친구 중 하나가 책을 열심히 보고 있기에 뭔가 하고 봤더니, 행정고시 책이었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아 그래 고시라는 게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곧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고시 관련 책들을 구입했죠. 그때 ‘고시’라는 단어는 암울한 시대를 극복하고 싶은 저에게는 새로운 길이었습니다. 그렇게 고시공부를 시작했는데 이를 안 아버님이 당장 그만두라고 불같이 화를 냈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자식이 고시에 합격하는 걸 바라지 않는 부모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버님은 10년이나 고시를 준비하다가 결국 실패한 이웃마을 사람을 알고 있어서 인지, 아들인 저도 이웃마을 사람과 같은 길을 걸을까 봐 반대가 심하셨습니다. 할 수 없이 아버님과 가족들 몰래 고시공부를 계속했죠. 2학년 때 치른 시험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습니다. 1차 시험 종합점수는 합격이었지만 노동법 한과목이 과락을 해 낙방을 했습니다. 가족들 몰래 고시공부를 하면서 한 번 낙방했다고 포기하기에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쉽게 포기한다는 것 자체가 용납이 안됐습니다. 그땐 ‘1차 시험’이라도 합격해 보자는 오기로 다시 고시공부에 매달렸습니다. 하숙집에서 싸준 도시락 2개를 들고 도서관으로 가 도서관이 문을 닫는 밤 11시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하루 4시간 밖에 자지 않는, 지금 되돌아보면 좀 무식한 방법이었죠. 고시학원에 가지 않고 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기초를 다졌고 하루 4시간만 자자라는 제자신의 원칙을 지켰죠. 그래서인지 3학년 가을에 1차 합격을 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고 2차 시험을 보고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에 설령 결과가 나쁘더라도 크게 실망하지 말자라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제가 수석합격을 했다는 보도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도 최연소 수석합격이 믿어지지 않았죠. 내 자신이 세운 원칙을 지키고 내 자신과 싸워 이겼다는 생각에 기뻤습니다. 지금도 어떻게 해서 고시에 수석 합격했냐고 묻는 분들에게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더 오래 의자에 앉아 집중하느냐가 공부 잘하는 비결이다.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한답니다. 5. 공무원 생활 행정고시 수석 합격 한 후 주변 분들은 당시 인기 있고 힘 있는 경제기획원이나 재무부에 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저는 내무부를 택했습니다. 당시 내무부는 초임 사무관을 지방으로 배치하는 것이 관례여서 인기가 없었습니다. 군대로 치면 최전방인 내무부를 택한 것은 행정 최일선에서 시민들과 만나면서 봉사하는 것이 공무원이라는 생각과 고향 대전에서 봉사하고 싶다는 마음이 우선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충남도청 서무과로 발령이 났고, 23살 세상물정 모르는 나이에 어색한 넥타이를 매고 도청으로 첫 출근하던 날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도청 정문을 지나려는데 수위아저씨가 저를 불러 세우고는 “학생, 무슨 일로 왔나? 어디가나?”라고 물을 때 조금은 아찔했습니다. 사무실에서도 어색했습니다. 같은 사무관인 동료들은 평생 일선공무원으로 잔뼈가 굵은 50대이어서 아들 뻘 되는 저를 좋아할 리 없었죠. 몇 달 동안 맘고생 좀 하다가 생각을 바꿨습니다. 내가 아무리 행정고시 수석한 사무관이더라도 공직 일선에서 잔뼈가 굵은 분들의 경륜을 당할 수 는 없다. 내가 먼저 다가가자라고 생각을 했죠. 그래서 저보다 직급이 낮은 분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이건 어떻게 하는 거냐? 이것 좀 봐주세요, 이건 이렇게 하면되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연배 많은 동료공무원들과 격이 없이 지내게 됐습니다. 충남도청 문화계장과 기획계장, 운수과장 등을 거쳐 내무부 지방과장, 대전시 기획관, 정무부시장, 행정부시장, 내무부 자치행정국장, 청와대 인사비서관 등을 지냈습니다. 6. 정무부시장에서 행정부시장으로 1999년 2월 홍선기 대전시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대전시 정무부시장직을 맡아 달라는 말이었습니다. 부시장직을 맡는다 하더라도 내가 갈 자리는 행정부시장이었지 정무부시장은 아니었습니다. 홍 시장은 주변으로부터 여러 사람을 추천받는 바람에 제3의 인물을 정무부시장으로 하기로 하고 저에게 전화를 하신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일할 수 있는 행정부시장직으로 옮긴다는 조건부로 답을 했지만 행정자치부 규정에 정무부시장에서 행정부시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홍 시장이 김정길 행정자치부장관에게 나를 부시장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을 했는데, 장관은 “일할 사람 다 빼 가면 행자부 안에서 누가 일을 하냐”고 반대했습니다. 차관도 “규정에도 없는 일을 하지 말고 나중에 내려가라”며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대전에서 일할 수 있다는 희망과 결심으로 ‘제2의 건국 범국민 추진위’ 총괄국장직을 사표내고 행자부 규정을 고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결국 1999년 2월20일 별정직 임용 절차를 통해 대전시 정무부시장에 임명됐습니다. 임명권자는 대전시장이었습니다. 그리고는 3월24일에 특별채용 형식을 통해 행정부시장에 임명됐습니다. 이 때는 발령청이 대통령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지방자치 단체 중 정무부시장에서 행정부시장으로 자리를 옮긴 첫 사례가 됐습니다. 부시장을 하면서 주말엔 시청 관용 버스에 ‘주말기동순찰반’을 만들어 대전시 곳곳을 누비며 민원을 해결해 부시장실은 ‘주말 민원실’이 됐습니다. 시청에서 청소를 맡은 아주머니 50명과 식사를 하며 소주 50잔을 마신 이야기는 지금도 유명합니다. 이 분들과 식사나 술을 마신 부시장은 아직 없으니까요. 아주머니들과 노래방까지 가서 노래를 잘 부른 뒤엔 헤어지면서 장미 50송이를 마련해 한 송이씩 선물을 했답니다. 7. 공무원 생활하며 보람됐던 일은 공직생활 가운데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고향 대전에서 미력하나마 봉사를 했다는 스스로 평가합니다. 또 우리나라가 관선시대를 끝내고 민선시대가 출범하는 밑바탕이 된 행정구역개편을 진두지휘 했다는 점입니다. 1995년 내무부 지방행정과장 시절 지방자치제를 위한 행정구역개편 이라는 일을 해낸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시장, 구청장 등 모든 지방 관료를 정부가 임명하는 것이 아닌 주민의 손으로 선출하는 지방자치 실현을 위해 행정구역개편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새로운 지방자치시대를 열어, 저에게도 중요한 역사이기도 하지만 대한민국에게도 커다란 전환점이 됐다는 생각입니다. 내무부 방호계장 재직시절에는 현재 운용되는 119구조대를 창설, 119가 단순 소방 업무뿐만 아니라 각종 안전사고에 처한 국민들의 구조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됐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출동하는 119구조대 사이렌소리를 들으면 오늘도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의 귀한 생명을 구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8. 청와대 근무 참여정부 청와대 인사비서관으로 일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내무부 지방행정국장이었던 2002년 참여정부 인수위원회로부터 인사비서관으로 선임됐으니 청와대로 출근하라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전화가 잘못 온 줄 알았죠. 참여정부인사들을 잘 알지 못하고 줄을 댄 것도 아닌데 “왜, 나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당시 청와대 비서관은 모두 34명이었는데 순수 공무원 출신은 저 혼자 였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청와대에서 인사비서관으로 적합한 인물을 찾던 중 관료사회에 대한 지배력과 공직내부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을 다방면으로 물색하던 중 제가 적합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아 인사비서관으로 선임됐습니다. 그렇게 청와대 인사비서관으로 1년을 보내고 공직을 떠난 뒤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가 48살이죠. 공무원이 평생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아쉽더라고요. 공직에 있으면서 제 나름대로 정말 살기 좋은 대전을 위해 봉사를 제대로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과 그동안 쌓아온 행정경험을 그냥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국회의원이었고 지역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길이 국회의원 이였고 남들보다 늦게 선거에 뛰어들었습니다. 고향인 중구 국회의원 출마를 결심했을 때 주변에서는 다 반대하더라고요. 상대가 5선 국회의원을 지낸 한나라당 강창희 의원이고 강창희 의원의 지지도는 따라잡을 수 없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죠. 주변에서는 ‘보나마나 참패’라며 ‘국회의원에 출마하려면 차라리 중구가 아닌 유성구로 출마하라’는 권유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중구가 아닌 다른 곳으로 출마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지더라도 내가 태어난 지역에서 장렬하게 싸우다 지겠다”는 생각으로 출마했고, 선거운동을 통해 지역주민들이 대전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진심을 알아주셔서 국회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9. 국회의원 시절 17대에 당선된 뒤 가장 먼저 해결한 것은 ‘대덕R&D특구 특별법’ 통과였습니다. 선진당 초대원내대표와 3기 원내대표를 맡으면서는 의원들로부터 ‘중재의 달인’이라고 불렸습니다. 아마도 당시 굵직굵직한 정치현안들을 둘러싸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격돌, 제3당의 입장에서 원만한 조정을 마다하지 않고 이끌어 내 ‘중재의 달인’이라고 불린 것 같습니다. <약력 정리> 1955년 12월 대전 중구 목달동 출생 1967년 대전 산서초등학교 졸업 1971년 대전 충남중학교 졸업 1974년 대전고등학교 졸업 1978년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2001년 한남대학교 지역개발대학원 도시계획학 석사 2004년 대전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박사 2005년 서울대학교 과학 및 정책 최고연구과정(SPARC) 졸업 1977년 행정고시 최연소 수석합격 1990년 충청남도 기획관 1991년 청와대 민정비서실 행정관 1995년 대전광역시 기획관리실장 1997년 내무부 지역경제심의관 1999년 대전광역시 정무부시장, 행정부시장 2002년 행정자치부 자치행정국장 2003년 청와대 인사비서관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당의장 인사특보 열린우리당 원내기획 부대표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위원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한국 웅변인협회 명예총재 한국 서바이벌게임협회 회장 열린우리당 신행정수도후속대책특별위원회 현장조사단 단장 2005년 열린우리당 양극화해소위원모임 위원 열린우리당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 국회 장애인특별위원회 위원 2006년 대전대학교 대학원 총동창회 회장 2007년 국민중심당 국회의원 한국지식정보기술학회 회장 산업자원위원회 위원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자유선진당 창당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자유선진당 정책위원회 의장 2010년 자유선진당 원내대표 국회운영위원회 위원 2009년 제1회 약속대상 최우수상 2010년 제2회 약속대상 최우수상 2011년 대한민국 반부패 청렴 대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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