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1970년대 회고--영화속 소품및 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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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998회 작성일 2015-02-09 01:14본문
복고영화 속 풍경·소품으로 본 시대상
국제시장·허삼관·강남 1970·쎄시봉
60~70년대 배경으로 한 작품 잇따라
‘기브 미, 쪼코렛’의 허쉬 초콜릿
아이들의 최고 간식 해태 캬라멜
복부인·정치깡패·국기 하강식 …
추억을 넘어선 현대사의 단면들
삶이 팍팍하고 힘들수록 사람들은 옛 시절을 그리워하게 마련이다. 그 시절이 지금보다 더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과거로 회귀하고 싶어진다.
드라마·영화 등 대중문화 콘텐트가 복고로 눈을 돌리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거리에서 최신 가요보다 1990년대 가요를 더 자주 들을 수 있는 요즘, 스크린도 복고정서로 넘실댄다. 50년대 이후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 낸 한 남자의 삶을 그린 ‘국제시장’(윤제균 감독)이 지난해 말 물꼬를 튼 이후 복고영화들이 줄줄이 개봉하며 관객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60년대 충남 공주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피보다 진한 부성애를 그려 낸 ‘허삼관’(하정우 감독), 70년대 강남 개발시대를 배경으로 밑바닥 청춘의 욕망과 몰락을 누아르 감성으로 담아낸 ‘강남 1970’(유하 감독). 여기에 70년대 서울 무교동 음악감상실 쎄시봉을 배경으로 한 ‘쎄시봉’(김현석 감독)까지 가세했다. ‘웨딩케이크’ ‘하얀 손수건’ 등 트윈폴리오(윤형주·송창식)의 주옥같은 선율이 아련한 첫사랑의 감성을 일깨운다. 이 영화들은 그 시절의 애틋한 추억뿐 아니라 시대의 공기까지 머금은 소품들을 구석구석 세심하게 배치했다.
국기 하강식, 미니스커트 단속 등 지금은 사라졌지만 중장년층 관객이면 누구나 ‘그땐 그랬지’ 하며 추억을 되새길 만한 일상도 비중 있게 그려진다. 영화에 등장한 반가운 소품, 일상과 함께 그 시절 그 추억 속으로 들어가 봤다. 이는 단순한 추억놀이가 아닌, 우리의 현대사를 되짚어 보는 일이기도 하다.
드라마·영화 등 대중문화 콘텐트가 복고로 눈을 돌리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거리에서 최신 가요보다 1990년대 가요를 더 자주 들을 수 있는 요즘, 스크린도 복고정서로 넘실댄다. 50년대 이후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 낸 한 남자의 삶을 그린 ‘국제시장’(윤제균 감독)이 지난해 말 물꼬를 튼 이후 복고영화들이 줄줄이 개봉하며 관객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60년대 충남 공주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피보다 진한 부성애를 그려 낸 ‘허삼관’(하정우 감독), 70년대 강남 개발시대를 배경으로 밑바닥 청춘의 욕망과 몰락을 누아르 감성으로 담아낸 ‘강남 1970’(유하 감독). 여기에 70년대 서울 무교동 음악감상실 쎄시봉을 배경으로 한 ‘쎄시봉’(김현석 감독)까지 가세했다. ‘웨딩케이크’ ‘하얀 손수건’ 등 트윈폴리오(윤형주·송창식)의 주옥같은 선율이 아련한 첫사랑의 감성을 일깨운다. 이 영화들은 그 시절의 애틋한 추억뿐 아니라 시대의 공기까지 머금은 소품들을 구석구석 세심하게 배치했다.
국기 하강식, 미니스커트 단속 등 지금은 사라졌지만 중장년층 관객이면 누구나 ‘그땐 그랬지’ 하며 추억을 되새길 만한 일상도 비중 있게 그려진다. 영화에 등장한 반가운 소품, 일상과 함께 그 시절 그 추억 속으로 들어가 봤다. 이는 단순한 추억놀이가 아닌, 우리의 현대사를 되짚어 보는 일이기도 하다.
● 시레이션
‘허삼관’에서 삼관(하정우)은 병원에서 피를 판 대가로 돈과 함께 카키색 통조림 2개를 받는다. 이는 ‘시레이션(C-Ration)’이라 불리던 미군 전투식량이다. 통조림 하나에는 조리된 육류 또는 육류와 채소가 섞인 주식이 들어 있었고, 다른 통조림에는 건빵과 인스턴트커피가 들어 있었다. 숟가락과 휴지·성냥·깡통 따개, 그리고 사탕과 껌·담배 같은 기호식품이 들어 있는 액세서리 팩도 있었다. 한국전쟁 중 국내에 들어온 대량의 ‘시레이션’ 중 일부는 암시장에 흘러나와 상자당 쌀 한 되 값에 팔렸다. 현재 미군의 전투식량은 조리된 음식을 플라스틱 필름으로 진공 포장한 레토르트식품 형태로 돼 있다.
● 허쉬 초콜릿
‘국제시장’에서 부산으로 피란 와 구두닦이를 하던 소년 덕수(엄지성)는 미군이 던져 준 초콜릿을 부랑배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몰매까지 맞는다. 베트남에서 어른 덕수(황정민)가 20년 전의 자신처럼 몰매를 맞던 소년을 구해 준 뒤 건넨 간식 또한 같은 브랜드의 초콜릿이다. 미국의 대표 초콜릿인 ‘허쉬 초콜릿’은 소년 덕수처럼 전쟁의 참화 속에서 배를 곯던 아이들에게 마법과도 같은 달콤함을 맛보게 해 줬다. 허쉬 초콜릿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의 전투식량에 포함되면서 세계로 퍼져 나갔다. 수많은 나라의 아이들이 미군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기브 미, 쪼코렛(초콜릿)’을 외쳐댔다.
● 해태 캬라멜
요즘 ‘허니버터칩’ 돌풍을 일으키며 제과업계의 명문가임을 입증한 해태제과가 46년에 만든 국내 최초의 사탕이다. 79년 ‘오리온 밀크캬라멜’이 계보를 이을 때까지 큰 인기를 누렸다. ‘영양이 풍부한 해태를 신용하십시오. 운동할 때, 등산할 때, 공부할 때 기분을 상쾌하게 합니다’라는 문구의 광고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허삼관’에서 삼관이 장남 일락(남다름)을 가게에 데리고 가서 먹고 싶은 걸 고르라고 하자 일락은 ‘해태 캬라멜’을 집어 든다. 달콤한 간식이 귀하던 시절, 해태 캬라멜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인기를 끌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 신탄진 담배
‘강남 1970’에는 탁자 위에 놓인 신탄진 담배가 클로즈업 된 장면이 나온다. 전매청(현 KT&G)은 65년 대전 신탄진에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담배공장을 설립했는데, 이를 기념해 신제품에 ‘신탄진’이란 이름을 붙였다. 가격은 60원이었다. 68년 시내버스 요금이 10원, 짜장면이 50원이었던 걸 감안하면 신탄진이 얼마나 고급 담배였는지 알 수 있다. 60년대 담배는 경제 개발 재원 마련을 위한 세원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담배사업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박 전 대통령은 70년 베트남 파병 5주년을 맞아 신탄진 담배 10만 갑을 파병장병 위로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 미니스커트 단속
영화 ‘쎄시봉’의 시대 배경은 70년대 초반. 데이트를 하던 근태(정우)와 자영(한효주)은 자를 들고 여성들의 미니스커트 길이를 재는 경찰을 발견하곤 건물 안으로 몸을 숨긴다. 자영은 자신의 미니스커트를 근태의 바지와 바꿔 입고선 위기를 모면한다. 67년 가수 윤복희에 의해 국내에 들어온 미니스커트는 젊은 여성들 사이에 뜨거운 유행이 됐고, 급기야 73년 경범죄처벌법에 따라 단속 대상이 됐다. 무릎 위 20㎝라는 마지노선을 두고 경찰과 멋쟁이 아가씨들 간에 치열한 신경전이 펼쳐졌다. 비슷한 시기 남자들의 장발도 단속 대상이었는데, 개인의 취향까지 국가가 통제하던 시절이었다.
● 국기 하강식
‘국제시장’에서 돈 벌러 베트남에 가겠다며 아내 영자(김윤진)와 부부싸움을 하던 덕수는 애국가가 울려 퍼지며 국기 하강식이 시작되자 싸움을 멈추고 태극기를 향해 가슴에 손을 얹는다. 영화에서처럼 70~80년대 모든 국민은 매일 오후 6시면 애국가 연주에 동작을 멈추고 1분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 했다. 78년 10월 1일부터 국기 하강식이 전국에서 의무적으로 시행됐기 때문이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데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획일화된 국가주의적 발상이란 비난을 받던 국기 하강식은 유신정권 몰락 후에도 10년간 더 존속했다.
● 넝마주이
일제 강점기인 2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넝마(낡고 해져서 입지 못하는 옷이나 천)나 폐지, 고철, 빈 병 등 재활용이 가능한 물건을 주워 모아 고철상에 팔아서 생계를 꾸려 가던 사람. 넝마주이는 부랑아·거지·상이군인과 함께 밤길 공포의 대상이었다. 부랑아나 거지들과 달리 넝마주이들은 집 또는 거처가 있었다. 고도성장기로 접어들며 넝마를 줍지 않아도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면서 넝마주이들은 점점 사라져 갔다. ‘강남 1970’의 두 주인공 종대(이민호)와 용기(김래원)는 넝마주이로 생계를 유지하던 중 안식처인 무허가 판잣집이 재개발로 헐리면서 거친 운명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 복부인
70~80년대 서울 강남 개발 등으로 아파트가 건설되고 수도권 개발 붐이 일면서 일부 중상층 주부가 부동산을 사고팔면서 이득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중 전문적으로 부동산 투기에 뛰어든 사람을 ‘복부인’이라 불렀다. 70년대 말 신문에는 ‘서울 잠실 일대에서 불로소득의 횡재를 꿈꾸고, 치맛바람을 날렸던 복부인들 중 일부가 지방 원정길에 나서고 있다’는 고발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강남 1970’에는 정치권에서 얻어 낸 정보로 강남 땅값을 뒤흔들어 놓는 민 마담(김지수)이 등장하는데, 재력과 정보력 을 겸비한 최상위층 복부인이라 할 수 있다.
● 혜은이의 ‘제3한강교’
‘제3한강교’는 강북(용산구 한남동)과 강남(강남구 신사동)을 연결하는, 지금의 한남대교다. 경부고속도로 계획과 더불어 66년 착공, 4년 만인 69년 완공됐다. 85년 한남대교로 이름이 바뀐 이 다리는 강남 신화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유하 감독이 ‘강남 1970’에서 79년 발표된 가요 ‘제3한강교’(길옥윤 작사·작곡, 혜은이 노래)를 넣은 건 그런 이유에서다. ‘강물은 흘러갑니다/제3한강교 밑을/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마음을 싣고서~’로 시작하는 노래는 흥겨운 디스코풍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혜은이는 영화 ‘제3한강교’(1979, 김정현 감독)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 이장희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70년대 청년문화의 아이콘이었던 가수 이장희(68)가 74년 발표해 히트한 곡이다. 그가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만든 이 곡은 영화 ‘별들의 고향’(1974, 이장호 감독)의 OST로 사용되기도 했다. ‘쎄시봉’에서도 순정남 근태가 첫눈에 반한 여인 자영을 위해 이 노래를 부른다. ‘강남 1970’에선 춤바람 난 사모님들이 카바레에서 춤을 출 때 이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장희는 75년 대마초 단속으로 윤형주·이종용·신중현·김추자 등과 함께 구속되는데, 이는 ‘쎄시봉’에 중요한 사건으로 묘사된다. 대마초 파동으로 가요계를 떠난 이장희는 미국에서 사업가로 성공했으며 현재 울릉도에 살고 있다.
70~80년대 서울 강남 개발 등으로 아파트가 건설되고 수도권 개발 붐이 일면서 일부 중상층 주부가 부동산을 사고팔면서 이득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중 전문적으로 부동산 투기에 뛰어든 사람을 ‘복부인’이라 불렀다. 70년대 말 신문에는 ‘서울 잠실 일대에서 불로소득의 횡재를 꿈꾸고, 치맛바람을 날렸던 복부인들 중 일부가 지방 원정길에 나서고 있다’는 고발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강남 1970’에는 정치권에서 얻어 낸 정보로 강남 땅값을 뒤흔들어 놓는 민 마담(김지수)이 등장하는데, 재력과 정보력 을 겸비한 최상위층 복부인이라 할 수 있다.
● 혜은이의 ‘제3한강교’
‘제3한강교’는 강북(용산구 한남동)과 강남(강남구 신사동)을 연결하는, 지금의 한남대교다. 경부고속도로 계획과 더불어 66년 착공, 4년 만인 69년 완공됐다. 85년 한남대교로 이름이 바뀐 이 다리는 강남 신화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유하 감독이 ‘강남 1970’에서 79년 발표된 가요 ‘제3한강교’(길옥윤 작사·작곡, 혜은이 노래)를 넣은 건 그런 이유에서다. ‘강물은 흘러갑니다/제3한강교 밑을/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마음을 싣고서~’로 시작하는 노래는 흥겨운 디스코풍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혜은이는 영화 ‘제3한강교’(1979, 김정현 감독)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 이장희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70년대 청년문화의 아이콘이었던 가수 이장희(68)가 74년 발표해 히트한 곡이다. 그가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만든 이 곡은 영화 ‘별들의 고향’(1974, 이장호 감독)의 OST로 사용되기도 했다. ‘쎄시봉’에서도 순정남 근태가 첫눈에 반한 여인 자영을 위해 이 노래를 부른다. ‘강남 1970’에선 춤바람 난 사모님들이 카바레에서 춤을 출 때 이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장희는 75년 대마초 단속으로 윤형주·이종용·신중현·김추자 등과 함께 구속되는데, 이는 ‘쎄시봉’에 중요한 사건으로 묘사된다. 대마초 파동으로 가요계를 떠난 이장희는 미국에서 사업가로 성공했으며 현재 울릉도에 살고 있다.
● 정치깡패
‘강남 1970’에서 무허가촌에서 쫓겨난 종대와 용기는 야당 전당대회를 방해하려는 정치깡패로 동원돼 서울에 올라온다. 정치깡패는 말이 깡패지, 국가를 등에 업은 범죄조직이었다. 자유당 정권 시절 기승을 부렸지만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부가 ‘본보기’ 척결 대상으로 삼으면서 기세가 크게 꺾였다. 조직폭력배로 명맥을 이어 가던 정치깡패들은 70년대 중반 이후 정치무대로 다시 불려 나오는데, 전과는 달리 은밀하게 활동하며 주로 야당 와해공작에 동원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76년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사건과 87년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일명 용팔이사건)이다.
● 야간 통금
‘쎄시봉’에서 근태는 밤늦게 종로 거리에서 자영과 데이트를 하다가 야간 통금(통행금지)에 걸려 경찰관에게 끌려간다. 심야에 일반인의 통행을 금지하는 야간 통금 제도는 미군정 시기인 45년 9월 서울과 인천에서 시작됐다. 한국전쟁 이후 전국으로 확대됐으며, 61년 밤 12시부터 오전 4시까지라는 통금시간이 굳어졌다. 야간 통금은 치안 유지라는 명분으로 시행됐지만 기본권 침해라는 지적도 있었다. 79년 12·12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이 민심을 얻기 위해 82년 1월 해제하기까지 36년 이상 시행됐다. 그때까지 전국에선 매일 밤 통금 사이렌이 울렸고, 단속에 걸린 시민들은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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