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절 論爭은?--21세기 禮訟 논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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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3,327회 작성일 2018-03-25 03:56본문
‘21세기 예송논쟁’이 된 건국절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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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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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⑧
이전만 해도 느슨하게 적용했던 장자 우대, 남녀 차별, 적서 차별 등이 17세기를 거치며 확고한 질서 체제로 굳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이미지를 굳힌 사건은 1659년부터 1674년까지 벌어진 이른바 예송(禮訟)논쟁입니다. 왕이 사망했을 때 상복을 몇 년간 입어야할지를 두고 조정 관료와 지식인들이 둘로 나뉘어지며 대논쟁을 펼쳤던 사건입니다.
제1차 예송논쟁은 1659년 기해년(己亥年)에 벌어져 기해예송이라고도 부릅니다.
그 해 효종이 사망하자 왕의 모친(계모)인 자의대비 조씨(이하 조대비)의 상복입는 기간이 문제가 됐습니다.
의전을 담당하는 예조(禮曹)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조정은 두 파로 나뉘어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남인 측 윤휴는 “임금과 장자를 위해서는 3년복을 입는다”고 주장한 반면 서인 측 송시열은 ‘4종(種)의 설’을 들어 “장자가 아닌 경우엔 3년을 입지 않는다”며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맞섰습니다.
송시열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봉림대군)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앞서 장자인 소현세자가 사망했을 때 3년복을 입었기 때문에 효종(봉림대군)은 장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송시열의 생각이었습니다.
논란은 해를 넘겨 계속 지속됐고, 결국 조대비가 1년복을 입는 것으로 매듭 짓습니다.
이번에는 효종의 왕비였던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조대비가 상복을 1년간 입을지 9개월간 입을지를 두고 싸우게 됐습니다.
며느리가 장자의 부인일 경우엔 1년복을 입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9개월복을 입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종은 1차 예송논쟁 때와는 달리 효종인 왕위를 이었기 때문에 종법상 장자라는 논리가 맞다며 남인 측 손을 들어줍니다. 제1차 예송논쟁 때 승리했던 송시열과 서인 측은 궁지에 처했고, 결국 송시열은 예를 그르쳤다는 탄핵을 받아 귀양을 떠나게 됩니다.
송시열은 왜 귀양을 가게 됐을까.
사실 송시열이 제1차 예송논쟁 당시 1년복을 주장한 논지는 당시 왕인 현종으로선 퍽 위험한 주장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송시열은 효종의 사망에 3년복을 입을 수 없는 근거로 ‘4종의 설’을 들었습니다.
당나라의 유학자 가공언(賈公彦)은 『의례주소(儀禮注疏)』에서 3년복을 입을 수 없는 4가지 사례를 제시했습니다.
㉮정체부전중(正體不傳重): 적자(嫡子)가 죽고 자식도 없는 경우 ㉯전중비정체(傳重非正體): 서손(庶孫)을 후사로 세운 경우 ㉰정이부체(正而不體): 적손(嫡孫)을 후사로 세운 경우 ㉱ 체이부정(體而不正): 서자(庶子)를 후사로 세운 경우입니다.
설명이 다소 복잡해질 수 있으니 여기서는 ㉰와 ㉱에 일단 주목하겠습니다.
송시열은 효종에게 체이부정(體而不正)을 적용했습니다. 즉, 서자(庶子)이기 때문에 3년복을 입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서자(庶子)라는 표현을 두고 논란이 벌어지면서 사태가 확대됩니다.
남인 측 허목은 서자는 첩의 자식에게 쓰는 표현인데, 송시열이 이를 적용한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하지만 소현세자나 효종(봉림대군)은 모두 정비였던 인렬왕후 소생이기 때문에 이는 논리상 맞지 않았습니다.
송시열은 서자(庶子)는 적자(嫡子), 즉 정실부인에게서 낳은 맏아들을 제외한 모든 아들이 포함된다고 봤습니다. 다시 말해 정실부인에게 낳은 둘째 아들이나 셋째 아들도 서자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조선 태종의 사례를 들자면 양녕대군만 적자가 되고, 효령대군이나 충녕대군(세종)은 모두 서자라고 본 것입니다.
실제로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단군왕검을 다룬 기록에도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子)인 환웅이 있었는데, 자주 하늘 아래에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탐냈다“고 나오는데 여기서 서자는 첩의 아들이 아니라 맏아들이 아닌 경우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송시열의 말을 수용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소현세자는 사망했지만 세 아들(장손)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만약 조대비가 효종이 장자가 아니기 때문에 1년복을 입어야 한다면, 과연 효종이 왕위를 잇는 것이 적절하느냐는 문제로 비화될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이는 효종의 아들인 현종의 왕위 정통성으로까지 비화될 수 있었습니다.
예송논쟁의 숨겨진 코드
당시 의례에 대해 가장 정통하다고 인정받았던 송시열이 체이부정 위험성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실제로 송시열은 ”소현세자의 아들은 적손(嫡孫)을 후사로 세우는 정이부체(正而不體)에 해당한다“는 말까지 남겼습니다. 지금 효종의 아들이 왕위에 오른 마당에 ”소현세자의 아들이 정이부체(正而不體)“라는 표현을 쓴 것은 경우에 따라 반역으로 다스려질 수도 있는 위험한 발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송시열은 왜 이렇게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종법 질서에 집착했을까요.
당시는 명나라가 무너지고 청나라가 대륙을 지배하기 시작한 때입니다. 또, 조선이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은지 30년 가량 지난 때였습니다. 비록 중원은 이제 오랑캐인 청나라가 지배하지만 적통(嫡統)은 명나라에 있다는 것이 송시열을 비롯한 많은 서인 측 학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비록 청나라가 종주국이 됐지만 진짜 중화의 정통성은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예송논쟁에 대입해보면 이렇습니다. 비록 둘째 아들인 효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장자의 칭호는 하나밖에 없으며, 이미 사망했지만 소현세자 외엔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송시열 측의 논리입니다.
반면 남인 측은 현실에 대해 보다 탄력적인 접근을 주장했습니다. 첫째 아들이든, 둘째 아들이든 왕위에 오른 자에게 적통이 있는 것이고, 맏아들이 죽으면 동생이 장자가 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즉, 예송논쟁은 단순한 상복 논쟁을 넘어서 왕위 및 당파의 정통성과 우열을 가르는 한편 대외 독트린까지 규정할 수 있는 조선 후기의 거대 담론이었던 셈입니다.
갑자기 400년 전 예송논쟁을 끄집어 낸 것은 최근 정치권에서 건국절을 두고 벌인 논란 때문입니다.
정부가 내년도 예산안에 ‘정부수립 70주년(2018년) 예산’은 반영하지 않고,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2019년) 예산’에 50억원을 배정하자 여야 간 논란이 치열합니다.
자유한국당 예결위 간사인 김도읍 의원은 “임시정부 100주년에는 2년 전부터 수십억 예산을 투입하면서 정부 수립 70주년 예산은 하나도 잡지 않았다”며 “정부수립 70주년을 폄훼하고 임시정부를 부각시키는 좌편향 예산 편성이다. 국론을 분열시킬 우려가 크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정말 역사가 두렵지 않느냐. 예결위 심사에서 3.1운동, 임정 100주년 사업에 대해 한국당이 건국절 쟁점화, 국론분열 가능성을 주장하면서 삭감을 주장해 보류됐다”고 질타했습니다.
현재 1948년설은 이승만, 김성수 등 보수우파가 중심이 되어 건국한 대한민국 그 자체가 완전한 국가라고 보는 쪽입니다. 비록 한반도 영토의 반쪽만 가졌고 민족도 분열됐지만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를 치러 건국 과정을 거쳤고, 수도 서울도 차지한만큼 여기에 정통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북한도 1948년 제정한 헌법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首部ㆍ수도)는 서울’이라고 규정했다가 1972년 개정 헌법에서 평양으로 수정했습니다.)
반면 1919년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보수우파가 남한 단독 선거를 강행해 세운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은 약화됩니다.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중 일부가 참여한 북한에 대한 시각도 전자에 비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별도의 다른 국가라기보다는 통합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건국절 논란이 당파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해 보입니다.
단적인 예로 지금 1948년 건국론을 부정하는 민주당은 정작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엔 건국 50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기획해 치렀습니다. 그러다가 이명박 정부에서 8ㆍ15 광복절 명칭을 건국절로 변경하려는 움직임이 일면서 1919년 건국론이 본격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1948년에 만들어진 대한민국을 건국으로 볼 것이냐, 단순한 정부 수립으로 볼 것이냐는 이제 양 측의 정통성으로 이어지게 된 셈입니다.
효종-현종으로 이어지는 왕통이 적통한 것인지, 명-청에 대한 관계를 어떻게 둘 것인지 등등 각 정치세력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를 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논쟁이 벌어지는 동안 조선은 경신대기근이라는 역대 최악의 기근이 발생하면서 전체 인구의 20%가 굶어죽는 유례없는 위기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 예송논쟁을 벌이는 것에 대해 이익 같은 당대 유명 학자들도 큰 우려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지배층이 사활을 걸고 매달렸음에도 예송논쟁은 400년이 지난 현재 후손들에게는 적지 않게 부정적인 인식으로 남아있게 됐습니다.
지금 여야가 매달린 건국절 논란을 100년 후 후손들은 어떻게 바라볼까요?
학자들에 따르면 17세기가 예학의 시대예 폐해가 깊어지면서 이에 대한 반성의 토대 위에 18세기는 실학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여의도에도 민생을 놓고 치열하게 고민했던 실학의 시대가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21세기 예송논쟁’이 된 건국절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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