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은 50년간 끊임없이 과거와 대화해온 사람이다. 그는 다산 정약용의 스승 성호 이익과 실학의 원류를 탐색했고, 조선 당쟁의 주역들과 국정 운영의 원리를 논했고, 최근에는 방촌 황희로부터 길면서도 화려한 관료생활의 비결을 들었다. 그가 이처럼 과거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과거는 반복되며, 시간과 경험을 통해 쌓아온 역사적 자산이 미래를 여는 열쇠라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 확인된 우리 사회의 적폐를 해소할 수 있는 길은, 정도전이 주례를 가져와 개혁을 추진했듯이 유학·양명학 등과 같은 우리의 정신적 유산을 현대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 발견한 소통의 원리도 설명했다. 자기만의 독특한 감정이나 편향된 이념을 바탕으로 과거의 사실을 볼 때 제대로 된 역사를 기록할 수 없듯이 사람과의 소통을 할 때도 자신을 내려놓고 끊임없이 대화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29일 서울 서초구 반포대로 대한민국학술원에서 만난 이 원장은 역사와 함께 한 50년이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 준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50여권에 달하는 저서의 인세료는 대부분 책으로 받아 다시 세상으로 돌려줬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서 아쉬움이나 후회를 찾아볼 수 없었다. ―최근 쓰신 ‘방촌 황희 평전’이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경기문화재단에서 시리즈로 책 3권을 펴내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한영우 씨가 율곡 이이 평전을, 박석무 씨는 다산 정약용 평전을, 저는 황희 평전을 맡았다. 그런데 막상 조사를 하다 보니 자료가 엄청나게 많았다. 황희가 워낙 관직에 오래 재직했고 거의 모든 정사에 관여했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 거대한 분량의 자료들이 있었다. 죽은 사람에 대해 종합적인 평가를 내리는 ‘졸기(卒記)’ 역시 조선 관료 중 황희 것이 가장 길었다. 황희는 당대에도 높이 평가된 인물이었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은 그걸 정리하지를 못했다. 지금까지 출간된 황희에 대한 책이 10권도 안 되고 그나마 거의 설화 같은 내용들뿐이다. 제대로 사료에 기초해 황희의 진면목을 다룬 책이 없다. 내가 이 책을 쓴 것이 그래서 개척적인 의미가 있다.”
―누런소 검은소 이야기 등 황희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져 왔는데 사료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까.
“각종 설화에 대한 기록은 없다. 후세 사람들이 설화를 황희에게 갖다 붙인 것이라고 추측된다. 예를 들어 황희가 워낙 청빈해 비가 오면 가족들이 집 안에서 우산을 쓰고 앉아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 황희는 재산도 꽤 있었고 자리가 자리니만큼 뇌물 유혹도 받았다. 당시 세종과 태종 등은 황희와 관련된 의혹이 제기돼도 조사를 하지 않은 것은 물론 황희를 고발하는 상소를 두 번 올린 사람을 오히려 옥에 가두었다. 왕들이 황희를 이처럼 비호한 이유는 황희가 없으면 안 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승이란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남의 이야기를 진정으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 말들을 잘 종합하고 정리해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오래 관직에 있다 보니 과거의 사례를 다 기억하고 있었는데 적재적소에 사례를 잘 적용했다. 그 결과 황희의 이야기나 판단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일 수밖에 없었고 왕들도 황희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게 황희의 진면목이다. 그래서 나는 ‘황희는 행정의 달인이자 외교의
사전’이라고 생각한다.”
―황희가 조정에서 활약한 사례를 듣고 싶습니다.
“세종 시절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라는 여진족 추장이 자주 조선을 괴롭혔다. 그래서 세종이 그를 귀순시키려 애를 썼는데 마침 그가 세종을 만나고 싶다고 제의를 해왔다. 세종은 바로 응하려 했는데 황희가 막아서 ‘일단 거절하라’고 조언한다. 거절 당한 이후에도 또 만나자고 청을 하는지 여부를 보면 진정성을 파악할 수 있으니 그때 만나도 늦지 않다는 이유였다. 이것이 외교의 핵심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더듬어 알 수 있는 것 말이다.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면 헛다리를 짚게 된다. 황희는 아주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어 이런 판단이 가능했다.”
―황희는 56년간 관직생활을 했는데 24년간 재상을 맡았고 그중 18년간 영의정을 지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계 역사에서도 이런 경우는 없을 것이다. 임금들은 황희가 10번이나 사표를 냈는데 받아주지 않았다. 황희는 경륜있고 조정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상대방 마음을 잘 읽어 합리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타협이 잘될 수밖에 없었고 갈등을 봉합할 수 있었다. 지금 그런 사람이 있어 총리직을 맡으면 좋을 것이다. 우리 정부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많이 남아있어서 특히 통섭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재상의 자리는 직접 많은 일을 하는 자리가 아니라, 여러 일들을 조율하는 것이다. 자기 의견을 끼워넣지 않고 객관적인 정세와 돌아가는 여론을 종합해서 하나로 합일하는 그런 조정 역할이 정말 필요하다. 그게 총리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이고 그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황희가 ‘황금대사헌’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는데 사실입니까.
“그는 대사헌 시절 다른 대사헌들과 함께 황금을 받았다. 뇌물을 받은 셈인데 청탁내용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래서 황금대사헌으로 불리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황희는 뇌물을 받은 것을 솔직하게 시인했다. 그것도
용기다. 여럿이 함께 받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얘기를 안 했고 황희와 변계량만 솔직히 시인한 뒤 원상복귀시키겠다고 말했다. 과거 공직비리사건도 요즘과 비슷했다. 예전에 ‘조선의 부정부패 어떻게 막았을까’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조선 관료들은 부정부패로 적발되면 우선 자기는 받지 않았다고 발뺌했다. 그러다 증거를 들이대면 ‘나는 깃털이다. 몸통은 따로 있다’고 우겼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놔두고 나에게 왜 그러냐, 나는 재수가 없었던 거다’라고 말했다. 당연히 통하지 않았고 그제야 일단 사표를 내면서 사직상소를 올린다. 사직상소에는 주로 ‘내가 부덕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지만 사실은 이러저러하다’고 상세하게 변명을 쓴다. 왕은 처음 해당 신하를 탄핵한 사정기관이 아닌 제3의 사정기관에 사직상소를 객관적으로 조사하게 한다. 만약 고발한 사람이 잘못된 내용을 말한 것으로 드러나면 고발한 사람이 쫓겨나고, 고발당한 사람의 잘못이 확인되면 관직을 박탈당하고 귀양을 가는 절차가 진행된다. 흔히 아는 ‘네 죄를 네가 알렸다’고 몰아가는 경우는 세도정치 때나 있을 법한 이야기고 그 전에는 철저하고 객관적으로 모든 것을 조사하고 증거를 수집했다. 조선은 작은 정부다. 관료 규모가 2500명 정도밖에 안 되는데도 500년간
유지됐으니 대단히 효율적인 정부다. 더구나 임진왜란을 겪었음에도 살아남았다. 원조를 한 나라는 망해도 원조를 받은 나라는 살아남은 것이다.”
―조선 관료제에는 어떤 장점이 있었습니까.
“임진왜란 뒤에 선조는
시스템을 개혁했고 신분제도도 다시 짰다. 그래서 조선 초기 수립된 경국대전 체제가 무너지고 전쟁으로 경제가 망가져 엄청난 백성이 죽었는데 살아남았고 결국 영·정조 시대 부흥할 수 있었다. 이런 역사를 보면 우리의 문치주의(文治主義) 체제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우리나라의 왕권제도나 문치주의가 고대 국가와 비슷하고, 봉건제도도 시행하지 못했다고 폄하했다. 그런 미개한 나라니까 일본이 보살펴줘야 하고 그래서 식민지로 삼는다는 논리를 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봉건제와 중앙집권제 중 유지하기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시스템이 중앙집권제다. 봉건제도는 왕이 전국을 통제하지 못하니까 장군들이 분할 통치하는 체제다. 그러나 중앙집권제도는 군현제, 오가작통제 등을 이용해 왕명 하나로 전국을 통제하는 사회다. 그런 체제를 작동시키려면 많은 연구를 하고 정교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무치주의(武治主義)는 봉건주의로 주먹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문치주의는 중앙집권제인데 당시 신하들의 정치감각이 뛰어나고 경험도 많아 가능했다. 특히 우리는 과거제도를 운영했는데 시험을 통해 관료를 뽑는 제도는 유럽이나 일본 등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선진적인 제도다. 우리는 우리 역사를, 그리고 그 가치를 재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왜 일제의 지배를 받게 됐습니까.
“세계 역사를 보면 적어도 16세기 이전에는 동양이 서양에 앞섰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었다. 모든 선진 문물은 중국제였다. 앵거스 메디슨이라는 서양 경제학자에 의하면 18세기까지도 중국이 전세계 국내총생산(GDP)의 40%를 차지했다. 그런데 언제 뒤집혔을까. 16세기 화약과 나침판이 발견되고 인쇄술이 나오면서 르네상스가 일어나고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사람들은 바다로 진출하고 콜럼버스, 마젤란 같은 탐험가들이 나왔다. 그 사람들로 인해 식민지를
건설하게 되고 식민지에서 원료를 강탈하다시피 해서
공장에서 상품을 만들어 그걸 또 식민지에 10배 가격을 받아 팔았다. 땅짚고 헤엄치기였다. 이렇게 제국주의가 팽창하고 산업혁명이 이뤄졌다. 심지어 17세기에는 해적의 시대도 있었다. 사실 남의 것을 뺏는 게 제일 많이 남는 장사 아닌가. 해적을 국가에서 길렀던 시절이었다. 해적왕 드레이크나 일본의 왜구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모은 자본으로 군대를 길렀다. 군대는 돈이 많이 들어가는 조직이다. 농사만 지어서는 그 비용을 충당할 수 없다.”
“반면 조선왕조는 문치주의를 하면서 국방 예산이 많지 않았다. 군대가 강하면 무신들이 뒤엎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상비군은 물론 예비군도 없었다. 단지 ‘오위’라는 정권 유지를 위한 정치보위군만 있었다. 그래서 외국군이 쳐들어오면 국민들이 총동원됐다. 세종실록에서 인구 수를 500만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정도는 안 됐을 것이다. 게다가 인구의 절반이 여자고 노인과 16세 이하 아이들을 빼고 나면 10만 군사를 양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율곡 이이가 10만 양병을 주장했고, 이성계도 10만 대군을 이끌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8만4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농업이 주력인 경제로는 큰 군대를 유지할 수 없다. 더구나 조선은 농사 짓기에도 적당하지 않은 나라였다. 강수량이 적고 토질도 나쁘고 산도 많다. 그러니 약소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100만 대군을 몰고오는 중국과 싸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과거 엄청났던 티무르 제국의 경우 지금 사마르칸트란 도시 하나만 남기고 망했다. 고려 역사를 보면 칭기즈칸 군대와 40년간 싸운 나라는 송나라와 고려뿐이다. 몽골(원나라)도 ‘저놈들 지겨운 놈들’이라고 할 만큼 고려를 인정했고 심지어 문화적으로 존경하기도 했다. 실제로 고려는 침략을 당했지만 몽골의 식민지가 아니라 독립국이었다. 몽골은 점령지를 직접 통치했지만 고려만은 독립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줬다. 대신 부마국으로 만들어 통제하려 했다. 원나라는 고려를 이용해 일본을 정벌하려고 고려에 배도 만들고 군량도 준비하라고 요구했다. 힘이 약하니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원나라는 당시 폭풍이 오는 만큼 빨리 일본정벌에 나서야 한다는 고려 장군의 건의를 무시하고 송나라 지원군 10만 명이 올 때까지 기다리다 때를 놓쳐 두 번의 원정을 모두 실패했다. 나중에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킬 때 우리가 원나라의 일본 침략을 도와 원수를 갚는 것이라는 억지주장을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지금의 한국이 가장 성공적인 국가, 융성한 나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은 명실상부한 강대국이다. 세계인들을 지도해야 하는 입장이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지도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돈과 주먹으로 지도하는 것이 아니고 문화로 해야 한다. 우리는 돈도 없고
파워도 부족하다. 문화로 지도하기 위해서는 보편타당한 논리가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를 찾아야 하는데 거기에 우리 강점이 있다. 주자학, 양명학, 불교의 큰 줄기가 모두 그 문제에 관한 것이다. 인간답게 사는 길을 교화의 수단으로 삼아 아프리카까지 우리의 사상을 퍼트려야 한다. 서양이 과학문명만 가지고 세계를 지배하려다 지금 수렁에 빠졌다. 과학발전으로 먹고 살기는 편해졌지만 공기와 물이 오염되고, 오존층이 구멍이 나는 등 모든 것이 엉망이 됐다. 지구가 멸망할 위기다. 구제할 주체는 유럽 아니면 아시아다. 21세기는 동아시아 시대라는 말을 하는데 말로만 하면 안 되고 현실적으로 세계를 지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난 1년간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 대형 참사가 계속된 것을 감안하면 우리가 과연 세계를 지도할 국가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세월호 참사는 인재다. 운이 없었던 게 아니고 여러 원인이 축적된 결과다. 건국 70년 동안 수많은 악습이 쌓여왔다. 관피아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 적폐들이 모두 연결돼 서로 엉켜있다. 하나를 들추면 다 딸려 나온다. 대통령이 척결에 나선다고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앞으로 그런 사고가 또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조심해야 하는데, 막기가 어려울 것 같다.”
―왜 이런 적폐가 쌓였을까요.
“너무 경제와 효율만 따지다 보니 사람의 마음이 망가졌다. 과거의 정부는 도덕국가였다. 모든 것을 도덕적인 잣대로 쟀다. 지금은 돈 정부다. 돈이 최고다. 그러다 보니 돈 가지고 하면 안 되는 게 없고 결국 다 비리로 이어진다. 그게 쌓이고 쌓인 것이니 하루아침에 척결하기 어렵다. 혁명은 쉽지만 개혁은 어렵다. 개혁은
저항 세력이 기득권 세력인데다 개혁추진 세력과 개혁대상이 다 연결돼 있다.”
―개혁을 위해 제일 필요한 게 무엇입니까.
“사람 심성을 훈련시키고 쓰다듬어야 한다. 사람이 제일이다. 돈도 중요하지만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위기도 극복할 수 있고 세계시민도 될 수 있다. 그래서 심학(心學)을 해야 한다. 심학이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주자학도 그렇고 양명학, 도교, 불교도 모두 심학에 해당한다. 마음 다스림의 첫째는 욕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사욕을 어떻게 제거하느냐가 전통사상의 핵심이다. 지금은 돈이 제일이라서 마음 다스리는 것을 무시하지만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기존의 기준을 뒤집고 도덕적 기준으로 사회를 바로잡아야 한다. 나는 공교육을 통해서 그렇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한문
교육도 중요하다. 부수적인 이야기지만 한문 배우면 중국어, 일본어를 배우기도 쉽다. 특히 단순한 한자가 아니고 한문 교육을 하면 동양 고전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다. 그 노하우를
가슴에 안고 세계 지도를 해야 한다. 그게 핵심이다.”
―평소 선비정신을 강조하시고 ‘선비평전’이라는 책도 내셨는데.
“선비의 가장 큰 특징은 도덕성과 의리다. 견위수명이라고 나라에 위험한 일이 생겼을 때 목숨 걸고 지킨다는 뜻인데, 선비는 견위수명의 가치를 지켰다. 지금 우리 사회는 도덕이 땅에 떨어져 인간(성)이 상실됐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등 정말 별일이 다 벌어지고 있다. 사회의 가장 기초인 가족이 깨지고 있기 때문이다.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이미 바닥까지 갔다. 이걸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마음밖에 없다. 개혁은 과거의 것을 활용해도 좋다. 정도전도 주례를 가져다 쓰지 않았나. 조선이 나라를 망쳤다고 욕은 하지만 그때 사상을 현대화해서 그걸로 개혁해야 한다. 의지할 데 없이 무조건 개혁한다고 하면 안 된다. 과거의 가치를 리바이벌할 수 있도록 연구를 해야 한다. 법을 더 만든다고 개혁이 되는 건 아니다. 법 하나 만들면 도망갈 길이 열 개 생긴다고 한다. 사람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예전에 공직자들과 교사들을 위한 일종의 교과서 만드는 데 참여한 적이 있다. 그 책에서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면 부정부패를 50% 이상 잡을 수 있다고 쓰기도 했다. 감사원 간부들을 대상으로 이런 내용을 강연했더니 너무 오활한(사리에 어둡고 세상 물정 모르는) 얘기가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그러나 사정기관을 동원해 때려잡아봐야 몇 사람 잡고 마는 것이지 발본색원은 어렵다. 지금 검찰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오활한 얘기라도 그게 오히려 가장 빠른 방법이다.”
―우리 사회는 소통이 안 된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소통은 자기를 비워야 가능한 일이다. 지금은 자신을 움켜쥐고 상대에게만 양보를 하라고 하니 소통이 안 되는 것이다. 자기를 내려놔야 한다. 그게 바로 앞서 말한 사욕을 버리는 것이다. 국회에서 법을 만들면 국회의원들이 공익이 아니라 자신의 유불리부터 따진다. 불리하면 교묘하게 반대한다. 이런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결국 사욕을 제거하고 공리를 위해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모두들 남탓에 자기 변명만 한다. 자기에게 관대하고 남한테 각박하다 보니 서로 대화가 안 된다. 대화할 때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경청해야 한다. 남의 말을 충분히 듣고 주장의 핵심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렇게 대화해도 서로 양보가 안 되는 것은 논쟁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민주주의니까 투표로 해결하면 된다. 그런데 지금은 처음부터 상대가 아예 말도 못꺼내게 하고 무조건 반대한다. 자꾸 딴 사람에게만 문제의 책임을 돌린다. 자기가 혹시 미흡한 점이 있는지를 돌아보고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주의, 주장이 분명하고 그걸 양보하지 않는다. 그런데 상대도 양보를 안 하니까 소통이 안 된다. 박 대통령이 포용력을 발휘해야 한다. 혼자 생각하는 데 익숙한 것 같은데 정치는 그래선 안 된다. 가끔 다른 이들과 사적인 자리도 가지는 등 어울려야 한다.”
인터뷰 = 박민 사회부장 minp@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