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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꿀이죽 5원 당시-최초 라면 10원-삼양식품 전중윤 회장 공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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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116회 작성일 2014-07-12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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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로 라면을 만든 삼양식품 ^^창업주
전중윤(全仲潤·95) 명예회장이
지난 7월10일 밤 별세했다.

고(故) 전 회장은
1961년 삼양식품을 세웠다.
강원도 철원 출신의 실향민으로
서울에서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금융인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31세 때인 1957년 동방생명보험 부사장으로,
35세인 1961년에는 잠시 제일생명보험 사장으로도 일했다.
그는 같은 해 보험사 생활을 접고 삼양식품을 세웠다.

'꿀꿀이죽' 줄 서있는 것 보고 라면 생산 결심

그는 평소
"당시 한국의 처절했던 식량 상황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
식품업에 나섰다"고 말했다.
금융인으로 일할 때
그는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5원짜리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길게 줄을 늘어선 사람들을 보고
처절함을 느꼈다.
그때 얼마 전
일본 도쿄에 갔다가 먹어본
인스턴트 라면이 떠올랐다.
일본
1958년 세계 최초로 ^^인스턴트 라면을 개발했다.
그는 조리가 간단하면서도 국물까지 먹을 수 있는 라면이
서민층 식량 문제 해결에 크게 도움될 것으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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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고 전중윤 회장. 1970년대 후반 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당시 영애였던 박근혜 대통령을 안내하고 있는 전 회장. 처음 생산된 삼양라면.
(사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고 전중윤 회장. 1970년대 후반 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당시 영애였던 박근혜 대통령을 안내하고 있는 전 회장. 처음 생산된 삼양라면. /삼양식품 제공
바로 일본의 라면 업체 중 하나인
묘조(明星)식품을 찾아가
기술을 가르쳐달라고 매달렸다.
어렵게 묘조식품의 허락을 받은 그는
한 달 동안 그 공장으로 출근하면서
라면 제조 기술을 직접 배웠다.
당시
묘조식품의 사장
마지막까지 가르쳐주지 않던
수프 제조법에 관한 비법을
서류째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그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이후 그는
정부를 설득해
당시로서는 거액인 5만달러를 지원받아
1961년
묘조식품으로부터
라면 기계 2대를 들여왔다.
남은 돈 2만3000달러는 반납했다.
2년 뒤인
1963년 9월 15일 ^^^첫 삼양라면이 생산됐다.
가격은 10원이었고,
일본 라면처럼 중량도 100g으로 같았고 수프도 맵진 않았다.

이후 三養식품
한국인 입맛에 맞게 맵게 바꾸고 양(量)도 120g으로 늘렸다.
식량 부족 극복에 관심이 많았던
故 박정희 대통령은
삼양식품에 전화해
"우리 국민이 좋아하는 매운맛으로 하는 게 어떠냐"
직접 조언했다고 한다.
1965년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을 계기로
삼양라면은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했다.

삼양식품은
1969년부터
베트남 등 60여개국으로 라면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소고기와 우유 생산을 위해
'대관령목장'을 만들었고,
**********************
저 한준구는
오래전 아마도 우지 파동 2년뒤인가 아니면 3년뒤쯤
당시 현대신업개발 회장님인가 현대차 사장이던
정세영_정주영 왕회장의 친동생-의 초청으로(삼양식품 전중윤 회장과 두 분
모두 절친이었다고 합니다)
다수의 사람들과
난생 처음 대관령 목장을 방문한 기억이 납니다.
당시 넓디 넓은 그 목장의 아름다운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돌아올 적에
삼양라면 원주 공장에 들러 당시 판매본부장급으로 기억되는
어느 부장의 우지라면 파동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눈물을 글썽거리던
애처로운 모습도 오버랩됩니다.
그는 그당시
자기 자식 3명을 모두 삼양라면 먹이고 그들이 잘 크고 하여 별 탈이 없는 데
왜 그런 파동을 일으켜 라면 원조 삼양라면측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주었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울먹이던 안타까운 모습도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
1980년대에는 과자·식용유 등도 만들면서 회사를 종합 식품 기업으로 키웠다.

우지(牛脂) 파동, 외환 위기 等 악재 극복

그러나
1989년 11월 ^^삼양식품은
이른바 '우지(牛脂) 파동'을 겪었다.
우지 파동은
당시 검찰에
'라면을 공업용 소기름으로 튀긴다'는
익명의 투서가 접수되면서 시작됐다.
검찰은
삼양식품 관계자들을 기소했고,
삼양식품에는 '인체에 유해한 기름을 쓰는 회사'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그는 이때부터 긴 법정 공방을 시작한다.
8년 뒤인 1997년에서야
삼양식품은 대법원으로부터
"삼양식품이 쓴 재료는 식품으로 적합하다"는
최종 무죄판결을 받는다.

하지만
법정 공방을 벌이는 동안
라면업계 수위를 다투던
삼양식품의 시장점유율은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무죄판결 직후에는
외환 위기까지 찾아왔다.
절체절명 경영 위기였다.
결국 삼양식품은
1998년 법원에 화의를 신청했다.
그는 자산 매각 등을 통해 회사를 살리기 위한 조치를 했고,
7년 후인 2005년에 경영권을 되찾았다.
우지 파동과 화의라는 두 개의 벽을 넘어
경영권을 지킨 그는?
2010년
장남인 전인장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고
명예회장이 됐다.

고인은
1세대 기업인 중 한 명이었다.
1967년
한국 최초로 사원지주제를 실시했고,
1969년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을 위해
이건교육재단(현재 이건식품문화재단)을 설립했다.
대통령 훈장 3회,
대통령 표창·상장 10회 등
정부로부터
크고 작은 賞을 620개 받았다.
이북도민회
중앙연합회 대표를 지냈고,
기업인 중에서는
같은 강원도 출신 실향민인
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및
故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과
히 친했다.

유족은
부인 이계순 여사,
장남인 삼양식품 전인장 회장과
큰며느리 김정수 사장 등
2남5녀가 있다.
빈소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발인 14일 오전 6시. (02)3010-2631.
영결식은 14일 오전 9시
강원 원주시 우산동 삼양식품 원주 공장에서 치러지며,
장지는 대관령 삼양목장 내 선영이다.
@++프리미엄 조선 측 및 정성진 기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전중윤 회장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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