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는 지난해 대학교를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구직 사이트에 올라온 채용 공고를 보고 지방의 한 신생 마케팅사에 취업했다. 서류와 면접 전형을 통과한 100명이 조금 넘는 20대 구직자들과 함께였다. 회사가 임시로 빌린 외부 강당에서 한 달 가까이 연수를 받고 현찰로 연수비
50만원도 받았다. 정식 출근일 아침 새로 산 양복과 와이셔츠를 다려 입고 첫 출근길에 나섰던 이씨와 입사 동기들은 쓰레기와 폐지만 널브러져 있는 텅 빈
사무실을 마주하게 됐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이씨는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았다. 이씨 명의의 대포통장 피해 신고가 접수됐으니 조서를 쓰러 출석하라는 내용이었다.
순간 이씨의 머릿속에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연수가 끝나 갈 무렵 회사에서 월급통장을 개설하라고 했다. 대형 시중은행 영업점에서 출장 나온 행원들이 계좌개설 신청서와 체크카드 발급 신청서를 나눠 주고 신분증을 복사한 뒤 신청서를 걷어 갔다. 이후 회사는 “회사 출입을 위한 보안카드를 만들어야 하는데 체크카드에 보안카드 기능을 탑재할 예정”이라며 통장과 체크카드 비밀번호를 요구했다. 이씨는 6일 “100명이 넘는 인원을 상대로 두 달 가까이 그렇게 치밀하게 사기를 칠 거라곤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며 “가뜩이나 취업난에 시달리는 20대 구직자들을 이런 식으로 등쳐 먹어도 되는 거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대포통장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8월까지 대포통장 계좌 개설 건수는 4만 133건으로 이미 2013년(3만 7883건) 한 해 발급 건수보다 6% 가까이 증가했다.
대포통장 명의 도용 수법도 날로 진화하고 있다. 기존에는 온라인을 통해 건당 100만원에 통장을 사고 팔았던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단속망을 피해 신종 사기 수법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특히 취업난으로 ‘청년 실신’(대학교 졸업후 실업자나 신용불량자가 된다는 의미)이라는 신조어마저 등장한 현실을 악용해 20대 구직자들을 노리는 대포통장 명의 도용이 활개를 치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정상적인 회사는 월급통장 사본만 요구한다. 통장 원본과 체크카드, 비밀번호를 요구하는 경우는 100% 대포통장 용도라고 보면 된다”며 “누구나 대포통장 명의 도용 피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포통장에 명의가 도용되면 모든 금융거래가 정지된다. 또 1년 동안 모든 은행에서 보통예금이나
저축예금의 신규 개설을 할 수 없다. 통장을 넘긴 기록은
신용카드 발급이나 대출 심사 등에 참고자료로 쓰여 불이익을 받는다. 다만 급여통장 등 계좌 개설 목적이 분명하면 심사를 통해 예외적으로 허용해 준다.
명의 도용 피해자는 피해 사실을 확인한 즉시 사법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게 유리하다. 대포통장으로 금전적 손해를 본 피해자들이 대부분 대포통장 명의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재판을 통해 무죄가 입증될 때까지 최대 2~3년 동안 금융거래가 제한될 수도 있다. 대포통장 양도자에 대한 처벌 수위도 강화됐다. 지난해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대포통장과 현금카드, 공인
인증서 등을 불법으로 대여하거나 유통만 해도 올해부터는 3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