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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서울대 조국 교수와 만년 노벨상 후보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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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141회 작성일 2012-07-26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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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7.22

 

 

 

 

 

 

 

지난 17일 오전 경기도 안성시 자택에서 고은(오른쪽) 시인이 조국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고은 시인은 “나의 신은 내게 문자를 만들어준 세종”이라며 “세종은 자기 아버지를 복제하지 않고, 문화적으로 자기 아버지를 내쳤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말했다. 안성/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조국의 만남 ⑪ 고은 시인고은은 우리에게 시인을 뜻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주선(酒仙)이 지상에 잠시 머물고 있는 경기도 안성에서 17일 오전 11시부터 향 좋은 독주를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이백과 니체가 혼융된 사람, 무당과 예언자를 넘나드는 사람, 천둥벌거숭이 아이와 열렬한 투사가 공존하는 사람이다. 질문과 무관하게 횡설수설, 종횡무진 번뜩이는 말씀을 쏟아 놓으셨는데 지면의 제약으로 다 담지 못해 아쉬웠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트위터 @patriamea

 

 

 

-서재 입구 양쪽에 높이 쌓여 있는 책들이 마치 절 입구의 ‘불이문’(不二門) 같습니다.

“서재는 나에게 자궁과 같아요. 태아처럼 들어앉아 있으면 몸이 달아올라. 자, 여기 프랑스에서 온 밀주야. 세포를 자르르 건드려. 조 교수 얼굴에서 평화 냄새가 나네. 이 전투적인 사회에서 말이야.”

-속은 끓고 있습니다. 꽤 독하네요. 처음 맡는 향인데 참 좋습니다. 최근 도종환 시인의 시를 교과서에서 빼니 마니 하다가 결국 들어갔습니다. 어떤 생각 드셨어요?

“화낼 가치도 없어서…, 친구들이 잔뜩 화낸 다음에나 천천히 아주 게으르게 화를 낼까 하고 있는데, 담배 한 대 다 피우지 않을 사이에 없어져버렸으니 뭐라 말할 나위도 없고 그래. 권력집단은 유아원 같아. 깨끗한 동심을 가진 아이 말고, 치졸하고 이기적인 욕망을 가진 아이들 집단 말이야.”

 

 

 

-정치인이 되신 적은 없지만,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초대 대표, 1976년 한국인권협의회 부의장, 1979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부의장을 하셨고,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뒤에는 구속되셨습니다. 시인에게 정치란 무엇입니까?

 

 

“시인이 자기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을 바라볼 때에는 시인이 아니라 정치인의 눈으로 보지요. 내 생활의 일반은 정치적이야. 왜냐하면 나는 투표를 하는 사람이고 세금을 내는 사람이니까. 또 누군가 잘못된 길을 가면 불만이 쌓이고 갈아엎어야겠다는 염원이 생기니까. 내 실존 자체가 피할 수 없는 정치적 환경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분명히 정치적인 존재지.

 

 

그 점에서 내 비석은 정치인의 비석일지도 몰라. 생사를 통해서 정치에서 헤어날 길이 없어. 물론 나는 시인으로서 실정법 쪽보다는 자연법 쪽의 생각을 해. 현실만이 아니라 꿈을 보태고, 그 꿈이 반영되는 현실을 만들어내고 싶어 하니까. 내가 현실을 바라보는 것은 현실 자체가 아니라 내가 만든 이미지를 현실에 부여하는 것일지도 몰라.”

 

 

 

도종환 시 교과서 삭제 소동

 

 


화낼 가치도 없어서…권력집단은 유아원 같아
동심 말고 치졸한 욕망을 가진 집단

 

-도종환 시인이 국회의원 되신 뒤 제가 화환을 보냈습니다. “시인에서 의원으로 강등되셨습니다!” 이렇게 리본을 달아서요.(웃음)

 

 

“(무릎을 치며) 짓궂은 덕담, 괜찮네! 난 밥 사줬어. 이왕 여의도 가는 바에 10년은 해라, 하지만 그걸 직업으로 삼진 마라, 가차 없이 ‘실축’(失蹴)하고 나와라, 그렇게 말했지. ‘실축’이라고 했어.”(웃음)

 

 

-1980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7호 특별감방에 갇혀 생사를 기약할 수 없을 때 <만인보>를 구상했습니다.

“7호 방은 김재규 부장이 있던 방이었어요. 교도소장이 헌병 대령이었는데, ‘어휴, 이 방은 험한 방인데’ 그러면서 가더군.

 

 

나중에 알았는데 국문학자 조윤제의 사촌이었어.

 

 

김재규는 교수형 당하러 가기 전에 ‘그냥 갈 수 없다. 커피는 한 잔 마시고 싶다’ 그랬다고 하더구먼.”

 

 

 

-죽음의 색깔을 보고 냄새를 느끼셨네요.

“창이 없어 30촉짜리 등이 꺼지면 암실이 돼요. ‘철창’이 아니라 ‘철무창’에 갇혔지. 크기도 작아, (팔을 벌리며) 한 요만큼? 거기 있으면 입관돼 있는 시체 같은 느낌이 들어. 내가 승려 생활을 했어도 실존에서는 울어.

 

생사 문제에서는 가장 비겁한 고백이 가장 진실해. 생사에 의연한 것은 의도된 디자인이야. 죽을 때 뭐라고 하고 죽을까도 생각했지. ‘통일 만세’를 부르고 죽을까, 아니 이것도 치졸하다, 그냥 껄껄 웃고 ‘야, 쏴! 확인사살까지 내가 인정하겠어’ 이래야겠다, 이런 호기도 있었어.”

 

 

-그 와중에 시작(詩作)을 생각했습니다.

“거기서는 현재가 없어. 유일하게 남은 것은 과거였어. 미래는, 뭐, 낼모레 죽는다 하는데…. 실제 날 송치시키면서 내 등 뒤에서 한 사람은 ‘3년 뒤엔 나와’ 이러고, 다른 한 사람은 ‘아니야, 이거 몇 달 있으면 없어져’ 이러더군. 대못질이지.

 

 

여하튼 그때, 내 과거 속 할아버지의 어떤 동작, 할머니의 하얀 육체, 할머니를 닮은 아버지의, 농부인데도 하얗고 그런 살, 인텔리겐치아의 손, 할아버지를 닮은 작은아버지의 갈색 피부가 떠올랐어. 그 얼굴들, 색깔들, 소리들…. 그때부터 미래가 생겼어. 만약 살아서 나간다면 이걸 쓰겠다 했지.

 

 

묘한 삶에 대한 묘한 허영, 작가로서 분심이 생긴 거야. (술을 권하며) 더 드세요. 흔들립시다. 이 술, 손님에겐 한 번도 주지 않은 거야. 우리 마누라하고 둘이만 먹었던 거야.”

 

 

 

-영광입니다. 많이 흔들리고 싶은데, 선생님은 사모님한테 혼나실 것 같은데요.(웃음)

“술 먹고 들어가 현관문 바로 앞 시멘트 바닥에서 쓰러져 자니까. 다음날 내가 당하는 게 상당하지.”(웃음)

 

 

-‘통일 만세’를 생각하셨다는데, 시인에게 휴전선은 무엇입니까? 분단이 고착되면서 남측 사람들의 상상력은 휴전선 이남에 갇혀 있지 않습니까?

 

“휴전선은 나의 은사야. 내 운명 전체를 그어주고 있다는 점에서. 내 시에 이런 것이 있어. 휴전선을 없애는 게 아니라 휴전선이 점점 더 확실해지면 좋겠다, 휴전선이 남과 북으로 넓어지는 거야, 북으로는 백두산까지 남으로는 한라산과 이어도까지.

 

이렇게 휴전선이 넓어지면 한반도 전체가 그냥 평화야. 그게 내 꿈이지. 1960년대 현실참여를 안 하고 예술지상주의 추구할 때도 <휴전선 언저리에서>라는 시를 통해 통일을 열망했어.

 

도저히 휴전선을 넘어갈 수 없잖아, 그러면 내가 콜레라균이 되어서 휴전선을 넘어가서 북한 여성에게 들어가자, 그럼 교합이 이루어진 거잖아. 그 여성도 죽고 나도 죽을 거 아냐. 죽었지만 흙이 돼. 하나의 흙이 되는 거야. 이렇게 나는 흙으로서의 통일을 염원했어.”

 

 

 

휴전선은 내 운명 그어주는 은사
콜레라균 되어 북 여성에게 들어가
그도 죽고 나도 죽고
하나의 흙으로 되는 통일 염원했어

 

 

-균이 되어서라도 휴전선을 무시하고 싶으셨군요. 아니면 북한 여인네와 목숨을 건 치명적 사랑을 하고 싶으셨든지.(웃음) 현재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직을 세 번째 맡고 계시죠?

 

“이 사업을 임종을 위한 사업으로 삼고 있어요. 내 운명은 여기 다 바쳐야겠다,

 

이렇게 생각해.

 

 

나의 신은 세종이에요.

 

 

나에게 문자를 만들어준 존재이므로.

 

 

 

그 세종 이전엔 우리나라는 한자에 종속된 국가였어. 세종이 개천(開天)을 한 거야. 그런데 겨레말은 200~300년 뒤에는 없어질지 몰라. 언어는 우리들의 삶처럼 무상해요. 가령 우리말과 같이 존재했던 만주의 여러 부족어는 다 죽어버렸잖아.

 

 

베이징의 민족대학 도서관에 학술용어로만 남아 있을 뿐 실제 쓰는 사람은 없어졌어. 적도상에 있는 여러 부족의 언어들, 적도에 있는 식물종과 똑같이 정비례해서 멸종하고 있고. 마지막 할아버지 죽으면 끝나니까. 학문의 전당에 남아 있지도 않고. 그런데 우리말도 위기상황이야. 남과 북이 갈라져 있잖아. 내게 통일은 수단이에요. 통일이 된다고 겨레말이 보장된다는 법도 없어. 더 영어화, 중국어화될지도 몰라. 이러한 위기의식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겨레말을 보존하고자 해요.”

 

 

-시인에게 우리말은 무엇입니까?

 

“겨레말은 억압받은 언어예요. 억압받아서 살아남은 언어. 세종이 만들었지만, 한자에 의해 무지막지하게 억압당했어. 현재 우리가 쓰는 언어에도 그 폭력이 내재화됐고, 한글이 만들어지고 점잖게 ‘언문’이라 했지만,

 

실제로는 ‘쌍글’, ‘똥글’, ‘암클’이라고 불렸지.

 

천민, 상것, 여자들이 쓰는 거다 이거지. 주자학의 극단주의지. 고종 때 국한문 혼용 문서를 쓰면서 비로소 공식어가 됐는데, 왜놈이 들어왔어.

 

팔자가 더럽게 센 언어야.

 

 

조선말은 낙후된 야만어라고 취급했지. 학교 들어가 일본어로 수업했고 조선말 쓰면 불이익을 당했어. 일제하 사범학교가 뭔지 알아? 가난하고 똑똑한 조선 아이들 모아서 일본화시키는 본거지야. 박정희가 대구사범학교 나왔지.

 

그러나 나는 학교에서 일본어 쓰면서도 동네 머슴한테 한글을 배웠어. 당시 이미 불온했나봐.(웃음) 아프리카 문인들 만났을 때, 이들이 과거 5~6대 걸쳐서 자기의 부족어를 밤마다 모여서 자식들에게 전승했다는 얘기를 들었어. 밖에서는 프랑스어와 영어를 쓰고. 우리 조상들이 솥단지와 솜이불 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북간도로 갔잖아.

 

그때 자기 할아버지, 할머니의 제삿날과 우리말을 기억하며 갔어. 1930년대 스탈린 통치 시절 중앙아시아로 쫓겨날 때도 그랬고. 후손으로서 이러한 아픈 역사를 기억해야 해. 이거 잊어버리면 나쁜 놈이지. 참말 최고의 악질이지. 내가 내 할머니, 할아버지의 자손이란 것보다, 그들이 썼던 언어의 자손이라는 것, 그게 내가 갖는 실존의 근본 명제야.

 

 

일본어 다음에는 영어 때문에 겨레말이 망하고 있어. 외국 신문이 ‘한국에선 영어가 종교다’라는 제목의 특집까지 낸 적이 있지. 체코에서 작가들과 만나 술 먹고 울었어. 체코가 히틀러의 독일에 정복되면서 언어도 정복됐어. 프라하에서 태어나 독일어로 시를 쓴 릴케는 체코에서는 반역자야! 체코 가서 릴케 얘기 했다가 혼났어.

 

 

나치 지배가 끝나니 소련 지배가 이루어져 슬라브어가 들어왔어. 요샌 영어가 지배하고 있더군. 프라하 가서 미 대사관의 초청을 받아 가봤더니, 대사관이 고궁을 차지하고 있어. 총독부더구먼! 독일어, 슬라브어, 영어에 차례차례 당한 거지. 우리 겨레말과 비슷한 역사 아니냐고.”

 

 

내 허무주의는 토산품이야
날마다 좌우 보복학살·전쟁폭격
인간 심성의 폐허로 이어질 수밖에…
전태일 이후 현실이 다가왔어

 

 

 

-청년시절 허무주의와 파괴주의에 빠지셨죠.

 

“내 허무주의는 19세기 서구의 것이 아니야. 토산품이야. 내 고향 전북에는 대지주들이 많았는데 그 아들들은 좌익이 많았어. 아버지의 모순에 대한 반동이라고 할까. 난 좌우의 보복학살의 현장에 있었어. 맥아더가 인천 상륙을 위해서 양동작전을 썼는데, 군산에 날마다 폭격을 했어.

 

사실 온 나라가 초토화되었지. 이 폐허는 인간 심성의 폐허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어. 나는 죽음을 많이 봤어. 좌익의 죽음과 우익의 죽음. 소년에게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었어. 장례 지낼 수 없는 존재이기에 소년이라고 하는데, 소년이 장례를 지내줘야 했으니까.”

 

 

-그러시다가 1970년 11월13일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방향을 트셨지요.

 

“무교동에서 아주 독한 소주를 마신 뒤 주모에게 부탁해서 신문지 조각을 놓고 술집 탁자에서 잤어. 여관비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신문에 ‘노동자의 죽음’ 기사가 나온 거야.

 

처음엔 가벼운 호기심 정도였어. 점점 현실을 알게 됐어. 몸살감기가 몸에 들어와 몸이 떨리는 것처럼 현실이 막 느껴졌어. 전태일 분신 이전까지는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어. 이승만이고 뭐고 신경도 안 썼어. 4·19를 나는 해인사에서 맞이했어. 단식하고 있었지.

 

 

아무튼 전태일 이후 현실이 다가왔어. 병에 걸린 것처럼 막 현실이 다가와. 그런데 그러고도 시는 여전히 옛날 시를 썼어. 몸이 먼저 가고 난 뒤에야 언어가 따라왔어. 70년대 중반에야 현실 참여 시가 나오더군.”

 

 

-몸이 먼저 간다는 말씀, 가슴에 와닿습니다. 정작 선생님의 시를 읽지 않는 사람들도 선생님이 노벨문학상 타기를 원합니다. 시보다 상을 좋아하는 것이겠지요.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시는 사치나 잉여가 된 것인가요?

 

 

“오히려 이런 때 내가 있다는 게 축복이에요. 지금이 왜 좋냐 하면, 이제 내 동굴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어요. 이때 시를 좀 써보고 싶어요. 내 시가 깃발처럼 휘날릴 때보다 내 시가 동굴 천장의 박쥐처럼 드리워지고 싶어. 자본주의가 판을 치고 광고 문구가 세상을 도배해도 시는 모독당하지 않아. 이백은 왕 앞에서 절대 비굴하지 않았어.

 

취해 쓰러져 잤는데 현종이 배려해서 이백이 깰 때까지 옆에서 기다린 적도 있었어. 요거 괜찮지.(웃음)

 

 

이백은 체제에 충실할 수 없는 사람이었어. 한족 아니라 오랑캐, 자유분방한 유목민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고. 지금이야말로 이런 시인 근성이 필요한 시대야.”

 

 

-아까 ‘나의 신은 세종이다’라고 하셨죠. 그런데 최근 박근혜 의원 측근이 박정희를 이성계에, 박 의원을 세종에 비유하더군요. ‘이성계가 쿠데타를 했지만 그의 손자 세종이 할아버지를 비판할 수야 없지 않으냐’라는 걸 강조하려는 것이겠죠.

 

 

서울민심 홀렸던 청계천도
돈 낭비 구정물임이 점점 드러날거야
우린 정치로부터 절대 도망갈 수 없어
박정희·이명박을 다시 겪지 않아야

 

 

“(깜짝 놀라며) 아니, 그런 일이 있었어? 아주 무식한 혈통주의네. 박정희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인물이지 세습해야 할 인물이 아니에요. 다시는 나타나면 안 될 시대를 의인화한 것이 박정희지. 아기 낳을 때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과거를 아주 희미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 그러면 안 돼. (목청을 높이며) 어떻게 박정희와 박근혜를 이성계와 세종에 비유할 수 있어!

 

 

범죄적 수준의 견강부회네. 아주 무식한 놈이나 지능범이 할 수 있는 말이야.

 

세종은 왜 위대하냐고?

 

자기 아버지의 무자비를 자비로 개혁한 사람이야. 세종의 위대성은 자기 아버지를 복제한 것이 아니고, 자기 아버지를 내친 데 있어. 문화적으로 말이야.”

 

 

 

-<만인보>에서 지금 대통령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개발이 악이 아니라 선이기를/ 개발이 정치가 아니기를” 우려하셨죠. 그런데 개발이 악이 되고 정치가 되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제 곧 대통령 선거입니다. 유권자가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요?

 

“앞으로 몇 개월 남았지만, 지난 5년 동안 우리가 감당해온 정권…. 당장 저 앞에 나가면 4대강 사업이 진행되고 있어요. 죽음의 강을 맞이하고 있는데, 철모르는 시민들은 자전거 타고 있고 뱃놀이하고 있고. 서울 민심을 홀렸던 청계천도 얼마나 돈을 낭비하고 있는 구정물인지, 앞으로 점점 더 드러날 거야. 우리는 정치를 쉽게 경멸하지만 정치로부터 절대 도망갈 수 없어.

 

 

박정희를 겪었고 이명박을 겪었어. 다시 겪지 않아야 하는데, 나쁜 징후가 현전(現前)해 있어. 사람들은 나이 들면 체념하거나 현상에 양보하기 쉽다고 해. 그러나 누구 하나쯤은 안 그랬으면 좋겠어. 전사자가 되더라도.”

 

-전사하지 말아야죠.(웃음) 폭포수같이 터져 나오는 통렬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난 절대 지식인이 아냐, 무당이야. 무당으로 내뱉은 거야. 점심때가 지났네. 잘 아는 수육집이 있어. 가서 소주 한잔 하면서 얘기 더 해.”

 

 

정리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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