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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人 性노예-光復후 내팽겨쳐진 人生]-畵報 분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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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3,859회 작성일 2018-01-12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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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利品으로  남은 


滿朔     慰安婦











美-中 연합군의 포로가 된


위안부들  순간 포착






1946년 조선 귀환 뒤에도


내팽개쳐진 지난한




만삭의 여성이 비탈에 기대 힘없이 눈을 감고 있다. 카메라 촬영은 안중에 없는 듯, 바로 옆 여성은 산발인 채 다른 곳을 본다. 남성 옆의 긴 머리 여성은 왼팔에 피가 스민 붕대를 둘렀다. 그도 카메라 시선을 외면하고 있다.

얼굴에 화상을 입은 가운데 여성만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다들 고통스러워 보이거나 넋이 나간 표정이다. 여성들 모두 맨발이라 급박함마저 느껴진다.

반면 왼쪽 끝 남성은 카메라의 시선을 의식하며 웃으면서 여유로운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❶) 그렇다. 이 남성을 위한 기념사진인 것이다.

여성들은 누구이고, 남성은 누구일까? 누가 어떤 목적으로 촬영했을까?



맨발 여성병사들의 웃음



한겨레21

❶ 서울대 정진성 교수 연구팀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여성들은 조선인 ‘위안부’다. 그 가운데 만삭의 여성은 박영심이다. 2000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 때 ‘위안부’ 피해자 박영심이 사진 속 여성이 자신임을 증언했다. 사진 찍을 당시 그는 하혈 중이었고, 사산했다.

박영심은 1939년 평양 근처 남포에서 중국 난징으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았다. 1942년에는 상하이를 거쳐 배를 타고 버마(지금의 미얀마) 랑군으로 이송돼 라시오로 강제 동원됐다. 남방(동남아) 일본군 사령부가 ‘위안부’ 동원을 요청했고, 중국과 조선의 일본군 사령부가 이를 실행해 이뤄진 것이었다. 1943년 여름에는 다시 버마와 중국의 국경 지역인 쑹산으로 이동했다.

쑹산은 일본군과 연합군이 크게 부딪칠 수밖에 없는 요충지였다. 그래서 ‘버마도로의 지브롤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미국 등 연합군이 충칭에 있는 장제스를 지원하려면 쑹산을 통과해 살윈강(누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그곳에 일본군 수비대가 배치됐기에 박영심을 비롯한 조선인 ‘위안부’ 24명도 끌려왔다. 미-중 연합군(Y군)이 버마도로를 탈환하려 쑹산 등 일본군 수비대 거점을 공격하는 것은 충분히 예상된 일이었다.

중국과 버마 국경 지역의 작전을 관할했던 일본군 제33군은 사전에 암호 해석으로 미-중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알고 있었지만, 일본군 수비대에 끝까지 싸우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옥쇄’ 전투라는 미명하에 모두를 강제적 집단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일본군은 수비대에 배속된 ‘위안부’에게 함께 살고 함께 죽을 것을 강요했다. 여성들은 그저 살아 있는 ‘특종보급품’에 불과했다. 전멸이 임박하고 군기가 태워지자 ‘위안부’는 일본군에 학살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사진 속 박영심 일행이 참호에서 탈출했을 때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가까스로 탈출한 그들은 근처 수무천 강가에 이르렀다. 밭에 널브러진 옥수수로 허기진 배를 채우면서 잠깐 숨을 돌렸지만, 이내 리정자오(이정조)라는 중국인 농부에게 발견됐다. 그렇게 그들은 중국군 제8군의 포로가 되었다.

사진은 미-중 연합군의 포로가 된 ‘위안부’들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웃으면서 포즈를 취한 중국군 병사는 포로로 잡은 여성들을 무엇으로 인식했을까? 적(일본군)과 함께 있던 민간인 여성이자 포획한 전리품으로 여겼을 것이다. 맨발인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표정과 중국군 병사의 웃음이 대조적으로 시각화한 사진 구도를 볼수록 그렇게 해석된다.


인도주의 남성적 시선 교차


한겨레21

&#10103; &#10104; 서울대 정진성 교수 연구팀 제공/ 서울대 정진성 교수 연구팀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을 촬영한 이는 미 육군 164통신사진중대 소속 찰스 H. 해티필드 이병이다. 그의 시선도 마찬가지다. 해티필드는 여성들이 조선인 ‘위안부’임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적이 전멸되는 전장에서 적군과 함께 있다 생존한 일본인 여성으로 오인했다. 해티필드가 당시 쑹산에서 찍은 사진 10여 장 가운데 ‘위안부’를 피사체로 삼은 것이 4장인데, 그는 사진 설명에 여성 모두를 ‘일본인 여성’(Jap girl)으로 기록했다.

쑹산의 참호가 완전히 장악된 1943년 9월7일 해티필드가 촬영한 두 번째 사진을 보면, 이런 인식을 담은 사진 구도가 더욱 분명해진다. 사진 속 여성은 전멸 직전 끝내 탈출하지 못했던 지옥에서 살아남았다. 해티필드는 미군 기술병이 여성을 치료해주는 모습을 담았다.

그는 미군이 인도주의를 발휘해 포로로 잡은 일본 민간인 여성을 돕는 모습을 잡아내려 했던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 뒤에서 노획한 일장기를 든 중국군 병사들이다. 일장기는 일본도와 함께 연합군의 기념사진에서 자주 나오는 전리품이다. 다시 말해, 이 사진은 민간인 여성을 구원한다는 인도주의적 시선과 적의 여성을 전리품으로 취급하는 남성적 시선이 겹쳐 있다.(사진❷)

쑹산에서 해티필드와 함께 사진 작업을 했던 조지 L. 코쿠릭의 세 번째 사진에서 변화가 감지된다. 코쿠릭은 함락 뒤 하루가 지난, 9월8일 심문 모습을 찍었기에 여성들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 ‘위안부’임도 알았을 것이다.

사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심문하는 중국군 장교와 그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미군 연락병의 존재다.

이는 그 자체로 미-중 연합군을 재현한다. 미군은 버마도로를 탈환하는 ‘살윈 작전’에 전술 부대를 보내지 않고 정보·작전 차원에서 중국군을 지휘했다. 사진은 이를 직접적으로 시각화한다. 정면으로 보이는 두 여성의 시선이 엇갈리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여성은 심문하는 중국군 장교를 힐끗 보고, 그 왼쪽 여성의 시선은 심문에 응하는 오른쪽에 붙어 앉은 두 여성을 향해 있다.(사진❸)

스틸 사진은 현실의 한 단면을 시각화한다. 사진 몇 장에서 여러 정보를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이 사진과 관련해 다양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진이 촬영됐을 때 어떤 군사작전이 진행 중이었는지를 알려주는 미군 공문서 자료와 당시의 신문 기사가 발굴됐고, 무엇보다 당사자인 박영심의 증언이 나왔다. 하지만 스틸 사진은 현실의 일부를 사각화(死角化)하기도 한다.

2017년 7월5일 공개된 쑹산의 조선인 ‘위안부’ 영상은 스틸 사진에선 잘 드러나지 않던 이야기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영상은 해티필드와 코쿠릭의 동료인 에드워드 C. 페이 병장이 1943년 9월8일 이후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영상은 여성 7명이 맨발로 민가 벽에 붙어 서 있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중국군 병사들이 여성들을 신기한 듯 바라본다. 중국군 장교는 웃으면서 한 여성에게 말을 건다. 둘 사이에 대화가 이어지고 있지만, 다른 여성들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진다.

초조한 표정의 얼굴을 들지 못하는 여성, 옆 여성의 손을 붙잡고 의지하는 여성, 여성 뒤로 숨어버린 여성도 있다. 만삭의 박영심과 얼굴에 화상 입은 여성은 영상에선 보이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숨은 이야기 드러낸 ‘위안부’ 영상

시선을 잡아끄는 여성이 있었다. 중국군 장교와 대화하는 세 번째 여성에게 매달리듯 팔짱을 끼고 옷을 어루만지는 네 번째 여성. 친밀해 보이기도 하고, 그에게 의지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두 여성은 어떤 관계일까? 최전선의 지옥 같은 ‘위안부’ 생활을 서로 의지하며 버텨낸 동무였을까? ‘위안부’를 다룬 영화에서 자주 차용되는 두 소녀 이야기처럼 자매 같은 관계였을까? 영상이 불러일으킨 감정선을 따라 스틸 사진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제야 사진에 사각이 있음을 알게 됐다.

영상 속 네 번째 여성은 사진1의 박영심 옆에 있던 여성이었다. 스틸 사진 속 그는 산발인 채 넋을 잃은 듯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는 참호에서 군기가 태워지고 강제적 집단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도망쳤다.

그 과정에서 영상 속 세 번째 여성과 헤어졌던 것이다. 사진2는 다행히 세 번째 여성도 경미한 부상만 입은 채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두 여성이 영상 속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어떤 감정이 들었을까? 그 순간 소중함과 죄책감과 반가움과 미안함과 두려움과 긴장감이 한데 엉켜 넘쳤을 것이다. 영상은 이런 분위기를 전한다. 그제야 사진3의 오른쪽에 서로 붙어 있는 두 여성의 뒷모습이 내 시야에 새롭게 각인됐다. 그들이 거기에도 있었다.

조선인 ‘위안부’는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윈난성 쿤밍 소재 군화중학교에 설치된 포로수용소에 억류됐다. 텅충에서 살아남은 조선인 ‘위안부’ 13명과 함께였다. 일본군에 의해 끌려오고 버려졌으며, 스스로 살아남았지만 연합군 포로가 된 여성들의 운명은 또 한 번 변화를 겪었다.

1945년 4월 미국 전략정보국(OSS) 쿤밍 지부가 그들을 상대로 두 차례 예비심문을 했다. 일본을 상대로 한 심리전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심문에 한국광복군 3지대장 김학규 장군의 부관인 김우전을 비롯해
정윤성, 이평산 박사 등이 참여했다.
김우전은 이 여성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여성들은 충칭의 한국 광복군에 인수됐고, 1946년 2월 조선으로 귀환했다.

귀향 뒤에도 버려진 그들

사진 속 4명, 영상 속 7명, 더 나아가 쿤밍 수용소에 억류된 조선인 여성 23명은 모두 귀환했을까?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살아남은 ‘위안부’에게 ‘귀환’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몸이 더럽혀졌다”고 생각한 여성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거나
돌아가지 않았다.

설령 조선으로 돌아갔더라도 귀향하지 못한 채
낯선 곳에서 살아가기도 했다.

박영심처럼 집에 돌아가더라도 ‘위안부’였다는 것을 숨긴 채,
“전전하며 살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 돌아온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도 그렇게 버려졌다.
그 세월이 45년이었다.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가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처음으로 증언하기 전까지 말이다.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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