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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대환 인터뷰 제 2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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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968회 작성일 2018-01-23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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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사업이나, 국방비리 같은 것을 조사하고 인적 청산을 하는 것이 적폐청산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적폐청산으로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는 없죠. 외과 수술을 해야 하는 데 마사지 좀 해주니 시원하다하며 만족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요. 한국 사회의 문제는 마사지 좀 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건국에는 다양한 세력이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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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헌법에 서명하는 이승만 대통령. 이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조선DB
-다시 대한민국 역사 이야기로 돌아가시죠. 대표님은 제헌(制憲) 헌법(憲法)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을 무척 강조하고 계시는데요.
 
제헌헌법은 해방이 되면 이런 나라를 만들 거야라고 우리 선조들이 꿈꾸던 그 꿈을 한 글자 한 글자 새겨 넣은 것입니다. 제헌헌법을 만든 198명의 국회의원이 바로 건국의 아버지들입니다. 헌법 8조에 평등(平等)을 규정하고 있고, 9조에서 14조는 자유(自由)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자유와 평등의 나라로 건국된 것이죠.
 
-헌법 정신을 강조하는 이들은 많이 보아 왔지만, 제헌헌법의 가치를 강조하는 분은 오늘 처음 만납니다. 87년 헌법 이전의 헌법들은 장식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는 분들도 있는데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헌헌법에 농사를 짓는 사람이 농지를 소유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대원칙이 박혀 있습니다. 실제 농지개혁법은 1949년 국회를 통과했고, 1950년에 마무리되었지만, 헌법에 이렇게 명시되어 있으니 농지개혁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를 했다고 하지만, 어쨌든 임기를 지켰잖습니까? 김일성(金日成)하고 비교를 해보세요. 이승만은 헌법에 따라 임기를 마치면 선거를 했고, 4년밖에 안 되는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하려고 그렇게 무리수를 두는 과정에서 추락해간 거 아닙니까?
 
-1987년 헌법 이후 민주정부가 출범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의 민주정이 1987년 이전에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86세대의 무식하고 오만한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민주주의 역사가 자기들로부터 처음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독립협회로부터 내려오는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다시 공부해야 합니다.
 
-조금 전에 제헌헌법을 만든 198명의 국회의원들을 건국의 아버지로 표현하셨는데, 우리 역사에서는 건국의 아버지라는 표현이 무척 생소하게 들립니다.
 
제헌헌법을 만든 분들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면 누구를 건국의 아버지라고 할까요? 이승만 대통령을 놓고 국부(國父)니 마니 하는 논란을 벌이는 방식은 단 한 분의 아버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부 김일성 같은 사람을 찾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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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인촌 김성수, 해공 신익희, 죽산 조봉암. 주대환 대표는 "우파들은 이승만 대통령뿐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이들 세 명의 공적을 함께 기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학문적으로는 상당히 진척된 것 같은데도 왜 대중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극단적인 의견대립이 흡사 해방 정국의 좌우갈등, 좌우익 진영의 내부 갈등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저는 이승만 대통령이 재평가받기를 원하는 분들에게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이 세 분을 함께 모시라고 말합니다. 인촌은 한민당의 오너, 해공은 한독당의 배신자, 죽산은 공산당의 변절자였습니다. 대한민국 건국은 이처럼 다양한 세력이 참여하여 논쟁하고 갈등하는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해방공간의 복잡하고 유동적인 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선조들이 고뇌하고 토론했던 과정을 입체적으로 잘 엮으면 젊은이들에게도 얼마든지 재미있고 매혹적인, 그러면서도 교훈을 주는 역사를 꾸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우남 이승만의 원맨쇼로 만들어서야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우리 사회의 친일파 논쟁은 '정신병 수준'"
 
-최근 불거진 건국절(建國節) 논쟁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솔직히 저는 광복절을 건국절이라고 꼭 바꾸어야겠다는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잘 모르니 결국 (제 느낌으로는) 추진하는 측이 너무 성급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반대하는 사람들도 문제가 있습니다. 일부 좌파들과 민족주의 진영에서 1948년에 건국되었다고 하면 마치 무슨 큰 잘못이나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정치인들도 여기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의 조소앙(趙素昻) 선생이 건국강령을 쓴 게 1941년 무렵입니다. 여운형(呂運亨) 선생은 1944년 광복 직전 건국동맹을 만들고, 광복 직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건국이 1948815일에 되었다는 건 너무나 명백하여 논란거리도 아니죠.
 
-현행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다는 점을 내세워 1948년 건국 주장은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헌법 전문에 그런 촌스럽고 노골적인 표현이 들어간 것도 문제이지만,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된 엄연한 사실을 말한다고 임시정부를 부정하거나 위상을 깎아내리는 건 아니죠.
 
-친북좌파 민족주의자들은 아무에게나 친일파딱지를 붙여 놓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친일파 논쟁을 보면 거의 정신병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로 일본은 군국주의로 치달아 1930년대 말이면 완전히 전시(戰時)체제입이다. 다이쇼(大政) 데모크라시 시절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특히 미국하고 전쟁을 일으킨 1941년부터는 교사까지 칼을 차고 다니는 살벌한 전시 체제였습니다. 거의 광적인 분위기였죠. 그 시대를 모르면 쉽게 민족주의자들의 선동에 넘어갑니다.
 
주 대표는 반민특위 조사 대상에 오른 적이 없는 김성수와 조봉암 선생도 요즘에 와서 친일 시비의 수모를 당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김성수 선생의 경우 1962년에 추서된 건국훈장을 취소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고, 조봉암 선생의 경우 2011년 대법원에서 1959년 재판을 재심하여 무죄판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보훈처는 건국훈장 추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당시 모든 신문이 폐간되고 유일하게 남은 총독부 기관지에 실린 작은 기사 하나를 근거로 친일 혐의를 씌운 것이죠. 52년간 간첩혐의를 벗고 나니 이제는 친일파라고 하니 유족들이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차겠습니까.
 
-21세기에 여전히 친일파 논쟁이 벌어지는 겁니까? 지난 대선(大選)에서도 여러 명의 민주당 대선 후보들이 친일파 청산을 외쳤는데요.
 
친일(親日) 청산을 주장하는 사람한테 제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 친일파 본 적이 있느냐?1962, 63년에 태어난 이들이 친일파를 어떻게 압니까? 그런데도 아직도 우리나라의 모든 문제가 친일파 때문이라는 생각이 그들의 머리에 꽉 박혀 있습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에 있는 단 하나의 이유를 찾았다는 식입니다. 미안하지만 이런 생각은 전혀 검증되지 않은 허상이고요, 빗자루를 안고 허깨비와 씨름하는 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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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거제시 고현동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내 흥남철수기념 조형물 옆에 세워진 김백일 장군 동상(왼쪽). 김백일 장군이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경남의 일부 시민단체 회원들이 동상 철거를 요구하며 검은 천을 두르고 쇠사슬을 묶었다(2011).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나 백선엽(白善燁) 장군 같은 분들의 경우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니, 해방 당시 반민특위에서 박정희나 백선엽 같은 일본군 또는 만주군 하급 장교 부류는 애당초 친일파니 뭐니 하는 검증 대상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해방 당시 20대 청년인데 친일을 하면 얼마나 했겠습니까. 혈서(血書)? 입학 나이 제한에 걸리니까 그랬겠죠. 창씨개명(創氏改名)? 창씨개명 안하고 소학교(초등학교)라도 갈 수 있었나요?
 
-우리나라 역사의 정통성이 북한에 있다는 생각이 밑바닥에 흐르는 건 아닌가요?
 
남한은 친일파가 권력을 잡았고, 농지개혁은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하여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봉건 잔재가 남아서 남한은 여전히 반봉건 사회이고, 또 미국의 식민지다. 그러니 여전히 민족해방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에 머물고 있다. 북한은 어쨌든 독립운동 항일투쟁을 한 사람들이 만든 나라 아니냐. 또 친일 청산과 농지개혁을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정통성이 북에 있는 게 아니냐 하는 것이 86세대 민족주의 사관의 관점입니다. 이를 집중적으로 비판한 것이 뉴라이트 자유주의 사관이고요.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2000년 민족사에서 가장 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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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토지개혁 당시 선전 사진.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로'라고 선전했지만, 농민들 입장에서는 지주가 국가로 바뀐 것 외에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대표님은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에 대해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는데요.
 
북한은 지주들에게 무상몰수(無償沒收)해서 무상분배(無償分配)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요. 국가에서 40%의 세금을 거두어 갔습니다. 40%는 일제 강점기 못지않은 엄청난 고율의 소작료입니다. 지주가 그냥 국가로 바뀐 거지요. 농민들이 토지를 사고팔 수도 없으니 소유권이 없는 겁니다. 그 후 집단농장을 만들었으니 농민들 입장에서는 다시 빼앗긴 겁니다.
 
이에 반해 남한에서는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했는데, 소출의 30%5년만 내면 내 땅이 되었습니다. 30% 상환이 부담스러워 분배받은 땅을 포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애당초 남북의 농지개혁은 비교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주 대표는 해방 당시 85%의 농민이 소작농이었는데, 당시 국민의 70%가 농민이었다그들을 대대로 소작농이라는 천형(天刑)에서 해방시킨 것이 1949년의 농지개혁이었다고 말했다.
 
저는 이 농지개혁이 2000년 민족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토지혁명이라는 것은 쿠데타나 혁명의 슬로건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실제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운 겁니다. 토지혁명이든 농지개혁이든 엄청난 유혈혁명이 일어나도 잘 안 되는 겁니다. 필리핀이나 남미의 여러 나라를 보세요. 수도 없는 정변이 났지만, 여전히 대지주들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잖아요. 저는 대한민국 건국과 동시에 이루어진 토지혁명이야말로,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 주나라 문왕과 무왕의 시대 이래로 가장 성공적인 토지혁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농지개혁 때문에 6·25 때 농민들이 열심히 싸웠고, 공산화가 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1949년 정부가 농지개혁을 하려고 보니 이미 대상 면적의 절반 이상이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지주들이 대세가 기운 것을 인정하고 헐값에 땅을 팔아버린 겁니다. 인척 관계에 있는 사람은 거저 주기도 했습니다. 결국 전쟁이 터져서 인민군들이 내려와서 보니 이미 농지개혁이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당연히 농민들이 인민군에 호응하여 손뼉 치고 환영할 이유가 없었죠.
 
-농지개혁을 통해 대한민국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있다면요.
 
대한민국의 소작농이 모두 자영농으로서 새 나라의 국민이 된 겁니다. 완전한 새 출발입니다. 자영농의 나라로 대한민국이 건국된 거죠. 사람들은 1950년대 농민들이 문맹률이 높고 민도(民度)가 낮아서, 선거에서 막걸리나 고무신에 현혹되어 아무나 막 찍었다고 생각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자기 이익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하게 찍었어요. 자영농을 비롯한 당시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당당한 주인으로서 주권을 행사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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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의 흔한 농촌풍경.
-신생 독립국이 어떻게 그런 엄청난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었을까요?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운()도 좋았습니다.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국민당을 타이완으로 몰아냈는데 그게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겁니다. 또 북한에서 토지개혁을 먼저 했고요. 이런 상황에서 미국 국무부와 군정(軍政) 당국이 판단을 한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농지개혁의 실무 책임을 죽산 조봉암 선생에게 맡겼다는 겁니다. 그분은 아시다시피 원래 박헌영과 함께한 공산당원이었습니다.
 
-공산당계 인물에게 농지개혁을 맡긴 거군요.
 
죽산은 독립운동도 누구보다 치열하게 하신 분이고, 건국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누구보다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승만은 아들뻘인 조봉암이 제헌국회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농림부 장관으로 전격 발탁합니다. 조봉암 농림부 장관이 차관과 농지국장, 기획실장 등 서너 명과 함께 밤을 새워 농지개혁법안의 기본 골자를 만든 겁니다. 강정택 차관과 강진국 농지국장도 굳이 이야기하면 좌익계 인물들이었습니다.
 
주 대표는 흔히 우리나라는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만약 지주와 친일파가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면 친일파의 다수에게서 경제적인 토대를 완전히 몰수해버렸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친일파 몇 명 잡아서 사형선고를 내린 경우와 비교했을 경우 훨씬 더 실질적인 친일파 청산 조치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평등의 가치에서 출발한 신생 대한민국
 
-농지개혁을 통해 대한민국이 평등의 가치를 유전자로 가지게 되었다고 하셨는데요.
 
원래 평등은 좌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농지개혁을 통해 모든 농민이 자영농이 되었고, 자영농이 열심히 일하고, 그 자식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현대 학문과 과학기술을 배우고, 산업을 발전시키고, 민주주의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신분질서가 완전히 해체되면서 절반은 왕후(王侯)의 후손이고 절반은 장상(將相)의 후손이 되었으니, 홍길동의 꿈이 실현된 나라가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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